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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자료 스크랩 실학의 메카 성호 기념관 &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묘 탐방
이장희 추천 0 조회 130 14.05.09 21: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실학의 메카 성호 기념관 &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묘 탐방

(2013/06/14 현재)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있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선생을 기리는 실학의 메카
성호 기념관과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묘 전경 입니다. 오늘날 실학의
대종으로 추앙 받고 있는 성호 이익은 안산이 낳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 입니다.
당시 안산군 첨성리 (지금의 안산시 일동)에서 80평생을 학문에 전념하여 독창적
사회개혁사상을 설파하였다. 성호의 학문은 퇴계이황의 성리학에서 출발하였으나
차차 율곡이이의 경세학문과, 반계유형원의 영향을 받아 천문·지리·율산(律算)·
의학에 이르기까지 능통 했고, 남다른 안목으로 서학에 대해서도 동도서기의 관점에서
적극 수용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지닌 성호는 투철한 주체의식과
비판정신을 토대로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을 통해 당시 사회제도를
실증적으로 분석·비판하여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이중 당시산업의 주를 이룬
농업을 중시하여 누구나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한전론과 노비제에
대한 비판, 양반도 산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사농합일이론은 성호의 대표적 사상이다.
이러한 성호의 사상은 안정복·윤동규·신후담·이중환·이가환·권철신 등에게
전수되었으며, 다산 정약용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오늘날 안산시는 성호기념관을
통해 성호학을 재조명 하고 있다. 성호의 주요 저서로는 '성호집', '성호사설',
'곽우록', '11질서', '이선생예설' 등이 있습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묘 입니다. 

 

 

 

 

 

 

 

 

 

 

 

 

 

 

 

 ■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숙종 7)~1763(영조 39)]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을 대성했다. 독창성이 풍부했고, 항상 세무실용(世務實用)의 학(學)에 주력했으며, 시폐(時弊)를 개혁하기 위하여 사색과 연구를 거듭했다. 그의 개혁방안들은 획기적인 변혁을 도모하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것으로 현실에서 실제로 시행될 수 있는 것을 마련하기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실학사상은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 이다.

 

그의 가문은 남인 계열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상의(尙毅)는 의정부좌찬성을, 할아버지 지안(志安)은 사헌부지평을, 아버지 하진(夏鎭)은 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그가 태어난 바로 전 해인 1680년(숙종 6) 남인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재집권하는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남인이었던 아버지도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다시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이 유배지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682년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죽은 후 어머니 권씨는 선영이 있는 안산의 첨성촌(瞻星村)으로 이사했고, 이후 그는 이곳의 성호장(星湖莊)에서 평생을 지내게 되었다. 둘째 형인 잠(潛)에게 글을 배웠다. 처음 학문에 뜻을 두어 〈맹자〉·〈대학〉·〈소학〉·〈논어〉·〈중용〉·〈근사록〉을 읽고, 다시 〈심경〉·〈주역〉·〈서경〉·〈시경〉을 거쳐 정주(程朱)와 퇴계(退溪)를 탐독하여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705년 증광시에 응시하여 초시에는 합격했으나, 이름을 적은 것이 격식에 맞지 않아서 회시에는 응시할 수 없었다. 이듬해 둘째 형 잠은 진사로서 장희빈(張禧嬪)을 옹호하면서 노론집권당을 공격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려, 국문 끝에 장살(杖殺)당했다. 이익은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아, 과거를 완전히 단념하고 두문불출하며 독서에 전념했다. 이후 셋째 형 서(?)와 사촌형 황(況)에게서 수학했다. 1715년 어머니를 여의고 복상이 끝난 후에는 노비와 집기 일체를 종가(宗家)에 돌리고 약간의 토지만으로 생계를 이었다. 1727년(영조 3) 학명이 알려져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끝까지 사양하고 성호장에 묻혀 저술에만 몰두했다. 1763년에는 노인을 우대하는 제도에 따라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2월 83세의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삶을 영위한 시기는 18세기 전반기로서,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말미암은 피폐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때였다. 나라의 재정은 궁핍했고, 황폐된 전지(田地)가 복구되는 과정에서 궁방전·아문둔전·영문둔전, 그리고 양반의 대토지 소유가 새로이 전개되면서 지주전호(地主佃戶) 제도가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또한 동서분당이 남인·북인·노론·소론의 사색당쟁으로 발전되고, 다시 노론의 일당독재가 굳어지는 추세 속에서 정치 기강은 극도로 문란해지고 감사·수령의 가렴주구가 심화되었다. 이로써 농민의 광범한 몰락이 현저하게 전개되었다. 이익은 이 시기에 관직의 길을 절연하고 평생을 초야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글만을 읽고 성인(聖人)의 도리만을 말하면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방책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 학문은 개인생활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국가적 관계에서도 무용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의 학문의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는 학문을 연마하는데 있어 반계 유형원의 학문을 계승하여 조선후기의 실학을 대성하였는데요. 독창성이풍부했고 항상 "세무실용" 에 주력하였습니다.  그의 개혁 방안들은 획기적인 변화를 도모하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것으로써 현실에서 실제로 시행될 수 있는 것을 마련하기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리하여그의 실학사상은 다산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철학사상에는 자연과학 사상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데 그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하여 "천원지방설" 을부정했으며 이로써 "지전설" 까지도 제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당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함으로써 관리로서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을 기존의 숫자보다 줄여 엄격하게, 선발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 실학자입니다.

