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는 도쿄(東京) 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당(朝鮮靑年獨立黨) 명의로 발표한「독립선언서」이다. 이광수(李光洙)가 기초하였는데, 「3·1선언서」의 기본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선언서 600매, 청원서 1,000매를 인쇄하여, 선언서를 소지하도록 한 후 송계백(宋繼白)을 서울에, 이광수를 상하이(上海)에 파견하였다. 선언서는 이념과 사상을 선언과 결의문의 형태로 천명하였다.
선언서에서는 첫째, 조선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민족의 실질적 지배를 받은 경우가 없는 민족이라고 선언하고, 미국과 영국이 일제의 조선 침략을 승인한 것을 비판하였다. 둘째, 침략의 부당성과 한국병탄 후 10년간의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피력하였다. 셋째, 국제적인 환경을 볼 때, 일제가 지금까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구실로 한반도에 들어왔던 일이 있었을지라도 자신만의 안정을 위하여 한반도를 점령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넷째, 일제가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를 계속한다면 일제에 대해 우리 민족은 영원히 투쟁할 것이며 결국은 ‘동양평화의 화원(禍源)’이 될 것이라고 일본에 경고하였다. 다섯째, 선언서는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모범을 따라서 신국가를 건설하고 반드시 세계평화에 공헌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특히 선언서는 당시의 정세 속에서 기본적인 보편적 세계사의 발전 과정에 따라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현실적 요구와 필요를 담아냈으며 독립의 당위성을 국내외에 선전하였다. 결의문은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선명하게 현실적인 행동강령을 천명하였다. 우선 한국병탄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가 아니고, 우리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협하며 동양의 평화를 교란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독립을 주장한다고 전제하고, 일제의회와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며 만국평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 적용 요구와 아울러 실패할 때에는 일제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할 것을 선언하였다. 여기에 표현되어 있는 민족주의사상은 명확히 민족자결·민족생존의 권리에 의한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고, 그것을 위해 혈전까지도 선언한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2·8독립운동은 강경한 입장에서 끝까지 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한 민족운동이다. 아울러 「2·8선언서」는 국제정세에 대한 탁월함이 보임과 동시에 미국·러시아 등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민족대표 33인
천도교와 기독교는 1919년 3·1운동의 준비단계에서 민족 대연합전선 형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독립선언서의 작성은 천도교 측의 독립선언서 원고 지침에 따라 최남선이 기초하였다.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천도교 측의 오세창(吳世昌)이 총책임을 담당하고, 천도교 직영의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이 담당했다.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오세창의 총책임 아래 천도교, 기독교, 불교, 학생단 등으로 분담하였다. 독립선언서는 그 자체가 독립만세시위를 지시하는 기능과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따라서 적어도 독립선언서가 사전에 배포된 범위까지는 초기 조직단계의 활동가들에 의하여 3·1운동이 사전 조직화된 범위라고 볼 수 있다. 독립선언서가 사전에 배포된 지역은 서울, 평양, 선천, 원산, 개성, 서흥, 수안, 사리원, 해주, 대구, 마산, 전주, 군산 등이었다. 민족대표의 선정은 교단별로 추천을 받았다.
천도교 측에서는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임예환(林禮煥), 나인협(羅仁協), 홍기조(洪基兆), 박준승(朴準承), 양한묵(梁漢默), 권병덕(權秉悳), 김완규(金完圭), 나용환(羅龍煥), 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이종일·최린(崔麟) 등 15명이 선정되었다. 기독교측에서는 이승훈(李昇薰),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오화영(吳華英),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박동완(朴東完), 신홍식(申洪植),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16명이 선정되었다. 불교측 대표로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이 서명·날인했다.
3·1운동은 민족 대표들의 계획, 추진과 전 민족의 참여로써 거족적인 독립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민족 대표들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 아래에서도 3·1운동을 계획하고 조직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제작하고 배포하였다. 이로써 민족 대표들은 3·1운동을 점화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민족 대표들은 3·1운동을 추진함에 있어 확고한 신념의 독립 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민족 대표들의 독립 의지는 일제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잘 나타났다.
손병희는 법정에서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까지라도 계속하여 독립 운동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용운은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하는 일본인 재판장의 질문에 “그렇다. 언제까지라도 그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원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민족대표들의 이와 같은 말은 당시 한국 민족의 독립 의지를 잘 대변한 것이다.
6·10만세운동
1926년 5월 20일 이병립·이선호 등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간부들은 40여 명의 학생들을 모아놓고 순종의 인산일을 맞아 일대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여러차례 투쟁계획을 숙의한 후 6월 8일 경 연세대 뒷산 송림정에서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60여 매를 제작하였으며, 그날 밤 이석훈(李錫薰 : 연희전문)의 집에 모여 격문을 인쇄하는 등 준비를 하였다. 이날 인쇄된 격문은 어렵게 구한 명함 인쇄기로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2천만 동포야, 원수를 몰아내자. 피의 값은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라는 짤막한 것이었다. 이들은 김인오·권오상 등 학생대표자들에게 전단과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학생들을 동원하도록 했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중앙고보생 이동환·박용규·곽대형 등과 중동학교생 김재문·황정환 등의 학생들(통동계)도 거사를 모의하였다. 이들은 5월에 준비를 착수하여 각 학교별 축구시합을 위장하고 동지 50여 명을 규합하였다. 그리고 5월 29일 “조선민중아! 우리의 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라는 격문을 등사판으로 인쇄하였다. 이들 중에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는 학생도 있어, 두 조직은 사전에 서로 접촉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이나 비밀유지 등을 위하여 별도로 거사를 준비하고, 시위도 각기 장소를 나누어 독자적으로 거행하였다.
학생들은 이러한 준비작업 끝에 6월 10일 순종의 인산행렬이 서울 시내를 지나가는 것에 맞추어 시내 요소요소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는 오전 8시 반 경 대여(大與)가 단성사 앞을 지나가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 이선호의 선동으로 중앙·중동고보생 30·4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격문을 살포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연도에 늘어선 수백명의 학생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으며 일반 대중들도 만세를 부르며 동조하였다. 이를 필두로 순종의 장례행진에 맞추어 길목길목에서 잇달아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터져 나왔다. 관수교 남쪽 부근에서는 이병립·박하균의 선동으로 연희전문학생 50여 명이 만세를 불렀고, 을지로·훈련원·동대문으로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오후 2시 20분 경 장례행진이 동묘(東廟)부근에 다다르자 박용구, 이동환, 관대형, 황정환 등 이른바 통동계열의 학생들이 격문을 살포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순종의 인산일을 맞아 벌어진 만세시위는 이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자 고창·순창·정주·군산·울산·평양·홍성·공주 등지로 파급되었고, 당진·홍성·강경·전주·하동·이원에서는 학생들이 여기에 동조하는 동맹휴교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6·10만세운동으로 5천여 명이 연행되었고, 시위행진을 저지하는 일제의 야만적인 폭행으로 160명의 중·경상자가 났다. 한편 이 운동으로 서울에서 검거된 학생은 210 여 명에 이르렀으며 수많은 학생들이 이 일로 무기정학 등의 징계를 받아야 했다.
