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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베드로후서 3:8-13
3:8 |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 But, beloved, be not ignorant of this one thing, that one day is with the Lord as a thousand years, and a thousand years as one day. |
3:9 | 주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 The Lord is not slack concerning his promise, as some men count slackness; but is longsuffering to us-ward, not willing that any should perish, but that all should come to repentance. |
3:10 |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 | But the day of the Lord will come as a thief in the night; in the which the heavens shall pass away with a great noise, and the elements shall melt with fervent heat, the earth also and the works that are therein shall be burned up. |
3:11 | 그때 이 모든 것이 녹아 버리리니 너희가 모든 거룩한 행실과 경건에 있어 어떠한 사람들이 되어야겠느냐? | Seeing then that all these things shall be dissolved, what manner of persons ought ye to be in all holy conversation and godliness, |
3:12 |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열망하라. 그때는 하늘들이 불에 타서 녹아 버리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도 맹렬한 불에 녹아내릴 것이나 | Looking for and hasting unto the coming of the day of God, wherein the heavens being on fire shall be dissolved, and the elements shall melt with fervent heat? |
3:13 |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도다. | Nevertheless we, according to his promise, look for new heavens and a new earth, wherein dwelleth righteousness. |
제목: 하나님의 약속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속담이 있지요.
또 이탈리아의 격언에 약속이 없는 사람은 고독한 사람이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불의한 사람이다.
나폴레옹은 약속을 지키는 최고의 방법은 약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만큼 약속이 지키기가 어렵다는 말이지요.
데일 카네기는 아무리 보잘것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한번 약속한 일은 상대방이 감탄할 정도로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
신용과 체면도 중요하지만 약속을 어기면 그만큼 서로의 믿음이 약해진다.
약속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는 것,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책임있게 실천하는 것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야할 이 세상에서는 지켜야할 정해진 규약이나 규칙들이 있어서 이를 위반한 사람들은 적절한 제제를 받게 됩니다. 또한 사람들은 개인간에 혹은 집단이나 국가간에 여러가지 약속들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관계를 발전시켜나가요. 그래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이 발생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버리지요. 그래서 나중에 가게되면 그사람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지를 않는 것이지요. 그만큼 약속은 그사람의 인격을 대변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약속을 저버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로마서 1장에 보게되면 죄의 목록이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약속을 저버리는 사람에 대한 그 죄가 나와요.
약속을 저버림으로써 신뢰를 저버린 형제는 그가 전하는 복음과 진리를 농담처럼 들리게 만들 수 있어요.
마치 롯처럼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헌신하고 결심했던 약속들을 반드시 지킬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신뢰하여 그분의 말씀을 맞길 수 있는 성도가 누구겠습니까?
바로 주님안에서 헌신하고 결단했던 그 약속들을 신실하게 이행하는 성도들이에요.
매주일 이 강단앞에서 드렸던 성도들의 헌신과 결심의 기도들이 단 하루도 안지나서 한낱 휴지조각처럼 얼마나 많이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지 몰라요. 그렇게 버려진 약속들을 모아보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을 뒤덮고도 남을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전 지구를 뒤덮었던 것처럼 쓰레기장에 버려진 약속들이 전 지구를 뒤덮지 않는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를 정도지요. 우리는 결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그렇게 배우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약속과 그 약속을 지키시는 것에 관한한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10:23절에서는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 믿음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굳게 붙들자.
약속하신 분이 신실하니까 붙들 수 있는거에요. 변덕스럽다면 붙들수가 없지요. 늘 불안하지요.
로마서 4장에 의하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씨에관한 약속을 주셨을때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오히려 견고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운데 약속하신 그것을 주님께서 이루어 줄것으로 확신을 했어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그랬어요.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나이였지만 믿음으로 씨를 잉태하는 힘을 받아서 이삭을 출산했다고 그랬어요. 히브리서 11:11에 의하면 그녀가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실하신 분으로 믿었다 그랬어요.