 

한편 양반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그들도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면서 삶을 이어가야한다고도 주장합니다.  경제 제도에서는 토지제도가 가장 핵심적인 관건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균전제" 를 주장하는 등 이 익의 기본적 개혁사상 성격은 봉건적 전제주의와 양반 통치제도 그리고 봉건적 토지 소유의 횡포와 함께 화폐유통으로 인한 소농과 빈농의 몰락도 저지함으로써 모두가 노동하며 함께 사는 자영농으로서아울러 소득을 얻으며 사는 일명 "자영농경리" 를 지향하였습니다.

 

성호 이익, 그가 유교적인 도덕윤리에서 비록 완전히 자립화시켜 독립된 학문으로 확립시키지는 못하였으나민족의식의 빛을 보였고 근대적인 역사학을 일단 출발시킴으로써 한국에서 근대적역사인식을 성립시켰다고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저서로는 <성호선생문집> , <성호집속록> . <성호사설> . <곽우록>  등이 있습니다

 

▶이익 [李瀷] 1681(숙종 7)~ 1763(영조 39) - 브리태니커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을 대성했다. 독창성이 풍부했고, 항상 세무실용(世務實用)의 학(學)에 주력했으며, 시폐(時弊)를 개혁하기 위하여 사색과 연구를 거듭했다. 그의 개혁방안들은 획기적인 변혁을 도모하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것으로 현실에서 실제로 시행될 수 있는 것을 마련하기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실학사상은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

 

그의 가문은 남인 계열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상의(尙毅)는 의정부좌찬성을, 할아버지 지안(志安)은 사헌부지평을, 아버지 하진(夏鎭)은 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그가 태어난 바로 전 해인 1680년(숙종 6) 남인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재집권하는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남인이었던 아버지도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다시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이 유배지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682년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죽은 후 어머니 권씨는 선영이 있는 안산의 첨성촌(瞻星村)으로 이사했고, 이후 그는 이곳의 성호장(星湖莊)에서 평생을 지내게 되었다.