6·10만세운동은 거의 전적으로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일어났다. 학생들이 이러한 거사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1920년대 독자적인 학생단체의 설립과 잇따라 전개된 동맹휴학 등 그 동안에 이루어졌던 학생운동의 성과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바는 이 운동과정에서 1920년대 국내에 전파된 사회주의계의 영향력이 상당히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당시의 사회주의운동은 민족주의운동과 명확히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학생들의 격문이나 국호에서도 사회주의적 색채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러한 면에서 6·10만세운동은 내부의 이념적 편차가 없지 않았겠지만 이전의 민족주의운동의 틀과 양상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광주학생 항일운동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1월 광주에서 촉발, 해를 넘겨 전국으로 파급되고, 만주·일본 등지에도 영향을 미친 학생들의 일련의 가두시위, 동맹휴교 운동을 지칭한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된 한일학생의 충돌이 일어났다. 이 날 충돌은 학생들이 통학하는 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하였을 무렵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생이 광주여자고보 한국인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다니며 희롱하자 광주고보생이 이를 제지하고 나섬에 따라 시작되었다. 이미 광주고보생과 광주중학생은 여러 차례 충돌한 경험이 있었고, 이 사건을 둘러싸고 또다시 경찰이 편파적인 수사를 하자 광주고보생들은 분개하기 시작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보생들은 일제히 거리로 몰려나와 일대 시위운동을 단행하였다. 일요일인 이 날 등교해서 오전에 명치절 행사를 마친 학생들은 시내로 나와 한·일 학생간의 충돌사건을 왜곡보도한 광주일보를 습격하고 시내 곳곳에서 일인 학생들과 충돌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시위에는 광주농업·광주사범학교 학생들도 합류하였는데, 학생들은 ‘조선독립만세’,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를 외치면서 시내를 활보하였다. 시민들도 여기에 합세해서 시위대는 약 3만 가량이 되었다고 한다.
광주의 학생운동은 일제의 언론통제로 신문에 잘 보도되지 않았으나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면서 시위는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갔다. 학생시위는 11월에 목포·나주 등 전남 인근지역으로 확산되었고, 12월에는 가장 많은 학생들이 모여있는 서울로 파급되었다. 서울에서는 12월 2일과 일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과 일반민중의 총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이 살포되었으며, 5일에는 제2고보 학생들이 동맹휴교와 함께 가두진출을 기도하였고, 7일에는 제1고보와 경신·중동학교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이러한 술렁임 속에서 마침내 12월 9일 서울의 학생들은 대대적인 항일 시위를 단행하였다(제1차시위). 이후 10일에서 13일까지 시위항쟁의 여파로 서울시내 각 학교에서는 잇따라 맹휴가 일어났다. 이에 일제 당국은 12월 13일 조기에 동계방학을 실시하여 학생들의 시위를 잠재우려 했다.
방학으로 잠시 휴지기에 들어갔던 학생운동은 해를 넘겨 1930년 1월 개학이 되자 다시 불붙기 시작하였다. 1월 15일 서울시내의 각급 학교생 5천여 명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내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단행하였다(2차시위). 특히 이날 시위에는 이화여자고보·경영여자상업·숙명여자고보·진명여자고보 등 여학생들이 대거 진출한 것이 특징이었다. 1930년 1월과 2월의 학생시위와 동맹휴교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의 학생들이 밀집되어 있는 거의 모든 도시로 확산되었다. 전국 곳곳에서 학생들은 시위행진과 격문배포, 동맹휴교 등을 전개하였다.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한 학교는 무려 149개 교였으며, 참여 학생수는 약 9만2천 정도였으니 당시 학생들의 참여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준다 할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은 학생독립운동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시가행진을 벌인 것은 광주학생운동이 처음은 아니었다. 3·1운동 때에도, 6·10만세운동 때에도 학생들의 시위행진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학생층은 하나의 대중운동으로서 조직되고 자각된 상태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소수의 자각된 선구자로서 나왔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이때의 동원 양상은 학생대중을 결집하여 학생이라는 사회계층을 글어 들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은 이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학생층은 동맹휴교 등을 통해 자신의 일상적인 삶의 문제를 바탕으로 학생대중을 자각시키고 조직화시켰고, 이것을 바탕으로 학생층을 하나의 대중운동의 역량으로 결집하여 민족운동의 대열에 합류하고, 나아가 이를 선도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은 이처럼 소수의 자각된 학생층의 움직임이 아니라 학생대중의 항일운동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를 부여받을 수 있다.
기미독립선언서
기미 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33명의 민족대표 명의로 발표한 「독립선언서」이다. 제목은 「선언서」로 되어 있으며,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하였다. 3·1운동기에 나온 여러 종류의 「독립선언서」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다. 「3·1독립선언서」또는 「민족대표독립선언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1919년 미국 대통령 T.W.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이 발표되자, 일제의 통치 아래에 있던 한국의 민족지도자들은 이 기회를 포착, 각각 독립운동의 본격적 추진계획을 세웠다.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천도교측 중진들은 독립운동의 실천방법으로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국권반환요구서 등을 작성하기로 하고, 또 거족적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이승훈(李昇薰) 등 기독교측과 한용운(韓龍雪) 등 불교측과 연합하였다. 이렇게 하여 작성된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 15명, 기독교측 16명, 불교측 2명 등 33명이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였다.
「독립선언서」인쇄는 오세창의 책임하에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普成社) 사장 이종일에게 맡겼다.
