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조/명
김 선 태 시인
│시인 프로필│
1960년 전남 강진 출생
199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 집?
『간이역』
『동백숲에 길을 묻다』
『살구꽃이 돌아왔다』
평론집?
『풍경과 성찰의 시학』
수상?
애지문학상, 영랑시문학상
<시인이 뽑은 대표시 5편>
딱따구리 소리 외 4편
김선태
딱따구리 소리가 딱따그르르
숲의 고요를 맑게 깨우는 것은
고요가 소리에게 환하게 길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고요가 제 몸을
짜릿짜릿하게 빌려주기 때문이다.
딱따구리 소리가 또 한 번 딱따그르르
숲 전체를 두루 울릴 수 있는 것은
숲의 나무와 이파리와 공기와 햇살
숲을 지나는 계곡의 물소리까지가 서로
딱,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벌새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 제 몸을 쳐서
날개를 지우고
공중에 부동자세로 선다
윙윙,
날개는 소리 속에 있다
벌새가
대롱 꽃의 중심中心에
기다란 부리를 꽂고
무아지경 꿀을 빠는 동안
꼴깍,
세계는 그만 침 넘어간다
햐아,
꽃과 새가
서로의 몸과 마음을
황홀하게 드나드는
저 눈부신 교감!
정靜과 동動이
동動과 정靜이
저렇듯 하나로 내통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허공의 정물화 한 점
살아있는 정물화 한
점點.
수묵산수
저물 무렵,
가창오리 떼 수십만 마리가
겨울 영암호 수면을 박차고
새까만 점들로 날아올라선
한바탕 군무를 즐기는가
싶더니
가만,
저희들끼리 일심동체가 되어
거대한 몸 붓이 되어
저무는 하늘을 화폭 삼아
뭔가를 그리고 있는 것 아닌가
정중동의 느린 필치로 한 점
수묵산수를 치는 것 아닌가.
제대로 구도를 잡으려는지
그렸다 지우기를 오래 반복하다
일군一群의 세필細筆로 음영까지를 더하자
듬직하고 잘 생긴 산 하나
이윽고 완성되는가
했더니
아서라, 화룡점정畵龍點睛!
기다렸다는 듯 보름달이
능선 위로 떠올라
환하게 낙관을 찍는 것 아닌가.
보아라,
가창오리 떼의 군무가 이룩한
자연산 걸작
고즈넉한 남도의 수묵산수 한 점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느리게 혹은 둥글게
나는 미욱하여 늦게,
아주 늦게, 네게
닿고 싶다
가장 먼 길
휘어져서, 꾸불꾸불
세상을 한 바퀴
두루 산보하고서야, 너를
지구처럼 둥근 너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때까지는 아예
조인 허리띠도 풀어버리고
귀와 눈도 닫아버리고
졸리웁고 싶다
마음조차 끄고, 꾸벅꾸벅
조금새끼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 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냐고요? 아시다시피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고 쉬는 때랍니다.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물때는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은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금새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요? 도대체 이 꾀죄죄하고 소금기 묻은 말이 자꾸만 서럽도록 아름다워지는 건 왜일까요? 아무래도 그건 예나 지금이나 이 한 마디 속에 온금동 사람들의 삶과 운명이 죄다 들어 있기 때문 아니겠는지요.
<시인의 최근 신작시 5편>
몽골시편·1 외 4편
──초원에서
몽골초원에는 어머니가 누워있다
초원의 살림살이를 떠맡은 생명의 어머니다
그 넉넉한 품속에서 모든 생명의 자식들은
풀을 뜯고 뛰어놀며 꽃을 피운다.
몽골초원에서는
풀이나 가축이나 사람이나 한식구다
서로 튼튼한 끈으로 이어져 있다
이들 중 하나라도 빠지면
초원의 질서는 사라지고 만다
빈틈이 없다.
