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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좋은이들21 1월호 커버 스토리 /전체 참고 메일
안동 구담정사(九潭精舍)와 양평 초은당(招隱堂)중심으로 민족전통문화 르네상스 운동 이끄는 초은(招隱) 권오춘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 “한국적인 웰빙문화, 한옥·한복의 시대 온다” 한 귀인(貴人)을 만나러 가는 날, 세상을 새롭게 단장하듯 백설같은 눈이 내렸는데, 서울과도 달리 산 좋고 물 좋은 양평은 그야말로 은세계를 연출하고 있었다. 장풍득수(藏風得水)의 명당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언덕에 우람하게 우뚝 선 한옥을 배경으로 하늘빛 한복을 입은 그 귀인이 빗자루로 눈을 쓸고 나오며 천리향 선생과 기자를 맞이한다. 초은(招隱) 권오춘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이다.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함박 웃음을 웃는 얼굴의 안경 속 눈빛이 따스하게 다가온다. 단정한 반백의 머릿결에 헌칠한 몸매, 선풍도골(仙風道骨)이다. 듣던 소문대로 선비춤을 추는 그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신언서판(身言書判)이란 말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호를 따 작명했다는 한옥 초은당(招隱堂)의 딱 떨어지는 주인장의 모습이기도 하다. 한옥을 배경으로 앞을 바라보니 부드러운 산맥과 유장한 북한강이 시야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장풍득수(藏風得水)의 명당이다. 지난 번 그 무지막지한 태풍 곤파스에 이곳 저곳에서 거목이 뿌리채 뽑히는 난리가 났을 때도 이곳은 나무 한 그루 쓰러지지 않았다니,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대학생들까지 찾아올 법하다. 콜럼비아 전직 대통령을 비롯, 외교사절들이 방문했으며, G20 정상회의에 참석했던 룰라 브라질 대통령도 머물고 싶어했다는 초은당. ㄱ자로 되어 있는 본채가 60평이나 되는데 하늘로 비상하듯 길게 뻗은 고려양식의 처마로 인해 초은당은 한층 우람하고 멋스러워 보인다. 이음새 하나가 천년을 갈 한옥 원래 이 한옥은 문화재전문위원인 홍은옥 명지대 공예학과 교수가 박물관으로 준비한 것이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2004년 권 이사장이 인수했다고 한다. 당시 한옥을 둘러보러 온 권 이사장은 귀신에 홀린 듯 그 자리에서 인수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니 그의 비상한 안목도 놀랍거니와 한옥 또한 제 주인을 만난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인간문화재 대목장 최기영 씨가 설계하고 지었다는 이 한옥은 규모면에서도 대단하지만 그 재질과 구성 또한 실로 경이롭다. 최기영 대목장은 이음새 하나가 천년을 간다는 ‘장인의 윤리’로 봉정사 극락전, 백제문화단지 등 국보급문화재를 생생히 복원했던 바로 그 인물 아닌가. 또 한가지 놀라운 것은 칠장 중요무형문화재 113호 정수화 선생이 집 안팎을 온통 옻칠을 했다는 사실이다. 9칸 마루바닥은 아홉 번, 기둥은 다섯 번이나 칠하고 들여놓은 가구도 모두 옷칠을 한 것들이다. 장판지는 삼베인데 그 위에다 옻칠을 했고 벽지는 명주로 붙였다. 이렇게 철저하게 공 들여 옷칠을 한 한옥이니 방수, 방습, 방염, 방충, 방화 효과로 1천년은 보존될 문화재라는 것이다. 대청마루에 서서 잠시 눈을 감으면 은은하게 나무와 옻의 향기가 코에 스미는 듯하고, 눈을 뜨면 깊은 갈색 톤의 구조가 마음을 침착하게 하며 깊은 생각에 젖게 한다. 한옥의 멋과 매력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이러한 공간에서 전통 춤판이 벌어지고 노랫가락이 울려퍼진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몸이 움찔움찔 해진다. “한옥은 우주철학을 포괄하는 집이에요. 서까래와 사각기둥은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天圓地方)을 상징합니다. 한옥은 또한 원(추녀)과 네모(기둥, 마루, 방, 마당)와 세모(지붕)의 원방각(圓方角) 천지인(天地人) 철학을 품고 있어 우주섭리와 교감하는 집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바로 이러한 한옥에서 생활하면서 하늘을 공경하고 자연 앞에 겸허하며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는 사상을 몸으로 체득했습니다.” 온고지신(溫故而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 우리의 전통문화를 오늘에 되살리는 운동, 한국문화의 복원을 통한 르네상스 운동에 혼신을 바치고 있는 권 이사장에게 한옥은 중요한 상징적 키워드다. 안동 권씨 부정공파 35대 손으로 권 이사장은 어린시절을 안동에서 보냈다. 당시 고향마을에는 한옥이 많았다. 안동 일대가 기와집과 초가였다. 그런데 근대화 바람이 불면서 한옥은 줄어들었고 특히 대도시의 우리 주거는 아파트로 돌변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며 30여년 아파트 생활을 하다보니 나이가 들어갈수록 한옥에 대한 그리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옛날 고향의 한옥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게 다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감같은 것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공자의 말 중에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可以爲師矣).”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가 흔히 ‘온고지신’이라고 쉽게 말은 하면서도 정작 그 본의를 놓치고 있는 그 말을 권 이사장은 체험적인 차원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말도 그렇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한다는 뜻으로, 옛것에 토대(土臺)를 두되 그것을 변화(變化)시킬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根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현대인의 병색이 깊어진 까닭은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체험이란 삶에서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인자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고향의 처마에서 빗물 떨어지는 그 풍경이 지금도 문득문득 되살아나곤 합니다. 저는 여름날 어머니가 깨끗하게 닦아 반질반질한 그 대청마루에서 뒹굴던 어린 시절이 가장 즐겁고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결국 저는 90년대 초반부터 한옥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책도 읽고 답사도 해오고 있습니다. 한옥에 대해 공부하면 할 수록 이건 생명운동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약간은 불편하게 생각되지만, 불편하기 때문에 인간을 건강하게 합니다. 저는 이 불편함을 선택한 것이지요.” 