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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 도쿄의 명문대학인 청산학원(靑山學院).
본명 백기행.
북쪽 향토어를 사용하여 뛰어난 우리말 시를 창작하였으나
월북 후 북한정권에 의해 소외된 삶을 살다가 1995년에 작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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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쓸쓸한 길
22.산곡(山谷)
23.백화(白樺)
24.석양(夕陽)
25.절망
26.외갓집
27.내가 생각하는 것은
28.나 취했노라
29.수박씨 호박씨
30.함남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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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길
거적장사 하나 山뒷옆 비탈을 오른다
아-- 따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쓸쓸한 길이다
山가마귀만 울며 날고
도적갠가 개 하나 어정어정 따러간다
이스라치전이 드나 머루전이 드나
수리취 땅버들의 하이얀 복이 서러웁다
뚜물같이 흐린 날 東風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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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곡(山谷)-함주시초(咸州詩抄) 5
돌각담에 머루송이 깜하니 익고
자갈밭에 아즈까리 알이 쏟아지는
잠풍하니 볕바른 골짜기이다
나는 이 골짝에서 한겨울을 날려고 집을 한채 구하였다
집이 몇 집 되지 않는 골안은
모두 터알에 김장감이 퍼지고
뜨락에 잡곡 낟가리가 쌓여서
어니 세월에 비일 듯한 집은 뵈이지 않었다
나는 자꾸 골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골이 다한 산대 밑에 자그마한 돌능와집이 한채 있어서
이집 남길동 단 안주인은 겨울이면 집을 내고
산을 돌아 거리로 나려간다는 말을 하는데
해바른 마당에는 꿀벌이 스무나문 통 있었다
낮 기울은 날을 햇볕 장글장글한 툇마루에 걸어앉어서
지난 여름 도락구를 타고 장진(長津)땅에 가서 꿀을
치고 돌아왔다는 이 벌들을 바라보며 나는
날이 어서 추워져서 숙국화꽃도 시들고
이 바즈런한 백성들도 다 제 집으로 들은 뒤에
이 골안으로 올 것을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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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각담 : 돌담
깜하다 : 까맣다의 전남 방언. 까마득하다의 평북방언잠풍하니 : 잔잔한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듯하니.
터앝 : 텃밭. 집의 울안에 있는 밭.산대 : 산대배기. 산꼭대기
돌능와집 ; 기와 대신 얇은 돌조각을 지붕으로 인 집.
남길동 : 남색의 저고리 깃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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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白樺)-산중음(山中吟)4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山) 너머는 평안도(平安道) 땅도 뵈인다는 이 산(山)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박우물 : 바가지로 물을 뜨는 얕은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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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자작나무로 돌아간다. 자작나무들은 그렇게 모여서 모든 것을 자작나무로 이룬다. 그의 마음이 희고 옹이진 자작나무로 들어찼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보인다지만, 그는 아직 그 산에 가지 않았다. 고향이 그리워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외롭다고도 말할 수 없는 깊은 것이 마음에 자작나무를 듬성듬성 빽빽이 들어채우고 그 자작나무들은 평안도 쪽을 향해 선다. 외롭다고 함부로 나대지 않고, 허투루 산을 넘지 않는다. 지긋이 견딜 만하다. 그러나 그 뿌리가 깊다. 모든 전설이 자작나무로 돌아가고, 그 역시 한 그루 자작나무로 서 있다. 견딜 만하다.
[장철문·시인·순천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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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夕陽)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 거리에 영감들이 지나간다
영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쪽재비상을 하였다
개발코를 하였다
안장코를 하였다
질병코를 하였다
그 코에 모두 학실을 썼다
돌테 돋보기다
대모테 돋보기다
로이도 돋보기다
영감들은 유리창 같은 눈을 번득거리며
투박한 북관(北關) 말을 떠들어대며
쇠리쇠리한 저녁해 속에
사나운 즘생같이들 사러졌다
개발코 : 개발처럼 뭉퉁하게 생긴 코 내지는 넙죽한 코를 말함.
안장코 : 말의 안장처럼 콧등이 잘룩하게 생긴 코.
질병코 : 거칠고 투박한 오지병처럼 생긴 코.
학실 : 노인들이 쓰는 안경. 학슬(鶴膝) 안경. 특히 다리 가운데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마든 안경.
돌테 돗보기 : 석영(石英) 유리로 안경테를 만든 돋보기.
대모테 돗보기 : 바다거북의 등 껍데기로 안경태를 만든 돋보기.