자! 우리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기 위해서 피난처를 찾아 나온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든든한 위로와 힘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약속들을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0절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가 되기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아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노라.
자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번도 이책에 기록된 약속들을 기분에 따라 철회하시거나 무능력으로 못지키신 경우가 없어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그 약속을 이행하셨고 지금도 이행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이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약속을 깨실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생명을 걸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 약속 역시나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죽으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그분의 약속은 절대로 깨질 수 없고 영원히 변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그 약속을 받은 우리가 해야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의심이 아니라 믿는거에요. 불신이 아니라 전폭적인 신뢰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얼마나 많이 알고있고 또 얼마나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계세요.
1. 자!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첫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고 했습니다. 자 요한일서 2:25절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여러분은 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그것을 소유했지요? 요한복음 3:36절에서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그랬어요. 아들을 믿는자는 영생을 가졌고. 성경에는 많은 약속들이 나오는데요 무려 약 32,500개의 약속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이행하는 것에 관한한 자신이 있으신 거에요. 아무리 많은 약속을 하신다 하시더라도 이행하실 수 있는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책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수많은 약속을 하셨고 또 그 약속들을 반드시 지키실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경에 나오는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대할때 어떤 마음으로 대하십니까? 마음속에 감흥이 올라오세요? 약속을 들을때. 그 약속들이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도 아닌 나에게 주어졌다는 거에 대해서 흥분이 되십니까? 기분이 막 날아갈것 같으세요. 별로 얼굴이 그렇게 안보이네요. 아니면 그저 그런 마음이세요? 어떤 기쁨도, 어떤 환희도 어떤 기대감도 없으세요? 자 그렇다면 질문을 좀 바꾸어서요 세계에서 오늘날 가장 큰 부자가 아마존닷컴의 CEO인 제프 베조스라고 그럽니다. 이 사람이, 부자가 집값폭등과 전세대란으로 힘들어하는 여러분중 누군가에게 똘똘한 집한채 사주겠다고 약속한다면 어떻게하실 것이에요. 평생 먹고 살아남을 정도의 풍족한 돈을 매달 꼬박꼬박 통장에 넣어주겠다고 약속한다면 어떻겠어요? 어떤 실력을 인정받은 유능한 의사가 돈이 없어서 질병을 제대로 치료받을 수 없는 누군가에게 또는 난치병이나 불치의 병으로 밤낮 괴로움속에서 울부짖는 누군가에게 지금 당장 치료해줄테니 바로 입원수속을 밟으라고 한다면 어떻겠어요? 그것도 무료로 치료해주겠다고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도 지금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환호성을 외칠만큼 기뻐 날뛸 것이에요. 가만있지 못하지요. 이사람 저사람 찾아다니면서 자기가 받은 이 약속에 대해 아주 만면의 미소를 띠며 줄기차게 이야기하고 다닐 것이에요. 자 이러한 약속들에 비하면 하나님의 약속들이 초라하게 느껴지세요? 어떤 흥분도 느끼지 못할만큼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세요?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 아니에요.
