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2.0라켓 놓고 코치로 새 테니스 인생 시작
조윤정 삼성증권 코치 "테니스는 생각대로 된다"
이형택(32,삼성증권)은 10월 26일 서울 올림픽공원 테니스코트에서 열린 2008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삼성증권배 국제 남자 챌린저대회 결승전에서 이보 미나르(체코)를 2-0(6-4 6-0)으로 꺾고 대회 7번째 정상에 올랐다.
기나긴 부진을 털어 내고 챌린저급 대회에서 2년 만에 거둔 우승이었다. 그러나 이형택은 웃음 대신 눈물을 보였다. 시상식이 끝나고 같은 팀 후배인 조윤정(29)의 은퇴식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조윤정은 이덕희, 박성희를 잇는 한국여자테니스의 스타 플레이어였다. 2003년 세계랭킹 45위에 오르며 여자프로테니스(WTA) 투어에서 한국 선수로는 최고 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8월 이형택이 ATP 랭킹 36위에 오르기 전까지 남녀 통틀어 한국선수로 최고 기록이었다.
그러나 2006년 허리를 다쳐 투어 대회 참가 횟수가 눈에 띄게 줄면서 조윤정은 조용히 잊혀져 갔다.
허리 부상에 시달리던 조윤정은 결국 손때 묻은 라켓을 놓고 삼성증권 코치로 새로운 테니스 인생을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은퇴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는 오래 전부터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다. 2006년 허리 수술을 받고 재활 훈련을 했는데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지난해 은퇴하려고 했다.
하지만 US오픈에 출전한 뒤 몸 상태가 괜찮았고 감독님과 동료 선수들도 다시 해 보라며 격려해 은퇴를 뒤로 미뤘다. 그런데 부상이 또다시 찾아왔다. 한 경기 정도는 뛸 만 했는데 경기를 치를수록 통증이 심해져 유니폼을 벗게 됐다.
지난해 US오픈이 마지막 대회였나.
아니다. 이번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해 단체전 단식과 복식을 모두 뛰었다. WTA 투어 대회로는 지난해 US오픈이 마지막 무대였다.
허리 수술 뒤 1년 반 만에 단식 경기에 나섰다. 당시 목표는 기권하지 않고 경기를 끝까지 뛰는 거였다. 1회전에서 탈락했지만 다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랭킹으로 US오픈에 나갈 수 있었나.
WTA는 스페셜 랭킹 제도가 있다. 부상 전 랭킹을 기준으로 WTA 투어 대회에 8번 나갈 수 있다. 8번 가운데 1번은 그랜드슬램 대회 출전 자격이 주어진다. 난 US오픈을 가장 좋아했다. 하드코트에 분위기도 한국과 비슷해 경기하기 편했다.
라켓을 놓겠다고 마음을 굳힌 건 언제쯤인가.
올해 5월 말이다. 인천, 김천, 창원 국제챌린저대회에 나가 3주 연속 복식 경기를 뛰었다. 김천, 창원대회에서는 준우승했다.
그러나 경기를 하면 할수록 허리에 통증이 왔다. 매일 치료를 받으러 다녔고 주사를 맞았다. 체력 소모가 덜한 복식 경기를 뛰었는데도 많이 아팠다. 설렁설렁하면 공은 칠 수 있었지만 테니스는 많이 뛰고 온 몸을 사용하는 운동이라 그럴 수 없었다.
코치 데뷔가 빠른 편인데.
지난 7월부터 삼성증권 주니어 테니스단이 지원하는 중학교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경기에 내보내야 하는데 선수들을 데리고 갈 코치가 없었다.
주원홍 감독이 한번 다녀오라고 해 선수들과 함께 대회에 나갔다. 별다른 준비 없이 시작해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냥 선수들의 공을 받아쳐 주는 수준이다.
은퇴식 때 눈물을 흘렸는데.
테니스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뒤 은퇴하고 싶었는데 끝이 아름답지 못했다. 허리 부상으로 힘들었던 때가 생각났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부상 때문에 그만둬야 하는 게 속상했고 한편으로는 시원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올해 선수 생활과 코치 생활을 병행하며 하루하루 긴장감 속에 살았는데 이제 한 가지에 전념할 수 있어 편안하다.
팀 동료이자 선배인 이형택이 무슨 말을 했나.
그동안 고생했다며 안타깝다는 말도 했던 것 같다. 은퇴식 때 (이)형택 오빠도 같이 울었다. 시상식이 끝난 뒤 마이크를 건네받고 내게 무슨 말을 하려 했는데 울먹거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형택 오빠는 정이 많은 사람이다.
이형택은 2003년 1월 시드니에서 열린 아디다스 인터내셔널에서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스페인)를 물리치고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ATP 투어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조윤정은 이형택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 우승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2002년 파타야오픈, 2003년 ASB뱅크 클래식, 2006년 캔버라 인터내셔널에서 결승에 올랐지만 모두 준우승에 머물렀다.
조윤정은 WTA 투어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코트를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 했다.
2003년 7월 세계 랭킹 45위까지 올랐는데.
몸 상태가 최상이었고 자신감이 넘쳤다. 포핸드 스트로크가 주무기인데 발리도 마음먹은 대로 들어갔다. 매주 대회에 출전하느라 그해에는 9개월 이상 해외에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벌어진 ASB뱅크 클래식 결승전이다. 엘레니 다닐리두(그리스)와 맞붙었는데 세트스코어 1-1 게임스코어 5-3에서 40-15로 앞서 매치포인트를 잡았다. 다닐리두의 공을 아웃으로 봤는데 라인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부터 추격을 허용해 타이브레이크 끝에 졌다. 경기가 끝나고 심판이 “내가 진행한 경기 가운데 최고였다”고 말할 정도로 명승부였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2회전 패배가 큰 아쉬움으로 남을 텐데.