 

 둘째 형인 잠(潛)에게 글을 배웠다. 처음 학문에 뜻을 두어 〈맹자〉·〈대학〉·〈소학〉·〈논어〉·〈중용〉·〈근사록〉을 읽고, 다시 〈심경〉·〈주역〉·〈서경〉·〈시경〉을 거쳐 정주(程朱)와 퇴계(退溪)를 탐독하여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705년 증광시에 응시하여 초시에는 합격했으나, 이름을 적은 것이 격식에 맞지 않아서 회시에는 응시할 수 없었다. 이듬해 둘째 형 잠은 진사로서 장희빈(張禧嬪)을 옹호하면서 노론집권당을 공격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려, 국문 끝에 장살(杖殺)당했다. 이익은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아, 과거를 완전히 단념하고 두문불출하며 독서에 전념했다. 이후 셋째 형 서(?)와 사촌형 황(況)에게서 수학했다. 1715년 어머니를 여의고 복상이 끝난 후에는 노비와 집기 일체를 종가(宗家)에 돌리고 약간의 토지만으로 생계를 이었다. 1727년(영조 3) 학명이 알려져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끝까지 사양하고 성호장에 묻혀 저술에만 몰두했다. 1763년에는 노인을 우대하는 제도에 따라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2월 83세의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삶을 영위한 시기는 18세기 전반기로서,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말미암은 피폐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때였다. 나라의 재정은 궁핍했고, 황폐된 전지(田地)가 복구되는 과정에서 궁방전·아문둔전·영문둔전, 그리고 양반의 대토지 소유가 새로이 전개되면서 지주전호(地主佃戶) 제도가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또한 동서분당이 남인·북인·노론·소론의 사색당쟁으로 발전되고, 다시 노론의 일당독재가 굳어지는 추세 속에서 정치 기강은 극도로 문란해지고 감사·수령의 가렴주구가 심화되었다. 이로써 농민의 광범한 몰락이 현저하게 전개되었다. 이익은 이 시기에 관직의 길을 절연하고 평생을 초야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글만을 읽고 성인(聖人)의 도리만을 말하면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방책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 학문은 개인생활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국가적 관계에서도 무용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의 학문의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성호 이익 생애


그는 1681년(숙종 7) 신유년 10월 18일 아버지 이하진의 유배지(流配地)인 평안도 운산(雲山)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성호가 두 살 되던 1682년(숙종 8) 임술년 여름, 향년 55세로 귀양이 풀리지도 않은채 그곳에서 세상을 버렸다. 이처럼 성호의 생애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작되었다.

 

어린 성호를 키운 것은 편모인 권씨부인이었지만 그를 학문의 세계로 이끈 것은 둘째 형님 섬계공(剡溪公) 이잠(李潛)이었다. 스물 두 살 터울로 마치 어버이 같고 스승같던 이 형님마저 성호의 나이 26세 나던 1706년(숙종 32) 진사의 신분으로 서인(西人) 중신(重臣)의 잘못을 임금께 상소했다가 역적으로 몰리어 곤장을 맞고 작고하였다. 연이은 당쟁의 환난(禍難)이었다.

 

성호는 이보다 일년전인 1705년(숙종 31)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답안지[科紙]에 적은 이름[錄名]이 잘못되었다는 빌미로 제2차시험인 회시(會試)에 조차 나가지 못하였다. 이 사건 이후 그는 과거를 아예 작폐한 채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이같은 일들을 일러 다산 정약용은 “성호선생께서 집안에 화를 당한 뒤로 이름난 학자가 되셨으니, 권세있는 부호가의 자제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라고 기록했다.

 

그가 33세 나던 1713년(숙종 39)은 성호의 생애에 있어 대단히 의미있는 한 해였다. 기다리던 외아들 맹휴가 태어나고 본격적인 저술 활동이 시작된 해였기 때문이다. ‘질서(疾書)’의 시작인 『맹자질서』는 이 해에 완성되었다. 성호의 학문이 알려져 많은 제자들이 안산으로 찾아든 것은 그의 나이 30대 부터였다. 또한 47세 때에는 나라에서 그의 학문과 덕행(德行)을 듣고 몇 차례 벼슬을 내리고자 불렸으나, 한번도 이에 응하지 않고 성포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니, 그가 주장한 ‘사농합일(士農合一)’ 즉, ‘선비는 농사로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철저히 실천한 셈이다.