저는 영원한 생명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영원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성경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을 때 우리가 이제 직면하게될 저 영원의 삶은 결코 먼나라 이야기나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저는 기회가 있을때마다 설교나 강의를 통해서 저 영원의 삶은 우리가 이제 곧 직면하게될 진짜라는 사실을 성도들에게 인식시키려고 노력을 해왔습니다. 과연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거듭난 성도들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현실이겠어요? 저 영원에서 맞닥드릴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준비하고 천년왕국에서 받을 유업과 영원을 대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긴급한 그런 현실이 어디있겠어요? 자 그런데도 우리는 현재 이땅에서 직면하는 현실적인 문제들과 세상에서 추구하고 싶은 성취감 육신의 정욕들의 부합하는 현실적인 문제들, 과제들 자 그러한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저 영원한 현실과 연관한 문제들은 자주 뒷전으로 미루는 것을 보게됩니다. 재림에 대한 복된 소망이나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열망, 혼을 이겨오게하는 구령의 열정이나 진리의 지식을 전파하고 가르치려는 열심, 그리고 주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그 첫사랑이 냉랭하게 식어버려서 종교적이고 형식적인 삶을 자주 반복하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잊어버린채 믿음을 표류한채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 것이지요. 스펙을 쌓아야 되고, 어학 연수도 가야되고, 인턴 경험을 쌓아야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되고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밥도 먹는것도 줄이고 시간도 아끼고 잠도 덜자고 성공지향적인 삶을 추구하고 또 추구해야 하는 현실이고 높은 수입에 넓은 평수의 땅과 안락한 주택을 추구하고, 비싼 자동차, 정기적인 해외여행, 엘리트 자녀교육, 부와 명성, 세상적인 견지에서 그야말로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어하는 급, 세상에서 원하는 것은 모두다 성취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계속 채워도 채워지지않는 욕구를 채우기위해서 치열하게 살아야만 하는 그런 현실때문에 우리에게 다가올 영원한 현실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짜현실을 제대로 대비하라고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상급과 유업을 준비해 놓았더니 이시대에 그렇게 준비하라고 초청하지만 만은 사람들이 그러한 초청을 던져버린 것이지요.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일과 연관된 이 진짜 중요한, 이 영원한 현실을 이에대한 하나님의 초청을 너무나 쉽게 잘 짓밟아버리는 것이지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었다는 것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지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왜 받았겠습니까? 당연히 장차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영원한 삶을 실제로 누리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자 우리 앞에 영원히 사는 영원한 현실이 펼처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있든 없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런 약속은 공수표처럼 무의미한 약속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에요. 왜냐하면 저 영원에 거하시고 우주에서 가장 높은곳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곧 있으면 저 영원으로 돌아갈 것이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것이고 말그대로 영원한 삶 그 자체를 영원히 누리며 살게될 것이에요. 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셋째하늘로 돌아가실 때 우리에게 뭘 약속하셨습니까? 자! 요한복음 14:1~3을 찾아보겠습니다.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으라. 2나의 아버지 집에는 많은 저택들이 있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리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 3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내가 있는 그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무궁토록 살게될 영원한 거처, 새예루살렘 안에있는 영원한 저택들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곳에는 전세대란 없어요. 가격폭등 없읍니다.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해 주셨겠지요. 자! 그런데 우리는 월세나 전세집 분양받은 집값이나 땅값 정부의 부동산대책에 대해서는 열변을 토하는데, 우리가 약속받은 이 영원한 거처에 대해서는 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지요? 왜 이렇게 그걸 이야기하는데에 인색한 것이지요?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그렇게 시답지 않은 약속인가요? 아직도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사도 요한의 고백에 귀를 기울이셔야 됩니다. 초림당시에 아주 가까이에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 영원한 생명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었던 요한의 고백을 진지하게 숙고하셔야 되요. 1태초부터 계셨고, 우리가 들었으며, 우리 눈으로 보았고, 주목하여 살폈으며, 우리 손으로 직접 만졌던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라. 2그 생명이 나타나시매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였으며 너희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보여 주었으니, 그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우리에게 나타나셨느니라. (요한일서 1) 유월절 마지막 만찬에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있었습니다. 그 가슴 안쪽에는 다섯번째 갈비뼈로 보호받고 있는 살아있는 심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심장은 인간의 몸에서 펌프처럼 작용하는 장기입니다. 끊임없이 피를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피를 내보내면서 혈관들을 통해 이피를 온몸으로 보내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온몸으로 내뿜었던 피는 어떤 피겠어요? 공인 의사였던 누가는 그가 기록한 사도행전 20:28에서 그피는 인간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였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의사가 한 말이에요.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피를 그분의 온몸으로 이동시키기 위해서 그피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근원이 바로 그 심장에 귀를 바짝대고 주님을 믿는 모든 성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그피에 힘찬 고동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무슨 환청을 들은게 아니에요. 꿈을 꾼게 아니에요. 환각증세에 빠진 것도 아닙니다. 눈으로 직접 보고 듣고 손으로 직접 만지고 경험할 수 있는 그 분명한 현실속에서 끊임없이 고동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의 심장소리를 들은 것이에요. 그 심장소리를 듣는 가운데, 그 순간 사도 요한은 창세기 1장 이전으로, 저 영원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요한 복음을 기록할때 첫두구절에서 무어라고 말씀해요?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그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 이것이 바로 현실이었단 말이에요.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을 손으로 만졌단 말이에요. 이것은 결코 어떤 상상속에 나오는 꿈의 그런 허황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수천억개의 별들과 은하들를 창조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다는 이 위대한 현실을 숙고해 보셔야되요.
