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앞을 지나다가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가 담벼락에 분필로 낙서를 해 놓았다.
“○○는 ○○를 좋아한대요. 얼레리 꼴레리”
“알나리 깔나리. ○○도 ○○를 사랑한대요.♡”
며칠 전, 작은 아이의 여자 친구인 지희와 아영이가 우리 집에 놀러왔었다. 그런데 평소 작은아이를 정말 좋아해 온 지희가 느닷없이 “아줌마, 아영이가 승훈이를 무지 사랑한대요.” 하고 놀리듯, 일러바치듯 내게 말을 했다. 지희의 행동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은 7년 전,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지희가 우리 작은아이를 굉장히 좋아했던 것을 누구보다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다양하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간혹 남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기도 하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사랑이야기에 무척 관심이 많다. 우리 조상들도 사랑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많은 설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나는 연인들의 사랑이야기를 할 때면 먼저 춘향이와 이몽룡을 떠올린다. 다음으로 서동(薯童)왕자와 선화(善化)공주를 손꼽는다. 이 밖에도 역사에는 다양한 커플이 많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결혼을 하고 싶어 애를 태우는 모습에서 참사랑의 의미를 한번 새겨보곤 한다. 남의 사랑을 두고 왈가왈부 할 수는 없지만 사랑의 의미만큼은 성(性)이 대책 없이 개방된 정보화 시대에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본다.
자기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취하는 여러 가지 행동이나 방법에 대하여 탐구해 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방법을 살펴보면 크게 적극적인 경우와 소극적인 경우로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서동왕자는 적극적인 사랑의 구애를 한 것이 아닐는지.
백제의 무왕(제30대) 장(璋)은 -마를 캐는 아이라는 뜻으로 ‘서동’ 또는 ‘맛둥’이라 불림-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아 승려처럼 위장하여 신라의 서울로 왔다. 그리고 동요를 지어 입에서 입으로, 거리에서 거리로, 마침내 대궐에까지 알려지게 퍼뜨렸다. 벼슬아치[百官]들의 탄핵으로 귀향 가는 공주를 맞아 아내로 삼았다.
선화 공주님은 / 남몰래 시집 가 두고 / 맛둥[薯童] 도련님을 / 밤에 몰래 안으러 간다네
그러나 자신의 사랑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 나는 생각을 해본다. 먼저 부정적인 측면에서 살펴본다. 서동의 행동은 매우 이기적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겨 선화공주가 겪게 될 아픔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한 순간이라지만 어떻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게 만들 수 있는가. 당사자인 공주의 마음은 전혀 개입되지 않은 혼자만의 사랑이고 서글픈 짝사랑이다.
반대로 긍정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서동은 자기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지혜롭게 행동했다. 그런 방법이 아니었다면 서동이 선화 공주와 결혼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비록 잠시 곤경에 빠지긴 했지만, 결국 선화 공주도 서동을 만나 행복해졌으니까 그 과정에서 일어난 아픈 일들은 모두 이해하고 용서했으리라.
나에게도 애틋한 짝사랑의 추억이 있다. 중2 때였다. 같은 반 남학생을 남몰래 흠모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속앓이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쉬는 시간에 세면장에 다녀오는데 한 여학생이 내 곁에 다가와 팔짱을 끼었다. 그날따라 그 여학생은 나에게 다정한 척 하더니 교실 앞문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내 팔뚝을 꼬집었다. 나는 얼떨결에 “아얏!”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교실 안에서는 내가 좋아하던 남학생이 짝꿍에게 옆구리를 꼬집혀 “아-악!” 비명을 질렀다. 이건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보다는 뭔지 모를 음모 같았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그를 의식하면서도 편지 한 장 써서 건네지 못한 숙맥이었다.
고입시험을 치러 대구로 향하던 날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서 차창에 달린 거울을 통해 바로 내 앞에 앉은 그 남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순진하고 어설픈 나의 사랑 방식이었다.
