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 구라쟁이 빨개퉁퉁~ 반역자 펭귄 할부탱~
느믈느믈 위선과 가증스럽게
빨개퉁퉁을~ 변명하고 빠져 나가는데 선수~
너구리 반역자 펭귄 할부탱~
mbc는 분명히 이러한 펭귄의 이적, 반역 행위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방영해야 해요.
화려한 좌익 전력들과 이미 518 폭동이 있기 전부터
반 국가단체를 구성해서 북한이 지원하는
조총련과 배트공파와도 연계되 있었뜸.
헐~ 배트공파 하니깐 배트맨 파 같ㅤㄴㅞㅇ~ 흥--a
☞ 한민통 결성 과정에 대한 군 검찰측 자료(주일대사관 영사증명서)와 김대중씨 진술을 대조해서 읽으면 상황파악이 입체화 된다.
여기서 잠시 숨을 돌리고 다른 참고 자료를 읽어보자. 1980년 5월 17일 심야 김대중씨는 자택에서 연행되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는다.
관례에 따라 수사관은 김대중 피의자에게 자필 진술서를 먼저 쓰게 했다. 5월20일자와 5월 25일자 자필 진술서는 짧은 「자필 회고록」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진술서는 한민통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열쇠가 된다. 주요 부분을 뽑았다.
☞ 김대중 피의자 자필 진술서
제1회(1980년 5월 20일)
Ⅰ. 8·15 해방 이후 정치· 사회단체에 가입· 활동한 사실
1. 1945년 9월경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목포지부의 선전부장으로 참가했음.
2. 같은 해 11월경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된 후 약 2개월 동안 참가했다 자진 그만두었음.
3. 1945년 9월경 결성된 목포 청년동맹에 가입했으나 건준 일을 주로 하고 청년동맹 일엔 간여하지 않았음.
4. 1945년 말경에 좌우 합작을 기치로 출범한 신민당(당수 백남운)에 동조하여 이에 가입, 목포지부 조직부장을 맡아 합법적 정치 활동에 종사했음(약 5∼6개월간).
5. 해방 당시 일제 하의 철저한 황민화 정책으로 인해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형편 이었으므로,
오직 해방의 기쁨과 독립의 희열에 들떠 활동하다 보니 좌익분자와도 같이 일하게 되고, 그들이 주장하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약간의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
6. 그러나 당시 본인의 장인인 차보륜씨는 철저한 우익 지방유지로, 그는 당시 한국민주당 목포시 부위원장으로, 본인을 수차 호출해
공산주의의 반민족성, 즉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일제하 그들의 반민족적 행적들을 말하면서 그들과 손을 끊도록 명령했음.
7. 이런 관계로 차츰 좌익 분자들과 멀어지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소련을 조국이라 하는 자는 칼로 배를 갈라놓겠다』고 한 본인의 발언으로 그들과 결정적으로 다투고 갈라서게 되었음. 그 때가 1946년 7∼8월경으로 기억됨.
8. 한편 본인은 1944년 6∼7월경 부터 목포 소재 일본인이 경영하는 전남기선주식회사의 사원으로 있었으며 해방 후 일본인이 철수하자 사무직원은 본인 혼자만 남게 되어 일시 총무 대표로 추대 되었음.
그러다 본인은 회사의 해운건으로 1946년 2월경 상경, 군정청 운수부 해사국에 들렀더니 이미 서울거주 손일○씨(원본불량으로 확인 불가- 편집자 주)에게 회사 관리권이 넘어간 후였음.
본인이 손씨를 만났더니 자기가 현 종업원을 그대로 고용, 경영하겠다는 계획을 표명하며 협력을 당부하기에 당시 회사의 곤경을 타개하는 한 방법이라 믿고 목포로 내려와 종업원들에게 그런 경위를 설득, 손씨와의 제휴를 권했음.
그러나 종업원들이 반대하며 자퇴를 주장하는데 당시 좌익 해원동맹 가입 선원들이 본인을 손씨계의 협력자로 몰아치므로 본인은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1946년 말까지 이름만 둔 채 간여하지 않다가 그들과 결별하게 되었음.