그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주시기 위해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낮아지신 그분의 풍성한 은혜와 자비를 생각해 보셔야 되요. 그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의 현실은 절망과 낙담, 불안과 좌절, 체념과 비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비참한 염세주의자로 살던지 아니면 허망한 낙관주의로 살던지 그렇게 했을 것이에요.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은 창세기 1:1절 이전부터 존재했어요. 지금도 있고 또 요한계시록 22장 이후에도 계속 존재할 것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이 영원한 생명을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신 것이에요.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라(요일5:11).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그 어떤 누구라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에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기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은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에요. 이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이에요. 우리는 그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되요. 그것은 잊게되면 영원한 삶에 대한 현실감각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2.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셔야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그것은 나의 것이라고 믿고 주장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다같이 마태복음 21:21, 22절 찾아보겠습니다. 21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에게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무화과나무에 일어났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이 산더러 ‘옮겨져 바다에 빠지라.’고 말하여도 그렇게 되리라. 22또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너희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시더라.
저는 이 구절을 읽을때마다 늘 생각나는 한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유명한 책을 쓴 저자에요. 그가 자주 인용했을 것입니다. 이 성경구절과 관련하여 그는 자기가 격었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한번은 신학대학에서 함께 공부하는 친구 하나가 내 방에 불쑥 찾아와서 무언가 기쁨이 섞인 얼굴로 나한테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 정말로 이 말씀을 믿는가? 거듭난지 얼마안된 이 친구는 마태복음 21:22절 이 말씀을 읽어주면서 희열에 찬 얼굴로 다시 물었습니다. 이 말씀을 정말로 믿냐 말일세.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너희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정말 대단한 약속이지 않아? 왜 나는 지금까지 이 약속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 많이 기도하지 않는지 모르겠어. 이 친구가 방을 나간뒤, 그 저자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어요. 그동안 이 구절을 그런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이후로 이 저자는 깊은 생각끝에 무한한 능력의 삶에대한 비전을 품게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믿음과 기도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 일을 계기로 기도생활에 큰 변화가 나타났고, 기도에 관한 책 한권을 쓰게됩니다. 여러분이 잘 들었다시피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원래 이 사람의 이름은 한동안 무명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수년전에 그의 이름이 엘버트 리처드슨임이 발혀졌습니다.
자! 기도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땅에서 직접 확인하고 겪험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모든 복과 약속의 성취는 기도를 통해 전달되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살아있는한 기도를 해야되고 오직 기도하는 동안만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에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약 3만개이상의 약속들을 성경을 통해 해 주셨어요. 또한 그 약속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우리의 진지한 기도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죽은듯한 침묵속에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많은 성도들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괴로워 할줄만 알지 기도의 자리로 나오지 않습니다. 각종 현실적인 문제들에 짖눌린채 실의에 빠지고 신음만 할줄알지 그런 걱정과 염려 마음의 혼란과 두려움을 일시에 떨처버리기 위해서 기도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죄책감으로 쉽게 낙담을 해도 기도를 통해 그 절망감과 낙심을 치료할 생각을 전혀 안하는 것이지요. 상황에 대해서 불평불만만 쏟아놓을뿐 그것을 위한 근본적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는거지요. 마음이 괴롭고 힘들다고 포기하는 성도는 많아도 괴롭고 힘드니까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장하며 기도해야겠다는 성도가 너무나 적은 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시편 62:5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느 때나 그를 신뢰하라. 너희 백성들아, 너희 마음을 그분 앞에 쏟아 놓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시로다. 셀라. 그랬어요.