로이도 돗보기 : 미국의 희극 배우. 헤롤드 로이드(1893~1971). 로이드 안경에 맥고모자 차림으로 192평균적 미국인을 표현함. 채플린, 키튼과 함께 3대 희극왕으로 불림. 주연 작품으로 '로이드의 수명', '로이드의 활동광'. 미국의 희극 영화 배우 로이드(H.Loyd)가 영화 속에서 끼었던 안경에서 유래.
쇠리쇠리한 : 눈이 부신. 눈이 시우린, 시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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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는 고향 사람들을 이국적인 풍물을 대하듯 객관적인 태도로 바라보고 있다. 화자는 장날 북관(함경도) 거리를 활보하는 영감들의 특징을 얼굴에서 잡아내고 있다. 말상, 범상, 족제비상의 얼굴을 그리고, 개발코, 안장코, 질병코로 넘어간다. 이렇게 다른 영감들은 모두 학실을 썼다. 그런데 그 학실은 돌체돋보기, 대모체돋보기, 로이도돋보기 등 또 다들 다르다. 이런 영감들의 모습을 통해 시인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투박한 북관 말을 쓰고 사나운 짐승같이 사라지는 1930년대 북관 영감들의 모습에서 화자는 우리 민족의 북방 정서를 찾아냈다. 만주를 호령하던 그 늠름한 모습을 상기시킴으로써 백석은 일제에 저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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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絶望)
북관(北關)에 계집은 튼튼하다
북관(北關)에 계집은 아름답다
아름답고 튼튼한 계집은 있어서
흰 저고리에 붉은 길동을 달어
검정치마에 받쳐입은 것은
나의 꼭 하나 즐거운 꿈이였드니
어늬 아침 계집은
머리에 무거운 동이를 이고
손에 어린것의 손을 끌고
가펴러운 언덕길을
숨이 차서 올라갔다
나는 한종일 서러웠다
길동 : 저고리의 깃동.
가펴로운 : 가파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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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
내가 언제나 무서운 외갓집은
초저녁이면 안팎마당이 그득하니 하이얀 나비수염을 물은 보득지근한 복쪽재비들이 씨굴씨굴 모여서는 짱짱짱짱 쇳스럽게 울어대고
밤이면 무엇이 기와골에 무리돌을 던지고 뒤우란 배나무에 째듯하니 줄등을 헤여달고 부뚜막의 큰솥 적은솥을 모조리 뽑아놓고
재통에 간 사람의 목덜미를 그냥그냥 나려 눌러선 잿다리 아래로 처박고
그리고 새벽녘이면 고방 시렁에 채국채국 얹어둔 모랭이 목판 시루며 함지가 땅바닥에 넘너른히 널리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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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것은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 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것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다닐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新刊書) 하나도 없는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世上事)'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따디기 : 한낮의 뜨거운 햇빛 아래 흙이 풀려 푸석푸석한 저녁무렵.푹석 : 몸피가 큰 것이 맥없이 주저앉는 모양
누굿한 : 여유있는.
살틀하던 : 너무나 다정스러우며 허물없이 위해주고 보살펴 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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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은 열렬히 흠모했던 처녀를 빼앗긴 동시에 친구까지 잃어버렸다. 이때 상심한 마음을 백석은 함흥에서 꽤 오래 가슴에 품고 살았던 것 같다. 훗날 발표한 몇 편의 시에 그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에서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백석은 그렇게 실연의 상처를 도려내어 시행 곳곳에 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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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취했노라
- 노리다께 가스오(則武三雄)에게 -
나 취했노라
나 오래된 스코틀랜드의 술에 취했노라나
슬픔에 취했노라나
행복해진다는 생각에 또한 불행해진다는 생각에 취했노라
나 이 밤의 허무한 인생에 취했노라
<原文>
われ 醉へり
われ 古き蘇格蘭土の酒に醉へり
われ 悲みに醉へり
われ 幸福なることまた不幸なることの思ひに醉へり
われ この夜空しく虛なる人生に醉へ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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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다께 가스오는 일본 시인으로,
그 누구보다 먼저 백석의 천재성을 알아본 사람이었다.
<뛰어난 시인 백석, 무명의 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정작 일본 후꾸이현(福井縣) 최고의 시인이기도 했다.
노리다께는 일제시대 약 십오년간을 조선에서 보내며 많은 조선 문인들과도 친분을 쌓았는데,
백석을 제외한 다른 문인들에 대해서는 매우 낮게 평가했다.