사실 인간은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이렇게 병색이 깊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이른바 물질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신체적으로 편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신체뿐 아니라 정신도 병색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일하기 때문에 몸도 정신도 사상도 건강했다. 지금 인간들은 어떻게 하면 덜 일할까 골몰하고 있다. 노동운동도 그런 것에만 몰두하고 있다. 게다가 현대의 주거들은 편리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인간을 게으르게 만든다. 권 이사장은 아파트라는 괴물은 인간의 몸과 마음, 정신과 사상을 병들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문명현상이라고 지적한다. 게으르고 건강하지 못한 인간이 위대한 예술품과 철학을 만들어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한옥은 자연합일, 자연회귀 “우리 한옥은 온돌이라는 북방문화와 마루라는 남방문화를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겨울철에 따뜻한 온돌에 있다가 서늘한 마루로 나오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여름철에는 에어컨이 없이도 견딜 수 있습니다. 마루에서 바라보는 천장은 우리 조상들이 창출해낸 위대한 생활예술입니다. 속살까지 내보이는 마루의 천장을 다시 찬찬히 바라 보십시오. 마루의 천장은 높게 해 서서 활동하게 하고, 방의 천장은 낮게 만들어 앉아서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한옥은 나무와 흙으로 만든다. 기와도 흙이다. 그러니 한옥을 해체하면 흙이고 나무다. 오염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초은당 한옥 역시 쇠못 하나 사용하지 않았다. 화학재료도 들어가지 않았다. 나무끼리 서로 얽혀 있게 하고 필요하면 나무못으로 구조를 단단하게 하였으니 구석구석 조상의 신묘한 지혜가 어려 있다는 것이다. 한옥은 자연합일, 자연회귀의 사상이 체화된 구조물인 것이다. “한옥의 가장 탁월한 점은 집 안팎으로 바람이 통한다는 게 아닐까요 아파트는 사방을 밀폐시켜 바람을 막는 방식인데, 특히 고급 아파트, 고층 아파트의 밀폐성은 더 심해지지 않습니까 문을 열어놓고 사는 것이 자연과 순응하는 것일 터인데 말입니다. 아파트는 숨 쉬지 못하는 집입니다. 집도 살아 있는 존재이며 숨 쉬어야 하는 생명입니다. 한옥도 문을 잘 맞추지만, 문 하나쯤은 약간 헐렁하게 해둡니다. 바람이 잘 통하게 하자는 것이지요. 마루는 방과 바깥의 두 공간을 조정하는 기능을 합니다. 갑자기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적응시킵니다. 절묘하지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아파트에 살면 감기 걸리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한옥에 살면 감기에 덜 걸립니다. 호흡기 질환이 확실히 줄어듭니다. 자연을 살려내는 한옥의 구조에 참으로 놀라기도 하는데, 한옥의 대청마루 앞문은 크거나 비어있고, 뒷문은 상대적으로 아주 작습니다. 보통 한옥의 뒤쪽은 산이나 언덕을 끼고 있습니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이지요. 산이나 언덕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바람이 작은 뒷문을 통해 빨려듭니다. 엄청난 송풍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한옥에서는 늘 바람이 불어요. 이를 보면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다시 한번 놀랍니다. 한옥에 산다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이미 자연속에 있는 것입니다.” 한옥은 과학 요즘 아파트 사는 아이들은 여름에 빗물 떨어지고 겨울에 고드름이 달리는 처마를 모른다. 왜 조상들은 한옥을 지으면서 처마를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권 이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처마는 방안의 공기가 밖으로 나갈 때 그것을 일단 붙들어두면서 조정하는 기능을 합니다. 직사광선을 막아주어 눈을 보호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눈이 나빠지는 것도 중간에 조정하는 공간 없이 직사광선을 받기 때문입니다. 모자의 챙과 같은 것입니다. 그늘이란 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옥의 재료가 나무와 흙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처마가 있어서 시원합니다. 한옥은 과학입니다. 한옥의 처마란 또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낙수 소리란 자연의 음악입니다. 이런 걸 죽여버리는 건축이란 인간의 몸과 마음을 살려내지 못합니다.” 일사천리 막힘 없는 달변이고 철학이다. 책 속의 지식이 아니라 삶속의 지혜로 빚어내는 스토리 텔링이다. 권 이사장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요즘 유행하는 ‘웰빙’에 대한 개념도 새롭게 천착돼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생활의 편의를 좇으며 육신의 건강과 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지혜에 바탕을 둔 한국적 웰빙이어야겠다는 것이다. 수박겉핥기식의 구호가 아니라 진정 신토불이(身土不二), 온고지신의 문화적 웰빙이 새롭게 조명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관점에서 권 이사장의 진일보한 한옥관을 좀 더 들어볼 필요가 있다. 진일보한 한옥관 “저는 과거의 한옥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외부구조는 그대로 두되 내부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문화재를 관리한답시고 사람을 떠나게 하는 정책은 잘못된 것이지요. 종가집에는 사람이 살아야 기가 돌고 보존도 잘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화장실도 실내에 현대식으로 잘 배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붕도 문제가 있습니다. 지붕에 흙을 깔고 그 위에 기와를 얹는데, 이렇게 되면 흙에 풀씨나 나무씨가 떨어져 자라면 지붕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진흙과 회를 섞으면 단단해져 식물이 자라지 못합니다. 과거에는 700~800도로 기와를 구웠지만, 지금 고령기와는 1300도로 굽기 때문에 도자기처럼 단단해집니다. 옛날 기와는 70, 80년 되면 문제가 생기지만, 고령기와는 300년 이상 견딥니다. 흔히 말하는 전통과 현대의 공존이고 온고지신이지요. 저는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옛것의 좋은 점과 새것의 좋은 점을 더불어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권 이사장은 “웬만한 강남아파트 한 채가 10억원을 넘는데 그 것을 처분하면 한옥 한 채 쯤은 지을 수 있다.”며 “정부가 앞장서 정책적으로 한옥 건축을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한옥 예찬론자답게 권 이사장은 일상생활에서 한복을 즐겨 입는다. 정통한복도 잘 어울리고 개량한복도 잘 어울린다. 사실 양복은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서양인들의 작업복이었으며, 우리의 한복은 풍류를 좋아하는 민족적 심성에서 만들어진 놀이옷이란 설도 있고 보면, 앞으로 3만 달러 시대가 되면 우리의 한옥과 한복이 제대로 평가를 받으며 귀중해질 것이라는 권 이사장의 견해에 수긍이 간다. 