9. 1946년 10월의 대구 좌익 폭동사건이 발발한 당시 목포시에서 남교동 파출소 습격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목포에서
독립촉성회(촉성회) 청년대장으로 있던 홍익선씨라는 분이 본인과 같은 연배로서 서로 라이벌 관계로 있던 중 본인이 이에 가담했다고 고발, 본인을 촉성회 창고로 납치해 마구 구타한 후 경찰에 넘겼음.
그러나 본인은 사건 당시 본인의 처가 출산 중인 처가에 있었기 때문에 산파, 기타 이웃 사람 등 많은 증인에 의해 알리바이가 성립되었을 뿐 아니라, 파출소를 습격했던 일당도 체포되어 본인이 전혀 관련되지 않았음이 판명되어 구속 10여 일 만에 아무 혐의 없이 석방 되었던 것임.
10. 본인은 장인의 권고에 의해, 그리고 좌익과의 완전 결별을 명백히 하는 방법으로 한민당 목포지부에 입당하고 본격적으로 우익진영에 가담했는 바, 이 때가 1947년 중반기로 기억됨.
11. 한편 본인은 1947년경부터 연안 운행의 화물선을 1척 구입, 해운사업을 시작했으며 사업관계상 당시 목포에 있는 해안경비대 목포기지 사령부 장교들과 접촉이 잦아 좌익계열로부터는 증오를 받게 되었음.
12. 1949년 어느 날, 친구(윤재식)의 형인 윤모씨가 찾아와 서울 가는 여비를 부탁해 도와 주었는데, 후일 그가 좌익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본인이 여비를 준 사실을 진술, 본인은 좌익 분자에게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었음.
그러나 조사 결과 단순히 친구 형에 대한 여비보조라는 것이 판명되고, 또 해군 목포경비소 정보대장 오세동(군검찰 신문기록엔 오세돈으로 되어 있음- 편집자 주) 중위(6·25 때 전사), 헌병대장 박성철 소위 등이 신원을 보증해 체포 수일 만에 석방 되었음.
13. 1949년 무렵 당시 좌익 또는 그런 혐의를 받던 자 중 대한민국에 적극 충성하기로 태도를 명백히 한 자들을 중심으로 보도연맹이 결성된 사실이 있음.
그러나 본인은 여기 가입하거나 간부로 활동한 사실은 없고 다만 연맹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지방유지들이 갹출할 때 이를 제공했는데 아마 운영위원 같은 직책이 있어서 이에 참가했던 것으로 기억됨.
14. 1950년 초 청년들의 대한청년단 가입이 반의무적으로 되어, 당시 해상근무 선장들은 육상지부에 가입하기가 직무 성격상 곤란하므로 대한청년단 목포 해상단을 별도로 조직했는데, 같은 해운업자인 민병안씨(6·25 때 본인과 같이 체포되었다가 공산군에 의해 학살됨)가 단장이 되고 본인이 부단장이 되어 6·25 때까지 이름.
15. 이미 진술한 대로 본인은 1946년 가을경부터 좌익과는 일절 상종하지 않고 해운업에만 전념, 6·25 직전에는 배가 세 척으로 늘어났고 특히 당시 금융조합연합회(현재의 농협)가 정부 양곡 연안수송을 일괄 담당하던 서울 조선상선주식회사의 목포지역 수송을 하청 담당하게 되어 사업이 크게 번영했음.
해상수송의 성격상 해군 목포경비소와도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어 본인과 해군과의 친밀 관계는 시민 공지의 사실이었음. 뿐만 아니라 본인은 사업상 필요에 의해 해군 경비대의 문관 신분증을 휴대하고 있었고, 본인의 친동생인 김대의는 해군 방첩대의 문관으로서 근무하는 실정이었음.
http://www.independent.co.kr/news/n_view.html?id=6113&kind=main&keys=&search=&listpage=n_list.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