성도가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침묵을 지키면 하나님도 침묵을 지키십니다. 그 성도의 생애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에요.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너희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이 약속이 하잖게 여겨지십니까? 아니면 약속은 죠지 뮬러같은 몇몇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야고보서 5:17절에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성정에 속한 사람이지만,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삼 년 육 개월이나 땅에 비가 오지 않았다고 그랬어요. 우리가 자주 회자하는 기도의 사람들의 그런 성정(passions)이나 우리의 성정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판단입니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기도했고 우리는 안한 것이지요. 그들은 간절히 기도했고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했지만 우리는 그렇게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들은 집요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했지만 우리는 그렇게하지 않은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많은 경우에 죽은 시신이나 얼음장처럼 냉랭한 삶을 사는 것이에요.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강건함의 척도는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성도는 기도없이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요. 예수님을 닮아갈수도 없습니다. 주님과 참다운 교제를 나눌수도 없습니다. 성도와 주 하나님과의 관계는 적절한 의사소통이 없이는, 기도가 없이는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누군가가 잘 이야기했듯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인간이 할수있는 가장 고상하고 가장 숭고한 일이에요. 무엇보다도 가장 실제적인 일이에요. 기도할 것인가? 염려할 것인가? 기도의 삶이 될것인가? 염려로 인해서 질식당해 죽을것인가? 선택은 개인의 몫이에요. 그러나 이 숭고하고 실제적인 일, 이 기도에 승부를 걸었을 때 여러분은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가장 강력하고 능력있는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이에요. 하지만 그것을 포기할때 가장 가련하고 비참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기 원한다면 기도하세요.
1900년대 중반 미국 뉴욕시에서 시장을 세차례나 역임한 피요넬로 라과디아라는 사람이 있었읍니다. ~~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라과디아 판사보다 더 위대한 판사이자 더 위대한 변호인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관련된 모든 법정사건들에 있어서 지옥행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를 대신해서 그 죄값을 대신치르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심지어 지옥에까지 다녀오셨어요. 하지만 여기서 끝난게 아니에요. 영원한 생명을 값없는 선물로 주셨고 영원한 삶을 잘 대비할 수 있도록 영원한 말씀인 성경도 주셨어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혹이라도 부족할까봐 기도응답에 관한 위대한 약속도 해주셨어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자 이 말씀은 위대한 약속이 아닐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아들을 내어주셨어요. 자 그런 마당에 우리에게 그외에 무엇인들 값없이 왜 안주시겠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실 수 있는 최상의 것 내지는 최후의 것을 아끼지 않고 주셨기에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구한들 하나님은 전혀 아까워하지 않으시는 것이지요. 영원한 생명 외에 주어지는 나머지 모든 것들은 덤으로 주어진 것들입니다. 다만 그러한 덤을 우리걸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뭐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며 기도할때 가져올수 있는 것이에요. 염려하지 마십시요. 불안해하지도 마세요. 포기하지도 마세요. 하나님만 믿으십시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하시고 절대 변하지 않으세요.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세요.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행하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신실하심에 따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고 또 도우세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하신다는 이 약속을 붙드셔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영광 가운데서 그의 풍요함을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것이라(빌4:19).