이 선언서는 종교교단과 학생대표들을 통하여 사전에 전국으로 전달, 배포되었으며 서울 광무황제 국장에 참여한 수만 명의 지방인사들에 의해 지방으로 전파되는 등 거족적 3·1운동의 전개에 결정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 독립선언서는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적·평화적 방법으로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독립의 전개방법을 제시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우리 민족의 독립선언과 독립의 역사적 · 원리적 당위성을 당당하게 밝혔다. 제1소절 6행에서는 우리나라의 국가적 독립과 우리 민족이 자주민임을 선언하였다. 제2소절 4행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치하에서의 피해를 열거하며, 일본제국주의의 본질이 구시대적이며 침략주의 · 강권주의로, ‘신천지’로 대변되는 새시대, 즉 도의의 시대와 대비시켰다. 제3소절 6행은 독립의 필요성과 그 방법에 관한 내용으로서, 시간적으로는 과거(구래의 억울 선양) · 현재(현재의 고통 파탈) · 미래(장래의 협위 삼제)를 통하여 주체 단위별로 민족(민족적 양심 흥분 신장) · 국가(염의의 신장) · 개인(인격의 발달) · 자제(고치적 재산 불유여), 자자손손(경복)을 위해 독립이 필요한 것, 그리고 방법으로는 개개인이 결의를 품고 정의와 인도라는 정당성을 확신하며 나아감으로써 달성할 수 있음을 밝혔다. 공약3장은 행동강령을 담고 있다. 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은 당시 한국사회의 신흥종교였던 천도교계 15명, 기독교계 16명, 불교계 2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림과도 연결이 시도되었으나, 촉박한 시일 때문에 참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유림들은 따로 유림단의 파리장서라고 일컬어지는 「증파리평화회의서」가 작성되어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통해 파리강화회의에 전달되었다.
제암리
제암리는 1919년 3·1운동 때 수원군(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감리교회에서 3·1운동 탄압의 일환으로 일제가 저지른 주민 학살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일제는 주민들을 교회에 감금하고 총격을 가하며 방화하여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24명을 사망하게 하고 일대 주민들에 대해 살육과 방화를 자행하는 등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제암리 주민 대부분은 천도교와 감리교 신자들이었다. 동학농민운동 이전에 이 지역에 동학이 포교되어 동학신자가 많았고, 감리교는 1905년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의 전도에 의해 안종후가 입교함으로써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3·1운동 이 일어나자 제암리 감리교 신자인 안종후와 장안 우정면 시위운동을 주도한 백낙렬, 고주리 김홍렬의 동생 김성열 등은 서울에 올라가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김홍렬은 수촌에 있는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교사, 수촌리 구장과 장안면의 구장회장을 겸하면서 고주리 천도교 전교사였다. 이들은 천도교 순회교사 안종린과 전교사 안종환을 3월 16일 수원으로 보내 중앙총부에서 내려온 이병헌을 만나게 했다. 수원에서 이들은 일제 소방대원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제암리에 내려오는 것을 제암리에 살면서 주민들을 감시하던 순사보 조희창에게 목격 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제암리 주민들을 인근지역 격렬한 시위운동의 중심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4월 1~2일 인근지역 산위에서 일제히 봉화시위가 있었고, 4월 3일 장안면 우정면 주민들의 격렬한 만세시위, 4월 5일 발안장 시위 등 시위운동이 이어지며 관공서 파괴·방화·순사 피살 등 시위의 양상이 다른 곳과 달리 격렬하였다. 이에 4월 15일 조선주차군 보병 제20사단 제79연대 아리다(有田)중위가 이끄는 수비병 11명이 오후 3시 반 발안장을 출발하여 제암리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주민들에게 15세 이상 남자들은 다 제암리 감리교회당 안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주민들은 거듭된 탄압에 그들이 미안하여 주민들에게 위무연설을 하려나보다 하고 교회당에 모여들었다. 주민들이 모여들자 수비대는 교회당을 포위하고 출입구와 창문을 못으로 박아 도망가지 못하게 한 다음 무차별한 사격을 가하였다. 안종환은 어린 아들을 안고 교회당으로 들어갔다가 어린 것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일본군은 어린 아이를 군도로 내리쳐 참살하였다. 이어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안종엽과 김정헌이 교회당 흙벽을 뚫고 사력을 다해 도망하였으나 수비대의 총탄을 맞고 즉사하였고, 안경순도 뒤이어 도망가자 수비대가 쫓아가 칼로 목을 쳐서 죽였다. 초가집이었던 교회당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수비대는 교회당 뿐만 아니라 마을을 돌며 민가에도 방화를 하여 33채의 집중에서 31채가 모두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다. 교회당 안에서는 오직 노경태 한 사람만 구사일생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1982년 제암리 학살현장의 유적은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유관순 열사
유관순은 1902년 11월 17일 천안군 지금의 병천면 용두리(당시는 동면 지령리는 자연부락 명치)에서 유중권(柳重權)과 이소제(李小悌) 사이에 3남 2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공주 영명학교를 2년간 다니다 미국인 순회 선교사 부인 사이러시의 도움과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여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우 6명과 함께 학교 뒷담을 넘어 탑동공원까지 가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거기서 경관에게 붙들렸으나 곧 석방되어 3월 5일 남대문역 앞에서 벌어진 학생단 시위에 다시 참여하고 무사히 기숙사로 돌아왔다.
유관순은 학교가 휴교 상태가 되자 사촌언니인 유예덕(柳禮道)와 함께 3월 8일 고향으로 왔다. 천안에서는 그때까지 만세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3월 9일 주일밤 예배가 끝나 교인들이 흩어진 후 부친의 주선으로 조인원과 그의 친구 이백하(李伯夏) 등 20여명이 있는 자리에서 관순과 예덕은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즉석에서 아우내(竝川) 장날인 4월 1일(음력 3월 1일)을 기해 거사를 하기로 계획했다. 지령리에 총본부를 아우내 장을 가운데 두고 상호 5리 거리에 삼각형으로 있는 수신면 장명리(長命里)와 갈전면 백전리(栢田里)에 중앙 연락기관을 둘 것과 아우내 장을 중심으로 안성·진천·청주·연기·목천 등 여섯 고을을 망라하여 각 촌 각 면의 연락기관을 분담시키는 동시에 유림의 대표들과 한 마을에 수백 호씩 차지하고 사는 대성(大姓)의 문장(門長)들을 움직일 계획을 했다. 연락원은 비교적 의심을 덜 받을 수 있는 애더와 관순이 맡기로 하였으나 몸 약한 사촌 애더가 일찍이 탈락하고 유관순 혼자서 연락일을 담당하였다.
병천 장날을 하루 앞둔 1919년 3월 31년 밤(음력으로 2월 그믐). 동생 관복과 친척 유제한에게 미리 준비해 둔 여러 자루의 홰를 돌려 매봉 꼭대기로 올라가 불을 붙여 들어 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매봉을 중심으로 구밋들(龜坪) 우각산, 강당산, 백적리 돌산, 세성산 등 동서남북에서 24개의 불꽃이 하늘을 밝혔다.