그는 1942년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에서 평론가로 활동하였으며, 『압록강』(1943)이라는 책을 동경에서 출간하여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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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씨 호박씨
어진 사람이 많은 나라에 와서
어진 사람의 짓을 어진 사람의 마음을 배워서
수박씨 닦은 것을 호박씨 닦은 것을 입으로 앞니빨로 밝는다
수박씨 호박씨 입에 넣는 마음은
참으로 철없고 어리석고 게으른 마음이나
이것은 또 참으로 밝고 그윽하고 깊고 무거운 마음이라
이 마음 안에 아득하니, 오랜 세월이 아득하니, 오랜 지혜가
또 아득하니 오랜 인정(人精)이 깃들인 것이다
태산(泰山)의 구름도 황하(黃河)의 물도 옛임금의 땅과 나무
의 덕도 이 마음 안에 아득하니 뵈이는 것이다
이 작고 가벼웁고 갤족한 희고 까만 씨가
조용하니 또 도고하니 손에서 입으로 입에서 손으로 오르나리는 때
벌에 우는 새소리도 듣고 싶고, 거문고도 한 곡조 뜯고 싶고,
한 오천(五千)말 남기고 함곡관(函谷關)도 넘어가고 싶고
기쁨이 마음에 뜨는 때는 희고 까만 씨를 앞니로 까서 잔나비가 되고
근심이 마음에 앉는 때는 희고 까만 씨를 혀끝에 물어 까막까치가 되고
어진 사람이 많은 나라에서는
오두미(五斗米)를 버리고 버드나무 아래로 돌아온 사람도
그 녚차개에 수박씨 닦은 것은 호박씨 닦은 것은 있었을 것이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하고 누었던 사람도
그 머리맡에 수박씨 닦은 것은 호박씨 닦은 것은 있었을 것이다
밝는다 : 껍질을 벗겨 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를 지어낸다.
도고하니 : 도고하게. 짐짓 의젓하게.
함곡관(函谷關) : 요동반도에서 북경으로 가는 길목.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
오두미(五斗米) : 도연명의 월급. 당시 현감의 월급이 오두미에 해당되었음.
녚차개 : 호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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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도안(咸南道安)
고원선(高原線) 종점인
이 작은 정차장엔
그렇게도 우쭐대며
달가불시며
뛰어오던 뽕뽕차가
가이없이 쓸쓸하니도
우두머니 서 있다
해빛이 초롱불같이
희맑은데
해정한 모래부리
플랫폼에선
모두들 쩔쩔 끓는
구수한 귀이리차(茶)를 마신다
칠성(七星)고기라는 고기의
쩜벙쩜벙 뛰노는 소리가
쨋쨋하니 들려오는
호수까지는
들쭉이 한불 새까마니 익어가는
망연한 벌판을 지나가야 한다
달까불시며 : 작은 몸집으로 격에 맞지 않게 자꾸 까불며.
뽕뽕차 : 기동차(汽動車).
우두머니 : 우두커니.
해정한 : 깨끗하고 맑은.
모래부리 : 모래톱.
귀이리 : 귀리. 포아풀과의 일년생 또는 이년생 재배식물.
칠성고기 : 망둥이 사촌쯤 되는 고기. 물 위를 뛰어가는 버릇이 있다.
쨋쨋하니 : 아주 선명하게.
들죽 : 들쭉. 들쭉나무의 열매. 진홍색으로 단맛과 신맛이 함께 느껴지며 그냥 먹거나 술을 담가 먹는다.
한불 : 상당히 많은 것들이 한 표면을 덮고 있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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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리차는 나의 꿈이다. 밥을 먹을 때나 음악을 들을 때, 버스를 타거나 먼 산을 볼 때 고원선 종점의 도안역을 생각한다. 그곳 플랫폼에서 귀리차를 마시던 사람들의 고뇌와 빈궁을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 시인은 그들이 마시는 귀리차 앞에 쩔쩔 끓는,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라가 하나가 되면 제일 먼저 함남 도안까지 가는 기차표를 끊을 것이다. 그곳 플랫폼에 서서 쩔쩔 끓는 귀리차의 맛을 보고 싶은 것이다.
<곽재구시인>
도안(道安)은 개마고원에서 흘러내리는 부전강을 막아 만든 호수 아래에 있다던가. ‘달가불시며(호들갑 떨며)’ 달려왔던 ‘뽕뽕차(기차)’가 멎은 종착역은 ‘해정한(깨끗한)’ 모래부리를 풍경으로 펼쳐 햇빛조차 희맑은데, 여행자는 거기서도 망연한 벌판을 얼마만큼 더 지나 호수까지 가야 한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나그네로 나도 덩달아 그 부전강 가를 헤매건만, 그리운 방랑은 시 속에서나 가능한가.
<김명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