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나는 대한민국
너 랑 나 랑 우 리 두 리 하 나 되 는
한국나다나엘선양회
<목양회><선교회><성교회><친교회><학교회><연구회><상담소>
<기도회><평사모>(가정)(학교)(직장)(교회)(병원)<독서회><출판사>
CCCC : OXCA : CICA : UNIC
Corea Canon Christ Church
Cancer Cancel Councel Center
民立 O군사관학교
<한국민총합학교>
성경일기교육학회
<(성경쓰기+일기쓰기)운동본부>
1년365일오늘의역사<말씀>출판사
한국인재활용상담센터
국민소통운동본부
<(국가원수사랑+자아초월치유)상담소>
설립자(대표) 김 평 탁 목사
경기평택시통복동161-3(우편번호 450-040)
전화(031)692-3650 Cp 017-727-3863
나와내집 으로부터 나아가서 온세계로 성경일기 재림기독 성교사역
성경사회 총합국민 교육사역 동서내외 남녀노소 건강생명 자아초월
학사과정 석사과정 박사과정 목사과정 장로과정 권사과정 교수과정
교장과정 교감과정 교무과정 교사과정 교관과정 의사과정 율사과정
†하나님이여 내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오늘, (시51:10)
여기서,
지금,
곧,
바로
내<U&I)가 해야 될 가장 중요하고도 긴급한 일은 무엇인가요?(히3:13)
당신 ! 낫고자 하십니까?
<건강문제 ! 가정문제 ! 직장문제 ! 교육문제 ! >
<내일문제 ! 미래문제 ! 노후문제 ! 사후문제 ! >
1 : 몸과 마음의 상태는 어떠신지요?
2 : 행복한 결혼<가정>생활중 입니까?
3 : 직장 <경제문제>는 만족하세요?
4 : 공부는 더 잘 하곺지요?
소통+대화+상담+토론을 통해<인생>문제를 해결합시다.
<전화><통화><대화>로<소통><숨통><교통><대통><영통>을 합시다
<<1년 365일 24시간>>
8월 20일
오늘의 말씀
① 시편 20장 전문
|
1. |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
|
|
2. |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
|
|
3. |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
|
|
5. |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
|
|
6. |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
|
|
7. |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
|
|
8. |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
|
|
9. |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
|
② 잠언 20장
○ 의인이 가져야 할 행실
|
1. |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
|
|
2. |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 |
|
|
3. |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
|
|
4. |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찌라도 얻지 못하리라 |
|
|
5. |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찌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잠18:4 |
|
|
6. |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눅18:8 |
|
|
7. |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
|
|
8. |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 잠16:10 |
|
|
9. |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 |
|
|
10. |
한결 같지 않은 저울 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
|
|
11. |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 마7:16 |
|
|
12. |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 |
|
|
13. |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에 족하리라 |
|
|
15. |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 |
|
|
16. |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잡힐찌니라 |
|
|
17. |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
|
|
18. |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찌니라 눅14:31 |
|
|
19. |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찌니라 |
|
|
20. |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유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잠28:20 |
|
|
21. |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
|
|
22. |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
|
|
23. |
한결 같지 않은 저울 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 잠20:10 |
|
|
24. |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16:9, 렘10:23 |
|
|
25. |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 |
|
|
26. |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 하며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리느니라 |
|
|
27. |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
|
|
28. |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
|
|
29. |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 |
|
|
30. |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
오늘의 역사
① 을미사변(乙未事變) 발발(1895) :〔원인〕청․일․러시아 등 3국
간섭으로 인한 친러 세력의 대두와 일본 세력이 약화됨을 두려워한 일본은 퇴세를 회복 하고자 친러파 중심의 민씨 일파를 제거하려 하였다.
〔경과〕조선에 친러적 경향이 높아짐을 못 마땅하게 여긴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개국 504년(1895) 8월에 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 낭인(浪人)과 군인을 이끌고 궁중으로 쳐 들어와 민비를 죽이고 친러파를 내쫓았다.
〔결과〕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 내각을 조직하고 유길준(兪吉濬)․서광범(徐光範) 등의 친일파를 등용하였으니, 이를 「을미사변」이라 한다.
[명성황후 시해](1895) ; 일본의 주한공사 미우라는 폭도들을 동원해 명성황후를 살해합니다.
1895년 오늘의 일입니다.
"을미사변!"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던 일본이 배일정책을 추진한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저지른 만행입니다.
폭도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에 불을 지르는 야만적 행동을 합니다.
명성황후의 당시 나이는 마흔 넷!
시해된 후 폐위돼 서인으로 전락한 명성황후는 2년후인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집니다.
명성황후의 장례식은 시해 2년뒤인 1897년에 치뤄집니다.
② 경부선 철도 기공(1901) : 철도만큼 많은 사람과 화물을 정확하고 안전하게 운반하는 교통수단이 또 있을까.
한반도를 넘어 대륙 진출을 꿈꾸던 일제에 철도가 꼭 필요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1899년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이 완공됐지만 일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 건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일제는 1880년대 중반부터 지형탐사를 시작했고, 1896년에는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조선 민중은 저항했다.
측량 기계를 짊어진 일본인이 나타나기만 하면 “땅 뺏어가는 측량꾼이다, 쫓아내라”며 고함을 질렀다.
일본인 측량 기술자들은 장사꾼이나 나그네로 가장하고 비밀리에 측량을 해야 했다.
대한제국 황실도 경부선 건설에 반대했다.
고종은 1896년 두 차례나 일제의 경부철도부설청원서를 거부했다. 그러나 나날이 약해지던 대한제국은 일제의 집요한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1898년 대한제국은 일제에 경부선 건설을 허락하는 경부철도합동조약을 체결했다.
1901년 8월 20일 오전 11시. 마침내 서울 영등포에서 경부선 철도 기공식이 열렸다.
경부선 건설은 조선 민중의 피와 땀으로 이뤄졌다.
일제는 헐값에 토지를 수용했고, 조선 백성들을 강제 부역에 동원했다.
