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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인연으로
촌수寸數도 없이 함께하는
당신과 나의 오늘이
결코 이런 모습은 아니겠지요
아직은 손을 놓지 말아요
- 심창섭
1. 들어가는 말 : 대중적 서정의 성과와 예술적 검증의 필요성
디카시는 바야흐로 모바일 시대의 새로운 예술 양식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 최전선에서 대중적 소통과 문학적 연대를 이끌어온 경남 고성 국제 한글디카시 공모전은 매해 주목할 만한 성과를 배출해 왔다. 제9회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심창섭의 〈가시버시〉 역시 이러한 대중적 호소력의 정점에 선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가시철사'라는 날카롭고 거친 사물에서 '가시버시(부부)의 애달픈 사랑과 유대'라는 실존적 의미를 포착해 내며 많은 독자에게 서정적 감동을 안겼다.
그러나 공모전이 지니는 대중적 성과와 문학지가 담보해야 할 미학적 예술성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한국디카시학회가 정립하고 추구해 온 '예술디카시'의 미학적 잣대로 〈가시버시〉를 냉정하게 분석해 보면, 이 작품은 대중적 감동의 이면에 명백한 창작 스킬적 흠결과 미학적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본고는 20세기 문학비평의 중심축인 신비평(New Criticism)의 시각을 빌려 이 작품의 구조적 결함을 지적하고, 이를 통해 현대 디카시가 도달해야 할 극순수 예술디카시의 당위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2. 본론 (1):〈가시버시〉에 나타난 미학적 흠결과 창작 스킬의 한계
가. 이미지의 종속화와 '설명적 진술'의 오류
예술디카시는 영상과 문자가 5:5의 평등하고 유기적인 결합을 이루어야 한다. 문자가 영상을 일방적으로 설명하거나, 영상이 문자의 삽화로 전락하는 순간 디카시 고유의 미학은 붕괴한다. 그러나 〈가시버시〉는 3행과 4행에 이르러 심각한 구조적 결함을 드러낸다.
"당신과 나의 오늘이
결코 이런 모습은 아니겠지요"
이 진술은 사진 속 녹슨 가시철사를 '우리 부부의 위태로운 현실'로 직유(直喩)하여 보여주는 친절한 '해설'에 불과하다. 시인이 포착한 영상(날이미지)은 그 자체로 다의적이고 개방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으나, 이어지는 문장 서사가 그 사유의 공간을 스스로 좁혀버렸다. 독자에게 능동적인 응시와 사유를 요구하기보다, 시인의 사적인 감정을 주입하고 과외해 주는 구태의연한 '설명적 서정'의 한계를 답습한 결과다.
나. 시어의 작위성과 제목 의존증
디카시학회가 강조하는 미학의 핵심은 언어적 수사나 사전적 관념이 개입하기 전, 사물과 마주한 '순간 포착'의 직관에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획득한 시적 충격은 현장의 직관이라기보다 '가시버시'라는 제목의 언어 유희적 연상에 과도하게 빚지고 있다.
'가시철사'의 '가시'에서 순우리말 부부를 뜻하는 '가시버시'를 유추해 낸 것은 재치 있는 언어적 기교(Wordplay)일 수는 있으나, 이는 사후적인 관념의 조립에 가깝다. 사진 속 오브제(가시철사와 시멘트 파편)가 지닌 본질적인 물질성과 거친 날것의 생명력이 '가시버시'라는 온정주의적이고 관념적인 프레임에 갇힘으로써, 디카시 본연의 '발견의 미학'은 퇴색되고 '작위적 편집의 미학'이 전면에 부각되는 흠결을 남겼다.
다. 신파적 결론과 예술적 긴장감의 상실
현대 예술디카시는 마지막 행에 이르러 감정을 폭발시키기보다, 오히려 서정적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하거나 예상치 못한 반전을 통해 깊은 여운을 남겨야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명작의 반열에 올렸다고 평가받는 마지막 행은, 역설적으로 예술디카시의 미학을 가장 크게 무너뜨리는 지점이다.
"아직은 손을 놓지 말아요"
이 한 줄은 디카시가 유지해야 할 사물과의 객관적 거리를 단숨에 무너뜨리는 감정 과잉, 즉 신파적 호소다. 거칠고 굳은 철사와 돌덩이가 주는 시각적 긴장감을 이 애달픈 결론이 순식간에 무장해제 시켜버린다. 날카로운 실존적 각성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가시철사의 미학을 흔한 '부부 클리닉' 식의 서사로 안착시킴으로써, 대중적 위안(키치, Kitsch)과 타협해 버린 아쉬움을 남긴다.