 

본래 병약했던 그가 등과 가슴에 악성 종기가 심해지기 시작한 것은 60대 이후였다. 외아들 맹휴도 같은 증세로 39세에 젊음을 버렸으니, 이 병은 성호가의 고질이었던 듯하다. 수많은 친족에 대한 보살핌과 자신의 병을 다스리는 동안, 이미 가산은 탕진되어 나중에는 ‘송곳조차 꽂을 단 한 평의 땅도 없을’ 정도로 경제적 몰락과 모고(困苦)를 겪게 되었으나, 이런 고통 속에서도 83세로 이승을 버리기까지 세상을 위한 실용·실증의 학인 경세치용의 학문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83세 되던 1763년(영조 39), 영조는 고령의 노인을 우대하는 나라법에 따라, 성호에게 정3품 당상관직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렸다. 세상을 떠나기 몇 개월 전의 일이었다. 같은 해(1763) 11월, 병상에 들어 12월 섣달 17일, 정침에서 임종했으니 향년이 83세 였다.

 


●성호 이익의 학문과 사상

 

실학은 조선후기에 대두된 일련의 현실 개혁적 사상 체계를 말하는데, 성호 이익은 실학을 이끈 가장 중요한 학자 중 한사람이었다.성호는 세계를 대할 때 관념적이거나 주관적으로 보지 않고, 객관적이며 경험론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우주(宇宙)와 천지(天地)는 어떻게 다르며, 우주와 기(氣)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의 문제에 의문을 가지고, 철학적 사유를 통해 물질 존재의 객관적 형식으로써의 전체 ‘우주’ 즉 공간·시간은 무한하다는 과학적 인식에 도달할수 있었다.

 

서양의 자연과학적 지식에 영향 받은 성호는 이(理)를 본체로 중요시하는 성리학적 자연관에 대한 비판을 통해, 현상인 기(氣)가 본질인 이(理)보다 우선하는 현실주의적 가치관에 의한 기(氣)중심적인 이기론(理氣論)을 전개하였다. 성호는 삶을 중심으로 한 이기(理氣)와의 관계와 경학(經學)을 근거로 하여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제를 재해석하였다. 성호의 인간관은 삶을 바탕으로 한 현실적 인간을 중시하여, 기혈적(氣血的) 존재로서의 육체적 인간을 강조하였다.


성호는 실존적 본성을 재발견하고 인간의 마음의 역할과 감정의 근원을 살펴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인간애의 실천을 위한 사회 개혁 사상을 주장하였다.
성호는 중국의 청대(淸代) 고증학과 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면서, 자구(字句)에 대한 교감·문자학과 음운학·훈고· 추론 고증의 방법에 의해, 경전을 연구하는 실용주의적 경학(經學)을 추구하였다. 성호는 현실생활을 도외시한 공허한 관념의 유희만을 즐기는 당시의 학문풍토를 비판하고, 하나의 경전이라도 능통하여 실생활에 유익하게 쓰일 수 있는 경세치용적(經世致用的)인 경학을 주장하였다.

 

성호는 선입견에 의하지 않고 실제의 사실에서 옳은 것을 추구하였는데, 학문에 있어서 실증적 사유는 천문·지리·역사· 제도 등의 각 분야에서 새로운 인식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 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한 서학(酉學)은 성호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는데, 세계관의 확대와 역사 의식의 심화, 전통적 중화관(中華觀)의 탈피라는 점 등에서 의미가 크다.

 

