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번연은 영국의 배드포드(Bedford)의 작은 마을 엘스토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땜쟁이였고 그의 가정은 가난했기에 대학교육을 받지못했다. 그는 내란, 공화정, 왕정복귀, 종교전쟁등 어려운 시기를 거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디, 16세때 군인으로 징집되어 3년간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전투에 참가한 동료가 죽는 광경도 여러 번 목도했다. 동료가 죽는 것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약한다.
3년후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일을 도우며 생활해 나갔다, 그는 음악을 좋아하였다 악기를 살돈이 없어 의자다리를 부셔서 바이올린을 만들어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는 두번 결혼했는데 첫번째 부인 역시 가난한 집안의 규수였다, 시집올 때 두권의 책을 가지고 왔는데, Arther Dent의 저서 “평민이 천국가는 길” 과 Lewis Bayly의 저서 “경건의 실천” 이란 책이였다, 번연은 이책을 통해 신앙심이 깊어졌다, 첫부인에게서 4자녀를 얻었는데 그중에 한자녀는 소경으로 태어났다, 그딸을 통해서 많은 회의 의문 깨달음 및 신앙심이 고조되였다, 생이 무엇이며, 왜나는 가난한가, 왜 이아이는 소경으로 태어났는가. 인간이 할수없는 일이 많구나, 등 깊은 인생의 문제를 심사숙고하게 된다, 또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에 깊은 회의도 느꼈다. 아내의 죽음, 딸의 소경됨, 자신의 무능 무지 가난등 인생문제를 고향마을에 있는 침례교회 목사인 John Gifford 목사에게 상담을 요청한다. 그후 성경 읽으며, 기도하며, 깊은 신앙생활, 은혜의 자리에 들어간다, 또 인생의 문제들을 극복하며 살기로 결심하였다.
두번째 부인은 담대하고 용기있는 여성이였다, 훗날 번연이 12년 감옥살이 할때에 생활을 책임지고 가정을 꾸려나가기도 하였으며, 또 재판장에가서 따지며 석방을 요구할 정도였다. 부인과 함께 교회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고 때로는 목사의 설교에 크게 감동되여 울기도 하였다, “누구든지 나에게 나오는 자는 결코 버리지 않는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하리라,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놀라지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는 말씀속에서 큰용기와 위로를 얻는다.
25세때 부터는 마음이 뜨거워저 노방 전도하기 시작했다. 개혁파가 주도하는 정치상황이였기에 평신도로서 5년동안 자유롭게 전도하고 설교하였다. 그러나 1660년 왕정이 들어서며 찰스2세가 명을 내려 인가받지 못한자의 설교를 금하였고, 이런자는 형벌에 처한다고 했다 그러나 존 번연은 전도와 설교를 하지않고는 견딜수가 없었다, 속에서 끌어 오르는 전도의 불길을 끌수가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며 설교를 했다, 결국 1661년1월에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그후 당국의 설교금지령에도 계속 불복하므로 12년이나 옥살이를 했다, 그의 아내는 재판장과 관리들을 찾아 다니며 부당성을 이야기 했으나 별도리가 없었다.
12년간의 감옥살이에서 첫작품이 Profitable Medition (명상의유익)이였고, 계속해서 Christian Behavior (신자의행위), Grace abounding to the chief of sinners abounding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 를 집필했다, 1667-1672년까지 불후의 명작 THE PILGRIM PROGRESS(천로역정)-나그네 인생이 장차망할 이성에서 떠나 천국까지 가는 노정기-를 펴냈다.
이책은 옥중에서 성경 읽고 기도하다가 받은 계시와 꿈으로 본것을 기록한 책이다, 그후 이책은 유롭에서 성경 다음으로 제일 많이 읽혀지고 있는 신앙서적이 되였다, 프라우드는 말하길,” 성경만 통하면 휼륭한 문학가도 될수 있다는 것이 존 번연을 통해 증명됬다,”고 했다.
역사가 맥콜레이는 말하길 ,” 존 번연이 이책을 쓸 때 문장형식을 참고할 만한 책은 없었다, 다만 영어로 번역된 성경이 유일한 참고서였다, 그는 단어조차 틀리게 쓴 것이 많았고 문법적으로 틀리는 것도 많았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과 계시는 모든 지식의 부족함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다,” 고했다.
