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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요한복음3장1~12절
제목 : 중생의 도리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암 부스 대장은 그 시대의 기독교회들에게서 본 위험 요소 6가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① 성령 없는 종교 ②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 ③ 회개 없는 용서
④ 거듭남 없는 구원 ⑤ 하나님 없는 정치 ⑥ 지옥 없는 천국윌리암 부스가 지적한 이와 같은 위험 요소들은 현대 교회에도 신기할 정도로 딱 들어맞습니다.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 빌리 그래함은 "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가장 큰 위험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거짓된 종교라고 본다.
...교회 안의 수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하지만,
마음은 그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은 결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고, 거듭나지도 못했으며, 회심하지도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 안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거듭남은 신분의 변화가 아닙니다. '상태의 변화'입니다.또한, 거듭남은 개종이 아닙니다. 개종이란 종교를 바꾸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종교를 불교에서 기독교로 바꾸었다고 해서 그가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부분적인 개선이나 변화가 아닙니다.
거듭남은 전체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기독교 교리의 진수인 중생의 교리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1.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1) 니고데모(1절)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니고데모’는 헬라식 이름의 뜻은 '백성의 정복자'로서, 공관복음서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본서에서는 세 번에 걸쳐 나타납니다(7:50;19:39).
요한이 전해 주는 바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1)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도록 '몰약과 침향을 섞은 백 근'(19:39) 정도를 선뜻 내놓는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2) 엄격한 유대교를 신봉(信奉)하는 종파인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백성 되는 자격이 아브라함을 통해 계승되는 자연적, 육적 출생에 있음을 강조한데 반해,
예수님은 영적 중생을 강조하셨습니다.
(3) 그는 유대인의 관원입니다.
관원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을 가리키는데,
산헤드린은 그 당시 유대인의 최고 종교 회의 기관으로 그 구성원의 수는 71인으로 알려졌으며, ①고위 사제들과 ②율법 학자들과 ③원로들(다른 말로 하면 백성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니고데모가 그러한 사회적 고위층에 속해 있으면서도 친히 예수님을 방문한 사실은, 매사에 편견(偏見)이 없고 사리가 깊었음을 보여줍니다.
(4) 그는 조상들의 율법에 정통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율법 교사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5)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10절).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2)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께 와서 대화를 나눕니다(2절).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밤에 예수님께 와서.
니고데모가 굳이 밤에 예수님을 방문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1)타인의 이목이 두려워서
(2)분주한 낮 시간을 피해 예수님과 친밀한 대화를 오래도록 나누기 위해,
(3)밤늦게까지 연구하고 논쟁하였던 당시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서,
등 여러 견해가 있으나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쨌든 이는 니고데모의 신중성을 보여줌과 아울러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은 19:39에서 다시 한 번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실을 언급합니다.
니고데모는 안드레와 요한 그리고 나다나엘과 마찬가지로(1:38, 49)
예수님을 '랍비'라 부름으로써 대화(對話)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특히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른 것은 유대의 상층 계급에 속한 사람으로는 처음 있었던 일이요 따라서 예수님이 이미 그러한 계층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이상의 존재
즉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모세, 예레미야, 세례 요한 등과 같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의 신적 본성을 나타내고 있다고까지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이,
예수님이 과연 대망의 메시야인가 하는 의문을 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니고데모의 방문의 주목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한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표적을 통해서입니다(2:23).
*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그러나 표적 자체로서는 참된 구원의 신앙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표적들을 통해 예수님의 탁월하신 교훈 능력을 인정하였던 것은 중요한 통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예수님의 교훈보다는,
표적 자체에 더 큰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4절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중생의 교훈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하는 가능성 자체를 놓고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9절에서는 일단 그 가능성만은 인정한 상태에서 그 방법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자 하여 재차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겔 36:25-28 등에 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과 중생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유대교의 간과(看過)와 무시 때문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됩니다(10절).
사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들은 하나의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창 17 :1-8) 자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 지극히 생소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영생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이 단순한 추상적 지식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엄연한 진리임을 분명히 하고서,
이를 선포적 차원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기실 이러한 신령한 지식은 성령의 조명을 통한 믿음의 눈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비밀에 속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중생의 진리를 찾아 묵상하는 중에 은혜를 받으시기를 소망 합니다.
2. 중생의 의미.
1)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한 번은 어머니의 모태에서 육으로 나고,
한 번은 영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7]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남은 니고데모가 착각한 것처럼 육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인간에 대해 "사람은 영이고, 혼을 가지고 있으며 몸 안에 산다."고 하면서 거듭남은 "인간의 영의 재탄생"이라고 말했습니다.
진실로 거듭남은 영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놀란 것은 중생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민족적, 신분적 구분도 없이,
모든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3절).
따라서 이 원칙은 율법의 준수자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도 물론 적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중생은 생물학적 의미가 아닌 영적인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창2:16~17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아담과 하와는 그 실과를 따 먹었습니다(창3:6).
그런데 무엇이 죽었습니까? 죽은 것은 육(肉)이 아니요 영(靈)입니다.
영(靈)이 죽었다함은
(1)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2) 의와 진리와 거룩함이 없어 졌고,
(3) 선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성향이 없어졌고 선의 의지를 상실하였고,
(4) 그러므로 생명(生命)에서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5:24,25“[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살아난다는 것입니까?
죽었던 영(靈)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영적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전15:44~49 “[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45]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48]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3)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창조시에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창1:27~28)이 범죄로 인하여 파괴되고 상실 되었습니다.