이튿날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로 나섰고 정오가 가까워 오자 3천여 장꾼들이 장거리를 뒤덮었다. 오후 1시 조인원이 큰 태극기를 장터 한가운데 세우고 쌀가마 위에 올라서서 독립만세를 부르자 군중들의 만세소리가 온 마을을 뒤흔들었다. 태극기와 조인원을 선두로 군중은 가쟁이 장터에서 병천 헌병분견소 앞까지 잇따라 만세소리를 높이며 행진해 갔다. 유중권, 김구응, 김상헌, 김구헌, 김교선, 주병호 등이 조인원을 뒤따랐다. 곧 그 뒤에 유관순과 어머니 이씨와 각 고을에서 모여든 군중들이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며 대열을 지어 나아갔다.
헌병들이 해산을 명했으나 듣지 않자 상등병 진상부(溱相部)가 기총(騎銃)을 발포하여 3천 군중이 일단 물러섰으나, 이 발포로 말미암아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과 남씨의 남편이 사망하자 약 40여명의 군중들이 그 시체를 떠메고 헌병분견소로 몰려왔다. 유관순은 "제 나라를 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무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로 대들었다. 1천 5백명의 군중도 함께 몰려와 헌병분견소에 돌을 던지며, 소장을 잡아 끌고 밀치는 등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을 때 천안 헌병분대에서 20여 명의 응원병이 도착하여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19명이 즉사하고 43명이 부상하여 피바다가 되었다. 유관순의 부친에 이어 모친 이씨도 현장에서 숨졌다. 그 날 유관순은 자기 마을로 돌아왔다가 헌병에게 검거되어 헌병 분견소로 끌려갔다.
이후에도 유관순은 서대문감옥에서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고,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아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고 결국,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1920년 10월 12일,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0월 14일 정동예배당에서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유족 3형제와 동창생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영결식이 거행되었고,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그녀의 무덤은 도로개설로 손실되어 그 근방 어디에 옮겨졌다가 그 조차도 유실되고 말았다.
- 의열투쟁
- 1909 10월 안중근의사 하얼빈에서 이토 저격
- 1932 1월 이봉창의사 일황 저격
- 1932 4월 윤봉길의사 홍구공원에서 폭탄 투척
안중근 의사
의사는 1879년 9월 황해도 해주읍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에서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가 되던 1886년부터 의사는 유교경전과 조선역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무예를 익히는데도 관심을 가져 12세가 되던 해부터는 말타기와 활솜씨가 묘기를 부릴 정도가 되었으며, 13세때에는 단총을 들고 포수들을 따라 수렵에 나서 명사수로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16세인 1894년에는 김아려(金亞麗, 당시 17세)와 혼인하였으며, 3년 후인 1897년에는 토마스란 영세명을 받고 천주교인이 되었다. 안 의사가 이 같이 성장하고 있는 동안 조국은 외세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되었고,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체결로 급기야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에 선각자인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조국의 현실을 직시했던 의사는 1905년 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의사는 유력 한인과 외국인 신부들을 만나 조국을 구할 수 있는 여러 방책을 제시하며 그들의 도움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1906년 1월 부친의 부음소식을 접하고 귀국해야만 했다.
귀국 후 의사는 서우학회(西友學會: 뒤에 서북학회로 개칭)에 참여해 활동하는 한편, 삼흥학교(三興學校)·돈의학교(敦義學校) 등을 설립해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또 1907년 초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 관서(關西)지부를 설치해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 이 같은 활동을 벌인 후 의사는 1907년 가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초 연추(煙秋,노우키에프스코에)를 근거로 약 300명 규모의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이 의병부대의 총독에는 김두성(金斗星)이 추대되었고, 총대장은 이범윤(李範允)이, 안 의사는 참모중장을 맡았다. 의사는 이 부대를 이끌고 그 해 6월 국내진입전을 전개하여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하는 일본군 부대를 습격해 수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7월에는 경흥 부근의 신아산으로 진입하여 일본군을 섬멸하는 한편, 1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의사는 이들 포로들을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의거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석방하였다. 그러나 석방된 일본군 포로들에 의해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그들의 급습을 받아 오히려 대패당하고 말았다. 의사는 단 3명의 병사만 이끈 채 연추의 본 거지로 돌아왔다.
귀환 후 의병부대의 재건을 도모하였으나, 그의 포로 석방을 문제 삼은 한인 청년들이 호응하지 않아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비록 의병부대를 재건하지는 못했지만, 의사는 그럴수록 더욱 조국을 구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따라서 그는 1909년 1월 동지 11명과 구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었다. 의사의 약지가 잘린 모습(手形)은 이때의 단지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러한 때,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에 의사는 그를 처단할 결심을 하였고, 우덕순(禹德淳)과 사전 계획을 세운 후 조도선(曺道先)과 유동하(劉東夏) 등을 동지로 가입시켰다. 의사는 신중히 검토한 후, 만약 이토오가 탑승한 기차가 하얼빈으로 오는 철로의 교차역인 채가구(蔡家溝)에 정지하면 그 곳에서 거사가 이루어지도록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이 계획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자신은 하얼빈 역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유동하는 통역과 두 공격 지점 사이의 연락을 담당케 하였다.
채가구에서 1차 거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이토오를 실은 기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다. 이토오는 환영나온 러시아 재정대신 코코프쵸프화 약 30분간 대담을 한 뒤 플랫폼으로 나와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 순간 의장대 후방에 있던 의사는 뛰쳐나가며 8연발 권총으로 이토오를 조준해 네발을 발사하였다. 세발이 정확하게 명중되어 이토오는 쓰러졌다. 이어 의사는 쓰러진 자가 이토오가 아닐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수행원 중 의젓해 보이는 자들을 향해 다시 세발을 연이어 발사하였다. 이 사격으로 이토오를 수행하던 가와가미[川上] 하얼빈 총영사·다나까[田中] 만철(滿鐵] 총재 등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리고 이토오는 기차안으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30분 후에 절명하였다.
