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신론(讀史新論)_상세(上世) : 부여족 대 발달시대
이 장은 삼부여가 분립했던 시대에서부터 삼국 초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부여족이 어떻게 번성하고 쇠퇴하였으며 우리 부여족이 다른 종족과 어떻게 관계되는가를
일일이 상세하게 서술하여
1) 민족주의를 밝히며,
2) 국가정신을 발휘하며,
3) 우리 고대사에 빠져있는 부분을 보충하며,
4) 수천 년 동양의 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처한 위치를 논하고자 한다.
아아, 한 민족이 번성하고 쇠퇴하는 것이 과연 아득한 천운에 매여있는 것인가?
아니면 순전히 인간의 만듦에 따라 나옴인가?
부루 이후의 역사를 읽어보면
어찌 그 소침(銷沈)의 운명이 천년의 오랜 기간을 겪어왔으며,
삼국시대 초기에 이르러서 또 어떻게 하여 하루아침에 발달의 힘이 빨리 증가하였는가?
대개 단군 이후 2천여 년 동안 부여족의 발자취가 압록강 이동으로 한치라도 건너온 일이 있는가?
대동강 청천강 유역은 단지 기씨 위씨 유씨(劉氏: 한무제 4군) 등 중국민족의 수라장이 되며
강원도 함경도 지방은 오직 저 말갈족 예맥족 등 각기 야만 민족들의 활동무대를 이루고
“근래 모씨가 대한지지(大韓地志)를 편찬하였는데
고사에서 말한 부여와 해부루가 동해안으로 옮겨 살았다는 구절로 인해 잘못된 단정을 내리어 말하기를
동해안은 곧 강원도요 강원도는 곧 이후의 예맥의 땅이니 그러한즉 예맥이 모두 단군의 후예라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한나라 무제에게 항복한 예족의 임금 남려가 곧 해부루의 아들 약손(若孫)이라 하였으니
그 망발이 아주 심하다.
만일 이 동해안을 강원도라 할진대 해부루가 옮겨 살았을 때에 그 옮겨왔던 길이 어디를 거쳐 왔겠는가?
평안도를 거쳐왔다면 이때 평안도는 지나 민족이 바야흐로 강성하였으며,
함경도로 거쳐왔다면 이때 함경도는 말갈족이 바야흐로 강대하였으니
그가 전국민을 이끌고 멀리 옮길 때 어찌 적국의 중심을 뚫고 이 지역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아 이러한 주장은 논란을 기다릴 것 없이 스스로 없어질 것이다.”
한강 이남에는 토착 야만 종족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대개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보면
이 삼천리 강산에 살았던 민족이 조금도 부여족의 모습을 띠고 있는 자들이 없다.
아, 단군이 각 부락을 정복한 이후에 2천여 년간 긴 세월을 지나도록
우리 부여족의 광명이 한쪽 구석에 오래도록 감춰져 있었음은 무슨 까닭인지
이제 그 원인을 고찰하여 볼 데가 없거니와,
삼국시대 초기의 전후 백여 년간에 부여족의 세력이 동서 만여리 사이에 갑자기 나타났으니
이것이 고대 부여족의 제1발달 시대이다.
해부루도 이때 내어나며 해모수도 이때 태어나며 고주몽 유리왕도 이때 태어났으며
대무신왕 비류 온조도 이때에 태어나며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 김수로도 이때 태어나며
부분노 부염위도 이때에 태어나며 을음도 이때 태어나며
기타 현명하고 뛰어난 위인이 배출하여 부여족의 세력을 드날릴 때
오소리강 유역에 두 개의 큰 나라를 건설하니 그것이 동부여 북부여요
압록강 유역에 한 개의 큰 나라를 세우니 그것이 고구려요
한강 유역에 한 개의 큰 나라를 세우니 그것이 백제요
낙동강 유역에 두 개의 큰 나라를 세우나 가락 신라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상에 열거한 현명한 사람과 뛰어난 위인들이 모두 부여족임은
역사서적을 통하여 고찰할 수 있거니와,
다만 신라 가락 시조들도 부여족에서 나왔다 함은 혹시 억단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것에 관해 의문점을 가질 것이 혹시 있기는 하나 나의 연구한 바에 의하면
신라도 부여에서 나왔음이 의심할 바 없으니 이제 그 증거를 대면 다음과 같다.
