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새벽 세시.
아직도 창밖으로는 잔잔하게 빗소리가 흐르고
서로가 하나 되어 피어났던 시간 만큼이나 노곤노곤 혼곤해져간다.
살푸시 적시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살풋 내리덮히는 눈꺼풀에 순응하며
저쪽 작은 방에선 몇몇 님들이 잠을 청하고 있고
이쪽 작은방에선 송파님, 흐름이어라님이 고골고골 잠에 젖여들어있다.
스님들은 후박나무님이 따로 방을 마련하신다며 나서셨고
큰방 안쪽 창가 곁에서 몇명이 옹기종기 두런두런
아직도 생글생글 빗소리를 반주삼아 다담을 나누고 있다.
후박나무님이 화계 산야초 다원에서 가져온 각종 차를
훈민정음님과 아란도님이 우려내며 잔에 나누고
그간 분주히 움직였던 내 마음이 그제야 느긋하게 잔잔해진다.
지금 잠든 이, 깨어있는 이.
함께 한 모든 이가 함박웃음으로 어우러지고
나이와 성별, 성격에 관계치 않고 서로를 열어두고 하나로 관통하며
저마다의 입가에 미소를 베어물리고 있음이 참 감사하다.
살며시 둘러보니
그라지오, 아하, 채훈, 스마일, 훈민정음, 아란도.
좀 있으니 잠을 청하다 도란거림에 깨었는가...
이성원님이 차를 청하고
좀 있으니 부시시 아직 덜 깬 눈을 비비며 바람이어라님이 함께 하신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끊임없이 세희님이 카메라를 들고 있구나.
모두 익숙한 얼굴들이로다.
'아, "익숙한"이라고?' 가만 생각해본다.
이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다니...
익숙하다 하기에는 그 직접적인 대면은 참으로 부족하였으리언만
딱 한번의 마주함만 있었던 님들이든
오늘 처음 대면한 님들이든
왜 그리 오랜 벗처럼 편안하고 서로의 색채가 익숙한가?
정답고 스스럼없다는 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전에 설악 오색에 지내던 기억이 떠오른다.
처음 갔던 강원도 양양이었건만 괜시리 눈에 선하고 낯설지 않은 느낌.
꼭 전에 한번 와봤던 것 같은 기분...
이런 어울림과 동화가 어느 과거의 인연에서 발원한 것인가?
차 하나로 이루어지는 공감대가
사회적인 저마다의 위치를 접어두고 서로의 정서를 감응시키고 있음은
차가 자신도 알게 모르게 시나브로 下心을 닦아주고 있음인가?
그것이 차의 덕성인가... 인연의 인과인가...
이제야 고요롭게 차맛을 즐긴다.
연잎차, 뽕잎차, 칡꽃차, ...
사람 많은 가운데에 옆에 코고는 소리와 쌕쌕 숨을 불어내는 소리 속에
조금은 새벽녘의 녹녹함에 잔잔히 깔리는 몸과 맘.
형광등에 반사되는 창밖을 간간히 쳐다보며
쪼르르 다관에서 숙우에 부어지고 또르르 잔에 담겨지는 차를
홀짝 홀짝 마시는 이 그 고요로움이 좋다!
서로가 굳이 말을 해도 안해도
건네는 눈빛 속에 잔잔히 익어가는 나눔이다!
간간히 세희님이 멘트를 부탁하는데
그 건네지는 말까지 고요롭다.
좀 더 시간이 흐르니 배가 고프다.
훈민정음님이 준비한 김밥이 있다.
가져다 먹는데... 먹고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아
얼마를 먹은 것인지... 김밥이 참 맛난다.
나 혼자 거의 여섯 줄은 좀 더 먹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또 군침이 도는구나!^^
그러는 가운데 이성원님이 잠을 청하고
바람이어라님이 다시 잠을 청하셨던가?(가물가물)
여섯시가 조금 넘어 나도 잠을 청하였다.
비가 오는 관계로 등산일정은 취소하기로 하며
그 안내할 일이 덜었으니 마음 편하게
이내 푹신 곤히도 잠이 들었구나.