1672년 1월에 배드포드의 성도들은 존 번연을 담임목사로 요청하였고, 3월에 출옥하였고, 5월에 설교할 자격증을 얻었고, Bedford 교회를 회중집회장소로 허가를 얻었다. 번연은 설교가, 집필가, 전도자, 목회자로 열정을 다 쏟았다, 목회하면서 The Life and Death of Mr Badman, The Holy War 등 유명한 책은 저술하였고 약 60여권의 책을 썼다.
성령의 감동으로 충만한 그의 설교는 듣는이로 하여금 가슴을 치며 회개하게 만들었다, 그당시 옥스포드대학은 유롭에서 제일가는 대학이였다, 이대학교의 Christ Church의 학장인 John Owen 에게 당시 황제인 찰스2세가 “ 당신처럼 많은 것을 배운 학장이 불학무식한 땜쟁이출신 존 번연의 설교에 무엇이 들을 것이있다고 참석하는냐,” 고 물어보자, 그는 대답하길 ,”황제요 이런말을 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요, 내가 만약 땜쟁이 존 번연처럼 설교를 할수있다면 내가 배운 지식 학문을 다 버리고 싶습니다,’”라고했다.
실로 그의 설교는 평범했지만 성령의 감동과 오랜 고난속에서 나온 것이였기에 사람의 가슴을 정수로 찌르는 설교였다, 1688년 어느날 가정 불화로 싸우는 집을 심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폭우를 만나 옷을 적시고 열병에 걸렸다, 그후 10일후 1688년 8월31일 친구 John Strudwick 의 집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난풍파 많은 이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갔다, 최후에 말, “오 주님 나를 받아주소서, 내가 이제 당신께로 갑니다,” 였다, 12년간의 옥살이가 그로하여금 불후의 역작 PILGRIMS PROGRESS을 만들어냈다.
수년전 개혁자의 발자취를 찾아 유롭에 갔을 때 그가 설교한 교회의 강대상에 서보며 그를 생각해본 일이있다. 감옥터는 도시계획에 의해 지금 사라졌으나 감옥터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JOHN BUNYAN WAS PRISONED 12 YEARS, AS I SLEPT I DREAMED A DREAM.”
베아트리스 뱃손(미국 휘튼 대학 영문학 교수) /손영구 목사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번연의 생애
존 번연은 1628년 11월 영국의 농경 지대 베드퍼드(Bedford) 근교인 엘스토(Elstow)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되었을 때 “그는 외모상 키가 크고 뼈대가 튼튼한 사람이었지만 살은 찌지 않았고, 반짝거리는 눈에 비교적 좋은 혈색을 하고 있었다.
또한 고대 영국의 유행을 좇아 윗입술 부분까지 그의 머리를 늘어뜨렸다. 그의 머리는 불그스레한 갈색이었는데, 생애 후반기에는 나이가 들어 회색으로 변했다. 그의 코는 잘생겼으며 구부러지거나 비뚤어지지 않았고 입은 좀 컸으며 앞이마는 약간 넓었다.”
번연의 아버지 토머스 번연은 떠돌이 땜장이여서 자녀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시킬 능력이 없었다. 번연은 겨우 읽고 쓰는 것을 문법 학교에서 배운 후 일찍 아버지의 직업을 전수받았다.
번연은 소년 시절을 엘스토 농경지 소작농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보냈다. 그는 감수성이 뛰어났으며 비록 정규 대학 공부를 하지는 못했지만 독서열이 대단하였다.
번연은 케임브리지 근처 스타워브리지(Stourbridge)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책들을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 햄프턴의 베비스(Bevis of Hampton)나 그리스도교의 7용사 같은 모험담이 주제가 된 책들을 통해 번연은 풍부한 상상력을 길렀다.
이 외에도 번연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목판본으로 출판된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Book of Martyrs), 쉬운 말로 된 설교집, 일상의 도덕적인 대화록, 하나님께 나아가는 감상적인 판단과 행위를 다루는 책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흠정역 성경을 탐독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책들에서 번연은 영웅 심리, 인문주의적 로맨스 그리고 영국 민담과 전승이 주는 시민의 일상 생활을 접할 수 있었다.
번연은 부모를 따라 영국 성공회에 출석했으며, 9세 때 죄 때문에 고통당하는 영혼의 자각이 있었다. 번연은 이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주님에게 큰 잘못을 범했으므로 나의 어린 시절에도 주님은 무서운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고 겁을 먹게 하셨으며, 두려운 환상을 통해 나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셨다.
