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노혜숙
꿈을 꾸었다. 고향 잿길을 걷는 꿈이었다. 길은마을신작로로 연결되는 서낭당 고갯마루에 있었다.꿈속의 나는 초등학생 아이였고 혼자 집으로돌아가는 중이었다. 잎을 떨어뜨린 나무들은수척했고 햇발은 서늘하게 맑은 늦가을이었다. 길은달구지가 지나다닐 만큼 넓었으나 사위는 고요했다.
마음은 급한데 걸음은 안 걸리고 가도가도인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허공에 까만점처럼 떠 있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물체는빠른속도로 내게 날아오더니 머리 위에서 빙빙돌기 시작했다. 나뭇잎만바스락거려도 가슴이조마조마하던 참이었다.
불현듯 어머니 말씀이 생각났다. 닭을 낚아채간매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질긴 내 울음 끝에정색하고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었다. "안 그치면매더러 잡아가라고 할테다." 마침 하늘엔 새가 날고있었고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얼뜬 내겐 즉효 있는처방이었다.
꿈속에 나타난 새의 몸집은 아주 컸다. 날개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길이가 내 키를 훌쩍 넘어
보였다. 윈을그리며 머리 위를 맴돌던 새가당산나무에 앉아 나를 쏘아보더니 마침내 맹렬한속도로 덮쳐왔다. 팔을 휘두르고 발을구르며 쫓는시늉을 했으나 발바닥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나는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다 제풀에 놀라 꿈에서깼다.
어린 내게 서낭당 잿길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인적이 드물고 음산했다.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소문들이 무성한 곳이기도 했다. 누구는 도깨비에흘려 밤새 헤매다 새벽녘에야 집에 돌아갔다고했다.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당산나무에 목을했다는 처녀 귀신 이야기는 지나갈 때마다 뒷덜미를잡아챘다. 서낭돌무더기에서 기어 나온 구렁이를보고 혼비백산 달아나다 신발 한짝을 잃어버린적도 있었다. 알록달록한 헝겊들이 새끼줄에 꿰어나부끼던 서낭당의 괴기스런 풍경은 선연하게뇌리에 남았다. 어쩌면 그때부터 서낭당은 내게불안과 억압의 상징이 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꿈속에서 종종 내 안의 자라지 않은 아이를만났다. 아이는 겁쟁이에다 울보였다. 아이를통해서 내 안의 진짜 목소리를 들었다. 울부짖음에가까운 그 말들은 본능적이고 직설적이고 분노에차 있었다. 슬프게도 분노는 가까운 사람들을 향한것이었다. 깨고 나서 나도모르게 눈가를 적실 때도있었다. 순하게 길들여진 현실의 나와 달리 꿈속의나는 야생의 짐승에 가까웠다.
현실의 억압을 벗어나고 싶어 꿈속까지 끌고들어온 것일까. 꿈길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 번호는 암호처럼 열리지 않고 내가찾는 사람은 늘 안개 속에 있었다. 약속시간은다가오는데 신발 한짝이 사라지거나 갑자기 장면이바뀌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에게 쫓겼다. 어느때는 의식이 개입하여 가위 눌린 상태를 일깨우며꿈밖으로 나를 밀어냈다. 나는 꿈속에서 쌈닭처럼사나웠고 길을 잃었고 벼랑에서 추락했고 물에빠졌고 심지어 죽은 적도 있었다.
대체로 추상화처럼 난해한 꿈이 많았지만해석 가능한 꿈도 있었다. 스크린 밖의 관객처럼선명하게 내가 들여다보였다. 괜찮지 않은데괜찮은 척, 억울한데 너그러운 척, 겁쟁이면서 센척, 속빈 강정이면서 있는 척, 부러우면서 초연한척, 인정받고 싶은데 아닌 척…. 그 모두 왜곡된욕망의 표상일 터였으나 '아큐'처럼 정신승리법으로위장했다. 그렇게 숨겨지고 억압된 내면의 자아는괴물이 되어 꿈속으로 나를 찾아왔다.
꿈을 통해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일은 용기가필요했다. 가면이 아닌 진짜 얼굴을 대면해야했다. 때로 낯설고 섬뜩하게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재현하며 나의 현재를 물었다. 꿈은 보이는 나와보이지 않는 내가 끊임없이 충돌하고 타협하고담판을 벌이는 현장이었다. 무의식은 쉽사리 도달할수 없는 미지의 세계지만 필경 자신의 꿈과 기원을담고 있을 것이다. 꿈은 멀어서 아득했고 기원은절실해서 무거웠다. 그 아득함과 무거움을 뛰어넘을수 없는 한계가 나를 불안하게 하고 억압한 게아니었을까. 신은 어쩌면 분열된 자아의 치유를 위해꿈이라는 무의식의 거울을 볼 수 있도록 허용했는지모른다.
나는 아직도 더는 사라지고 없는 고향의 서낭당꿈을 꾼다. 서낭나무엔 색색의 소망들이 인간의이루지 못한 꿈을 기원하듯 바람에 흔들리고있다. 그 잿길에 유년의 내가 홀로 서 있다. 노을을등에 지고서야 나는 사무친 눈빛으로 그 아이를끌어안았다.
제16회 한국산문문학상 수상작품
2006년 '수필과비평' 등단
좋은수필 편집장 역임,
수필과비평작가회 부회장
황의순문학상, 에세이포레문학상
에세이문학작품상 등
<조르바의 춤> <생생, 기척을 내다><비밀번호> 선집 <인연수첩>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