고1 때, 어느 초여름 날이었다. 자취를 하는 내 방에 내 팔뚝을 꼬집었던 그녀가 찾아왔다. 그녀는 내가 큰소리로 부르면 들릴 정도로 지척인 바로 옆집에서 자취를 했다. 그녀가 대뜸 갈 곳이 있다고 함께 가자고 졸랐다. 아무것도 모른 체 그녀와 함께 찾아간 곳은 그 남학생이 자취하는 집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속마음을 한번도 드러낸 적이 없었기에 몰랐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나의 아픈 곳을 찌르는 송곳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현명하고 내가 어리석고 순진한 바보였으리라. 나는 사랑을 표현할 줄도 몰랐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곰 같이 미련했다. 그게 전부였다.
대학생이 되어 다시 그녀와 그 남학생을 만났을 때는 두 사람이 아주 가까운 사이인 듯 했다. 나는 그를 꿈속에서만 그리워했을 뿐이었다. 그땐 나를 좋아하는 같은 전산학과의 또 다른 남학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가슴 속에는 사춘기 시절의 아련한 짝사랑에 대한 아픈 기억만큼은 지울 수가 없었다. 또한 나를 좋아하는 남학생조차도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가지지 못한 채 만났다. 그것은 끝내 두 사람에게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다.
사랑은 용기 있는 사람만이 미녀를 취한다고 했던가. 내 팔뚝을 꼬집었던 그녀는 적극적인 구혼 작전을 펼쳤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좋아했던 그 남학생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십팔 년이 지난 어느 날, 동창회에서 그 남자는 그녀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를 보는 순간 낙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것이 나을 뻔 했다. 그는 예전에 내가 가슴 졸이며 애타게 바라보던 그런 모습이 더 이상 아니었다. 그를 만나기전에 부풀었던 환상의 꿈은 그날 워그르르 깨어졌다. 그는 나를 피하기만 했다.
또한, 나를 간절히 원했던 같은 반 다른 남학생의 사랑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까닭에 나는 그 두 남자를 바라볼 이유가 없었다. 나는 서동처럼 적극적이고 지혜로운 사랑의 표현과 애정공세를 할 줄 몰랐던 나의 실패한 사랑이야기를 내 아이들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둘 다 남자니까 통하리라 믿는다. “운명은 용기 있는 자를 선택하듯, 사랑도 쟁취하는 사람의 것이다.” 라고 말이다.
‘아름다운 공주님, 선화 공주님! 마동이와 노닐다가 궁궐로 돌아가던 당신처럼 캠퍼스에 소문을 퍼뜨린 지금의 남편과 14년 전 화촉을 밝혀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명문가인 진주 강씨(晉州 姜氏)의 문중에 들어와 강이식(姜 以式) 장군(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의 28대 후손을 당당하게 이었습니다.’
가끔 남편과 함께 아련한 추억을 찾아 캠퍼스에 가면 아직도“숙이는 석이를 사랑한대요. 얼레리 꼴레리” 하고 소리친다. 그 메아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2005.4. 초고.
긴 글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으셨다니 고맙습니다. 한데, 사랑이란 두사람이 함께 사랑하면 좋겠지만, 만약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사랑한 경우라면 어느 쪽이 행복할까요? 사랑을 하는 쪽, 아니면 사랑을 받는 쪽? 내가 원하는 사람, 아니면 나를 원하는 사람?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서두...
첫댓글 재미있고, 아름다운 추억, 동화같은 이야기네요. 자랑할 아무런 추억이 없는 난 무처이나 부럽고, 셈이 날 지경이군요.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
긴 글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으셨다니 고맙습니다. 한데, 사랑이란 두사람이 함께 사랑하면 좋겠지만, 만약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사랑한 경우라면 어느 쪽이 행복할까요? 사랑을 하는 쪽, 아니면 사랑을 받는 쪽? 내가 원하는 사람, 아니면 나를 원하는 사람?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서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