그는 8·15 광복절을 비롯한 정부 공식행사나 외국 방문 때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고유 복식인 한복을 입어야하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한국적인 것을 알리는데 그보다 더 좋은 브랜드가 어디 있냐는 것이다. 술이부작(述而不作) “한복은 한옥과 같은 것입니다. 약간 불편하기도 하지만 습관을 들이면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한복을 입으면 언행을 조심하게 되는데, 참으로 삶에 보배 같은 것이지요. 우리 조상들은 사약을 받는 자리에서도 품위를 지키며 임금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어떤 국회의원이 한복을 걸치고 공중부양을 하는 것과는 참으로 대조가 되지요. 이는 한복에 담긴 의식을 깨치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 사회는 너무 급격하게 변해요. 어느 날 아무도 한복을 입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 할아버지대의 물건을 대물려 쓰는 예가 거의 없어요. 우리의 옛 것을 모르면서 왜 그리 새 것에 집착하는지… 공자께서 말씀하신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깊은 뜻을 새삼 반추하게 됩니다. 제가 한복을 입고 한옥을 주창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할아버지가 입었고 아버지가 입었던 한복을 입으면 그분들의 체취와 정신세계와도 함께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몸과 마음 속에는 우리를 독특하게 하는 유전자가 있기 때문에 조만간 한복과 한옥은 우리의 소중한 것으로 되돌아올 것이라 믿습니다.” 권 이사장의 초은당 한옥을 이야기하기 전에 실은 먼저 고향 안동의 구담정사((九潭精舍)를 살펴보아야 한다. 안동 구담정사(九潭精舍) 면모와 자태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 459에 위치하고 있는 구담정사는 하회별신굿놀이의 본거지인 하회마을과 7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자동차로 5분 정도 가면 하회마을 건너편인 부용대로 막 바로 오를 수 있는데 그 길목에 서애 유성룡의 형인 겸암 유운룡의 정자인 겸암정도 함께 볼 수 있다. 또 예천의 유명한 물도리 마을인 회룡포와도 20분 거리에 있다. 신선의 꿈결 같은 아름다운 선몽대(仙夢臺)가 5분 거리에 있는데, 선몽대는 소백산으로부터 흘러내려온 내성천이 낙동강과 합류하기 직전에 내성천이 만들어내는 마지막 절경이다. 가일마을과 소산마을, 오미동과 검무산도 모두 10 여분 정도의 거리에 있기 때문에 구담정사는 안동의 서쪽 지역의 문화유적을 찾아볼 수 있는 중간지점이라 할 수 있다. 구담정사는 앞에 낙동강 구담습지가 내려다 보이고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감싸고 있어 넓은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있다. 원래 광산 김씨가 안동에 옮겨 산 터전으로 최근까지 광산 김씨 담암공 종택이었던 곳인데, 10년 전 권오춘 이사장이 구입하여 터를 넓히고 기와를 새로 올리고 기단의 석축을 장대석으로 다시 쌓고, 앞 마당과 주변을 새로 단장하여 면모를 일신하였다. 당호도 처음 경덕재로 하였으나 다시 구담정사로 현판을 갈았다. 사랑채, 대청마루 기둥에 걸린 주련은 광산 김씨가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두었다. 세거하던 광산 김씨가 아주 잘 보존하였으므로 건물 구조적으로 원형을 크게 바꾼 것은 없으나, 다만 흙으로 된 안마당을 다듬은 돌로 깐 것과 마루와 마루를 이어서 여러 방을 옮겨 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본래 모습과 가장 많이 다른 것은 마당과 주변환경이다. 마당을 안채 앞마당과 사랑채 앞마당 사이에 담을 두어 안과 밖을 나눈 것이라든가, 세 칸 솟을 대문을 크게 지은 것이라든지, 마당을 잔디로 덮고 정원석과 분재형 수목으로 꾸민 것은 전통적 형태에서 진일보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구담정사는 이 지방 고택의 전형인 口자형 뜰집을 원형대로 유지하면서 현대식 정원을 전통형에 어울리도록 조성해 멋스러움을 풍기고 있다. 구담정사의 뜰집구조는 마당-안채-바깥채-뒤뜰로 이어지면서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바깥채에는 접빈과 풍류의 공간인 정자형의 높은 마루가 있고, 안채는 가족들만의 생활공간인 안방 등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전체 공간의 가운데에는 지붕이 없는 안마당이 위치하고 있다. 건물 속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당은 안채 공간의 채광도를 높이고, 공기를 순환시켜 안채 공간을 외부 자연과 소통시키는 역할을 한다. 마당·한옥·안마당은 자연공간·인공공간·인공적 자연공간의 삼층 구조를 이루며 항상 자연과 호흡하고자 하는 한국의 전통 건축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발길 이어지는 한옥고택 체험 구담정사는 한옥연구가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안동에 오면 꼭 들리는 관광 필수코스로 꼽히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권 이사장의 90세 된 모친 황순례 여사(90)가 여전히 건강한 심신으로 건재하고 있으며, 누이동생 권후남 여사가 한옥체험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조상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고택체험의 일환으로 시작된 이 행사는 제법 입소문을 타 이제는 예약해야만 될 정도로 신청자들이 많다 (054-853-2009). 한 번 이곳에서 맛깔스런 음식을 먹고 쾌적하게 잠을 자 본 사람들은 잊지 못하고 재방문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펜션이나 호텔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편하고 상쾌했다는 소감도 올라 있다. 특히 잊지 못할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집의 된장찌개와 안동 간고등어이다. 이 음식 손맛의 원조는 모친 황순례 여사이다. SBS 인기프로 ‘엄마의 밥상’에 황순례 여사의 안동 종갓집 음식이 소개된 것도 우연은 아닐 터! 어릴 때부터 종갓집 음식을 먹고 자란 권 이사장은 어떠한 산해진미보다도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고향집 밥상을 최고로 쳐왔다. 귀한 아들이 보낸 손님이라며 어머니는 제작진을 반갑게 맞이한다. 이렇게 손님이 급하게 찾아오면 서둘러 만드는 음식이 있다는데, 그것은 바로 칼국수!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 만든 칼국수는 쉽고 빠르게 준비 할 수 있어 손님을 대접하기에는 그만이라며 한 그릇 뚝딱 만들어 내놓는다. 그리고 황 여사는 왕실에 진상하였다는 안동식혜를 만들기 시작한다. 찹쌀로 고두밥을 찐 후 무와 당근을 씻어 채를 썰고 엿기름을 준비한다. 준비한 엿기름에 물을 섞고 가라앉혀 맑은 윗물만으로 만든 엿기름물을 따뜻하게 데운 후, 그릇에 무를 깔고 고두밥을 넣은 뒤에 엿기름물을 부어 섞는다. 여기서 안동식혜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고춧가루로 물을 들인다는 것! 그러면 매콤하고 달콤한 맛이 정말 일품이라고! 