즉, 나는 종종 죄 가운데서 나날을 보낸 후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악령들에 대한 불안으로 아주 큰 고통을 맛보았던 것이다······
내가 9세나 10세의 어린 아이였을 때 이러한 생각들이 내 영혼에 큰 고통을 주었으므로, 그때 나는 많은 오락과 유치하고 보잘것없는 일들을 즐기고 나의 헛된 동무들과 어울리면서도 종종 심하게 낙담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극심한 괴로움을 맛보았다. ]
번연의 감수성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1644년 곧 번연이 16세일 때 어머니가 6월에 돌아가셨고, 7월에는 누이동생 마거릿이 죽었다. 8월에 아버지는 새 어머니를 데려왔다. 이 일련의 처참한 상황에서 번연의 감수성은 어떻게 표출되었는가? 번연의 전기 작가 해리슨은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감수성이 강한 소년[번연]이 광폭하게 되었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번연은 [동네] 청소년들의 선동가가 되었고, 불경건하고 못된 짓을 하는 데 있어서 골목 대장이 되었다.]
1644년 11월 우리는 번연이 뉴포트 파그넬(Newport Pagnell) 의회군 수비대의 보충병으로 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의회군은 청교도 지도자 크롬웰을 중심으로 영국 왕 찰스 1세에 대항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번연은 가정을 떠나 내란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위직 보충병의 지위에 있었던 번연에게 어떤 특별한 임무가 부여된 것 같지는 않다. 번연은 1647년 7월까지 의회군에 있었으나 오직 한번 레스터셔 포위 공격 중 옆에 있던 동료가 총에 맞는 사건을 제외하곤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았다.
3년의 군복무 중에 번연은 다양한 분파의 청교도 교리를 접할 수 있었고, 크롬웰의 신형군(New Model Army)이 가진 경건한 신앙 생활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크롬웰의 철기병대는 “전장에서나 막사에서나 고도로 엄격한 훈련을 실시했다······노름도 하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았으며” 촌락에 접근해도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이때 받은 인상들이 후에 거룩한 전쟁(The Holy War)에 표현된다.
제대 후 번연은 마리아라고 하는 매우 경건한 여성과 결혼했다(1649). 그녀는 결혼 혼수감으로 접시나 숟가락 같은 가정 용품 대신 번연에게 큰 영향을 줄 두 권의 책을 가져왔다.
한 권은 아더 덴트(Arthur Dent)의 평범한 사람이 하늘에 이르는 좁은 길(The Plain Man’s Pathway to Heaven)이었고, 또 한 권은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의 경건의 훈련(The Practice of Piety)이었다.
번연은 덴트의 글에서 쉽고 친숙한 격언을 가지고도 통렬한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덴트와 베일리가 사용한 대화 형식의 글들이 아름다우나 예리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알게 되었다. 번연이 천로 역정이나 다른 글에서 왜 대화체를 애용하게 되었는가를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겠다.
마리아와의 결혼은 번연에게 영적 성장을 가져왔다. 마리아는 거친 남성인 번연을 조용한 인내와 섬김으로 품었다. 번연에게 말싸움을 걸기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약점을 스스로 깨닫게 도왔다.
예를 들면, 마리아의 아버지(번연에게는 장인)의 신앙 생활에서 그녀가 어떻게 은혜를 받았는가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번연을 부드럽게 충고하였다.
번연의 신앙 성장은 결혼 후 약 5년 동안(1650-55)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즐기던 춤, 종치기, 운동 경기와 같은 오락들을 서서히 포기하였다.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도 이 시기에 읽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죽고 사망 권세의 두려움에서 빠져 나오는 비밀도 깨닫기 시작했다.
번연의 일생에 금을 그을 중요한 영적 선생인 존 기퍼드(John Gifford) 목사도 이때 알게 되었다. 기퍼드는 의사였고, 한때 왕당파 군의 소령이었다가 1650년 개종하여 침례교 목사가 되었다.
기퍼드는 번연에게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었다. 칭의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 밖에서 어떤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기퍼드의 성경 강해로 인해 번연은 광명의 길로 들어섰다. 후에 번연은 은혜의 교리를 이렇게 정의했다.