일꾼들에게는 품삯 대신 군용표(軍用標) 한 장으로 때웠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은 세계 철도 역사상 가장 적은 비용으로 완전 개통됐다.
개통 당시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13시간 45분이 걸렸다.
그해 9월에는 부관(釜關) 연락선을 매개로 경부선과 일본철도가 연결됐다.
1906년에는 경의선이 개통돼 일본에서 중국 국경까지 가는 길이 열렸다.
1945년 일본의 패망 전까지 철도를 통해 일본에서 군인과 군수물자가 한반도와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곡물과 각종 자원들은 일본으로 흘러갔다.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철도가 우리나라 사회의 근대화에 기여한 측면도 있다.
광복 후 한국은 일제가 건설한 철도망을 이용해 사람과 자원을 수송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루기도 했다.
철도는 어떤 목적으로 쓰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경부선의 불행했던 역사는 과거의 기억으로 끝나기를….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2007)
③ 서울교외선 개통(1963) : 서울의 외곽지대를 도는 순환철도 '서울교외선'이 1963년 오늘 개통됐다.
이 순환선은 1961년 능곡-가릉 구간이 1차 개통됐지만 가릉-의정부 구간은 미군 군사시설 때문에 연결이 지연돼다 1963년 모든 구간이 개통됐다.
서울 서부역을 기점으로 경의선의 신촌과 수색을 경유해 능곡에서 본래의 능의선으로 분기한 뒤 다시 의정부에서 경원선의 성북과 청량리를 거쳐 용산부터는 경부선을 이용해 서부역으로 귀환하는 총연장 82.6km의 순환선이다.
개통 당시 한 번 순환하는 데 2시간 10분이 소요됐으며 하루 14편을 운행해 4천 명 안팎의 승객을 실어 날랐다.
서울교외선은 1970년대 들어서는 장흥, 송추 등으로 MT나 데이트를 가는 교통편으로 널리 이용됐다.
④ 일진회(一進會) 조직(1904) : [요약] 대한제국 말에 일본의 한국 병탄정책(倂呑政策)에 적극 호응하여 그 실현에 앞선 친일단체(1904∼1910).
설립연도 1904년
구분 친일단체
소재지 서울
설립목적 친일적 민의의 필요
주요활동 대한제국 탄핵문제(政府彈劾問題) 제출.
[본문] 1904년 일본이 고문정치만으로 한국정부를 간섭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친일적 민의(民意)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통역이던 송병준(宋秉畯)과 구(舊)독립협회의 윤시병(尹始炳) ·유학주(兪鶴柱) 등이 1904년 8월 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가 8월 20일 일진회로 고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여 발족하였다.
이 단체는 ① 왕실의 존중,
② 인민의 생명 및 재산 보호,
③ 시정(施政)의 개선,
④ 군정(軍政) ·재정(財政)의 정리 등
4대 강령을 내세우고 국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단발(斷髮)과 양복차림으로써 부일(附日)의 결심을 나타내게 하고 문명의 개화를 급격하게 서둘렀다.
처음에는 서울 지역만을 중심으로 하여 지방에는 그 세력을 뻗치지 못하였으나 지방세력으로서 동학당(東學黨)의 친일세력인 이용구(李容九)의 진보회(進步會)와 같은 해 12월 26일에 합동하여 13도총회장에 이용구, 평의원장(評議員長)에 송병준이 각각 취임하였다. 1905년 11월에 개최된 총회에서는 회장 이용구, 부회장 윤시병, 지방총장 송병준, 평의원장 홍긍섭(洪肯燮)을 선출하여 일본인 고문 모치츠키 류타로[望月龍太郞]와 함께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을 10여 일 앞두고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위임함으로써 국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복을 누릴 수 있다’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한편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인 1907년 5월 2일에는 정부탄핵문제(政府彈劾問題)를 제출하여 국채보상운동으로 야기된 모든 사태가 구한국 정부의 잘못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같은 해 7월 18일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양위하게 되고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은 일진회원들을 토살(討殺)시키고 일진회 지부 및 그 기관지인 국민신보사를 습격 파괴하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哈爾濱]에서 암살된 이후부터 일진회의 매국행위는 더욱 가열되어 국권피탈안을 순종에게 몇 번씩 상주하기도 했다.
이에 중추원 의장 김윤식(金允植) 등은 송병준 ·이용구 등의 처형을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진회는 1910년 8월 22일 조약이 체결된 후 9월 26일 친일적 소임을 다하고 해체되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EnCyber.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⑤ 연극배우 추송웅의 모노드라마 '빠알간 피터의 고백' 공연(1977) : 연극배우 추송웅이 데뷔 15년을 자축하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카프카의 산문 '어느 학술원에 제출된 보고서'를 토대로 한 모노드라마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그는 이 연극 한편으로 우리의 영원한 '빠알간 피터'가 됐다.
추송웅의 신화를 만든 '빠알간 피터의 고백'은 그의 표현대로 '원숭이를 몸 속에 넣는 동화작업'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탄생했다.
창경원 허락을 받아 원숭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는 우여곡절 끝에 추송웅은 원숭이와 사람을 구분할 수 없는 '피터'로 변신했다.
그는 이 연극으로 '한국 현대사에 신화 탄생'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아내의 곗돈 75만원을 쏟아부어 만든 '빠알간 피터'는 1년간 163회나 공연해 8만5천명을 끌어들였다.
추송웅은 '빠알간 피터의 고백'으로 482회 15만2천명, 1인 6역을 맡은 '우리들의 광대'에 512회 23만5천명을 모아 '1000회 모노드라마 출연, 40만명의 관객 동원'이라는 전무후무한 모노드라마 출연기록을 세웠다.
'빠알간 피터의 고백'은 그의 아들 상록에 의해 그의 15주기에 맞춰 문을 연 소극장 '떼아뜨르 추'에서 2001년 3월 13일부터 공연되어 그를 기렸다.
⑥ 노천명 시비 : 1957.8.20 건립.
묘비 겸 시비.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 천주교 묘지 소재.
전면에는 ‘노천명지묘’, <베로니가>, 후면에는 <고별> 의 8, 9연이 새겨져 있다.