8시경에 잠이 깨어보니 모두가 잠들었는데
훈민정음님과 채훈님이던가... 안 자고 이슬비 아침 길을 산책하고왔단다.
그러면서 컵라면을 먹고 있구나.
그렇게 한 명 두 명 일어나 부시럭대면서 라면을 먹고 있으니
일부러 깨우지 않아도 9시에 동학사에 가시고픈 님들은 알아서 일어나신다.
일어나는 대로 컵라면, 김밥, 떡, 엇저녘에 남은 비빔밥과 그 밑반찬.
그 진수성찬에 아침요기가 풍요롭도다!
게중에 한 장면이 생각나는데
부시시 일어난 바람이어라님을 반갑게 맞으며 옆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세희님 부탁왈
"'산자락에서 자니 공기도 좋고 기운도 맑겠다
일어나니 참 가쁜하고 상쾌한 것이 개운하네요!'
이대로 멘트를 좀 해주세요!"
하는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낸
오메! 저럴수가... 그건 정말 거짓말이다.
새벽녘에서 거의 아침녘이 되도록 앉았다가 잤는데
어찌 개운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고요?
바람이어라님 한말씀 하실 법한데 그냥 웃으시며
그대로 말해주는데...
이러니 우리가 방송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답니다.^^
그리 살짝 웃으면서 후박나무님께 연락하여 일정을 확인하니
선우스님이 동학사를 안내하여주신다 한다.
몇분들이 먼저 나서서 한차례 걸어가고 있고
뒤늦게 아침을 드신 금곡님과 청솔님, 유수무현님, 송파님이 차를 부르릉하고 가셨겠다.
내 따라가 길을 안내하려했더니
민박주인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한참 뒤떨어졌다.
그렇게 다 떠난 뒤 뒤늦게 아침걸음이나 하여볼까...
아하님, 나유타님과 함께 우산을 들고선
느긋이 벗나무 가로수길을 산책한다.
낙엽지고 이슬비에 흠뻑 젖은 가는 나뭇 가지가지 마다 데롱데롱
은방울이 참으로 영롱하다.
계룡산자락 위로 회색빛 먹빛 구름이 섞여서 웅성웅성 하늘을 움켜쥐고있고
그 아래 산기슭에서는 물안개가 몽글몽글 뿌옇게 아른아른 일어나
한폭의 산수화가 병풍처럼 벌려서 사방을 화폭같이 꾸미고 있구나!
매표소에 거의 다다를 쯤
송파님이 차를 되돌려오고 있다.
선우스님도 차가 몇대나 올라갔는지 알수 없으니 다 챙기시질 못하였겠는데
참으로 숫기없는 송파님은 선우스님께 말씀을 못드렸을 것이고
속으로 알아서해주십사 짐짓 고대도 하셨겠지만
눈도장을 찍지 못하셨을터이니 누구를 원망하시랴?
차량통제를 당하고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던 것이다.
참으로, 스님을 알고 모르고
그 여행지에서의 쏠쏠한 재미(무료입장이나 절에서의 숙박 등^^)가 다르니
이 차맛어때의 인연이 더욱 매력적일 수밖에 없네라며
내 숨은 잇속이 웃음으로 돋는구나!
매표소에서 발길을 돌리고 오는데
스마일님이 저기 오시네.
옷을 제대로 입었는지 신마녀님과 먼저 가 동학사에 있을 성수를 살짝 걱정하시면서도
어디서든 혼자서 잘 노는 성수가 대견하시다고 든든해하신다.
그렇게 되돌아오니
후박나무님과 뭉치, 덕성스님, 훈민정음님, 송파님,
그 새 일어난 채훈, 아란도, 천사연 님들이
따듯한 차로 반겨주시더라.
작은방에서 그라지오님은 잠이 꼬박 들어 이제야 한밤중이고...
그렇게 우리는 동학사와 다담 일행으로 나누어서
그 빗속의 겨울과 봄의 문턱에 선 조금은 노곤하지만 아침을 산뜻하게 즐기고 있었다.
빗소리가 참으로 음악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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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지하철 희생자를 추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