[자기의 선행으로써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럴 때 그들은 은혜로써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행위로써 구원받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행위와 은혜는 이 문제에 있어서······서로 상반된다. 만약 [우리]가 행위로써 구원을 받는다면 은혜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교리를 연구하라.
당신이 이 약 저 약을 써 보지만 치료되지 않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다면, 치료를 위하여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약에 대하여 알아보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문제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라고 확신한다. 우리의 상처받은 양심을 치료하기 위한 최초의 조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특별히 그의 시선에 있는 저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아는 일이다.
상처받은 양심 아래 사는 사람은 자연히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게 되며, 그가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그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만족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말씀에 이르기를,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고 하셨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배워야만 한다. 마음을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다운 것이다.]
1653년 번연은 기퍼드의 성 요한 교회에 정규 회원으로 가입했다. 1655년 번연은 엘스토에서 베드퍼드로 이주했고 평신도 설교자로 봉사했다. 이때 건강이 나빴던 마리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기퍼드가 죽은 후 번연은 더 한층 설교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나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 복고로 청교도 전성 시대가 끝나 가고 있었다. 찰스는 성공회를 영국의 유일한 교회로 복귀시키고 비국교도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축출하였다. 크롬웰 치세에 사용했던 베드퍼드 성 요한 침례 교회는 다시 성공회의 교회가 되었다.
번연같이 비국교도이고 아울러 성직을 받지 못한 자로서 설교한다는 것은 국법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되었다. 설교 금지령을 위반한 번연은 12년 동안(1660-72)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감옥에 들어가기 1년 전 번연은 엘리자베스를 새 아내로 맞이했다. 엘리자베스는 총명하고 용기 있는 여성이었으며 번연을 구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항소하였다. 그녀의 항소는 묵살되었다.
번연의 오랜 수감 생활은 상당히 자유스러운 것이었으며 때로는 밖으로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러 나갈 수도 있었다. 우리는 번연의 수감 생활이 융통성 있는 것임을 한 간수와 번연 사이의 일화에서 볼 수 있다.
[번연이 종종 감옥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이 런던에 있는 번연의 박해자들 중 몇몇 사람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간수와 이야기할 관리를 내려 보냈다······번연은 그때 그의 가족과 함께 집에 있었는데 마음이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말하기를, 비록 간수가 다음날 아침까지 집에 머물 수 있는 자유를 주었지만 왠지 불안하므로 즉시 돌아가야 겠다고 했다. 번연은 감옥으로 돌아갔고, 간수는 그렇게 좋지 않은 시간에 번연이 돌아온 것에 대해 싫은 소리를 했다.
이른 아침에 그 관리가 도착했고, 그는 간수에게 물었다. “모든 죄수들이 잘 수감되어 있는가?” “그렇습니다.” “존 번연도 안전하게 수감되어 있는가?” “그렇습니다.” “그를 봤으면 한다.” 번연은 불려 나왔고 그래서 만사가 잘 해결되었다.
그 관리가 돌아간 후 간수는 번연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이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때에 다시 나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제 돌아와야 하는지를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
번연은 양심수로서 심지어는 일부 간수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옥중에서 번연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그의 육체는 감금당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딤후 2:9). 그는 감옥에서 60여 명의 양심수들에게 소망과 위로의 말씀을 전해 주었다.
또 한편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위해 장식이 달린 레이스(long Tagg’d laces)를 뜨기도 했다.
1672년 3월 찰스 2세는 비국교도들에 대한 종교 관용을 선포하였다. 동년 5월 번연은 석방되었다. 출감 즉시 번연은 베드퍼드의 비국교도 침례교회 목사로 임직되었다.
1676년 다시 비국교도 박해가 시작되어 번연은 6개월 간 짧은 투옥을 당하는데, 이때 천로 역정 전반부를 쓴 것으로 생각되고, 후반부는 1684년에 완성하였다. 천로 역정에 버금가는 대작 거룩한 전쟁은 1682년에 썼다.
번연의 천로 역정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이것 때문에 그의 유명세는 높아만 갔다. 영국 왕 제임스 2세는 번연을 비국교도 진영에서 빼내려고 관직을 제의하는 등 여러 모양의 회유를 시도했으나 번연의 지혜로운 저항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번연은 유명해졌지만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켰다. 1688년 8월 31일 번연은 재산 상속 관계 때문에 생긴 어떤 부자간의 갈등을 화해시키러 런던에 갔다가 심한 비를 맞고 열병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