⇨9월 2일.
⇨6월 16일.
⑦ 대입 수능 첫 실시(1993) : 베이징 올림픽이 어느덧 종반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선수단이 연일 전해오는 승전보에 8월의 무더위와 일상의 피로를 잊고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기에 국민은 한동안 행복했다.
그러나 올림픽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사람도 있다.
11월 13일 실시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봐야 하는 수험생들이다. 스포츠 TV 중계를 보고 싶은 유혹을 참고 공부에 열중해야 하는 수험생의 고충은 짐작할 만하다.
교과지식 중심으로 실력을 평가하던 대입 학력고사가 1993년 고등 사고능력 측정에 역점을 두고 통합교과 출제 형식의 현행 수능으로 전환한 지 2008년 올해로 15년이 됐다.
1993년 무더위가 한창이던 8월 20일 첫 수능이 실시됐다.
고교 정상화의 기치 아래 기대와 우려 속에 치러진 첫 수능이었던 만큼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당산중 교사들은 시험 전날 ‘매미 사냥’을 벌였다.
처음 실시되는 듣기평가 시험 시간에 혹시 매미가 울어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다른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수험생들의 학부모도 교육부에 전화를 걸어 매미 대책을 촉구했다.
하지만 다행히 시험 당일 외국어 듣기평가 시간에 보슬비가 내리면서 매미들이 일제히 울음소리를 그쳐 항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외국어 듣기평가 문제를 녹음하는 데도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교육부는 국내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으며 강의 중인 외국인 남성과 10년째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외국인 여성을 녹음자로 선정했다.
그런데 보안 유지 때문에 출제기간 동안 연금을 당한다는 말에 이들이 손사래를 치며 거절해 교육부가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수능 첫해에는 8월과 11월 두 차례 시험을 실시한 까닭에 시험장 주변 분위기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8월 시험 때는 새벽부터 시험장 앞에 격문을 붙이고 따뜻한 차를 나눠주며 구호를 외치던 수험생 후배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1차 수능은 쉽게 출제됐으나 3개월 뒤 치러진 2차 수능은 어렵게 출제됐다.
난이도가 일정하지 않고 ‘온탕’과 ‘냉탕’을 오간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한 해 2회 수능’이 위기에 처했다.
논란 끝에 다음해 2월 교육부는 수능을 1년에 한 차례만 실시하기로 하고 시험일도 11월로 옮겼다.
이에 따라 수능 시험장 앞 풍경도 다시 이전으로 돌아갔다.
(이현두 기자 ruchi@donga.com.2008)
⑧ 소련군 체코 침공(1968) : 1968년 오늘 !
소련군이 탱크를 앞세워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합니다.
바르샤바 조약군도 가담한 30여만명의 소련군!
침공한지 12시간도 안돼 체코의 수도 프라하 등 체코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합니다.
소련은 체코공산당 지도부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견했다고 주장합니다.
<프라하의 봄>으로 불린 체코의 자유화 운동은 소련군의 침공으로 물거품이 됩니다.
1956년 헝가리에 이어서 1968년 오늘 또다시 소련군은 무력으로 자유화 운동을 탄압합니다.
소련군의 탱크에 맞서 육탄전을 벌인 프라하의 시민들!
신문과 방송 등 매스컴은 지하로 들어가 반소 활동을 폅니다.
세계 각국은 물론 서유럽의 공산당들도 소련의 체코 침공을 강력히 비난합니다.
소련군은 자유화운동 지도자인 두브체코 공산당 당수와 체르니크 총리를 모스크바로 강제 연행합니다.
침공 사흘 뒤인 8월 23일 체코의 스보보다 대통령은 소련의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을 만나 언론자유와 복수정당제 등의 내용이 담긴 개혁조치들은 포기하는 데 동의합니다.
소련은 두달 뒤 열린 체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통해 친소 세력들을 등용함으로써 체코의 자유화운동 불씨를 완전히 꺼버립니다.
*****침공한 소련군의 전차 앞에서 "나를 쏴라" 외치며 서있는 프라하 시민
소련,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동독 5개국으로 구성된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사전통고없이 1968년 8월 20일 오전 11시 일제히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
`우호국`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침공 준비는 면밀했다.
동독부대는 30년 전의 히틀러군과 완전히 같은 길로 보헤미아를 향해 침공했다.
동쪽으로는 폴란드군이, 남쪽으로는 불가리아 군대가 진격해 왔다.
하지만 침략군의 대부분은 소련군이었다.
8월 21일 오전 4시, 프라하 시내에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 건물이 소련군 낙하산 부대의 공격으로 점거됐고 수뇌진도 대부분 체포됐다.
민중은 저항했다.
마을 이름 표지판을 바꿔, 침략군을 혼란스럽게 했고 이동 라디오에서는 냉정하게 행동하도록 방송했다.
작가들도 국제여론에 호소했으나 세계는 냉담했고 침묵했다.
전쟁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소련군에게 돌을 던지거나, 전차 보조탱크에 구멍을 뚫어 유출되는 가솔린에 불을 붙이는 등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프라하, 바르샤바를 비롯한 전 국토가 완전 점령됐다.
이로써 두브체크 제1서기의 지도하에 진행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건설, 이른바 `프라하의 봄`은 파국을 맞았다.
⑨ 폴란드, 비공산연립정권 탄생(1989) : 폴란드의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89년 오늘 자유노조 소속의 마조비에츠키를 총리로 지명합니다.
동유럽의 최초의 비공산주도 연립정권의 탄생입니다.
두달전 실시된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폴란드이 자유노조!
자유노조 기관지 편집장을 지낸 마노비에츠키가 총리 지명을 받음으로써 폴란드가 공산화된지 45년만에 비공산주의자 총리가 탄생합니다.
총리 지명 다음날 마조비에츠키는 자유노조운동의 지도자 레흐 바웬사를 만나기 위해 그다니스크를 방문합니다.
1981년 처음으로 자유노조운동이 시작됐던 그다니스크!
바웬사는 " 이제 폴란드에도 자유와 민주의 원칙에 입각한 정부가 수립되게 됐다"는 연설을 했습니다.
