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 짜 : 2022. 12. 11 (일)
■ 산 행 지 : 안산 (서울 서대문구)
■ 코 스 : 독립문역5번출구~서대문형무소역사관~한성과학고 뒤~북카페쉼터~전망대~기원정사 뒤~전망대~신연중 뒤~
메타세콰이어숲~잣나무숲~숲속무대~무악정갈림길~능안정~금화터널 상단~전망대~독립문삼호아파트~독립문역
<안산자락길 완주(순환)>
■ 거 리 : 7.90km
■ 소요시간 : 2시간 47분 (10:50 ~ 13:37 / 간식 및 휴식시간 포함)
■ 날 씨 : 하늘은 맑았으나 깨스가 많이 참
■ 참석인원 : 16명 <김준호,남기구,박상욱,박재원,박태봉,배종목,변규현,서상택,신현국,오상직,윤 탁,이상교,이효석,조민규,
황천성,전호열(비회원)>
■ 기 타
산행 후 독립문역 인근 '동영숯불갈비'에서 푸짐하게 먹었습니다. 남기구회원이 아들 혼사 양주(시바스리갈) 1병을 선물 하였고,
비회원으로 참여한 전임 재경44동기회장께서 5만원을 기부하였습니다
독립문역 5번출구에서 바라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담장 모습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형무소는 일본제국주의가 지은 근대식 감옥이다
1908년 10월에 문을 열어 1987년 11월에 폐쇄될 때까지 80년 동안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옥사는 붉은 벽돌로 지어졌고 수감자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원형 감옥 형태인 패놉티콘 구조로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 지배에 맞섰던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갇혔으며, 해방 후에는 독재 정권과 군사 정권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가들이 갇혔던 역사의 현장이다.
1908년 10월 경성감옥으로 설치
1912년 9월 서대문감옥으로 명칭 변경
1923년 5월 서대문형무소로 명칭 변경
1945년 11월 서울형무소로 명칭 변경
1961년 11월 서울교도소로 명칭 변경
1967년 7월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87년 11월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뒤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고려하여 보안과 청사, 제9~12옥사, 공작사, 한센병사,
사형장 등을 남겨 두고 나머지 시설은 모두 철거되었다.
이후 서대문구에서 현장을 보존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1998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과거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의 자유와 평화를 향한 신념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우측으로 한바퀴 돌아서 안산자락길로 들어갈 예정이다
안산을 바라 보면서..
공원 끝에 보이는 건물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외곽을 돌아서 빠져 나오고 있다
전망대에서 본 인왕산 모습이다
성곽길이 선명하게 보인다
안산자락길은 누구나 걸을 수 있게 잘 정비되어 있어서 편하게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안산자락길의 절반에서는 계속 인왕산이 잘 보인다
예쁘게 잘 단장된 길..
전망대에서 본 북한산 모습
쉼터에서 막걸리 한 잔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특히, 변규현 친구가 가져온 배추전은 그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
아직까지 걷는 모습이 청년과 다를바가 없어 보인다
친구들 만나서 보내는 시간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오늘 기온은 트레킹하기에는 참 좋은 날씨 같은데 미세먼지가 많아서 깨끗한 전경을 볼 수가 없다
승전봉을 배경으로 그 흔적을 남겨 본다
능안정에서..
전망대에서 본 인왕산과 그 뒤 북한산 전경
전망데에서 본 안산 정상 봉수대 모습
전망대에서 기념 사진
독립문 獨立門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세운 문(높이 14.28m, 너비 11.48m).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자리에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하여 지은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모화관慕華館과 영은문迎恩門
모화관은 조선에서 중국사신을 영접하려고 지은 건물로 중국 사신이 머물던 숙소라고 할 수 있다.모화관에서 조선임금이 중국(명,
청) 황제가 보낸 사신을 맞이하고 떠나 보냈던 장소이다. 모화관의 모화慕華는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이고, 영은문은 모화관 앞에
세워진 문으로 영은迎恩은 은혜를 베푼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큰 나라를 섬긴다는 조선의 사대주의 정책에 따라지어
진 것이다.
▪영은문을 독립문으로,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1895년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킨다.청나라가 패하자 조선은 더는 청나라를 섬기는 나라가 아니
라 자주독립국가임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대주의 상징이었던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을 세워야 한다는 운동이 벌어졌다. 1896년 독립신문을 발간항 서재필을 중심으로 ‘독립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영은문과
모화관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모금 운동을 벌려서 1896.11.21 공사를 시작하여 1년만인 1897.11.20일에 독립문을
완공했다. 독립문 모양은 프랑스 개선문을 본떠 서재필이 스켓치 했다. 그리고 모화관은 독립협회 집회 모임장소인 독립관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독립문의 의미 변화
독립문이 완공되기 한 달 전 쯤인 1897년10월 고종이 독립협회 지원에 힘입어 ‘대한제국’을 선포한다.이로써 독립문은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었다. 이처럼 독립문 건립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볼 때 독립문은 일본이 아닌 중국(명,청)으로
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 졌으나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강점기가 길어 지면서 일제로부터
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그 의미가 변해 갔다.
▪독립문 이전
1979년 성산대로를 건설함에 따라 원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떨어진 현 위치로 옮겨졌다
뒷풀이 장소 '동영숯불갈비' 식당 앞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집' 모습
이곳은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를 옥바라지했던 가족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살았던 동네를 기억하는 작은
전시공간이다. 가족과 주고받았던 옥중 편지와 옥바라지 일화, 과거 서대문형무소 주변 동네였던 무악재 골목의 옛 풍경 등을 통해
삼천리 강토 전체가 감옥이었던 일제강점기 ‘옥바라지’의 의미를 되새기는 공간이다.
뒷풀이 장소인 '동영숯불갈비'식당
푸짐한 뒷풀이 음식을 먹으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우정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일부 회원은 곧바로 뒷풀이 장소로 와서 흔적을 남기려고 함께 인증샷을 날려 본다
아무것도 볼게 없는 도로에서 인증샷을 찍는 사람은 처음일거 같아..
첫댓글 재원친구덕분에 추억을 되돌리수 있구나 감사하고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