성호는 ‘자아(自我)’의 자각을 통해 민족의 주체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놓는 중화주의를 배척하여, 중국이 유일한 천자(天子)의 나라가 될 수 없으며, 서양의 각국이 각기 군주가 있어 자기 역내(域內)를 통치하고 있으므로, 각 국가의 독립적인 주권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성호는 “하(夏 : 中華)를 귀하게 여기고 이(夷)를 천하게 보는 것은 옳지 않다.”“동국(東國)은 다름 아닌 동국일 뿐이다 (東國自東國), 우리 역사는 중국의 역사와 다르다.” 라고 주장하여 소중화(小中華) 의식에서 벗어나 민족적 자아를 발견하고,우리의 역사를 자주적으로 재인식, 새로운 역사적 안목을 지니게 되었다.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일본에 대한 인식도 전통적인 화이적 명분론이나 감정적 차원의 대응에서 벗어나, 세계 여러나라가 더불어 사는 상호간의 교린 (交隣) 체제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성호는 또한 올바른 역사 이해와 서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객관적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한 두 가지 사서(史書)에 의존하지 말고, 여러 서적을 상호 비교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료에 대한 문헌비판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도덕적 해석으로부터 독립시켜, 역사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인식방법을 제시하고자 노력하였다.성호는 우리 나라 역사에 계통을 세워 재구성하기 위해 삼한(三韓)에 정통을 두는 ‘삼한정통론’을 강조하였다.

 

단군이 처음 우리 나라를 일으켰고, 그 후 기자조선이 계승하여 남쪽으로 옮겨 마한(馬韓)이란 나라를 연장해 왔기 때문에, 우리 나라 역사의 정통은 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단군조선에서 비롯한 우리나라 역사 의 변천과정 속에 하나의 계통을 찾아내려는 성호는 한사군(漢四郡)의 설치로 역사가 중단된 듯이 여겨졌던 공백기간에, 마한으로 나라가 이어진 계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정통으로 내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성호의 정통론은 중국사가와 같이 자기 소속 왕조에 대한 의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 파악에 있어 체계성을 위한 것이었고 한 걸음 나아가 중국의 정통사상 [천자사상]을 극복하게 되었다. 성호에서 비롯한 이 정통론은 안정복·정약용으로 계승 심화되었는데, 순암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통해 역사를 보다 체계적으로 파악하였고, 다산 정약용에 와서는 현실론적 주장으로 중화주의(中華主義)의 절대성의 잔재가 일소되었으며, 나아가 현실성에 입각한 역사이해를 가능케 했다.

 

성호는 서양과학 중 특히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자연과 인간을 독립된 존재로 인식하는 한편, 실증적 방법론에 의한 경세치용적인 경학 연구로 사회전반의 개혁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성호는 우주의 운행질서와 태양·지구·달 등에 관해 기존의 동양 천문학에서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과학적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방대한 저서를 통해 소개했으며, 세계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성호는 경전해석에 있어 기존 학설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를 시도하여, 성리학과 예학을 현실적·체계적으로 정리, 그 대안을 제시하였고, 이를 통해 학자들로 하여금 정치·경제·사회적 현실을 직시케 했다.성호는 덕치(德治)를 근본으로 하지만 현실적인 통치수단으로 법을 중요한 도구로 보았기 때문에, 엄격한 법의 시행과 형평에 맞는 판결과 집행, 연좌제 금지 등의 법률 적용 방법을 주장하였다.성호는 국제외교에서도 실리적인 선택으로 사대주의를 주장하였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사대외교가 약자로서 생존할 수 있는 정책으로 인식, 도덕적 이상주의에 젖은 당시의 대외관을 비판하였다.

 

성호는 개혁해야 할 대상으로 당쟁의 페단을 지목하였는데, 당쟁은 서로의 ‘이해(利害)’때문에 생긴다고 했다. 그리고, 당쟁의 폐단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을 두 가지로 나눠 제시하였다.

첫째는 붕당의 근원이 과거제도에 있으므로, 인재등용의 방법을 고쳐 문벌이나 당색 중심의 정치를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생업을 천시하고 관직만을 통해 부귀영달을 꾀하는 양반들의 생리와 생활 태도를 바뀌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성호는 특히 과거제도의 폐단을 논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첫째, 과거만이 유일한 출세의 길이었기 때문에 과거시험 준비에 평생을 소모 하는 폐단이 있는데, 이를 추천제를 통해서 보완하고자 했다.