⑩ 흐루시초프 서기장 유고 방문(1963) : 1963년 오늘 !
소련의 흐루시초프 공사당 서기장이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해 유고의 티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습니다.
유고의 브리오니 섬에서 열린 소련과 유고의 정상회담!
흐루시초프와 티토는 오랜 시간을 함께 걸으면서 스탈린 시절 야기됐던 소련과 유고의 경직된 관계해소를 위해 공동노력하기로 합의합니다.
회담을 마친 흐루시초프 서기장은 한달여전 지진으로 천여명이 숨진 유고의 스코프제시를 방문합니다.
흐루시초프는 복구작업에 참여한 5백여명의 소련 기술자들과 사고수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기도 합니다.
⑪ 터키 동부지역 지진 강타(1966) : 1966년 오늘 터키 동부지역에 있는 바르토시 조용한 바르토시에 진도 9의 강진이 엄습해 바르토시를 폐허로 만듭니다.
24시간 계속된 지진으로 2천명 이상이 무너진 건물더미에 깔려 숨졌습니다.
이틀전 가벼운 미진으로 시작된 지진이 갑자기 강진으로 돌변하면서 바르토시 전체를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터키 정부는 이재민 구호와 복구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세계 여러나라에서도 구호물자를 보내왔지만 바르토시에는 두차례의 여진이 잇따라 발생해 피해가 더 늘어났습니다.
⑫ 노몬한 사건(1939) : 몽골과 만주의 국경지대에서 일어난 일본군과 소련군의 대규모 무력 충돌 사건.
* ‘노몬한’이란? 만주 북부의 ‘하이라르’남쪽 60킬로 지점에 있는 조그만 마을 이름이다.
결과는 일본군의 참패로 끝났다.
노몬한은 만주 북서부에 위치하며 외몽골과의 경계선이 뚜렷하지 않아 국경분쟁이 일어나기 쉬운 지대였다.
1939년 5월 11일 노몬한 부근에서 만주국(滿洲國) 경비대와 외몽골군이 교전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일본 참모본부와 육군성은 처음부터 사건의 확대를 원하지 않았으나, 현지의 관동군(關東軍)이 중앙의 의사를 무시하고 전투를 속행․확대시키면서, 외몽골과의 상호원조조약(1936)에 따라 출병한 소련군과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8월 하순에 소련 기계화 부대의 대공격으로 일본군 제23사단이 섬멸되었다.
8월 23일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고 9월 3일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급박한 세계정세 속에서 일본정부는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소련 주재 대사에게 정전교섭을 벌이게 하였다.
9월 15일 도고 대사와 몰로토프 외무인민위원의 회담에서 정전협정이 성립되어 16일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⑬ 미국, 첫 흑인 : 1619년 8월20일, 미국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 사람들이 항구로 몰려들었다.
흑인 20여명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미국에 흑인이 첫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다.
미국인들이 공식적인 선조로 여기는 메이플라워호 탑승자들의 폴리머스 도착(1620년)보다 1년4개월 빠르다.
흑인의 유입경로는 약탈. 네덜란드 선박으로 위장한 영국 사략선이 포르투갈의 흑인 노예를 빼앗은 후 제임스타운에 들러 보급품과 맞바꿨다.
교환 가격을 얼마로 계산했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확실한 점은 흑인들의 신분. 노예가 아니라 계약제 하인이었다.
4년 계약의 하인을 고용하는 게 노예 유지 비용의 절반이라는 점에 착안한 농장주들은 흑인들과 계약을 맺고 백인 하인처럼 부렸다. 돈을 모아 백만㎡의 농장과 다른 흑인 노예를 보유한 흑인 농장주가 등장했다는 기록도 있다.
흑인들이 노예로 전락한 이유는 호황. 담배로 인한 북미 최초의 경제호황이 흑인의 노예화를 불렀다.
장기 노동력 확보 차원에서다.
버지니아주 의회는 1662년 노예제도를 공식화하며 농장주들을 거들었다.
끝없이 늘어나는 담배경작지와 함께 흑인 노예도 급증해 독립전쟁 직전 흑인 인구는 남부의 3분의1에 이르렀다.
남부 출신 중에서도 제퍼슨 대통령처럼 노예를 개인적으로 해방시켜준 사람도 적지않았지만 흑인 노예는 19세 초ㆍ중반 더욱 늘어났다.
이번에는 면화 호황이 화를 불렀다.
손이 많이 가는 면화사업은 흑인의 노동력을 쥐어짰다.
담배와 면화를 매개로 한 돈에 대한 백인의 탐욕이 흑인노예제도를 낳고 심화시키는 과정에서 미국 경제가 성장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지위가 많이 향상됐다는 요즘도 흑인의 소득수준은 백인의 절반을 약간 웃도는 정도다.
미국 경제의 기저에는 이것이 깔려 있다. 흑인수탈 잔혹사.
(권홍우 편집위원.서경.2007.한국아이닷컴)
⑭ 모기의 날(Mosquito Day) : 현재 유럽에서는 8월 20일을 ‘모기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1897.8.20. 이 날 영국 의사 ‘로널드 로스‘가 ’말라리아‘를 모기가 발병시킨다는 사실을 역학적으로 발견한 날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학(瘧)이라 하여 기원전 300년경 기록에 나온다.
우리 나라에서는 학질로 많이 알려져 있다(*주(註):1995.7.23, 조선 일보).
********모기(mosquito) : [요약] 파리목[雙翅目] 모기과 곤충의 총칭.
학명 Culicidae
분류 파리목 모기과
종수 전세계 약 3,500종(한국 9속 56종)
생활방식 완전변태 곤충으로 알·유충·번데기·성충의 생활환
↑ 큰검정들모기 / 파리목 모기과의 곤충.
[본문] 지구상에 약 3,500종이 알려져 있고, 한국에서는 9속 56종이 기록되어 있다.
다른 곤충과 같이 머리·가슴·배 3부분으로 되어 있다.
머리에는 1쌍의 더듬이, 1쌍의 겹눈, 1개의 아랫입술(대롱 모양의 주둥이), 1쌍의 아랫입술수염이 있다.
