97년 11월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둘째고모댁이 있는 레인즈파크에서 저녁을 먹고 8시쯤에 나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날 조카의 컴퓨터에 깔린 게임이 너무나 재미가 있었다. 커맨드 앤 컨커 레드 얼럿 이란 이름의 게임이었는데 처음 컴퓨터로 게임을 해본 내겐 그야말로 눈돌아갈 만큼 재미가 있었다. 지금 하라고 돈을 줘도 시시해서 안할 게임이지만...
그래서 평소 8시면 집을 나서야 하는데 예정보다 3시간이 늦게 집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레인즈파크를 출발한 기차가 서비톤까지만 가는 것이 아닌가. 일단 기차역에서 나와 버스정류장을 둘러보는데 정류장 노선도를 보는 내게 어느 영국남자가 다가와서 이미 버스는 끊겼다고 하는게 아닌가. 그래서 다시 기차가 있는 쪽으로 가는데 또 다시 술에 절은 영국남자가 자기가 워킹으로 가는 기차를 아니 안내해주겠다고 해서 간신히 기차를 타고 워킹까지 올수 있었다.
그날의 영국날씨는 정말 바람이 쌩쌩불고 공기도 무척 차가웠다. 워킹에 오긴 했는데 역앞의 회사원들은 바로바로 택시를 잡아 어디론가 가버리곤 나혼자 남았었다. 타임테이블을 보니 이미 판암행기차는 끊긴 것이다. 죽음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택시를 잡았는데 인도사람이 모는 택시였다. 그런데 수중에 돈이 10파운드밖에 없다고 하자 그 매정한 인도운전수는 담엔 돈을 더 준비하고 타라며 얼른 내리라고 한다. 그래서 20미터갔다가 바로 내렸다.
쩝 돈 부족하면 영국에서 정말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아침 첫차가 있는 새벽 5시 30분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워킹 역에서 나와 나이트클럽과 교회가 같이 있는 워킹 도심쪽을 왔다 갔다 하며 둘러보았다. 맥도널드를 지나 들어갈수록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디스코박자에 맞춰 노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결국 나완 무관한 것이다.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이곳저곳을 보다가 다시 역앞으로 와보니 바람만 불뿐 인적하나 없는 광장이었다. 역앞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신문쪼가리가 있길래 그걸 모아다가 전화박스안으로 들어가 바람을 피하며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하숙집 주인에게 전화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이 야밤에 너무 큰 부탁을 하는 것 같아 그것도 그만두었다. 그런데 한 30여분쯤 신문을 보고 있었는데 워킹역을 가로지르는 지하도쪽에서 비명소리랑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그래서 그쪽을 보니까 영국여자들 3명이 나오고 있었는데 한참을 유심히 보니 2명이 발길질을 하며 싸우고 있었고 다른 한명의 여자가 중간에서 싸움을 말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내가 느낀 점.. 여자도 열받으면 무지하게 과격하다는 것이다. AFKN에서 W.W.F.에 나오는 여자 레슬러 뺨치게 체격이 우람해 보이는 여자가 (화장도 요란하게 해서 더 비슷해 보였음) '바스타드'라는 말을 연발하면서 핸드백으로 다른 여자의 머리를 내려치고는 부츠를 신은 발로 반은 술에 취해 옆으로 쓰러진 여자의 배며 정갱이를 연거푸 걷어차는데 맞고 있는 여자가 비명을 질러대는 모습이 보기에도 안스러웠다.
내가 말려 볼까도 생각했지만 아직 연수 3개월밖에 안되서 영어도 제대로 안되는 놈이 괜한 혈기 하나 믿고 나섰다간 닥터슬럼프에 나온 슈퍼맨 마냥 왠지 중간에 끼어든 똥자루 허접한 놈이란 인상만 줄것 같아 관두었다. 지금은 차라리 끼어드는게 더 좋았는데 하는 후회가 매번 든다. 그네들은 모두가 온통 검은색으로 입었던 것을 볼때 나이트클럽에서 놀다 술에 취한 영국조폭들의 여자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여간 그여자들이 잠시 워킹역앞의 적막을 깨놓다가는 또 이내 어디론가 사라저버리고 역앞에는 청소를 하기 시작한 역무원과 나만 있었다. 그런데 그 인도태생으로 보이는 역무원이 청소를 모두 마치고는 내가 딱해 보였는지--;; 내게 다가 와서는 역안의 스팀이 나오는 웨이팅 룸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추위를 피했다가 아침 기차로 가라는 것이다. 이때 정말이지 눈물이 나올 만큼 그 역무원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면서 그 역무원이 남긴 한마디는 Don't make a mess 어지르지 말아라..
그래서 워킹역안으로 들어갔는데 워킹에서 도심쪽으로 갈때 서있게 되는 플랫폼이었다. 아마도 1번 플랫폼이 아닌가 기억된다. 가운데는 캐드부리초콜릿을 파는 자판기가 있었고 그 왼쪽으로 10여미터 가면 여성용 웨이팅룸이 있었다. 들어가보니 그냥 나무로 된 긴 의자가 있고 벽면에는 의자뒤로 스팀이 있었다. 난 나무로 된 긴 의자에 몸을 누이고는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시 눈만 감았을 뿐 정신은 오히려 또렸했다. 그러면서 참으로 한국에서 영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느끼지 못했을 철저한 고독을 느낄수 있었다. 정말이지 처량하다고 해야겠다. 수중에 돈도 10파운드뿐이었으니... 만약에 한 300파운드정도 수중에 있었다면 이것도 하나의 잊지 못할 경험이려니 하고 즐거운 맘으로 워킹역에서 새벽 녘까지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4시간 30분이 10시간은 넘게 느껴졌다.
5시가 다 되어 표를 사구서 정확히 새벽 5시 30분 판암경유 첫차로 난 집에 올 수 있었다. 잠이 들어 오후 1시쯤에 고모한테 안부전화를 했다. 고모 왈 "그날 잘 들어갔니?" "내 마침 시간이 딱 맞아서 막차로 간신히 집에 갔는 걸요!" 고모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여행을 한 것도 아니고 고작 게임나부랭이를 하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되었지만 여행을 하다보면 혹자들중에 이런 비슷한 사정을 겪는 경우가 비일비재할 것 같다. 그래도 이것도 나중에는 다 연수중의 잊지못할 추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