둘째, 시험과목이 너무 문예(文藝)에만 치중하여 실용성이 없는 폐단이 있는 것에 대해, 경학(經學)과 시무(時務)를 묻는 시험과목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셋째, 잦은 과거 시험 때문에 합격자가 너무 많아 붕당이 형성되는 폐단이 있으므로 과거시험을 줄여야한다고 하였다.

 

성호는 농업을 기본산업으로 하여, 근검과 절약을 강조하는 절제를 바탕으로 상업을 억제하고 돈의 유통을 막고, 백성을 편안히 살도록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성호는 고향인 안산(安山)의 농촌에서 일생동안 농민들과 지내면서 농촌사회의 경제적 몰락을 실지로 체험하였다.지배층의 가혹한 수탈과 상업(商業)·고리대자본(高利貸資本)으로 비농민(非農民)의 농지 소유가 늘어나는 반면, 농민들이 토지로부터 이탈되자, 적은 농사를 짓는 농민을 구제하는 토지 제도로 한 가구당 오늘날의 1,500평에 해당하는 50묘 정도의 영업전(永業田)을 한정하여 기본적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균전론(均田論)’을 제시하였다.

 

성호는 가혹한 노비제와 서얼차별의 사회상을 비판하였다. 천인도 과거에 응시하게 하여, 다양한 인재를 등용시키고, 노비의 수를 줄여 양인(良人)이 늘어나면 국가의 조세와 부역 또한 많아져 국가의 재정이 확대될 수 있다고 하였다. 성호는 검소하고 간소한 생활의 예를 강조하여 사리의 분별과 겸손하고 근검 절약하는 예(禮)와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분수에 맞는 예식을 치르도록 주장하였다.성호의 이러한 제도개혁안들은 이상론(理想論)이 아니라, 당시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대안 (代案)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성호 이익의 학문의 계승과 발전

 

그의 학문세계는 타락한 정치와 피폐해진 경제를 개혁하고 통치 체제를 개혁하려는 실천적 방안들이 제시된 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 바로 그것이었다.성호는 위로 퇴계 이황(李況)을 학문의 종장(宗匠)으로 사숙(私淑)하였으며, 율곡 이이(李珥)와 반계 유형원 과 큰 댁 상숙인 태호 이원진의 학문에도 영향을 받았다. 특히 유형원은 성호에 앞서 실학적 사상을 개진한 인물로 성호와는 성이 다른 6촌의 친척 관계에 있었다. 성호는 반계의 사후에 그의 전과 문집 서문을 지어 두 집안의 세의를 보이고 있다. 성호는 또한 지봉유설을 남긴 이수광의 가문과도 혼인을 통한 세교가 있었다.

 

이상과 같은 성호학과 사상의 계승적 측면 외에도, 성호에 대한 정치적 사승은 오광운 · 강박 · 채제공 등으로 이어졌으며, 문학 방면에서의 사승은 성호의 조카였던 이용휴를 중심으로 안산 일대의 남인 · 소북계 문사들에 의해 이어졌다. 이용휴 · 유경종 · 강세황 · 조중보 · 허필 · 최인우 · 신광수 · 임희성 등 "안산15학사"는 대부분이 성호의 문하생들이었다. 또 안산에서 직접 수학하지는 않았으나 정조 연간에 활약한 대표적인 남인계 문인인 정범조 · 이헌경 등도 성호학파의 영향을 일정하게 받았다. 특히 혜환을 중심으로 하는 문인 그룹은 서울의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문인 그룹과 함꼐, 18세기의 가장 수준높은 문학적 성과를 드러내었다.

 

성호의 학문은 제자들 뿐 아니라 성호와 같은 시대를 살면서, 학문적 · 문학적 교류가 있던 남인 소북계 인물들에게 우선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인물 몇몇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성호의 문인들은 대체로 근기남인계의 문사들과 여주이씨 일문으로 경ㄴ학에서부터 서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쳐 학문활동을 펼쳤는데, 모두 당대의 뛰어난 선학들이었다. 근기남인 학자들로는 윤동규 · 안정복 · 신후담 · 권철신 등이 있고, 이 학맥은 다산 정약용에게 이어졌다.