여기에 안동하면 빠질 수 없는 간고등어와 텃밭에서 키운 무와 배추로 만든 채소전, 그리고 상큼한 솔잎주까지 올라와 종가의 전통과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엄마의 밥상’이 완성되는 것이다. 구담무담-잃어버린 잔치를 찾아서 구담정사가 많은 이들에게 고택체험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풍류의 장, 전통문화 공간으로 인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지극한 효자인 권 이사장이 수구초심(首丘初心)으로 고향의 전통문화를 재조명하고 또한 이러한 어머니의 미수(米壽, 88세)를 기리는 마음으로(그러나 그 사실은 숨기고) 2007년 9월 8일 큰 문화잔치를 벌린 것이다. 이름하여 ‘구담무담-잃어버린 잔치를 찾아서’다. 이 잔치마당을 열면서 그 동기와 소회를 밝힌 권 이사장의 초대글에는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목하 잔치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환갑이니 칠순이니 하는 잔치들도 이젠 시들해졌고, 옛 법도를 잃었습니다. 차일치고 멍석 펴고 술 걸이고 떡 치던 잔치가 사라진 것입니다. 가족의 경사를 마을의 잔치로 치르던 성대한 축제, 어느덧 옛 풍경이 되었고, 그 풍경 속에서 누리던 풍류역시 지난 일이 되었습니다. 이에 사라진 옛 잔치를 복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구담무담(九潭無譚)에 담았습니다. 놀이의 이름을 구담무담(九潭無譚)이라 했습니다. 안동의 구담리(九潭里)에 있는 구담정사(九潭精舍)에서 벌이는 무담(無譚)이란 이야기입니다. 무담(無譚), 원래 무(無)자는 ‘춤을 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없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하여 새로이 무(舞)를 만들어 춤춘다는 뜻으로 쓰고, 무(無)자는 없다는 뜻으로 쓰게 된 것입니다. 말을 넘어선 육체의 언어 춤과 그 너머의 침묵마저 잔치로 끌어들이고픈 마음에 지은 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담아 여러분에게 선사하고자 합니다.” 명인 명무 고수 대거 참여 안동 MBC 제작진까지 “바로 이거다.”하고 창사 기념 특집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출동한 이날 잔치마당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처럼 경사났다고 몰려들었고, 이 나라의 내로라 하는 문화예술인이 대거 참여하여 밤새 신명나게 놀았다. 이날의 판놀음은 먼저 ‘문굿’으로 풍물패가 당도함을 알리면, 구담정사의 주인이 이들을 맞아 들이고는 마을 유지와 함께 두 폭에 잔치를 기리는 글을 내려 만장을 쓴다. 이어 노름마치 풍물패 김주홍의 ‘비나리’로 판을 여는데 이는 액을 소멸하고 만복을 받아들이는 의식이다. 본격적인 잔치판이 벌어지면 박종선 명인과 김무길 명인이 ‘아쟁·거문고 병주’의 선율이 울려퍼지고 이어지는 춤판에서는 박경랑의 ‘승무’, 이난초 명창의 판소리 ‘춘향가’, 하용부(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보유자)의 ‘북춤’, 김운태 명인의 ‘채상소고춤’, 박경랑의 ‘교방춤’이 박수갈채를 받는다…. 놀이의 중간에 자녀들이 어머니 황순례 여사에게 절을 올리고 권 이사장은 어머니와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춘다! 문화예술 교류 전수의 장 양평 초은당에서도 문화잔치마당은 수시로 개최되고 있다. 1백 여명은 능히 둘러 앉을 수 있는 대청마루에서 가야금 병창이 울려퍼지고 각종 음악연주가 펼쳐진다. 문화예술인들의 공연 뿐만 아니라 지식인 학자들의 연찬회도 열린다. 초은당은 그야말로 우리의 고전 문화 예술이 새롭게 부활하는 산실로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노벨상을 받을 예술인들이 이곳에서 꿈을 키울 수도 있으리라 여겨지는 것이다. 이곳에 이렇게 명사들이 모여드는 것은 한옥이 멋있고 아름답기도 하기 때문이지만, 넉넉한 도량과 베풀 줄 아는 마음을 소유한 권 이사장의 인간적인 매력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초은당에 ‘활수서실(活水書室)’이란 휘호의 액자를 걸어준 조순 전 총리는 전통문화 진흥에 힘쓰는 권 이사장과 나이를 불문하고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군자지교 담여수(君子之交 淡如水)’로 지낸다고 밝히고 있다.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하면서도 자신이 직접 공연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권 이사장. 그는 문화적 로맨티스트다. 그가 정통 한복 차림에 의관을 갖추고 선비춤을 추는 모습을 보노라면 일종의 황홀경을 느끼게 되며 다음과 같은 노랫말이 떠오른다. 말 그대로 그렇게 살아보고픈 유혹을 던지는 한량무가 아닐 수 없다. ‘합죽선 감아쥐고/ 흰 무명 저고리에/ 두루마기 다소곳이 의관 갖춘 선비/ 풍악소리 울리자 / 수줍은 까치발 앞으로 한발 두발/ 뼛속까지 새겨진 선비 문신/ 한꺼풀 두꺼풀 벗겨내더니/ 묵직했던 어깨에서/ 날렵한 날개 쫙 펴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합죽선/ 그 바람타고 온 몸 달아 오른 선비/ 한발로 껑충 뛰어올라/ 허공에서 몸을 돌며 두다리 벌리니/ 하늘을 찌르는 사대부의 호연지기…’ 서울대 법대 교수들이 한글 명함이라니 한민족 문화예술의 복원과 르네상스를 추구하는 권 이사장의 활동 영역은 전방위적이다. 그의 대표적인 명함은 현재 (사)해동경사연구소 이사장과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 그리고 (주)여금의 회장이다. 그가 펼치고 있는 이같은 영역의 문화사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어(國語)에 대한 그의 관점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글은 우리글이고 한문은 중국글인가 권 이사장은 한글도 한문도 우리글이라고 단언한다. 제대로 말하자면 한글이 아니라 훈민정음으로 올라가 영역을 넓혀 우리글이라 해야 하고, 한문 또한 황하문명을 이룬 동이족의 문자로서 당연히 우리의 국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읽기 쉬운 간자체로 쓰다보니 본래 훈민정음의 반치음 같은 것이 사라졌는데, 덧보태지 못할망정 문자가 유실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권 이사장은 밝힌다. 한자의 경우, 우리말의 70% 이상이 뜻글자이고, 팔만대장경이니 왕조실록이니 우리문화유산이 대부문 한문으로 기록돼 있는데 한문을 국어가 아니라는 생각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것이다. 상형문자를 만든 주인공이 바로 우리 민족인데 한자를 우리글이라 당당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그는 통탄한다. 유교를 생활화한 부친과 불교에 심취한 모친 슬하에서 암묵적인 영향을 받아 자연스레 금강경을 비롯한 불경과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교경전을 읽으면서 잠이 달아날 정도로 재미를 느낀다는 권 이사장. 경전의 바다에 빠져 과연 이 민족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민족문화의 엑기스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를 화두로 삼게 되었다. 도대체 거리에서 한문 간판을 볼 수 없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우리의 고유문화와 한문에 대한 교육정책이 근대화 과정에서 실종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성공적이었지만 그에 따른 어두운 그림자, 그 부정적인 측면을 간과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서울대 법대 교수들이 물건 파는 사람들도 아닌데 한글 명함을 가지고 다니고, 강의도 한자 판서를 하지 않는다고 하니 개탄스럽다는 것이다. 