는 이 약속을 붙드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실거라고 약속하셨어요. 새로운 마음, 정직하고 담대한 마음, 부드럽고 용서하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언제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면 죄들을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성령의 열매를 약속하셨고, 평화를 약속하셨어요.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약속하셨어요. 우리를 두려움과 고난 가운데서 건져내겠다고 약속하셨어요.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겠다고 하셨어요. 모든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지혜를 약속하셨고 시험에서 건지겠다고 약속하셨어요. 건겅과 치유를 약속하셨고, 위험과 해로움으로부터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얼마나 더 이야기를 해야됩니까? 얼마나 더 그 약속들을 내가 여기에서 나열을 해야 되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 약속을 믿느냐에요. 이 위대한 약속앞에 반응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 약속을 주장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삶에는 더이상 기대하고 소망할 것이 없게됩니다. 희망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고 기도했을때 바로 그때 희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3.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세번째로 우리의 구주께서는 다시오시겠다는 그 약속을 더이상 지체하지는 않을거라고 하셨어요. 히브리서 10:37절을 찾아보겠어요. 조금 있으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야고보서 5:8절에서도 너희도 인내하며 마음을 견고케 하라. 주의 오심이 가까움이라. 그랬어요. 성경의 마지막 책, 마지막 장,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고 3번이나 말씀하셨어요.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마지막 약속은 재림에 관한 약속이고 마지막 기도 역시나 재림에 관한 기도입니다. 특히 서두에 이야기했듯이 성경에 나오는 32,500개 약속중에서요 무려 삼만개정도의 약속이 바로 재림에 관한, 재림과 연관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어디에 촛점을 두고 있는 지 알수있는 대목입니다. 3만번 이상을 약속하셨는데 안지키시겠습니까? 하지만 베드로후서 3장 4절에보니까 이러한 약속들을 조롱하면서 정욕을 따라 살기 원하는 자들이 이렇게 물어요. 그가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성경에 있지요. 3만번 이상이나 있지요. 그들은 이 말씀하신 약속들을 보지 못하는 눈먼 소경들입니다. 사탄의 연막에 눈이 가려진 것이지요. 보인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사실을 고의로 잊으려는, 왜 잊으려 하겠어요? 정욕대로 살고 싶으니까? 더 죄짓고 싶으니까. 주님이 오시면 더이상 죄를 지을 날이 없으니까.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세속적인 탐욕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영원히 즐기고 싶은 마음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에 미련을 두고 그들 나름대로 세상을 바꿔보려하고 심지어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세상을 위해 일합니다. 그들은 결국 교회의 휴거때 땅에 남겨집니다. 에수님의 재림때에는 지옥으로 던져집니다. 백보좌심판 때에는 영원한 불못으로 던져집니다.
한편 주님께서 속히 오시겠다는 이 약속에 비추어볼때 웬지 주님의 약속은 인간적인 견지에서 더딘것처럼 보일때가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에 대해 베드로후서 3:9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거에요.
한번은 어떤 목사가 주일 설교에서 휴교에 관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날 엄마와 함께 예배에 참석해서 이 설교를 들은 6살짜리 꼬마가 그날 저녁식사때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만일 예수님이 오늘 오시면 아빠는 이 땅에 남겨지는건가요? 아빠는 아직 구원받지 못했어요. 이 질문에 엄마는 모른척하고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자 아이가 또 물었어요. 엄마, 예수님이 오늘 오시면 아빠는 뒤에 남는건가요? 그러자 참다못한 남편이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이 아이가 도데체 무슨말을 하고있는 거야? 아! 오늘 목사님이 재림에 대한 설교를 했는데 예수님이 오실때 믿는 사람과 믿지않는 사람의 분리가 있을 거라고 그랬어요. 이 아이는 만약 예수님이 오늘 오시면 우리는 함께 올라가지만 당신은 이땅에 남게되는지? 아니면 우리와 함께 가시는지? 그걸 알고싶은 거에요. 그러자 이 남자가 화를 냅니다. 도데체 교회에서 내 아이에게 뭘가르친거야? 남편은 곧바로 교회 목사에게 전화를 겁니다.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냐고 따졌어요. 