무릇 삼국시대 이전은 우리나라 민족이 아직도 신화시대이다.
그러므로 당시 영웅들은 모두 신화에 의하여 인민을 꾀어 모았는데,
고구려 신라 가락 세 나라의 비슷한 신화가 너무 많다.
고주몽도 알에서 나왔다 하며 박혁거세 김수로도 알에서 나왔다 하며 석탈해도 알에서 나왔다 하고
고주몽이 송양과 기묘한 술책을 겨울 때 매가 되기도 하고 수리가 되기도 하고 까치가 되기도 하였는데,
석탈해가 수로왕과 기묘한 술책을 겨룰 때도 역시 매가 되기도 하고
수리가 되기도 하고 까치가 되기도 하였다.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이라 스스로 칭하였는데 가락국의 신정(神政)도 천신이 낳은 것이라 하였으니,
같은 당 같은 종족이 낳은 바가 아니면 어찌 신화가 이와 같이 비슷하겠는가?
이것이 첫째 이유다.
또 신라의 지명이 고구려와 비슷한 것이 많다.
고구려에 태백산이 있는데 신라에도 태백산이 있으며 고구려에 계룡산이 있는데
신라에도 계룡산이 있으며 고구려에 묘원산이 있는데
신라에도 묘원산이 있으며 기타 조그마한 산천의 이름이 같은 것이 대단히 많으니
피차 서로간에 받아 씀이 분명하다.
이것이 둘째의 이유다.
또 삼국간의 관제를 고찰해 보건대 여기에는 태대형이 있는데 저기에는 태대각간이 있으며,
여기에는 서불한(舒弗邯)이 있는데 저기에는 서발한(舒發邯)이 있으며
여기에는 구사자(九使者)가 있는데 저기에는 구간(九干)이 있으며
여기에는 주주(州主) 군주(郡主)가 있는데 저기에는 군주(軍主) 동주(洞主)가 있는 것이 셋째 이유다.
또 그 외 성곽 가옥 음식 풍속이 서로 같은 점을 낱낱이 들어 말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몇 가지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 백제만 부여에서 나온 종족이 아니라
신라도 부여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혹은 신라가 지나족의 일부라고 하나
그러나 실제로 미루어 볼 때 신라가 어찌 일찍이 털끝만한 것도 지나족의 취미를 가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진한 육부가 진(秦) 나라나 한(漢) 나라의 유민이라 하는 것은 고사의 억단일 뿐이다.
설혹 몇몇 진나라와 한나라의 유민이 흘러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 주권을 행사했던 종족은 부여족이었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
혹은 전쟁으로 혹은 덕을 사모하여 혹은 계책으로 좌우로 거느리고 맺어서 이 땅에 머물러 살 때
지나족을 물리치고 선비족을 정복하며 숙신국 예맥국을 쳐서 멸망시켜
북방에서 웅비한 나라가 고구려요 마한 진한의 각 부락을 병합하여 남방에 우뚝 솟은 나라가
신라와 백제이다.
불과 백여 년 사이에 우리 부여족의 세력을 뿌리박아 다른 민족이 분수에 넘치는 바람을 끊어버렸으니
기운이 떠오르고 왕성하였던 것이다.
이 때의 우리 선조의 영광이여,
이후에도 다른 주변 종족들이 항복하기도 하고 투항하기도 하였으나 우리 민족의 우세와
다른 민족의 열세는 무릇 이때에 승패가 판가름 났던 것 같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부여족의 나라가 되는 것은 정신적으로 볼 때는
단군시대에 이미 시작되었고
실질적으로 얘기한다면 삼국 초기에 비로소 명백히 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