 

성호는 모든 학문분야를 설립하여 18세기 우리나라 사상계에 새로운 방향을 열고 실학의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지만, 그의 학문과 사상은 보수와 진보의 양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문하에 안정복과 권철신으로 대표되는 두 갈래 경향을 낳게 되었다. 즉, 주자 성리학적 입장을 고수하며 경학 연구에 치중했던 안정복은 온건주의를 대표하는 우파로써, 이후 황이곤 황덕길 부자를 거쳐 성재 허전으로 그 학풍이 이어졌다.

 

반면 양명학 · 서학 · 천주교 등에 경도되어 반주자학적 성향을 보인 권철신은 급진주의를 대표하는 좌파로써 손암 정약전으로 이어지고 다산 정약용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성호 기념관


2002년 5월에 개관한 기념관은 안산시 상록구 이동 성호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9,246m², 의 부지에 지하1층, 지상2층, 연면적 1,483m² 규모로 건립되었습니다. 기념관은 성호 이익 선생이 생전에 남긴 친필과 저서 등 성호의 학문과 사상에 관련한 유물을 전시한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관, 선생의 일대기를 영상으로 구성해 상영하는 영상관 및 실학과 관련된 주요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실학정보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기실학 전자지도, 안산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컴퓨터 안내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주요 전시 유물로는 선생의 친필 시고 및 간찰, 성호선생문집 등의 저서와 퇴계 이황, 미수 허목, 반계 유형원, 다산 정약용 등의 저작물 등을 들 수 있으며, 복제가 아닌 실제 유물을 중심으로 구성됐고 특히 개인이나 종중에서 소장하던 상당수 미공개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성호기념관에는 문화관광해설사가 항시 대기하여 상세한 해설을 통해 관람객의 관람편의를 도모하고 있으며, 단체관람객의 경우 예약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문화교육의 장으로 자리잡고 있는 성호기념관은 안산시의 명소입니다.

 

■이익선생묘역


 -위        치 : 안산시 상록구 일동 555번지
-주 요 시 설 : 성호 선생 묘소, 재실(齋室), 사당(祠堂), 안내판
-문화제지정번호 : 경기도기념물 제40호
-봉 분 규 모 : 6m×5.5.m×2.2.m


성호 이익 선생과 두 부인을 합장한 묘이다. 묘소는 성호기념관 북쪽 건너편, 수원 인천간 산업도로가 잘 보이는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성호 묘역과 그 주변 지역은 원래 성호 집안의 선산이었던 곳으로, 안산이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선생의 묘소를 빼고는 조상과 후손의 묘는 다른 지역으로 이장되었다.


묘비는 오석(烏石)으로 선생 사후 204년이 지난 1967년에 후손에 의해 세워졌다. 묘갈명은 정조시대의 명 재상이었던 번암 채제공이 지었다.묘 오른쪽으로는 1980년대 초에 건립된 재실과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재실의 명칭은 경호재(景湖齋)라 하고, 사당의 명칭은 첨성사(瞻星祠)라고 하는데, 편액의 글씨는 한학자인 청명 임창순(靑溟 任昌淳) 선생이 썼다.

 

◎성호공원


-위        치 : 안산시 상록구 이동 615번지 일원
-주 요 시 설 : 호기념관, 안산식물원, 단원조각공원, 관리사무소, 주차장, 축구장, 롤러스케이트장, 놀이터 등

 

안산 최대의 공원으로 수인간 산업도로를 끼로 전개되어 있는 다목적 시민공원이다. 부곡동, 성포동, 이동에 걸쳐 있는 성호공원은 소나무와 28종의 다양한 수종과 자산홍등의 관목이 심어져 있다. 넓은 공원 면적과 편리한 주차공간을 갖추고 있다. 축구장을 비롯하여 롤러스케이트장이 있으며, 조깅과 산책을 위한 보행자전용도로, 지압장, 분수대 등도 설치되어 있다.