의거 후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만세]""를 연창한 후 피체되었다. 이어 일본영사관으로 호송되었다가 여순(旅順)에 있는 일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았다. 재판정에서 의사는 ""나는 한국의 의병이며 지금 적군의 포로가 되어 와 있으므로 마땅히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라고 주장하며 남아로서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사의 정당한 발언은 묵살되었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이봉창 의사
이봉창의사는 1900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효녕대군(孝寧大君) 후손인 부친 이진규(李鎭奎)씨와 모친 밀양 손씨(密陽孫氏) 사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취직했으나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게 되었고, 자리를 옮겨 남만(南滿)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견습을 했으나 역시 일본인 직원들로부터「조센징」이라는 참을 수 없는 수모와 설움을 받았다. 여기서 이봉창은 부모나 이웃 그리고 자신이 받은 민족적인 수모와 설움이 모두「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한 그는 철도원 생활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을 전전하며 일어(日語)를 익히는 한편, 상점점원이나 철공소직공·잡부역·날품팔이 등으로 직업을 바꾸면서 일인생활을 익혔다. 이렇게 6년여의‘일본습득(日本習得)’을 마친 후 독립운동 본거지인 상해로 옮겨왔다. 능숙한 일어를 바탕으로 일인상점에 취직, 임시정부청사와 거류민단 출입의 기회를 잡는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이 기노시타라는 일인식 이름을 쓰는 한국인을 의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같은 사실은 백범에게 전해졌고 임시정부사무원인 김동우(金東宇)를 시켜 면밀히 관찰하게 하였다.
이봉창이 단순한「건달」이 아님을 간파한 백범은 여러차례 비밀리에 면담을 갖고 이 과정에서 김구는 이봉창의 투철한 애국심과 확고한 독립사상에 큰 감명을 받아 신임하게 된다.
이후, 김구선생과 이봉창 의사는 1년여의 준비 기간동안 폭탄준비, 여비 마련을 하여 때를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내, 김구선생은 중국 공병창에서 폭탄 1개와 하남성 유치(劉峙)에게서 얻어 온 폭탄 1개를 구하였다. 한 개는 일본국왕의 처단용이었고, 하나는 이봉창의 자결용이었던 것이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김구 선생은 1931년 12월 6일 프랑스 조계의 임시정부판공서에서 개최된 국무원회의에 이 거사 준비계획을 정식 상정하였다.
12월 12일, 프랑스 조계 중흥여사(中興旅舍)로 이봉창의사를 초치하고, 마지막 거사 계획을 완료하였다. 12월 13일 이봉창 의사는 정식으로 한인애국단에 입단을 하고 선서문을 낭독하였다. 수류탄 2개와 거사금을 건네 받은 의사는 안중근의사의 동생 안공근의 자택에서 역사적인 기념식을 마치게 되었다.
일인으로 가장하고 12월말 일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이듬해 1월 8일 일본국왕이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해의 백범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암호전보를 보냈다.
예정대로 수류탄은 일왕에게 던져졌으나 불행히도 명중되지 못하고 궁내대신(宮內大臣)의 마차만 뒤집어 놓았다. 의사는 현장에서 피체되어 동경의 인고쿠(印谷)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의사는 형무소에 수감된지 9개월이 지난 10월경,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32년 10월 10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에서는 이봉창의사의 의거를 기념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의사의 의거를 동경폭탄사건의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전세계에 공표하였다. 비록, 일왕의 처단을 이루지 못하였을지라도 의사의 그 의거는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로 이어졌고, 한·중협력의 새로운 관계를 통한 독립운동 진작에 큰 활력소가 되게 한 커다란 의열투쟁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의 유해는 1946년 7월 고국으로 모셔져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윤봉길 의사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윤황과 김원상을 부모로 모시고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우의(禹儀)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11세때인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독립운동의 함성고 함께 학교를 자퇴하고 이후 1921년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문하에 들어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학 수업을 받았다. 전통교육을 받으면서도 당시 민족잡지인「개벽(開闢)」등을 구독하며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6년 서당에서 수학하던 중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당시 윤봉길은 19세였다. 우선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의 문맹퇴치와 민족의식의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밖에도 1927년「농민독본(農民讀本)」3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인 농촌개혁의 실행에 착수하였다.
1928년에는 부흥원(復興院)을 세워 구체적인 농촌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 주된 사업은 농가부업장려 등의 증산운동과 공동판매 공공구입의 구매조합 설치, 토산품(국산품) 애용과 일화배척(日貨排斥), 생활개선 등이었다. 이듬해에는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여 농촌개혁운동을 추진할 중심인물들을 규합하였고 위친계(爲親械), 수암체육회(修岩體育會) 결성을 통한 친목, 체력향상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윤봉길은 1930년 3월 6일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1931년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조국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된다. 백범과 윤봉길은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 경축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에 접하게 된다. 드디어 기회를 맞은 것이다.
이를 위해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의거 3일전인 4월 26일 윤봉길은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여 선서를 하고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을 답사하여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다.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경 홍구공원에서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윤봉길은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뽑아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위로 투척하였다. 폭탄은 그대로 야촌과 중광의 면전에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백천과 하단은 사망하고 야촌 중장은 실명, 육군중장 식전은 다리를 절단하였으며 중광은 절름발이가 되고 촌정과 우야(友野)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이 의거에 감격하여 종래 무시로 일관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여 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비로소 한국인의 독립운동이 갖는 의미를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윤봉길의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피체된 윤봉길은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8일 일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32년 12월 19일 순국하였다.
윤봉길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 처리장에 방치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6년에 조국에 환국 안장되었다.
- 무력투쟁
- 1920 6월 봉오동 전투
- 1920 10월 청산리 대첩
- 1940 9월 한국광복군 창설
청산리 대첩
청산리 대첩은 1920년 10월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을 주력으로 한 대한독립군 연합부대가 중국 지린성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 대부대와 10여 회의 대격전 끝에 격파하여 대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봉오동대첩 후 독립군의 사기가 충천해 있을 무렵, 일제는 소위 ‘간도지역불령선인(不逞鮮人)초토계획’을 세웠다. 일제는 만주의 실권자인 장작림(張作霖)에게 독립군 탄압을 강요함과 동시에 1920년 10월 초 대규모 정규군을 투입시킬 구실인 ‘훈춘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일제는 약 2만에 달하는 일본군을 간도로 침입시켜 독립군을 초멸코자하였다. 이에 독립군들은 상호 연락을 취해 일본군의 공격을 일시 피하기로 결정하고 백두산록 서쪽으로 진영을 이동키로 하였다.