사법고시에서 윤리과목이 빠지고 외무고시에서 역사과목이 빠지고서야 어떻게 나라의 미래가 걱정스럽지 않느냐는 것이다. 문화민족의 품위를 지키기 위하여 “효도 효(孝)자를 한자로 쓰면 아들이 노인을 업고 있는 뜻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국어라면 훈민정음인 한글과 우리 조상들이 수천년 동안 써왔던 한문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지적 재산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요. 팔만대장경이다, 실록이다, 최치원 선생의 계원필경이다, 정다산 선생의 흠흠신서 등 선조들의 모든 정신사상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요. 국어고전문화원은 한글과 한문을 병용해서 쓰자는 생각을 가지고 이를 다방면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용할 때 언어의 구사력이나 지적 표현이 더 풍부해지고 문화민족의 품위를 지키게 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제가 전에 성균관대학 다도대학원에서 차 교육을 받고 큰 감동과 깨우침을 받았는데 바로 윤경혁 원장께서 강의를 했지요. 그래서 이런 분을 도와 드려야겠다 싶어서, 그 전에 종로에서 ‘만시태학당’이라는 곳에서 교육을 하셨는데 그걸 사단법인화 해서 국어고전문화원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고전 공부에 빠지고 보니 유교적 토양이 깊은 안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서당에서 명심보감을 배운 권 이사장에게 한문은 친숙한 영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화두를 세우고 공부를 하면서 한국고전번역원의 성백효 선생과 조순 박사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고전에 눈을 뜨게 되고 주위에서 많이 안다며 강의도 해 달라고 요청을 받게 되고 칭찬도 받게 되니 더욱 몰입해서 공부하게 되었다. 안동에 대해서도 더 공부하게 되고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나 이기이원론 등도 깊이 있게 하게 되고, 서울 사람들에게 안동 관광 안내도 하게 되니 유홍준 교수보다 낫다는 평도 듣게 되었다. 어느 정도 공부에 몰입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권 이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좀 과장해서 하루 24시간 전부 고전책을 보며 지낸다고 할 수 있죠. 마음 먹고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우선 술을 끊고 담배도 끊었습니다. 그리고 바둑, 고스톱 같은 잡기도 끊어야겠다, 골프도 끊어야 되겠다, 잡담하고 노는 것을 끊어야 되겠다, TV와 신문도 끊어야 되겠다, 그렇게 하고 나니 시간이 주어지고 공부에 빠지게 되었지요. 뜻이 맞는 사람들과 만나서 새로운 문화운동을 해보자고 고전공부 뿐만 아니라 선비춤을 배우고, 거문고며 서예도 배우게 되었지요.” 경서(經書), 사서(史書) 연구 번역 (사)해동경사연구소는 우리나라 전반에 걸쳐 불완전한 한글전용을 현대적·애국적 표현의 수단인 것으로 착각하여 한문(漢文)으로 기록된 소중한 문화유산들을 외면하는 분위기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며 설립되었다. 해동(海東)은 우리나라를 가리키고, 경사(經史)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현재 해동경사연구소는 성백효 원장을 중심으로 경사와 자집(子集)에 대해 폭넓게 연구, 번역하며 주요 전적(典籍)을 발굴하는 동시에 이를 담당할 역자 양성에 힘쓰고 있다. 또한 한국의 전통문화와 고전을 적극적으로 보급하여 그 저변을 확대해 나가고 각급 학교와 지방자치단체 등의 협조 하에 어린이·청소년에게 전통 예절 교육과 전통 문화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며, 일반인에게는 전통 관혼상제(冠婚喪祭) 등의 사례(四禮) 교육을 실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전통문화 및 고전 정책에 관한 제도화와 그 정착을 위한 각종 활동을 병행해 나갈 예정이다. 디지털 문화콘텐츠 제작 ‘여기 지금’의 (주)여금(www.now-here.co.kr)은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디지털 유토피아를 꿈꾸는 기획집단으로 문화콘텐츠산업을 선도하는 회사다. 전통문화와 문화기술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통해 인간의 꿈과 문화의 가치를 새로운 디지털 매체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존의 단순한 정보전달방식을 지양하고 사용자와 콘텐츠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쌍방향(Interactive) 전략에 초점을 두고 있다. (주)여금은 디지털 콘텐츠 기술의 발전은 오히려 자신만의 창조적 지식,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기업이나 국가에 내일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고 인식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여금은 박병철 대표를 중심으로 한국학과 전통예술을 디지털 기술로 융합, 한국적 스토리텔링의 세계를 열어가는 데 앞장서고 있다. 문화 지킴이로의 변신 이렇듯 현재 권 이사장이 한국의 문예부흥을 위해 지원하고 있는 전방위적인 사업을 보면 가히 놀랍기만 하다. 그래서 어떤 지인은 그를 두고 미래 ‘우주적 문화대통령’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그의 꿈이 확고한 신념과 철학의 내공을 바탕으로 추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단지 정신적 재원만으로 그 꿈이 가능할 것인가.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그는 재벌인가. 종손으로서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것인가. 놀랍게도 그게 전혀 아니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26세에 삼보증권에 취직해서 43세에 퇴직할 때까지 그는 성실게 노력하는 샐러리맨이었고 신뢰받는 증권맨이었다. 30대에 지점장을 할 정도 실력을 인정받고 보니 퇴직할 때는 사표를 받아주지 않아 내용증명으로 보냈다고 한다. 왜 잘 나가는 직장을 그만 둔 것일까. 그는 자신의 타고난 그릇에 이만하면 됐다는 하심(下心)으로 깨끗이 털고 일어선 것이다. 과욕하면 본래 그릇마저 깨버리는 법. 욕심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사례를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그의 전혀 새로운 삶, 문화지킴이의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던 것이다. 부모의 은덕, 조상의 음덕 “저는 특정 종교는 없는데 사람은 끊임없이 선행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 없이도 할 수 있는 선행 많이 있지요. 주변 사람들에게 져주고 양보하고 친절하게 하는 건 돈 안 드는데 자기 마음에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이 이기려고 하잖아요 기본적인 바탕을 닦지 않고 갑자기 되는 일이 있는가요 잘 되기 위해서는 정신 훈련을 해야 되는 거죠. 