화를 내고 앞으로는 이 아이를 교회에 안보내겠다고 호통을 첬읍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어요. 근데 이 아이가 다시 염려가 되었는지 잠을 자려다가 다시 일어나서 불을 탁 키고 엄마에게 또 묻습니다. 엄마,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는 아빠를 남겨두고 떠나야 하나요? 그러자 아빠가 또 화를 냈습니다. 잠이나 자. 야단을 쳤어요. 아이는 누웠어요. 하지만 또 궁금했어요. 그러자 엄마에게 작은 목소리로 이번에는 엄마 예수님이 오시면 우린 아빠를 남겨두고 떠나야되요? 그 다음날 월요일 이었어요. 아침이었는데 이 남편은 일주일동안 출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날 하루종일 아무일도 못했어요. 아들이 했던 말이 그의 마음속에서 계속 맴돌았습니다. 만일 오늘밤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는 아빠를 남겨두고 떠날건가요? 그는 그날 밤 아무일도 하지 못한채 호텔로 돌아왔어요. 잠을 못잤습니다. 밤새 이리저리 뒤척였어요.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는 그의 어린 아들의 질문이 맴돌았습니다. 그다음날 화요일 이었습니다. 여전히 아무일도 할 수 없었어요. 출장을 포기해야 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를 잡았어요. 그리고 아내에게 자기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목사님께 전화했어요. 그 다음날 수요일에 남편과 함께 목사님께 상담하러 가도 좋은지 물었습니다. 다음날 목사님을 만난 남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미칠 지경입니다. 저는 오늘밤 주님이 오시면 이땅에 남겨질까 두렵습니다. 저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고 싶습니다. 그렇게해서 이 아버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 마침 침례를 받을 수 있는 물도 딱 준비되어 있어요. 침례식도 가졌습니다. 목사님이 그 아빠를 물속에 담갔다가 일으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설명했을때 그모습을 지켜보던 여섯살짜리 이 아이가 회중을 바라보면서 기쁜 얼굴로 이렇게 외칩니다. 오늘 예수님이 오시면 저는 아빠와 함께 올라갈거에요.
베드로후서 3:15절에서는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생각하라.고 했어요. 자! 모든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지금 누군가의 구원을 오래 참으시면서 그분의 재림을 잠시 지체하고 계신줄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잠깐 지체되는 것이지 약속이 취소된건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중에는 마치 약속이 취소된 것처럼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잠깐 지체되는 기간을 죄를 짓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되요.세상일에 파묻혀사는 기회로 삼아서도 안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 잠깐 지체되는 이기간을 육신적으로 사는 성도들로 하여금 제대로 신실하게 준비하라는 그 경고로 주는 메세지일수도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제대로하라고 기회를 주신걸 수도 있습니다. 만일 오늘 주님이 안오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좀더 신실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설교자 딘 알포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만큼 우리 자신이 더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고 우리의 생각을 셋째하늘을 향해 한차원 더 높게 해주며 또한 죄인들을 향한 커다란 연민을 발휘하게 해주고, 정결하고 고상한 소망을 갇도록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랬습니다.
재림에 대한 약속만큼 고상하고 위대한 약속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나오는 다른 어떤 약속보다도 재림에 관한 약속을 더 굳게 붙들고 살아야 됩니다. 재림을 고대하며 사는 성도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에요.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잖아요. 또한 그분이 오시면 우리의 썩을 몸 죽을 몸이 주님의 영광스런 몸처럼 변모가 되잖아요. 어떤 성도는 이렇게 말해요. "나의 신앙생활을 돌아볼때 좀 잘못지낸것 같애. 주님을 위해 한 일이 별로 없네. 그러니까 난 지금 들림받을 준비가 안되있어. 그래서 주님께 속히 오시라고 도저히 기도할 수 없어."
하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재림에 대한 강한 열망을 오히려 더 질식시킨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종교적인 의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게으른 종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이 그동안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주님이 오셔서 사랑하는 누구야 떠나자고 했을때 "저는 준비가 안되었는데요." 그렇게 말할 수 없거든요. 그것은 마치 평상시에는 빈둥대다가 꼭 시험전날에만 밤을 세우겠다고 설처대는 그런 학생과 똑같은 것이지요.