가슴은 앞가슴방패판·가슴방패판·작은방패판으로 나누어지고, 몸 전체가 많은 비늘로 덮여 있다.
3쌍의 다리는 가늘고 길며, 각 다리는 넓적다리마디·종아리마디·발목마디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발목마디는 종아리마디와 거의 같거나 더 길고, 다섯째발목마디 끝에는 1쌍의 발톱이 있다.
날개는 투명한 막질이다.
날개맥에는 비늘이 배열되어 있고, 날개의 뒤쪽 가장자리에 털 모양의 비늘이 배열되어 있다.
뒷날개 1쌍은 변형되어 평형감각을 느끼는 곤봉 모양의 평균곤(平均棍)으로 되어 있다.
배는 8마디로 되고 배 끝에 l쌍의 미각(尾角:尾葉)이 있다.
(두산백과사전.2009)
⑮ 경제기회법(Economic Opportunity Act) : ‘빈곤층에 대한 교육ㆍ의료 지원 강화, 청소년 직업훈련소 개설.’
존슨 미국 대통령이 1964년 8월20일 서명한 경제기회법의 골자다.
평등기회법으로도 불린 이 법은 ‘빈곤퇴치’로 ‘위대한 사회’를 건설하려던 존슨이 가장 먼저 마련한 복지관련법. 암살 당한 전임 케네디 대통령의 잔여임기를 채우고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한 존슨은 경제기회국을 설립하고 90여개의 복지관련법을 쏟아냈다. 예산도 3년 동안 33.3%나 늘렸다.
성과는 어떠했을까. 평가가 엇갈린다.
1950년대까지 인구의 21%를 차지하던 절대빈곤층이 12%로 줄었다는 찬사와 실효는 거두지 못한 채 적자재정만 키웠다는 지적이 상존한다.
적자증가의 결정적 요인은 월남전. 복지예산이 늘어나는 구조에서 국방예산이 3년간 64.0%나 증가하며 통화공급도 늘어나 미국은 인플레이션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재정적자와 물가상승을 유럽이 보유한 잉여달러로 메우던 미국은 결국 닉슨의 달러화 불태환선언(1971년)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여건 변화는 경제학의 무게중심을 케인스주의에서 통화론으로 이동시키고 신자유주의 경제학 시대도 열었다.
경제기회법은 저소득 가정의 유아를 교육시키는 헤드 스타트(Head Start)와 숙식형 청소년 직업훈련소(Job Corps)에 흔적이 남아 있을 뿐 레이건과 부시 등 공화당 정권 때 대부분 사라졌다.
그래서인지 부시 정권 이후 절대빈곤층이 증가일로다.
한국의 처지는 더 딱하다.
글로벌 경제위기를 잉태한 요인으로 지목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판치고 부자감세 속에서 서민경제가 말라간다.
절대빈곤층 역시 외환위기 때보다도 늘어났다.
미국에서는 신(新) 경제기회법 도입 논의가 일고 있다.
(인터넷한국일보, 2009/08/19)
⑯ 기타 오늘의 역사⑰⑱⑲
1741 덴마크 항해사 비투스 요나스, 베링(알래스카) 발견
1904 친일파 송병준, 이용구 일진회 조직
1905 손문, 일본에서 중국혁명동맹회 결성
1906 쿠바에 반란 일어남
1908 램프 내한.미북장로교 한국 선교사.한국명 남행리.남자고등성 경학교의 2대 교장으로 재직했고,충북 청주에서 선교사업에 종사하였다.
1909 터키, 불가리아의 독립을 승인
1909 남아연방 성립
1911 포르투갈, 신헌법 제정
1914 성 바오로수도회 창설.이탈리아 알바에서 알베리오네 신부에 의해 창설된 가톨릭 남자 수도단체.
1919 총독부 관제(官制) 개정
1929 성경의 유래 발행.기독교문헌.저자 김인영 발행처 남감리회 주일학교부.4.6판,77면,국한문혼용,내려쓰기.총11장으로 구 성되었다.
1940 중국 8로군 40만 출격작전 개시
1940 쌀배급제 실시(출하. 판매 금지)
1945 소련군의 원산 상륙 진주
1948 국제난민기구(IRO) 발족
1949 니카라과 대한민국 승인
1953 소련 수소폭탄 첫 실험 성공을 발표
1955 침례회보 창간.월간신문.본지는 기독교한국침례회 기간지.처 음에 출판부장 장일수 목사와 애버내티선교사가 협의하여 부 산에서 발행.
1955 프랑스령 모로코.알제리서 폭동
1956 성서침례교회,한국 설립.미국의 캐스베리성서침례교회에서 파 송한 포스터선교사가 내한하여 선교를 시작함.
1960 세네갈, 프랑스로부터 독립
1964 조선일보 주관, 납북인사 송환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완결
1969 박정희 대통령 미국 방문
1970 개혁교회 세계연맹 창립총회(케냐 나이로비)
1971 남북적십자 연락관 분단 26년만에 첫 대면
1976 비동맹회의, 콜롬보선언 채택
1977 원자력발전소 가동
1977 미국우주선 보이저호, 목성-토성 향해 발진
1979 한국-나우르 국교 수립
1984 유엔, 이디오피아 기아사태 보고
1988 이란-이라크 정전 발효
1993 경부고속철도의 차종이 프랑스 알스톰사의 TGV로 결정
1993 제1차 대학수학능력시험
2000 동티모르 독립운동지도자 구스마오 민족해방군 총사령관직 에서 사임
오늘의 인물
① 민비(閔妃 ; 1851.9.25 - 1895.8.20(양10.8)) : 조선 고종(高宗)의 비(妃).
성은 민씨(閔氏), 치록(致祿)의 딸.
이름 자영.
16세로 왕비가 된 후 차차 정치에 관심을 갖더니, 왕을 대신하여 집권(執權)하고 있던 대원군(大院君)과 맞서 정쟁(政爭)을 벌임.