턱관절 수술 뒤 재기의 발판으로 삼은 게 아테네올림픽이었다. 첫 번째 올림픽 출전이기도 했다.
올림픽 전에 몸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개인 트레이너와 열심히 훈련했다. 1회전은 통과했는데 2회전에서 프란체스카 쉬아본(이탈리아)에 1-2로 졌다.
가장 본받고 싶은 선수는 누구였나.
킴 클리스터스(벨기에)였다. 세계 랭킹 1위에 오른 실력도 실력이지만 상대 선수를 진심으로 대하는 겸손한 자세를 지녔다. 톱랭커들의 자부심은 때때로 거만하게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클리스터스는 언제나 인사를 먼저 건네는 등 따뜻한 선수였다.
10월 26일 올림픽공원 테니스코트에는 조윤정과 함께 현역에서 물러나는 이가 또 있었다.
이형택, 박성희, 조윤정을 세계적인 선수로 길러 낸 삼성증권 주원홍 감독이다. 주 감독은 앞으로 테니스 프로화에 온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한국 여자테니스는 현재 세계 랭킹 100위권 안에 선수가 한명도 없다.
한국 여자랭킹 1위 이예라는 세계 랭킹 192위다. 올해도 한솔코리아오픈 본선 1회전을 통과한 선수가 나오지 않았다.
조윤정은 선수들의 자기 관리 부족을 부진의 이유로 들었다. 테니스 프로화를 추진하는 주감독과 조윤정의 생각은 맞닿아 있다.
요즘 세계적 선수가 나오지 않고 있다.
한국 선수들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진다. 힘들고 아프면 금방 포기해 버린다. 강한 선수와 맞붙으면 져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코트에 들어간다. ‘꼭 이겨야겠다’는 독한 눈빛이 보이지 않는다. 테니스는 생각대로 되는 운동이다. 1위나 100위나 공을 치는 건 비슷하다.
한국 여자테니스가 부진한 이유는 무엇인가.
실력을 키우려면 강한 선수와 자주 경기를 해야 하는데 힘들고 어려운 대회에 나가려 하지 않는다. 유럽이나 미국에 가서 경쟁하지 않고 200위권 선수들이 나오는 아시아지역 대회만 돌고 있다. 큰 대회에서 수준급 선수와 맞붙으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력은 는다. 톱랭커가 되고자 하는 프로 의식이 부족하다.
중국, 일본, 대만 선수들은 세계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 나라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 깨닫는 테니스를 한다. 그래서 실력이 빠르게 향상된다. 시켜서 하는 테니스가 아니다.
투어 대회에 나가면 코치가 선수들을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라 선수들이 코치를 이끌고 나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만큼 자기 주도적으로 운동을 한다.
한국 선수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영리한 테니스를 구사해야 한다. 미국이나 유럽 선수들과 스트로크 싸움을 하면 힘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체력도 급격하게 떨어진다.
상대의 힘을 거꾸로 이용해 반 박자 빨리 때리거나 과감하게 네트 가까이 들어가 발리를 하며 경기 템포를 조절해야 한다.
조윤정은 정식으로 코치가 된 지 1주일도 안 됐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10월 26일 양구 국제주니어 테니스대회가 끝나자마자 장충테니스코트에서 열린 골드슬램컵 국제주니어 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주니어 선수에 대한 조윤정의 애정은 특별했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눈은 경기를 하는 선수와 공에 가 있었다.
랠리가 이어지고 있을 때 질문을 하면 조윤정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어느 한 선수가 득점을 한 뒤에야 대답을 했다. 말을 걸기 어려울 정도로 조윤정은 자신이 지도하는 선수의 경기에 집중했다.
눈여겨보고 있는 선수가 있나.
안양서여중 1학년 장수정(13)이다. 아직 다듬어야 할 내용이 많지만 경기를 풀어 가는 능력이 놀라울 정도여서 가끔 깜짝깜짝 놀란다.
나이는 어리지만 노련하게 공을 친다. 양구 국제주니어 테니스대회에서 18세 이하 우승을 차지했다. 준결승에서 국내 주니어 랭킹 1위 홍현휘를 꺾었고 결승에서 아유카와 마나(일본)를 이겼다.
선수 생활을 통해 깨달은 지도자 생활의 노하우가 있다면.
내가 코치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강요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친구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야 선수들이 마음을 열고 따라온다.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직 어린 선수들이라 미숙한 게 많다. 자세, 스텝 등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윙이 부드러워야 공이 잘 나가고 발이 맞아야 공을 칠 수 있다. 코트 안팎에서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도자로서 욕심이 있다면.
내가 가르치는 선수를 나보다 훨씬 뛰어난 테니스 선수로 길러 내고 싶다.
조윤정
생년월일ㅣ1979년 4월 2일
출생지ㅣ경북 안동
학력ㅣ영양초-복주여중-안동여고
프로데뷔ㅣ1997년
주요성적ㅣ1998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복식 은메달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단식, 단체전 동메달
2002년 파타야오픈 단식 준우승
2003년 오클랜드 ASB뱅크 클래식 단식 준우승
2004년 아테네올림픽 국가대표
2004년 한솔코리아오픈 복식 우승
2004년 전한국선수권대회 단식 우승
2005년 US오픈 단식 본선 32강
2005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단식 준우승
2006년 캔버라 인터내셔널 단식 준우승
김우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