가축들은 풀을 뜯으며 살을 찌우고
사람들은 가축을 기르며 살다 초원에 묻히며
풀들은 그 배설물이나 사체를 거름 삼아 자란다
모두가 초원에서 태어나 초원으로 돌아간다
초원은 그대로 삶과 죽음의 아름다운 현장이다.
몽골시편·2
몽골 ──게르 체험
몽골 사람들의 양을 잡는 방식은 특이하다
물이 귀해 세수도 잘 할 수 없는 이들은
물 한 방울 쓰지 않는다 요란스럽지도 않다
칼로 배꼽을 조금만 흠집낸 뒤
손을 집어넣어 혈관 하나를 끊어 놓으면 그만이다
밖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피는 배 안에 그대로 고인다)
신기하게도 양은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별 통증도 못 느낀 양 황홀히 눈을 감는다
그 다음, 입에서부터 차례로 가죽을 벗기고
배를 갈라 피와 내장을 꺼내 그릇에 담는다
아무 것도 내버리지 않는다
배설물은 초원에 뿌리고
가죽은 말려두었다가 옷을 만들거나 팔며
피와 내장은 따로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
마지막으로, 고기를 잘라 우유통에 담고
돌을 뜨겁게 달구어 넣어 밀봉한 다음
한두 시간 후 잘 익은 고기를 꺼내 먹는다
양은 자신을 길러준 사람들 뱃속에 묻힌다.
몽골시편·3
──어린 양 길들이기
몽골사람들의 어린 양 길들이기는 섬뜩하다
철이 없어 무리를 이탈한 어린 양에게
결코 벌을 주거나 매를 때리지 않는다
대신 어른 양을 잡을 때 옆에다 매어놓는다
다시 반복하면 이렇게 죽는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한 무언의 훈계이다
어른 양의 처참한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양은
공포에 질려 소리 한번 내지 못한 채 그저
사지를 바르르 떨며 털썩 주저앉고 만다
길들이기의 효과는 죽을 때까지 간다
무리의 결속력도 이렇게 해서 생긴다.
몽골시편·4
──몽골반점
초원 한가운데 있는 게르에 막 도착했을 때
나는 나의 눈을 의심하였다
오래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기다렸다는 듯
어서 오라 팔을 벌리며 웃고 계셨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렇게 똑 닮으셨을까
잠시 나는 옛날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노파는 내 손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숭늉처럼 구수한 우유 한 잔을 건네는 것이었다
노파의 몸에서 풍기는 늙수그레한 냄새가
어린 시절 외할머니와의 아득한 추억을 건드렸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핏줄이 땡겼다 그때
내 엉덩이 어디쯤 몽골반점이 다시 돋는 듯
꿈틀거렸다.
몽골시편·5
──흘레
초원에서 말 경주대회를 보다가
생전 처음 말이 흘레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발정이 난 암컷을 위한 수컷의 구애는 집요했다
암컷은 국화빵처럼 부푼 생식기를 벌름거리며
애액을 질질 흘리면서도 수컷이 마음에 안 드는지
아니면 좋으면서도 일부러 튕기는지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도망을 다녔다
칼집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장검을 뽑아든 수컷이
뒤를 쫓아 올라타며 장검을 겨눌 때마다
암컷은 여지없이 뒷발로 걷어차 버렸다
급소를 얻어맞은 수컷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수컷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한번 뽑은 장검도 거둬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열 번 이상을 반복했을까
수컷의 집요한 공세에 지쳤는지
길길이 날뛰던 암컷이 이내 고분고분해졌다
마침내 수컷의 장검이 국화빵을 찔렀을 때
처음엔 히히히힝 간지러운 소리를 내던 암컷이
나중엔 숫제 끄응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로 일대가 진동했다
순간 관중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말 경주대회는 허탈해졌다
흘레를 마친 말들은 풀밭 위를 뒹굴더니
서로를 애무하며 만족감을 표시하였다
모처럼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기보다는
야하다거나 민망스럽다기보다는
참으로 성스러운 생명의 한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