그는 대원군의 세력을 꺾고자 조 대비의 조카 조성하(趙成夏), 대원군과 사이가 나쁜 김병국(金炳國), 대원군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조두순(趙斗淳) 등 그리고 민씨 일족(一族)과 유대를 맺어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민씨 일파가 세력을 잡게 함.
그러나 「임오 군란(壬午軍亂)」으로 민비는 피신(避身)을 하게 되고 대원군이 재 집권했다.
이어 청의 힘으로 난이 진압되고 대원군은 청병(淸兵)에게 납치된 후 다시 「갑신 정변(甲申政變)」후 개화당(開化黨)을 누르고 사대당(事大黨)으로 민씨 일파가 세력을 잡았으나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세력을 잃더니 친일파(親日派)와 일본 공사가 보낸 자객(刺客)에 의해 경복궁에서 참혹히 피살되었다.
⇨ 8월 20일.
⇨ 10월 8일.
② 이 상(李箱 ; 1910.8.20(양9.14) - 1939.4.17(음3.7)) : 시인․소설가.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서울 태생.
보성 고보를 거쳐 경성고등공업 건축과 졸업.
처음에는 시작(詩作)으로부터 출발하여 1934년 <오감도> 등을 발표하여 일대 선풍을 일으켰고, 1936년 「조광」지에 <날개>를 발표한 후에 단편 소설도 몇 편 썼다.
심리주의의 경향이 농후하여, 생활을 표현하였다기 보다도 극도로 피로한 지식 계급의 신경과 그 신경이 가져오는 무한도의 자의식의 분열을 악착스럽게 추구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종생기><실락원><실화> 등이 있고, 수필에 <권태>, 기행문에 <성천 기행> 등이 있다.
폐결핵으로 28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 9월 14일.
③ 김경태(金慶泰 ; 1935 서울 마포 ~ 1995.8.20 서울) : 방송인.
텔레비전 코미디 연출가.
한국에 텔레비전 코미디를 정착, 발전시킨 코미디계의 대부로,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인 〈웃으면 복이 와요〉․〈유쾌한 청백전〉․〈부부만세〉․〈고전 유머극장〉 등을 연출하며 수없이 많은 코미디 스타를 배출했다.
휘문중․고등학교를 거쳐 1958년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공군 정훈장교로 복무하다가 작가 한운사의 권유로 1964년 동양방송(TBC)에 입사했으며, 군 복무시절 당시 한국방송공사(KBS) 라디오 아나운서였던 오신근과 결혼했다.
'누구나 남을 웃길 수 있다'는 그의 웃음철학은 어린시절부터 이어진 뼈저린 가난과 눈물로부터 나왔다.
코미디 연출의 대가가 되기까지 '열심히 굶고 남부럽지 않게 고생도 한' 그는, 자신이 당하는 비극은 대개 자기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당시까지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코미디 분야에 대해 4년간 집요하게 공부했다.
이후 1969년 문화방송(MBC) 이 개국하면서 자리를 옮겨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유쾌한 청백전〉과 국내 최초의 시추에이션 코미디 〈부부만세〉를 연출했는데 이 프로그램들은 곧 시청률 1, 2위를 차지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3년 그는 다시 TBC로 옮겨 〈고전 유머극장〉을 연출했으며 1979년에는 지방극장 쇼 프로그램 사회자였던 무명의 이주일을 그의 프로그램에 전격 출연시켜 최고의 스타로 만들기도 했다.
1980년 언론통폐합 때 TBC가 강제로 KBS에 통합되자 방송에 회의를 느낀 그는 1983년 미국으로 이민, 교포방송(IBS TV)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8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직후 서울방송(SBS) 개국 코미디 프로그램 〈코미디 전망대〉의 앵커로 기용되어 '대머리 연기'로 인기를 모았다.
그의 낙관적인 생활관은 많은 주목을 받아 수십 군데의 대기업으로부터 긍정적인 화술과 삶에 대한 강의 요청을 받기도 했다.
1993년 간암에 걸렸으나 1994년 방송국에 몸담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모아 〈웃으며 살자구요〉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1995년 9월 수상 예정이었던 한국방송대상 공로상을 받지 못한 채 숨지고 말았다.
서울방송 방송위원 김경태 !
1995년 8월 20일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암으로 숨졌다.
1993년 간암으로 판정 받고 계속 투병해왔었다.
④ 레이몽 포앙카레(Raymond Poincare ; 1860.8.20 - 1934.10.1
5) : ⇨ 10월 15일.
프랑스의 정치가.
1913년 프랑스 제3공화국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푸앵카레는 영국, 러시아와 협조해 대독(對獨) 강경외교 정책을 취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강력한 전시행정을 펼쳐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대독강화에 불만을 품고 1920년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2년 뒤 총리 겸 외무장관을 맡는다.
1926년에는 거국일치 제3차 내각의 수반 겸 재무장관이 돼 재정난을 해결했다.
1928년에는 프랑화를 평가절하해 통화의 안정을 실현시켰다.
⑤ 파울 에를리히(Paul Ehrlich ; 1854.3.14 ~ 1915.8.20) : 독일의 세균학자.
독일의 의학자.
세균학자 겸 화학자 파울 에를리히가 61세로 작고.
과학사에서 에를리히라는 이름은 주로 매독 치료제 살바르산과 관련해 언급된다.
아르스페나민 또는 아르세노벤졸이라고 불리는 이 담황색 분말은 세계 최초의 화학치료제다.
에를리히는 1910년 일본 화학자 하타 사하치로(秦佐八郞)의 도움을 받아 살바르산을 합성해냈다.
두 학자의 실험 경과가 담긴 스피로헤타병의 실험 화학 요법이라는 책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살바르산은 스피로헤타병의 치료제다.
대표적 성병인 매독을 비롯해 서교증(鼠咬症)촵재귀열(再歸熱)촵바일병 따위가 스피로헤타를 병원체로 해 생기는 병이다.
살바르산은 본래 이름보다 606호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별칭은 에를리히와 하타가 606번째 실험에서 이 화학요법제의 합성에 성공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살바르산은 유럽의 난봉꾼들을 매독의 공포에서 해방시켰지만, 그 부작용이 커서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다.