성호공원안에는 성호기념관, 안산식물원, 단원조각공원 등이 위치하고있으며, 뛰어난 조경과 공원 곳곳에는 고인돌, 공룡발자국화석, 성호시비 등 볼거리가 공원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안산을 대표하는 시민쉼터이다.

 


◎단원조각공원


-위       치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이동 615
-부 지 면 적 : 약 66.116㎡
-중 심 광 장 : 약 3.689㎡ (단원조각공원만의 독창적 공간)
-기 타 사 항 : 조각작품(31점), 단원 풍속도 부조벽화(22점)


인간 · 환경(자연) · 예술의 만남 지역문화의 해를 맞이하여 2001년 11월 24일에 개장한 단원조각공원은 수원과 인천을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연결하는 수인산업도로의 IC부근, 안산시로 진입하는 주요 관문로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성호기념관과 식물원이, 북쪽에는 다목적 체육시설이 인접해 있어 인간, 자연(환경),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문화, 레저활동의 복합테마문화공간이다.


평화롭게 이어지는 산책로 주변에는 단원의 명성과 참여작가들의 휴머니즘적 예술혼이 담겨진 조각작품 30여점이 놓여있고 단원의 도시 상징성이 부여된 중심광장에는 김홍도선생의 풍속화를 현실감 있게 표현한 22점의 부조벽화가 설치되어 있어 방문객들에게 정서적 풍요와 미적인 향수(享受)를 즐길 수 있는 예술공원으로 기억될 것이다


◎안산식물원


-위 치 : 안산시 상록구 성호로 113 (이동)
-규 모 : 총 3개동 2,084㎡ (484종 30,215본)으로 구성


식물들이 자리하고 있는 안산의 최대 식물나라 당신을 안산식물원의 자연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 전시 1관 (열대식물원)


열대기후에서 볼 수 있는 식물들을 모아 놓은 곳으로 이국적인 분위기에서 사진에서나 볼 수 있던 식물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다. 열대식물 전시관은 신비롭게 보이는 피라미드형 유리온실로 온도, 관수, 창문의 개폐 등이 자동 조절되며, 야자류, 초화류, 선인장류 등과 같이 열대에서나 생육이 가능한 식물 130종 2,333 본이 전시되어 학습효과가 뛰어나다.

 

- 전시 2관 (중부식물원)


우리 꽃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키워주면서 야생화와 수목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 온도, 관수, 창문의 개폐 등이 자동으로 조절된다.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직접 눈으로 보고 관찰 할 수 있는 온실로 향기 식물인 천리향과 거미줄바이솔, 자태가 아름다운 구절초, 메꽃버섯부치 등의 177종 11,585본 그리고 희귀식물인 설악산의 “주목”도 볼 수 있다.

 

- 전시 3관 (남부식물원)


우리 나라 남부지방에서 자생하고 있는 나무와 야생화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온도, 관수, 창문의 개폐 등이 자동조절 되며, 남부지방에서 자생하는 희귀식물 및 수목 177종 16,297본이 식재되어 있는 곳이다.


 

◎노적봉 인공폭포

 

-위 치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성포동 산 39-1번지 일원
-규 모 : 645,863( 195,373평 )
만남의 광장, 폭포 및 분수, 상장광장, 수변테크, 장미원, 철쭉원, 인공암벽, 야외무대, 주차장, 순환산책로, 매점,관리사, 화장실


노적봉은 수리산에서 떨어진 낙맥으로 안산읍치의 청룡말미에 해당되며 높이는 해발 143m이다. 노적봉이라 부르게 된 유래는 옛부터 어업을 생계로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바다에 나가기전 반드시 사해 용왕과 산신에게 무사할 것을 기원하기 위해 당집을 찾았는데 어느날 당집에서 치성을 드리던 무녀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너희가 매일 나에게 드리는 정성이 모여 산만큼 커질것이니 이 산의 이름을 노적봉이라 부르라’ 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산의 모양이 노적가리를 쌓아 놓은 듯하여 노적봉이라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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