*창1:27~28“[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고,
엡4:22~24에는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4)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입니다.
요 1:12-13을 찾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이 외에도 요한일서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 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묘사한 말입니다.거듭남은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출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듭남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가져다줍니다. 첫째는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본성'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듭남을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증여 받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요일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씨"라는 의미심장한 단어가 나옵니다.거듭난 자 속에는 하나님의 씨가 거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씨 때문에 습관적으로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씨"는 무엇일까요?
식물이나 동물이나 다른 모든 생명체의 씨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씨 역시 두 가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첫째는 생명이요, 둘째는 본성입니다.그러므로 거듭난 자 속에 하나님의 씨가 거한다는 말은,
거듭난 자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본성이 거한다는 말입니다.이것은 당연하며 피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은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입니다. 행 26:18 / 고전 6:11 / 고전 7:14 / 살후 2:13 / 벧전 1:1-2 / 계 20:6.
*살후 2: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6) '인간의 재창조'입니다. 고후 5:17 / 갈 6:15 / 엡 2:8-10을 찾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3. 중생의 수단(5)
중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에 대한 정답은 예수님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5절입니다.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였습니다.
물과 성령이 세례와 관련해서 나란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1:26,31;마3:11;막 1:8;눅 3:16).
*1:26,31 “[26]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31]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막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눅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성령'에 대해서는 해석상에 별반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물' 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로 엇갈립니다.
즉 혹자는 이를 '세례 요한의 세례' 혹은 '기독교의 세례' 와 관련시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연적 출생'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 구절의 강조점은 어디까지나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아야 무방할 것입니다.
물은 깨끗하게 하는 상징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희생 제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특별히 제사장은 몸을 씻지 않고서는 언약의 피를 갖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를 촉구하였고,
이러한 촉구를 받아들여 죄를 회개한 자에게는 물로 세례룰 주었습니다.
한편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은 물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성령의 선물을 받았습니다(행10:47,48).
*행10:47,48 “[47]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48]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에디오피아의 내시도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추측해 불 수 있습니다(행 8:26-39).
결국 '물'이 무엇을 나타내든 간에 본절의 의미에는 큰 변화가 없습니다.
물을 자연적 출생으로 볼 경우에는, 사람은 육적 출생 뿐 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 출생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증거하고자 했던,
성령 세례를 통해 중생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이를 기독교의 세례와 연관시킨다면,
본문은 중생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곧 성령 세례를 통해 이루어지며,
물세례는 이 사실에 대한 공적 선포(宣布)이자 상징적 의식으로서의 의의를 지님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물은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이에게 베풀어지는 세례 곧 깨끗하여지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4. 중생의 필요성
중생은 왜 필요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에 대한 분명한 정답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존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1) 중생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3절).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기도, 제사, 세례로써 유대교에 개종하면 그를 중생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인 들 조차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서,
어느 한 부분만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본성이 새롭게 되는 사건(Calvin)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이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적 생명을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리는(고후 5:17) 성령의 역사로서(엡 2:5),
성령 혹은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엡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따라서 중생은 육에 속한 자연인의 지(知), 의(意), 정(情)을 항상,
계발(啓發)하는 것이라기보다,
근본적이며 전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병든 자가 회복(回復)하는 것과 같이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즉각적인 변화입니다.
2) 중생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5절).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중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5. 중생의 성격(8절)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를 바람으로 비유했습니다.
1)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리를 통해 그리고 그 결과에 의해 그 실재성을 보여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존재 또한 거듭난 사람의 구체적 행실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변화들을 통해 인식되어질 수 있습니다.
폘돈(Fenton)에 의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원(起源)과 운명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두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평범한 이성으로써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결과 다음 몇 가지를 비롯하여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계3:20,골1:27).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골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 모든 죄는 사함을 받습니다(골1:14).
*골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3)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요1:12).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4)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5:24).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5)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풍성한 새 삶이 시작됩니다(요10:10,고후5:17)
*요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속사람이 변화된 사람은
이전의 죄악된 습성들을 자연히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여야 합니다.
감사는 믿음의 표현입니다(살전5:18).
2) 현대의 과학을 총동원해도 바람이 어디서 생겨나 어디로 향하는지를 정확히 규명하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 또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기원을 헤아릴 수 없으며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께서 곧 하나님과 동등 된 분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분임을 알 따름입니다.
6. 중생의 삶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그 사람은 중생의 결실로서 삶에 변화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적존재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육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5:22,23)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은 오직 성령의 열매를 맺는 그들의 영적 삶을 통하여 확인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통하여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편지, 상속자, 왕같은 대 제사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통하여도 나타납니다.
마음에 소금을 두어 화목하며, 참고 선을 행하며,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중생의 삶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거듭남은 ①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②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③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④'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입니다.
⑤'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입니다.
⑥'인간의 재창조'입니다
중생은 세상의 학문으로나 인격으로 안 되는 특이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주인공 니고데모는 세상적으로 모든 것을 고루 갖춘 사람입니다.
1) 그는 당시 상류계층인 바리새인(3:1)이었습니다.
그는 엄격한 율법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으로 중생하지 못했습니다.
2) 그는 유대인의 관원(3:1)이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중생하지 못했습니다.
3)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3:10)이었습니다.
그는 학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중생하지 못했습니다.
4) 그는 부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습니다(19:39). 그것은 대단한 금액입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부요가 중생에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①율법의 지식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② 권력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③ 학식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④ 재물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이미 다 갖추었습니다.
다만 성령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하늘나라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2절)”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