매독은 본디 서인도제도의 지방병이었는데, 1493년 콜럼버스의 원정대에게 묻어 유럽으로 전파된 뒤 차차 아시아로 번졌다고 한다.
태아가 자궁 안에서 감염돼 선천성 매독 환자로 태어날 수도 있다.
에를리히가 처음 발견해 그의 이름을 딴 에를리히 반응은 오줌 속의 쓸개즙 색소를 검출하는 절차다.
이 반응이 너무 강하거나 약하면 간이나 쓸개가 병적 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슐레지엔의 슈트렐렌에서 태어난 에를리히는 결핵균 발견자 코흐의 연구소에서 혈청학과 면역학을 연구하면서 세균학자로 이름을 얻었다.
그는 이 연구소에서 디프테리아의 혈청 요법을 완성한 뒤 독일의 여러 대학과 연구소를 거치며 화학물질이 생체 조직에 끼치는 영향을 탐구했다.
에를리히는 19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고종석).
⇨ 3월 14일.
⑥ 틸리히 출생(1886) : ⇨ 10월 22일.
⑦ 살바토레 콰시모도(Salvatore Quasimodo ; 1901.8.20 - 1968.
6.14) : 콰시모도는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비평가․번역가이다.
원래 모더니즘 운동인 에르메티스모의 시인들을 이끌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 자극받아 현실을 반영한 사회비판적인 시들을 다수 발표했다.
팔레르모에서 공학과 수학을 배운 뒤, 로마에서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이탈리아 정부의 토목기사로 일했다.
일하는 틈틈이 시를 썼으며 <솔라리아 Solaria>에 처녀시를 발표했다.
첫 시집 <바다와 육지 Acque e terre>(1930)를 발표한 뒤 에르메티스모 시인들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1935년 이후 토목기사를 그만두고 창작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이 시기 콰시모도의 시는 딱딱하고 기교적이었으며 에르메티스모 특유의 난해한 상징주의가 두드러졌다.
<그리고 곧이어 밤이 되려니 Ed e subito sera>(1942)는 그가 마지막으로 발표한 에르메티스모 시대의 시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콰시모도의 작품세계는 급변해 파시스트 정권의 부당함과 전쟁의 공포, 이탈리아의 죄악을 상기시키는 시를 주로 썼다.
전쟁 전과는 달리 간결한 언어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심상을 표현해냈다.
번역서와 평론도 다수 발표했는데, 대표적인 번역서에 <그리스 비극 Tragici greci>(1963)․<위선자 Tartuffe>, 평론으로 <연극 비평집 Scritti sul teatro>(1961) 등이 있다.
1959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⑧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혹Trotskii ; 1879.11.7(구력10.26) - 1940.8.20) : ⇨11월 7일.
[요약] 러시아의 혁명가로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으로 있으며 11월혁명 때 무장봉기에 공헌하였고 외무인민위원 ·군사인민위원 ·정치국원 등을 지냈다.
레닌 사후 당의 노선을 놓고 스탈린과 대립하여 추방되었으며 주요저서에 《영구혁명론》 등이 있다.
본명 Leib(Lev) Davidovich Bronstein
국적 러시아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우크라이나
주요저서 《영구혁명론 Permanent Revolution》(1930)
[본문] 본명 Leib(Lev) Davidovich Bronstein.
남우크라이나의 비교적 부유한 농가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데사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마르크스주의운동에 참가하여 1898년 체포되어 투옥된 뒤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1902년 탈주에 성공하여 영국으로 망명, 런던에서 V.I.레닌에 협력하였으나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는 멘셰비키에 가담하였다.
이어 1905년 러시아로 돌아와 혁명의 혼란 속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소비에트 의장이 되었으나 1906년 다시 체포되고 1907년 탈주하였다.
국외에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통일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하고 1914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3월(구력 2월) 혁명 후 1917년 5월 귀국하여 볼셰비키와 공동투쟁을 벌였으며, 7월 정식으로 입당하였다.
9월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이 되어 11월혁명(구력 10월) 때는 무장봉기에 공헌하였다.
혁명 후 외무인민위원이 되었다.
독일과의 강화를 놓고 레닌과 대립하게 되어 1918년 사직, 그해부터 1925년까지 군사인민위원, 1919∼1927년 정치국원으로 있었다. 레닌 사후 당의 노선을 놓고 I.V.스탈린과 대립하여 1927년 제명, 1929년 국외로 추방되었다. ]
각국을 전전하다가 1936년 멕시코에 정착하였으나 1940년 8월 암살되었다.
그의 1905년 혁명 이래의 주장은 ‘영구혁명론’으로 불리는데, 이는 러시아와 같은 후진국의 혁명에 있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불가결하며, 또 그것을 유지하는 데에는 세계혁명, 적어도 유럽 제국(諸國)의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보는 생각으로, 러시아만으로도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과 대립하였다.
추방 후 그가 소련 주도의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에 대하여 제4인터내셔널을 조직한 것도 이 주장에 입각한 것이다.
주요저서에 《영구혁명론 Permanent Revolution》(1930) 《배반당한 혁명 The Revolution Betrayed》(1937) 등이 있다.
(두산백과사전)
⑨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 1829.4.10 잉글랜드 노팅엄셔 노팅엄 ~ 1912.8.20런던) : 구세군의 창설자·대장(1878~1912).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나 전당포에서 견습생활을 했다.
15세 때 종교적 회심을 체험하고 부흥설교사가 되었다.
1849년 런던으로 간 그는 전당포 일을 혐오하면서도 집으로 돈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런던의 월워스에 있는 전당포에서 일했다.
이무렵 평생의 반려자가 된 캐서린 멈퍼드를 만났다.
1852년 개혁 감리회의 정식 설교자가 되었고, 1855년 캐서린 멈퍼드와 결혼했다.
9년간 전도활동을 한 뒤 개혁감리회와 관계를 끊고 독립적인 부흥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형벌을 받게 된다는 단순한 신앙을 강조했다.
버림받은 자에 대해서는 깊은 연민을, 더러움·추함·고통에 대해서는 증오심을 가졌다.