우주에 복이 있지만 복을 잡는 눈을, 보는 눈을 키워야 하는 것이지요. 뭘 하든 자기 나름의 고민과 결단의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게 다 보이지 않는 재화이고 자기 덕이지요.” 이렇게 말하면서 권 이사장이 빼놓지 않고 기리는 이야기가 조상의 음덕이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독자였어요. 어머니가 딸을 넷 낳고 다섯 번째 저를 임신했는데, 할머니가 새로 장가 가서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여자를 알아보고 다녔는데, 어머니가 이번에도 딸이면 그렇게 하자고 했답니다. 심상찮은 태몽을 꾸고 저를 낳았는데 그때부터 집안이 안녕했대요. 어머니는 저를 두고 태어난 것만으로도 효도를 다한 것이라고 할 정도였지요. 그러니 남이 먹던 물도 안 먹고 제사 음식도 안 먹고 누나들이 저를 너무 귀엽게 키워서 사람 구실 못할까 걱정이었답니다. 이런 어머니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어머니와 마누라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저는 당연히 한 분밖에 없고 바꿀 수도 없는 어머니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오늘날 제가 이러한 문화운동을 하며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원천이 부모의 사랑이고 조상의 음덕이지요. 백골난망(白骨難忘)입니다.” 신묘년 생의 열정과 열망 문화단체나 주부대학, 동문회, 회사 직원 연수회 등에서 이런 이야기 보따리를 털어 놓으면 다들 재미있어 한다고 한다. “이리 저리 강의가 입소문을 타다 보니 저의 브랜드 가치도 상당히 높아진 것 같다.”며 강사료가 용돈은 된다고 권 이사장은 말한다. 종종 주례를 서달라는 요청도 받는데 그 수락 조건이 신랑신부가 반드시 조상 산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고, 기념식수를 해야 한다는 것이란다. 그의 지론 중의 하나인 ‘산소 찾기 운동, 효 운동’을 이렇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골프 치러 가면서, 등산 하면서 자녀들에게 조상 이야기를 해주라는 것이다. 한민족의 문화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풀어놓는 권 이사장의 무궁무진한 이야기.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진정 한국인답게 사는 지혜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실마리를 잡게 된다. 현재 초은당에는 별채격(가칭 ‘북한강 문화원’)으로 많은 이들이 머물며 국학과 우리 고전문화에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고 있다. 2011년 가을 쯤 완공되리라 한다. 신묘년 생인 권 이사장이 고전문화를 새롭게 복원하고 이를 르네상스 운동으로 확산하고자 하는 열정과 열망이 신묘년을 맞아 활짝 개화하기를 기원한다. 취재 / 김산경 기자 -------------------------------------------------------- 전통문화의 뿌리를 가꾸는 이 시대의 선비 -내가 본 권오춘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 율려 춤꾼 이귀선 언제 어디서나 걸림없이 생활 속 무애무의 춤을 추는 21세기의 선비!권오춘 국어고전문화원 이사장님을 처음 만난 곳은 안동 구담정사의 고택이었습니다. 첫 인상이 마치 우리가 꿈꾸는 그리운 옛날 할아버지 모습, 자상한 아버지 모습, 인자한 옆집 아저씨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젊은이들보다 더 높고 강인한 정신이 담긴 냉철함의 행동이 몸에서 빛처럼 품어져 나왔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 전통춤까지 추신다니 상당히 의아하기조차 했습니다. 90세 노모가 맥을 지키고 계시는 구담정사는 여성적 이미지로 온화하고 단아하며 포근함이 느껴지는 정이 샘솟는 따뜻한 한옥입니다. 이곳에서는 남자는 신선이 되고 여자는 선녀가 되어 그 옛날의 풍류도를 복본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와 정취를 만끽하게 됩니다. 그후 양평 초은당을 찾게 된 것은 저에게 기적같은 행운이었습니다. 영혼의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주는 자연의 에너지가 솟구치는 그곳에서 전통예술문화 잔치가 열렸으니 얼마나 놀라운지요! 그 행사에 참여하면서 이사장님의 진면목을 보게 되었는데, 우리 문화예술에 대해 전문분야 사람들보다 더 깊은 애정을 같고 계셨습니다. 때론 프로같은 아마추어 같기도 하고 때론 아마추어같은 프로의 모습이라고 할까. 한 마디로 권 이사장님은 일상 생활의 모든 동선이 옛 선비가 오셔서 울고 갈 정도로 우리의 전통고전문화에 젖어 사시는 분이었습니다. 우리 문화에 대한 안목이 탁월하신 분, 그리고 누가 뭐래도 옳다고 생각하면 밀고 나가는 분, 삶 속에 선비의 냉철함과 자상함을 겸비한 분으로 각인되었습니다. 얼마 전 TV에서 한국사회가 ‘세로토닌 결핍 증후군’에 걸렸다는 보도를 했습니다. 세로토닌 부족으로 공격성, 폭력성, 우울증, 충동성에 시달리고, 자살율도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세로토닌 결핍증에 제일 좋은 치료방법이 태양 아래 바람 맞고 흙 밟고 숲에서 쉬는 것이랍니다. 안동의 구담정사와 양평의 초은당은 세라토닉이 부족한 현대인들을 치료해 줄 문화예술 공간으로서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권 이사장님께 저는 제언을 하고 싶습니다. 자연의 최고의 에너지를 가진 구담정사와 초은당이 최고의 1급수 리콜하기와 1급수 만들기의 공간으로 활용돼야 한다고 말이죠! 우리의 몸이 하루 3끼 밥을 먹듯이 우리의 영혼도 밥을 계속 먹어야 합니다. 정치가 허물어지고, 교육과 경제가 무너지는 것은 현대의 잘못된 문화예술의 흐름에서 비롯된 것입다. 우리 전통문화예술은 집宇 집宙, 우주를 집으로 상정하고 만들어진 우주적 문화예술입니다. 지금의 1회용 문화예술에 젖어 사는 우리는 당연히 세로토닌뿐 아니라 부족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공기를 순환시킬 수 있는 체제도 안돼 있습니다. 3분만 숨 못 쉬면 죽을 수 있는 이 공기의 자양마저 무시 멸시하고 있는 지금의 저급 문화를 소생하는데 구담정사와 초은당의 살아있는 모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정신적 엑기스가 농축된 문화유산의 정보파일을 제대로 분석하고 해석하여 새로운 명품예술로 재탄생시켜야 할 중요한 시기가 다가왔다고 봅니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무엇으로 되는지를 알고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한국문화의 핵심 키워드는 하나를 향한 ‘마음’, 그리고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신’입니다. 올바른 마음과 정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기계가 발전이 되어도 컴퓨터를 비롯한 모든 전자 제품이 ‘전기’가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아버립니다. 기계들을 움직이는 것이 전기이듯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진정한 전기의 힘은 ‘마음’에서 우러난 ‘정신’ 에너지일 것입니다. 정보화의 시대에 진정 자신에게, 가족에게, 이웃에게, 국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우리 각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찾아야 할 때라고 봅니다. 