청산리대첩은(靑山里大捷)은 이와 같이 간도침입과 독립군의 이동 상태에서 전개된 것이다. 백두산록으로 향하던 북로군정서 · 대한독립군 등 10여개의 독립군단들은 1920년 10월 중순 화룡현(和龍懸) 2, 3도구(道溝) 일대에 모였다. 이러한 독립군들의 주둔지를 첩보원을 통해 파악한 일본군들은 약 5천명의 병력으로 이 지역을 공격해왔다. 따라서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여 일간 독립군과 일본군은 대대적인 혈투를 전개하였다. 전투가 일어난 계곡은 이주 한인들이 여러 마을을 형성하여 살면서 청산리 계곡이라 불렀다. 청산리대첩이라 기록된 이 전첩은 백운평 · 완루구 · 천수평 · 어랑촌 등지에서 10여 회에 걸쳐 전개되었다.
결과는 재만한인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지원아래 불굴의 정신은로 전투에 임한 독립군의 대승리였다. 청산리대첩은 일제침략군과 독립전쟁을 결행해 민족 자주독립의 역량을 입증한 빛나는 항일전이었다. 이렇게 하여 일본군의 간도출병작전을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만주지방의 한국민족독립운동을 보위하는 커다란 역사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또 이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한국국내의 독립운동도 지켜준 커다란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한국민족에게 독립정신을 크게 고취하고 독립에 대한 확신을 더욱 고양시켜 주었다.
봉오동 전투
봉오동전투는 중국 지린성(古林省) 허룽시엔 봉오동 골짜기에서 1920년 6월 7일 독립군이 추격해 들어온 일본군 1개 대대와 싸워서 승리를 얻은 전투이다.
대한독립군 · 군무도독부 · 군무위원회 등 세 군단은 연합사령부를 발족시킨 이후 보다 효율적인 독립전쟁의 수행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여러 유격대를 조직하여 한국의 온성 · 남양 등 두만강변에 설치된 일제의 국경수비대를 습격하는가 하면 더욱 깊숙이 침투하여 침략기관을 파괴하였다. 그와 함께 친일 부호들에게는 군자금을 징수해 그 자금으로 노령의 연해주에서 다량의 무기를 구입하였다.
연합사령부의 이 같은 활동에 불안을 느낀 일본군은 1920년 6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을 사전에 간파한 독립군들은 간도의 화룡현 삼둔자(三屯子)에서 1차 접전을 벌여 크게 승리하고, 다시 왕청현의 봉오동(鳳梧洞)골짜기로 일본군들을 유인하여 완전한 승첩을 거두었다. 봉오동대첩이라 기록된 이 대첩으로 독립군들의 사기는 더욱 충천하여 이후 신명을 바친 항일전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한국광복군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창설한 군사조직이다. 1940년 9월 17일에 중국 중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직할 무장대오로서 창설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0년대 중국 관내를 전전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 · 운영하며 군사양성에 힘을 기울여 왔다. 중 · 일전쟁(1937년)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전시체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군사정책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중국 정부와의 협의하에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던 것이다. 광복군은 창설 이후 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까지 편입하여 3개 지대와 각 전구 특파단 · 공작대를 편성함으로써 조직적인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즉각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중국군은 물론 영국군과 미국군과도 연합작전을 수행하여 인도와 버마(현 미얀마)전선에까지 참전하여 일제와 투쟁하였다. 또한 포로심문, 정보수집, 선전전단 배포, 방송을 통한 심리전에도 주력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45년에는 조국을 우리 손으로 되찾기 위하여 국내진공작전 계획을 세우고 미국전략정보처(O.S.S)와 협의하에 특수훈련을 실시하였다.
조국광복 후 한국광복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재외동포의 보호임무를 수행하다가 1946년 5월 복원선언서를 발표하고 영광스러운 독립전쟁을 끝내고 환국하였다.
경신참변
경신참변은 1920년 10월부터 1921년 4월까지 서·북간도지역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한인 학살 사건이다.
1920년 6월 북간도의 봉오동에서 독립군에게 대패당한 일제의 조선군(朝鮮軍)은 그 보복으로 서북간도지역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항일전을 펼치고 있는 독립군들을 소멸시키기 위해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웠다. 이 계획에 의거 대병력을 간도지방에 침입시켜 수많은 한인을 학살함은 물론 학교 · 교회 및 가옥을 파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서북간도 곳곳의 독립군 근거지는 물론이고 한인사회 마저 철저히 수색하여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죽이고, 가옥은 방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군도 가만히 앉아 일본군의 공격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전에 일본군의 습격을 감지한 독립군들은 그들의 근거지를 떠나 러시아의 연해주로 병력을 이동시킨 후 후일을 기약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김좌진이 이끈 북로군정서 · 홍범도가 이끈 대한독립군 · 지청천이 이끈 서로군정서 등은 각기 자신들의 군단을 이끌고 근거지를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1920년 10월 20일부터 약 10여 일간에 걸쳐 전개된 청산리대첩이었다. 청산리대첩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들은 더욱 광분하여 서북간도의 한인들에게 보복을 가하였다. 일본군들이 행한 대표적인 만행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0년 10월 말 일본군 제14사단 제15연대 제3대 대장 오오카가 이끈 77명의 병력이 간도의 용정촌(龍井村) 동북 25리 지점에 위치한 한인마을인 장암동을 포위하여 마을 주민 전체를 교회당에 집결시켰다. 이 중 40대 이상의 남자 33명을 포박해 꿇어앉힌 후 일본군들은 짚단으로 교회 안을 가득 채운 후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곧 화염에 충전하였으며, 불길에 휩싸인 한인들은 아우성을 치며 탈출구를 찾으려 안간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이들을 총검으로 찔러 결국 모두를 몰살시켰다. 가족들이 넋을 잃고 울부짖다가 일본군들이 돌아간 뒤 숯덩이로 변해 버린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 지냈다. 그런데 유족들의 비통이 채 가시기도 전인 5·6일 후 다시 일본군들이 이 마을에 찾아와 모든 유족들을 모아 놓고 무덤을 파 시체를 한곳에 모으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유족들은 어쩔 수 없이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언 땅을 파 시체를 꺼내 모았다. 일본군들은 이미 숯덩이 같이 검게 탄 그 시체들 위에 다시 짚단을 올려놓고 석유를 뿌린 뒤 불을 붙여 뼈만 남을 때까지 완전히 소각하였다. 이들 33인은 누가 누구인지를 분간할 수 없어 결국 가족들은 그 뼈로 합장 무덤을 만들어야만 하였다. 장암동의 이 같은 참변 외에도 한인의 참변은 허다하다. 그중에 옌지시엔 의란구 남동이란 곳은 30여호의 이씨 성을 가진 한인들이 사는 곳이었는데 중국 성으로 변성한 3명을 제외하고 모든 촌민이 몰살당하는 참변을 겪어야 했다. 이 중 어느 4형제는 불타는 가옥 속에 한꺼번에 던져져 죽어 갔다. 또한 1920년 12월 6일에는 일본군 수십 명이 옌지시엔 와룡동에 살고 있던 교사 정기선(鄭基善)을 다른 곳으로 끌고 가 심문하면서 고문을 가했는데, 정기선이 얼굴 가죽을 몽땅 벗겨도 말을 듣지 않자 두 눈을 칼로 도려내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도록 만들었다. 또 옌지시엔 팔도구에서는 어린아이 4명을 칼로 사살하였으며, 옌지시엔 약수동에서 살해한 시신을 다시 불에 태운 후 강물에 던졌다. 어느 지역에서는 부녀자를 잡으면 강간한 후 살해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2·3세 되는 유아를 창끝에 꿰어 들고 울부짖는 비명을 들으며 쾌재를 부르는 사례조차 있었다.