주님이 더 늦게오시면 주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아니면 죄를 더 많이 지을 것 같습니까? 죄를 더 많이 짓게 되어있어요. 빨리 오셔야 되요. 오히려 이 세상에 오래 남아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주님을 위해 일할 기회보다 죄를 지을 기회가 더 많아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속히 이 천한 육신의 장막을 빨리 벗어야 되요. 분명 주님은 이제 더이상 지체하지 않을 겁니다. 천성에 가는 길이 무척 고달프고 힘들지라도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어요. 조금만 더 견디시길 바랍니다. 이제 곧 우리의 믿음의 경륜은 끝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 끝날것입니다. 죄와 세상의 유혹과의 싸움 끝납니다. 지긋지긋한 현실적인 문제와의 처절한 사투 끝날 것이에요. 고난, 끝납니다. 질병, 끝날것이에요. 좌절, 낙심, 사람과의 갈등, 누군가에 실망, 상처, 상실감 모두가 끝날 날이 오는 것이지요. 조금난 있으면 조금만 있으면 견디면 되는 것이지요.
결론을 맺겠습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이에요. 그리스도의 향기가 배어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편지에요. 베드로후서 3:12,13절에서는 그분의 약속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2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열망하라. 그때는 하늘들이 불에 타서 녹아 버리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도 맹렬한 불에 녹아내릴 것이나 13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도다. 자!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에게는 이 날이 심판의 날이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움으로 이 날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고대하고 열망해야될 날입니다. 찬송가 427장 "내 영혼 평안해"라는 이 찬송 4절 가사에 보게되면 "주 공중에 흰구름타고 올때 큰 영광과 나팔소리 주 재림해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없겠네." 라고 했어요. 성도들은 이날을 고대하고 열망하셔야 됩니다. 새하늘들과 새땅을 기다리셔야야 됩니다. 특별히 교회시대에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영원한 거처가 예비되어 있어요. 그날을 고대하고 열망해야되요. 이 열망은 밤이 깊도록 파수를 보는 파수꾼이 아침이 밝아오기를 고대하는 그런 열망이에요. 한 남편에게 정혼한 순결한 처녀가 그 신랑이 오기를 고대하는 그 열망인 것이에요. 너무나 간절해서 머무나 간절해서 심장이 터져버릴것같은 그 열망인 것이에요.
영국의 궁정목사 파라 목사가 있었어요. 이 사람은 빅토리아 여왕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어요. 한번은 왕궁에서 어떤 설교자가 재림에 관한 설교를 했어요. 이 설교를 들은 이후에 빅토리아 여왕은 옆에 있던 이 궁정목사 파라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랬소. 그때 이 목사가 묻습니다. 왜 폐하께서는 그렇게 열렬한 갈망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시는 겁니까? 그러자 빅토리아 여왕이 깊은 감동으로 여왕다운 면모를 빛내며 이렇게 대답해요. 왜냐하면 나의 왕관을 그분의 벌아애 내려놓기를 너무나도 너무나도 열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랬어요. 여러분에게도 이 러한 열망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으세요? "폭풍치는 요단강 뚝에 나 서 있노라. 아름답고 복된 땅 카나안을 소망의 눈으로 바라보리. 그땅에 나의 모든 유업이 있도다." 라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계시는 셋째하늘을 갈망하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고백이에요.
우리 모두는 이제 이땅에서의 마지막 여행을 남겨둔 사람이에요.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순례의 길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에요.우리가 싸워야할 믿음의 선한 싸움도 곧 끝나게 되어 있어요. 다만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곧 끝날, 우리의 짧은 인생 여정속에서 신실하고 헌신적인 섬김을 원하신다는 거지요. 그렇게 할때 신실하고 헌신의 섬김을 보일 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친히 약속하십니다. 영광의 비중을 이루는 풍성함으로 우리에게 보상을 하시는 것이에요. 그러한 약속을 갈망한다면 우리 역시 사도요한처럼 이렇게 외쳐야 됩니다. 이런 일들을 증거하신분이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내가 속히오리라 하신다. 아멘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이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