이제 시시비비의 분열이 아니라 서로 위로하고 서로 보듬어 줄 수 있는 ‘어울림’의 정신문화가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2011년 신묘년에는 대지를 닮은 수용하는 ‘마음’과 더불어 더 높이 멀리 노력하고 행동하는 하늘의 상징 ‘정신’의 어울림이 양수리 북한강에 자리한 초은당에서 물줄기를 따라 안동의 물줄기 하회에 이르러 구담정사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마음과 정신의 어울림에 따른 행동을 해야 세상을 바꾸는 힘을 발휘하게 되고 존경받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몸으로 행동하고 마음으로 실천하는 권오춘 이사장님은 전통의 뿌리를 가꾸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사명자 역할을 하시는 분으로 여겨집니다. 이 문화시대의 산 표본으로 ‘국민아버지상’이며 ‘삶의 문화 대통령’이며 우주를 문화의 집으로 상정하고 살아가는 ‘우주적 문화예술 대통령’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 “어릴 때 전통문화예절 가르쳐야” 고전을 통해 본 도덕교육의 의의와 현대사회의 문제점 성백효(成百曉) (사)해동경사연구소 원장 고대의 교육은 윤리도덕(倫理道德)을 기본으로 한 인성교육(人性敎育)에 치중하였다. 암기위주의 지식을 강조하는 지금의 교육과는 크게 달랐다. 고전(古典)을 통하여 도덕교육(道德敎育)의 의의와 효과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오늘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사람에게는 행하여야 할 도리가 있는데 음식을 배불리 먹고 의복을 따뜻이 입어 편안하게 살기만 하고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와 가까워진다. 이 때문에 성인이신 요(堯)임금이 이것을 걱정하여 신하 중에 설(契)이라는 사람을 교육담당관인 사도(司徒)로 임명하여 인륜을 가르치게 하였으니, 부자간에는 친함이 있고 군신간에는 의리가 있고 부부간에는 분별이 있고 장유간에는 차례가 있고 붕우간에는 신의가 있는 것이다. 人之有道也 飽食煖衣 逸居而無敎 則近於禽獸 聖人有憂之 使契爲司徒 敎以人倫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孟子> 고대의 교육은 인간의 윤리도덕을 알아서 이를 잘 행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한 만큼 그 내용 또한 지금처럼 어학(語學)이나 수학(數學) 따위의 기술적이고 암기적인 지식보다는 효제충신(孝悌忠信)의 행동적인 면에 더욱 치중하였던 것이다. 위에서 맹자가 든 다섯 가지 윤리는 바로 오륜(五倫)으로서, 이 오륜이 수천년 동안 동양사상의 근간을 이루어 온 것이 사실이다.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은 학문의 본(本) 말(末)을 말하고 근본이 확립된 뒤에야 지(枝) 엽(葉)이 제대로 발달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본(本)이란 바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덕행(德行)을 가리키며, 말(末)이란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육예(六藝)를 가리킨다. 다음 공자의 말씀에서 이것을 알 수 있다. 자제들이 안에 들어가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오면 어른을 공경하며, 행동을 삼가고 말을 믿게 하며 여러 사람을 두루 사랑하되 특히 인자(仁者)를 가까이 하여야 한다. 이것을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여가를 이용하여 글을 배워야 한다.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論語 學而> 그러나 옛날 학문이라고 해서 반드시 행동에만 치중하고 박학(博學)에 힘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은 공자의 가르침을 박문(博文) 약례(約禮)로 표현하였다. 박문은 ‘글을 널리 배우는 것’이며 약례는 ‘몸을 예로써 묶는 것’이다. 《중용(中庸)》에도 ‘널리 배우며 살펴서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며 밝게 분변하며 독실히 행하여야 한다.〔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하여 박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학문은 그 목적하는 바에 따라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 나누어진다. 위기지학이란 ‘자신의 심신(心身)을 수양하고 행실을 닦기 위한 학문’이며 위인지학이란 ‘남에게 인정을 받고 출세하기 위하여 하는 학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역시 《논어》의 ‘옛날의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고 한 공자의 말씀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심성(心性)을 밝혀 덕행에 힘쓰는 성리학(性理學)을 ‘위기지학’이라 하여 소중히 여겼고, 과거(科擧) 급제를 위한 과문학(科文學)이나 문장학을 ‘위인지학’이라 하여 덜 소중히 여겼다. 일부에서는 조선조 후기 유학의 병폐를 들면서 주자학적(朱子學的) 성리학에 너무 매몰되어 실학(實學)을 하지 않은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보다는 이 모든 원인을 과거(科擧) 문화의 병폐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이 출세를 위하여 과거 공부에만 집착한 나머지 경전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암송을 하거나 시부(詩賦)를 짓는데 그쳤으며, 일단 과거에 급제만 하고 나면 다시는 학문에 종사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각종 문헌에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에 올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어릴 때에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성인을 만드는 길이다. 蒙以養正 聖功也 <周易 蒙卦 彖傳> 사람의 덕성(德性)은 어렸을 적에 교육을 어떻게 시켰는가에 따라 좌우된다고 한다. 한 번 나쁜 버릇이 들게 되면 이것을 고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옛말에도 ‘교자영해(敎子영孩) 교부초래(敎婦初來)’라 하여 ‘자식을 가르치려면 어릴 때에 가르쳐야 하고 며느리를 가르치려면 처음 시집왔을 때에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영재교육’이니 ‘유아교육’이니 하면서 조기교육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다. 현재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이들이 영어 공부를 하고 있으며, 영어를 배우기 위해 유학을 가는 실정이다. 어렸을 때부터 영어공부를 시켜야 일류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아무리 영어가 국제공통어라고는 하지만 그 많은 사람이 우리 국어도 제대로 모르면서 영어부터 먼저 배워서 무엇에 쓰겠다는 발상인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더구나 유아 때부터 영어를 교육시키겠다니 말이다. 우리는 일찍이 일제치하(日帝治下)에서 오직 일본말을 못 배워서 안달을 하던 치욕스런 경험이 있다. 