1864년 런던으로 가 천막과 야외에서 집회를 인도했으며, 화이트채플에 '그리스도교 선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구세군 창시
아내 부스
⑩ 오이긴스( ; 1778.8.20 ~ 1 842.10 ? ) : [요약] 칠레의 군인 ·정치가.
독립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아르헨티나로 망명해 아르헨티나의 지원으로 에스파냐 군대를 물리치고 칠레의 총독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그 후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시도했으나 보수파의 반대로 좌절되자 페루로 망명했다.
원어명 Bernardo O'Higgins
국적 칠레
활동분야 군사, 정치
[본문] 에스파냐 식민지관리인 암브로시오 오이긴스의 아들로 태어나, 리마에서 교육을 받은 후에 영국에 유학, F.미란다와 친교를 맺어 그의 독립운동에 동조하게 되었다.
1802년에 귀국, 적극적으로 운동에 가담하여 1810년 독립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아르헨티나로 망명하였다.
아르헨티나의 장군 산 마르틴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벌인 끝에 1817년 에스파냐 군대를 물리치고 칠레의 총독이 되어 1818년 2월 1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 후 교회의 권한축소, 장자상속제의 폐지 등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보수파의 반대로 끝내 좌절되자 1823년 페루로 망명, 그 곳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EnCyber.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⑪ 라지브 간디(Rajiv Gāndhī ; 1944.8.20 - 1991.5.21) : [요약]
전 인도총리.
인도의 정치가.
I.간디의 장남이다.
인도국민회의파의 당총무를 지냈다.
총리 I.간디가 암살되자 총리에 취임하였다.
원어명 Rajiv Gāndhī
국적 인도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인도 뭄바이
[본문] 뭄바이에서 태어났다.
I.간디의 장남이다.
인도에서 교육받고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 인도 항공회사의 조종사가 되었으나, 1980년 I.간디의 후계자로 지목되던 동생 산자이가 비행기추락사고로 사망함으로써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1981년 연방하원 의원에 당선, 1983년 여당인 인도국민회의파의 당총무가 되었다.
1984년 10월 31일 총리 I.간디가 암살되자 총리에 취임, 이후 인도국민회의파 내 인디라파의 당수로 선출되었다.
동년 11월 연방하원 의원선거에서 대승, 외무·상무·공업기업·과학기술 및 원자력 등 각료를 겸임하였다.
1989년 총선거에서 패배, 사임하고 1991년 5월 21일 남부지방 유세 중 꽃다발 속에 장치된 폭탄에 의해 암살되었다.
(두산백과사전)
⑫ 기타 오늘의 인물 ⑬⑭⑮
1517 그랑벨르 출생.스페인 왕 필립2세의 재상이었으며.파우다와 루뱅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 서품을 받음.1540년 아라스의 주 교로 임명됨.
1745 애즈버리 출생.미국에서 임명된 최초의 감리교회 감독.
1833 미국 제23대 대통령 벤자민 해리슨 출생
1833 달톤 출생.독일의 개혁파.1868년에 달톤은 종교법원 고문관에 임명되었으며 1876년 페테르스부르크에 복음주의도시선교회 를 설립.
1852 크라니히 출생.독일의 로마가톨릭 성직자.
1856 블리스 출생.미국 성공회 성직자.1905년 미국 노동성 실업자 대책위원이었다.신학에 있어서 그는 급진적인 광교회파였다.
1881 미국시인 에드가 게스트 출생
1890 미국 공포소설작가 H.P. 러브크래프트 출생
1894 리 출생.남감리교 한국 여선교사.한국명 이보석.일제에 의해 강제추방되기까지 배화학당에서 음악교사로 20년동안 봉사함.
1939 한국교회에 여집사 제도를 제의한 한석진 목사 별세
1996 한국 고전문학의 대가 장덕순씨 별세
오늘의 샘터
① <날개> : 이상의 대표적 소설 이름.
1936년 9월에 ‘조광‘지에 발표한 문제작이다.
심리주의적인 리얼리즘의 수법에 의해서 주인공의 자<지>의식의 세계를 묘사한 단편 소설이다.
위트, 야우, 패러독스, 자조 등 모든 지적 수단을 가지고서 가족 생활, 금전, 성, 그리고 상식과 안일에 대한 모독을 감행하여 주목을 끈 난해 작품이다.
② 콰시모도의 말 : "시라는 것은, 심지어 서정시조차도 일종의 연설입니다.
이 연설의 청중은 시인 또는 한 사람 아니, 수천 명의 인간 내면에 있는 형이상학적․형이하학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③ 오늘의 문답 ④⑤ ⑥⑦⑧⑨ ⑪⑫⑬⑭⑮
제01문 : 당신, <모기발순><모기장><모기향><모깃불><모깃소리>
<모깃소리만 하다><모기 보고 칼 빼기>란 말 아십니까?
제02문 : 당신, <말라리아(malaria)><말라리아모기(=학질모기)><말
라리아열><말라리아요법><말라리아원충> 아십니까?
|
의 졸저<원저 편저자 (1973년도 초판)> 평택 소통 김평탁입니다.
1973년 초판 이래 조선일보를 비롯 각 신문들과 각방송국 특히 ytn 을 비롯하여 컴퓨터 인터넷.......오늘까지도 각 방송들과 신문 인터넷의 덕택으로 원저자의 보람을 온 국민들과 함께 만끽하며 감사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소생은 하나님의 말씀<성경>과 개인<일기>를 60여년 동안 지금까지 쓰고 보존해 오면서,
오늘의 국민 소통 운동과 우리 한민족 한가족 소통 운동을 제창하게 되었으며 다행히도 박근혜정부<한민족미래창조과학기술부>의 탄생을 한없는 기쁨과 소원<소망>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국민 여러분 !
그리고
국내외 동포<가족> 여러분 !
어서빨리 동서남북 우리나라 남북 평화 통일을 이루십시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
2013년 08월 13일 광복절을 앞두고
CCCC C-man 평택 소통 김 평 탁 올림
(국민소통운동본부.017-727-3863,(031)692-3650.경기평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