라. 심사평의 찬사(讚辭), 그 역(逆)으로 드러나는 미학적 함정
이러한 미학적 흠결은 역설적이게도 당시 심사위원들이 상찬(賞讚)했던 심사평의 논거 속에서 그 당위성이 더욱 극명하게 반증된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가시버시〉를 대상작으로 선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녹슨 가시철사와 콘크리트 덩이를 연결해 부부로 표현한 것도 놀랍지만, 그 이미지를 내세워 부부의 바람 잘 날 없었던 지난한 세월과 아픔의 더께를 상징한 것도 참으로 독특하고 영리하고 신선했다. 그러면서 '아직은 손을 놓지 말아요'라는 말로 애틋하면서도 끈질긴 부부애를 강조하고, '가시'라는 동음이의어를 시 제목과 사진에 병치해 그 안에 든 이중의 의미를 맛보게 하는, 언어 감각적 재치와 케미가 무척 참신하고 인상 깊었다."
심사평은 이 작품의 미덕으로 ①가시철사와 콘크리트라는 재료에서 집과 부부의 서사를 유추해 낸 '영리한 연결', ②'아직은 손을 놓지 말아요'를 통한 '부부애의 강조', ③'가시'라는 '동음이의어의 재치'를 꼽고 있다. 그러나 문학비평의 눈으로 이 찬사를 냉정하게 뒤집어보면, 심사위원들이 상찬한 '참신함'은 도리어 예술디카시가 극복해야 할 '관념적 작위성'의 다른 이름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첫째, 가시철사와 콘크리트가 집의 재료이고, 집은 부부가 사는 곳이기에 이 사물이 부부를 상징한다는 심사평의 논리는 전형적인 삼단논법식 서사 유추다. 이는 사물(오브제)이 지닌 본질적인 날이미지성을 현장에서 직관적으로 폭발시킨 것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인과관계를 짜 맞춘 '영리한 연상 퀴즈'에 가깝다. 예술디카시는 사물과 시인이 마주친 찰나의 스파크여야지, 사물의 용도를 추적해 들어가는 연상 작용의 결과물이 아니다.
둘째, "아직은 손을 놓지 말아요"가 부부애를 '강조'해 주어 인상 깊었다는 평가는 디카시를 여전히 문자의 하위 장르나 교훈적 메시지 전달 도구로 바라보는 소통 중심적 서정관의 한계를 자인한 꼴이다. 예술디카시의 문자는 이미지를 강조하거나 주제를 선명하게 요약해 주는 캡션이 아니다. 오히려 이 친절한 강조가 이미지의 다의적 사유를 차단하는 독소로 작용했음을 심사평은 간과하고 있다.
셋째, '가시'라는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언어 감각적 재치는 칭찬받아 마땅하나, 이는 현대시가 추구하는 깊이 있는 아이러니(Irony)라기보다는 일종의 표피적인 말장난에 머문다. '가시철사'의 날카로움이 지닌 실존적 공포와 긴장감이 '가시버시'라는 언어적 유희와 결합하는 순간, 사물이 가진 물질적 중량감은 순식간에 휘발되고 가벼운 재치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심사평이 극찬한 〈가시버시〉의 '영리함과 재치'는 대중적 공모전의 심사 기준에서는 참신한 가치일지언정, 텍스트의 자율성과 유기적 플롯을 극단까지 밀어붙여야 하는 '극순수 예술디카시'의 미학적 지평에서는 장르의 자립을 가로막는 가장 결정적인 한계이자 흠결임을 본고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3. 본론 (2): 신비평(New Criticism)의 거울로 본 예술디카시의 당위성
이러한 〈가시버시〉의 미학적 한계는 단순히 한 작품의 결함에 그치지 않고, 왜 우리가 소통형 디카시를 넘어 '예술디카시'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학술적으로 증명한다. 엘리엇(T. S. Eliot)과 브룩스(Cleanth Brooks) 등으로 대표되는 신비평은 작품 외적인 요소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직 텍스트 내부의 유기적 구조와 긴장(Tension), 아이러니(Irony)만을 통해 작품의 예술성을 평가하고자 했다. 이 냉정한 거울을 디카시에 투영할 때, 예술디카시의 존재 이유는 더욱 명징해진다.