물론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였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국민들 중에서도 하루 빨리 일본인이 되어보고 싶어서 제 발로 앞장서서 선수를 친 친일파도 얼마든지 있었다는 것이 그 때를 잘 아는 노인들의 이야기이다. 이때나 그때나 선진국의 문화를 빨리 이해해야 한다는 구실에서였다. 우리 주위에서 선조들을 사대주의자라고 매도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밀접한 관계를 두고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절대로 그렇지만은 않았다. 명(明)나라를 대국으로 받들어온 조선조였지만, 그들과의 관계에서 중국말(漢語)을 하는 자는 고작 중인(中人) 출신의 소수 역관(譯官)들 뿐이었다. 강대국(선진국)의 것이라면 무조건 선호하고 수용하는 오늘의 풍조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만일 우리 조상들이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강대국의 문물(文物)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더라면, 지금 우리의 문화와 정신은 하나도 남아있지를 못했을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조기에 영어교육을 시키기보다는, 차라리 우리의 전통예절이나 문화를 인식시키고 우리말의 어원과 국어순화교육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지금인 것이다. 그리하여 천진난만한 우리 어린이들을 입시(入試) 위주의 획일적인 교육에서 탈피시켜, 각자의 개성과 소질에 맞게 개발시키며 진정 인간다운 인간을 만드는 일에 모두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해동경사 연구소 : (02)3672-0740 ----------------------------------------------- 다(茶)의 오공 육덕(五功 六德) -한재(寒齋) 이목(李穆)선생의 다부(茶賦) 중에서 번역 / 윤경혁 (사)국어고전문화원 원장 玉 而自濯 (옥 사발 내어 몸소 씻고), 煎石泉而旁觀(돌 샘물 달이며 두루 살피니), 白氣漲口(부리에 넘 솟치는 흰 김은) 夏雲之生溪巒也(여름구름으로 시냇 등성이에 피누나). 素濤鱗生(고깃 비늘 흰 놀로 솟으니), 春江之壯波瀾也(봄 강 세 찬 물결이요), 煎聲(끓는 소리 쉬-쉬-), 霜風之嘯篁柏也(서릿 바람에 대 잣나무 휘파람 소리로다). 香子泛泛(향기 둥둥 떠 번짐), 戰艦之飛赤壁也(전함 닫던 적벽이로다). 俄自笑而自酌(잠시 스스로 웃으며 자작하니), 亂雙眸之明滅, 於以能(두 눈동자 밝았다 흐렸다 어지러운데), 輕身者, 非上品耶(몸을 가볍게 하는 것, 상품 아니리). 能掃 者, 非中品耶(지병을 쓸어주는 것, 중품 아니랴). 能慰悶者, 非次品耶(번민을 위로하는 것, 버금 품수 아니랴). 乃把一瓢(이에 한 표박을 잡으니), 露雙脚陋白石之煮(두 다리 추하게 드러내고 백석 삶기와), 擬金丹之熟(금단 익힘에 견주리오). 盡一椀, 枯腸沃雪(한 사발을 다 마시니, 말랐던 창자가 씻기고), 盡二椀, 爽魂欲仙(두 사발을 다 마시니, 상쾌한 넋은 신선이 되고자). 其三椀也(그 세 사발은), 病骨醒頭風 (병골 씻기고 두풍이 나으매), 心兮若魯 (마음은 孔子와 같고), 抗志於浮雲(뜻은 부운에 들리워), 鄒老養氣於浩然(孟子의 호연지기를 기름일세). 其四椀也, 雄豪發(그 네 사발은, 웅호함 일고), 憂忿空氣兮(우울과 비분의 기운을 비워), 若登太山 而小天下(태산에 오르듯, 천하가 저리 작은데), 疑此俯仰之不能容(이 어찌 부앙함이 불능타 하리). 其五椀也, 色魔驚遁(그 다섯째 사발은 색마(마귀)가 놀라 달아나며), 餐尸盲聾身兮(시동 맹롱한 몸이 찬식함이오). 若雲裳而羽衣(구름치마 깃털 저고리 입은 듯), 鞭白鸞於蟾宮(월궁으로 백란조 채찍하네). 其六椀也, 方寸日月(그 여섯째 사발은, 해와 달 한치 (마음)에 들며), 萬類 神兮(온갖 것이 거적인양 신기하여라). 若驅巢許, 而僕夷齊(소보 허유 앞서고, 백이숙제 따라가듯), 揖上帝於玄虛(천궁(현허)의 상제께 읍하노라). 何七椀之未半(어찌 일곱 사발은 반도 채 비우기 전), 鬱淸風之生襟(울금 향 맑은 바람이 옷깃에 이누나). 望 闔兮(창합 바라 뵈는), 孔邇隔蓬萊之蕭森(곧 가까운 봉래산정 소삼함 이여). 若斯之味, 極長且妙(이 같은 맛과, 또한 신묘함 길게 다하느니), 而論功之, 不可闕也(공덕 논함을 거룰 수 없노라). 當其 生玉堂(그 서늘함 이는 옥당), 夜 書榻(밤새도록 서탑을 마주하여), 欲破萬卷(만 권 서책을 독파코자), 頃刻不輟, 董生脣腐(잠시도 그치지 않아, 동생입술이 썩고), 韓子齒豁, 靡爾也(한유는 이가 뚫릴 제, 네가 없으면), 誰解其渴, 其功一也(누가 그 목마름 풀었으랴, 그 공이 첫째요). 次則, 讀賦漢宮(다음은, 부를 한궁에서 읽고), 上書梁獄(양나라 감옥에서 글을 올리니), 枯槁其形, 憔悴其色(그 형체는 깡마르고, 그 안색은 초췌하며), 腸一日而九回(창자가 하루 아홉 번씩 뒤집혀), 若火燎乎 臆, 靡爾也(답답한 가슴이 불타듯 할 때 네가 없으면), 誰敍其鬱, 其功二也(누가 그 울분 풀었으랴, 그 공이 둘째요). 次則, 一札天頒(다음은, 천자의 한 (칙령을 반포하고) 반찰을), 萬國同心, 星使傳命(만국이 합심코자, 칙사가 천명을 전하고), 列侯承臨(제후가 임하여 받들 때에), 揖讓之禮旣陳(상견의(읍하여 겸양의) 례를 베풀고), 寒暄之慰將訖, 靡爾也(더위 추위를 마침내 위로할 제, 네가 없으면), 賓主之情誰協(빈주의 정으로 누가 맞으랴), 其功三也(그 공이 셋째요). 次則, 天台幽人(다음은 천태산 선인과), 靑城羽客(청성산(도교의 근거지) 선인이), 石角噓氣, 松根鍊精(돌 끝에 기를 내불며, 솔뿌리의 정기를 연단하여), 囊中之法欲試(낭중(신선의) 법으로 시험하고자), 腹內之雷乍鳴, 靡爾也(뱃속에 우레 소리 울렁거릴 때, 네가없으면), 三彭之蠱誰征(삼방의벌레 독을 누가 다스렸으랴). 其功四也(그 공이 넷째요). 次則, 金谷罷宴(다음은 금곡의 잔치가 파하거나), 兎園回轍(토원 잔치에서 돌아올 제), 宿醉未醒(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肝肺若裂, 靡爾也(간 폐가 찢기듯 할 제, 네가 없으면), 五夜之 誰輟(오야에 술을 깨어 누가 그치게 하랴), 其功五也(그 공이 다섯째이다). 吾然後知(나는 그 후에 알았으니), 茶之又有六德也(차는 또 여섯 가지 덕이 있음을). 使人壽修(사람으로 하여금, 천수를 누리고자), 有帝堯大舜之德焉(제요와 대순의 덕을 갖추고), 使人病已(사람으로 하여금 병고 그치고자), 有兪附扁鵲之德焉(유부 편작의 덕을 갖추고), 使人氣淸(사람으로 하여금 기운를 맑히고자), 有伯夷楊震之德焉(백이와 양진의 덕을 갖추고), 使人心逸(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有二老四皓之德焉(이로 사호의 덕을 갖추며), 使人仙(사람으로 하여금 선인이고자), 有黃帝老子之德焉(황제와 노자의 덕을 갖추고), 使人禮(사람으로 하여금 예의롭게 하니), 有희(女熙)公仲尼之德焉(주공과 공자의 덕을 갖춤이니라). 斯乃玉川之所嘗(이는 옥천이 시험한(맛 본) 바요), 贊陸子之所嘗(육우가 시험한 바를 밝혔고), 樂聖兪以之了生(성유가 즐기어 함께 생애를 마치었으며), 曹 以之忘歸(조업은 함께 하며 돌아가기 잊었도다). 一村春光靜(한치 (마음에) 봄빛 고요로움), 樂天之心機(백락천의 심기요), 十年秋月却(십년 동안 가을 달 물리쳤음은), 東坡之睡神(소동파의 깊은 꿈이었도다). 掃除五害, 凌 八眞(오해 쓸어 없애고 팔진으로 힘차게 나아가니), 此造物者之蓋有幸(이는 조물자의 은총이시라). 而吾與古人之(나는 옛사람과 더불어) 所共適者也(함께 지내는 바이라). 豈可與儀狄之狂藥(어찌 의적의 미친 약을 함께 하여), 裂腑爛腸(장부를 찢기고 창자가 문드러지게 하며), 使天下之人德損(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덕을 손상케 하고), 而命促者, 同日語哉(천명을 재촉하는 자와 같은 날에 말하리요). 국어고전문화원 : (02)717-85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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