일본군들은 이와 같이 한인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가옥을 방화하여 태우고, 곡식과 가축에까지도 불을 질러 이후 한인의 살길을 완전히 박탈하였다. 국치전후부터 민족주의교육기관으로 수많은 항일 민족운동자와 독립군을 양성하였던 명동학교도 일본군들에 의해 교사는 물론 기밀서류 및 도서가 소각되었다. 구전(臼田) 중위가 인솔하는 22명의 일본군은 1920년 10월 20일 명동촌을 습격하여 마을을 폐쇄한 후 모든 주민을 명동학교 교정에 모아놓고 이 학교의 교장 김약연(金躍淵)은 항일의식이 강한 자로 이 학교를 통해 많은 독립군을 길러내고 있다고 으름장을 놓은 후 학교 전체를 불길에 휩싸이게 하였던 것이다. 명동학교에 이어 명동교회 역시 일본군의 방화로 소각되고 말았다.
일제의 이 같은 잔인한 한인사회 말살작전은 해가 바뀐 1921년 4월까지 계속되었다. 약 6개월 동안 계속된 악랄한 만행 끝에 살아남은 한인들은 산간오지로 피신하여 그들의 만행대상이 없어지자 일본군은 간도지역에 일부 잔여부대만 남기고 1921년 4월초부터 주력부대들은 철수시켰다.
김좌진 장군
김좌진은 1889년 음력 11월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金衡圭) 선생과 오숙근 여사 사이의 둘째로 태어났다. 김좌진은 유년시절 글공부보다는 활쏘기ㆍ말타기ㆍ전쟁놀이 등을 즐겨했으며, 삼국지와 수호지 및 군사학에 관련된 책자를 탐독하였고 무술연마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또한 계몽운동가인 김광호(金光浩)와 홍주의병장 김복한(金福漢)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김복한으로부터 구한말의병의 기본정신이라 할 의리정신과 민족수호정신을 배웠는데, 이것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앞서 국권회복운동에 노력하였다. 즉 김좌진은 집안에서 거느리고 있던 30여 명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에게 전답을 무상으로 분배한 이후 상경하여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정식 군사교육을 배웠다. 1905년 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홍성으로 귀향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는 한편으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홍주지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등 교육운동과 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군자금 모금과 대한광복회 활동 등 직접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좌진은 1910년 전후하여 이창양행(怡昌洋行)과 염직회사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와 해외 독립운동단체와의 연락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서간도지역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독립운동군자금 마련을 위해 노력하던 중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김좌진은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군자금 확보에 전념하다가 1917년 만주로 향하였다. 대한광복회의 독립군 양성을 실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김좌진은 길림에서 대한독립의군부와 길림군정사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길림 등 만주와 노령지역 독립지도자들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도 서명하여 조국광복을 위한 일제와의 적극적인 항일무장투쟁을 강조하였다.
김좌진은 길림군정사를 1919년 대한정의단의 총재 서일(徐一)의 연합제의에 따라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로 통합하여 총사령관으로 사관양성소를 설치하여 독립군 양성의 중책을 맡는 등 군사부분을 책임지게 되었다. 또한 만주의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등 일제와의 직접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일제는 1920년 10월 만주지역 무장독립군을‘진압’하기 위한 목적에서 훈춘사건을 야기하고 이어서 만주로 진입하자, 김좌진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催振東)의 군무도독부, 안무(安武)의 국민회군과 연합하여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백두산록의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을 대패시켜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청산리대첩 이후 일제의 독립군단과 한인사회에 대한 보복으로 독립군부대들은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또 다시 북만지역으로 돌아 온 김좌진은 이범윤(李範允)이 이끄는 독립군부대와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총사령관을 맡아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의 양성에 몰두하면서 계속하여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준비하였다. 또 한편으로 북만지역 무장독립군단의 통합을 목적으로 1925년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다. 신민부는 무장활동, 교육 및 홍보활동, 산업활동 등 자치활동을 통해 북만지역 한인 동포들의 생활향상에도 주력하였다. 김좌진은 신민부의 총사령관 및 군사위원장을 역임하며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둔전제ㆍ징병제ㆍ군구제를 실시하는 등 신민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신민부가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싸고 양분되자, 김좌진은 1927년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고 만주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고 만주한인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한 차원에서 무정부주의를 수용하여 지속적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한인사회의 생활안정 도모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 국내와의 연락을 통해 군자금을 모집과 조선총독 처단 계획을 수립하고, 일부 대원을 국내에 파견하여 군사작전에 필요한 지도를 작성하도록 하는 등 국내 진격작전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청산리대첩 이후 계속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좌진은 만주지역 한인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해림현 산시역 부근에 설치한 금성정미소에서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당 청년회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순국하였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 1919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연통제 조직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파견
구미위원부 결성
독립신문 발행
- 1921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결성
- 1932 이봉창의사의 의거 조직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조직
- 1932 의정원 비상회의 개최
- 1933 김구와 장제스의 난징회담에서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훈련반 설치 합의
- 1935 한국국민당 조직
- 1937 군사위원회 설치
- 1939 한국광복전선 청년공작대 조직
- 1940 한국독립군 창설
- 1941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 발표
- 1943 한국광복군을 인도 미얀마 전선에 파견
- 1944 국내공작특파위원회 및 군사위원단 설치
- 1945 국내정진군 총지휘부 설립
임시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로부터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되찾아 ‘정식’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임시’로 세운 정부이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수립되었다. 3·1운동이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과 4월 국내외 각처에서 모두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중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러시아 연해주·상하이·한성(漢城)의 임시정부였으나 모두 민족을 대표할 수는 없었다. 세 곳의 임시정부가 통합을 실현한 것은 1919년 9월 11일이었다. 정부의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결정되었고,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한 국무위원들을 선출하여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기구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직접적 산물이었다. 3·1운동을 통해 민족적 대단결이 이루어졌고, 민족의 대단결이 임시정부 수립으로 귀결된 것이다. 이후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정부의 조직을 유지·운영하면서 민족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 중추기관으로서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은 전제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바뀌는 역사적 대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그 헌법인 임시헌장에서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로 함”이라 천명하고,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제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5차례에 걸쳐 헌법을 개정하면서 민주공화제 정부로서 조직과 체제를 유지 발전시켰다.