가. '의도의 오류'로부터의 해방
신비평가 위마트와 비어즐리가 지적한 '의도의 오류'는 디카시 창작자가 가장 빈번하게 빠지는 함정이다. 많은 창작자가 자신이 사진을 찍을 때 느꼈던 주관적 감정이나 의도를 텍스트를 통해 독자에게 강요하려 든다. 〈가시버시〉의 "아직은 손을 놓지 말아요" 역시 시인의 주관적 감상을 텍스트 내에 날것으로 주입한 결과다.
그러나 예술디카시에서 포착된 '날이미지'와 문자는 결합하는 순간 시인의 손을 떠나 하나의 독립된 유기적 텍스트로 존재해야 한다. 시인의 사후적 해설이나 정서적 강요가 개입하는 순간 디카시는 예술이 아닌 '감정의 배설'로 전락한다. 신비평적 관점에서 예술디카시는 시인의 의도라는 독재로부터 텍스트의 자율성을 선언하고, 이미지와 문자가 빚어내는 내부적 구조 그 자체로 자립해야 마땅하다.
나. 객관적 상관물로서의 이미지와 유기적 통합
신비평이 강조하는 '텍스트의 유기적 통합성(Organic Unity)'은 디카시에서 이미지와 문자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완벽한 언어다. 예술디카시에서의 이미지는 서정의 장식이 아니며, 문자 역시 이미지의 캡션이 아니다. 두 매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필수불가결한 구성 요소가 되어, 언어가 다 채우지 못한 감각을 이미지가 채우고, 이미지가 다 발산하지 못한 사유를 문자가 응축해야 한다. 즉, 디카시의 스틸컷은 엘리엇이 말한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로서 기능해야 한다.
〈가시버시〉의 치명적인 한계는 가시철사라는 훌륭한 객관적 상관물을 구상해 놓고도, 문장이 그 이미지를 정서적으로 환기하는 데 실패하고 관념적으로 설명해 버렸다는 점에 있다. 진정한 예술디카시라면 사물의 구체성 속에서 독자가 스스로 긴장과 아이러니를 느끼도록 유도했어야 한다.
다. '이단적 진술'을 넘어선 발견의 미학
클린스 브룩스는 시의 본질을 다른 산문적 언어로 바꾸어 설명할 수 없다는 '이단적 진술의 불가능성'을 역설했다. 시가 지닌 패러독스와 긴장감은 오직 그 시의 구조 안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예술디카시에 이르러 극대화된다. 잘 쓰인 예술디카시는 '왜 이 사진이어야만 했는가', '왜 이 문자여야만 했는가'에 대해 산문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고유의 미학적 도약(Moment)을 보여준다. 현장에서 직관적으로 포착된 날이미지의 순간적 역동성이 문자라는 정제된 시어와 부딪칠 때 발생하는 스파크, 그것이 예술디카시의 당위성이다. 이미지와 문자가 결합하여 산문적 진술로 환원되지 않는 제3의 미학적 실존을 뿜어낼 때, 비로소 디카시는 고등 예술이라는 이름을 허락받는다.
4. 결론: 한국 디카시 창작이 나아가야 할 미학적 지향점
결국 심창섭의 〈가시버시〉는 가시철사라는 강렬한 '날이미지'를 포착해 놓고도, 그것을 '가시버시'라는 언어적 유희와 '손을 놓지 말자'는 상투적인 신파성 결론으로 가두어버린 작품이다. 사진을 배제하고 문자만 읽어도 부부의 정념이 이해되고, 문자 없이 사진만 보아도 위태로움이 소통된다면, 그것은 신비평적 의미에서 구조적 통합을 이루지 못한 텍스트다. 이는 영상과 언어가 동등한 층위에서 폭발하는 '예술디카시'라기보다, 잘 찍은 사진에 서정적 캡션을 단 '설명적 디카시'의 전형에 가깝다.
디카시가 단순한 문학적 이벤트나 대중적 취미 활동을 넘어 하나의 독립된 예술 장르로 굳건히 서기 위해서는, 이제 관념의 조립과 친절한 해설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물이 뿜어내는 날것의 긴장감을 언어의 칼날로 팽팽하게 맞받아치는 극순수 예술디카시의 미학, 그것이 바로 한국디카시학회와 우리 시대의 디카시 창작자들이 끝내 포기하지 말아야 할 발견의 미학이자 실존의 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