임정은 독립운동은 물론 한민족이 처한 현실과 독립운동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외교활동도 하였으며 이를 통해 한민족의 존재가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극복하려는 다양한 노력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강인한 주체의식과 민족의식이 성장하였다. 이것이 해방 후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백범 김구 선생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 황해도 해주에서 80리 떨어진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에서 아버지 김순영(金淳永)과 어머니 곽낙원(郭樂圓)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구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이고 개명(改名)하여 구(龜·九)이며 호는 백범(白凡)이다.
김구가 태어난 1876년 일본의 침략정책에 의해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운이 점차 기울어져가는 시기였다. 김구는 어려서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4세 때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1892년 경과(慶科)에 응시코자 해주로 갔으나 매관매직을 일삼는 당시의 부패한 모습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였다.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황해도 도유사(都有司)로 뽑혀 충북 보은에서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의 첩지를 받아 접주가 되었다. 1894년 9월 김구는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안태훈의 집에 은거하다가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있는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일본군을 토벌하였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明星皇后)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듬 해 고향으로 귀향하던 중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중위 토전양량(土田讓亮)을 맨손으로 처단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해 5월 집에 은신 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7월 다시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되어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고종황제의 특사로 사형이 중단되었으나 석방되지 않자 탈옥하였다. 이후 삼남일대를 유랑하다 마곡사(麻谷寺)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고, 1899년 평양 근교 대보산 영천암의 주지로 있다가 환속하였다. 1903년 김구는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힘을 기울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덕기, 이준, 이동녕 등과 함께 을사늑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고 가두연설에 나서는 등 구국대 열에 앞장섰다. 1909년 김구는 최광옥 등과 교육총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을 맡는 등 교육사업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해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에 연좌되어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1911년 1월 김구는 사내정의(寺內正毅)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가 안명근(安明根) 사건의 관련자로 피체되어 1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 감옥으로 이감 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김구는 김홍량의 동산평(東山坪)농장으로 가서 농감(農監)의 직책을 맡아 농민들을 지도·계몽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직후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무국장(警務 局長)이 되었다. 1926년 11월 김구는 임정국무령에 취임하여 임시정부 내각을 조직하고 헌법을 제정하였으며, 1928년 3월 민족진영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동녕· 이시영·안창호· 조완구· 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1931년 독립투쟁이 어렵게 되자 김구는 비밀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여 일제 수뇌를 처단하는 성과를 올렸는데 그중에서 1932년 이봉창(李奉昌) 의사가 일본 동경에서 일왕(日王)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명중하지 않아 실패하였고,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경축식장에서 윤봉길(尹奉吉)의사가 폭탄을 던져 일본 육군 백천의칙(白川義則) 대장과 야촌길삼랑(野村吉三郞) 사령관등 10여명을 처단하는 큰 성과를 올렸다. 이 의거를 계기로 이듬해 5월 김구는 남경에서 장개석(蔣介石) 총통을 만나 하남성 낙양군관학교 분교를 한국 군관양성소로 이용하기로 합의를 본 것은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임시정부는 피난을 떠나게 되었는데 진강-장사-광동 -유주-광주-기강을 거쳐 중경을 옮겼다. 1940년 중경에서 김구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1944년 미국 OSS와 합작으로 국내침투를 위한 광복군 특별훈련반을 편성하여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던 중 1945년 서안(西安)에서 광복을 맞이하여 11월 23일 김규식· 이시영 등 임정국무위원들과 함께 개인자격을 환국하였다. 동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김구는 이를 반대하고 남북통일정부수립을 위해 전력을 다해 노력하였으나 결국에는 1948년 남북단독 정부가 각각 수립되었다. 그러나 김구는 계속해서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의 저격으로 서거하였다. 김구 유해는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정부에서는 김구의 공로를 기려 1962 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重章)을 수여하였다.
임시의정원
대한민국임시의정원(大韓民國臨時議政院)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이다. 1919년 상하이(上海)에서 개원되었고, 첫 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1945년 광복때까지 그 명칭과 조직을 유지하면서 임시정부의 입법의결기관으로 역할하였다. 해방 후 국내에 들어와서는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로, 1947년 3월에는 국민의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임시의정원은 임시의정원법이 제정되면서, 이에 의해 의원을 선출하고 입법기구로서 조직을 갖추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의정원은 정당(政黨)의 주도하에 운영되었다. 1920년대 후반에 전개되었던 민족유일당조직운동이 결렬된 후, 중국관내와 만주 등지의 독립운동전선에서 지역적 기반과 정치적 이념을 기초로 한 여러 정당이 출현하였다. 이를 계기로 의정원은 정당을 중심으로, 특히 민족주의 세력이 결성한 정당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의정원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정부와 함께 활동하였다. 의정원의 위상은 임시정부보다 우위에 있었다. 임시정부 수립 당시 제정된 임시헌장에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제2조)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1940년 주석(主席)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지도체제가 성립되면서, 그리고 1944년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한 후에는 이러한 조항자체가 삭제되었다. 의정원은 입법기구로 역할하고 활동하였다. 의정원은 임시정부 수립 당시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한 것을 비롯하여, 이후 5차례에 걸쳐 헌법을 개정하였고, 각종 법률안을 심의 의결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정원의 직권행사는 행정부가 집행하는 국정전반에 걸쳐있었다.
의정원의 활동은 의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1919년 4월 10일 제1회가 개최된 이래 1945년 8월 17일 임시정부의 요구에 의해 개최된 임시의회까지 모두 39회에 걸쳐 의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정기 및 임시의회를 통해 의정원은 직권을 행사하며 활동하였다. 의정원은 해방 후 임시정부와 함께 환국하였다. 국내에 들어와서는 1946년 2월 소집된 비상국민회의로 그 직능이 계승되었고, 다시 1947년 3월 국민의회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