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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시대마다 적용되는 경제학이 달랐다.
전통사회에서는 농지를 소중하게 여겼다. 길은 농사를 짓는 평지를 달리는 일이 없었다. 마을조차 평지가 아닌 산자락에 지었다. 농지를 다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길은 농지와 산지가 만나지는 데로 났다. 농토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덜 불편하게 걸을 수 있는 산자락이었다. 산이 가로막을 때면 길은 달라졌다. 꾸불꾸불 흐르지 않고 골짜기와 등날을 최대한 곧게 오르내렸다.
거리를 최소화해 걸리는 시간을 줄인 것이다. 옛길의 경제학이다.
오늘날은 달라졌다. 일제강점기 신작로를 내던 때와 해방 이후 신작로 위로 국도를 닦던 시절까지는 옛길의 경제학이 나름 적용됐다. 당시까지는 농지가 대접받았기 때문이겠다. 토목공학 등 길 닦는 기술도 자연 상태를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요즘은 기술 제약이 거의 없어졌다. 농토에 대한 존중조차 사라졌다. 반면 옮겨가는 데 드는 시간과 노동력과 에너지를 '물류비용'이라며 중시하는 세상이 됐다. 길에 적용되는 경제학도 완전히 달라졌다. 빠른 속도만을 최선으로 삼는 것이다. 길은 언제 어디서나 직선을 지향하게 됐다. 옛길은 묻히거나 토막이 났고 마을은 도로 너머 어딘가에 있다.
국도 3호선도 다르지 않다.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평안북도 초산군까지 이어지는 남북 간선도로인 이 국도에는 옛 국도도 있고 새 국도도 있다. 거창 금원산(1353m)이 남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자락에 있는 바래기재는 경남 함양군(안의면)과 거창군(마리면)의 경계를 이루는 바, 넘는 방식이 새 국도와 옛 국도는 다르다.
옛 국도 3호선은 이 재를 넘는 옛길을 덮어 썼지만 새 국도 3호선은 이와 무관하게 그 오른쪽에 남에서 북으로 향하는 길을 내었다.
- 삼산마을과 바래기재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묵었던 반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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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기재 바로 아래에 함양 안의면 대대리 삼산마을이 있다. '삼산'은 마을을 에워싼 청태산, 월암산, 아미산이다. 바래기재의 바래기는 이 삼산을 마주 바라본다는 데서 유래됐다. 삼산마을은 조용하다. 그럴 듯한 솔숲이 마을 앞에 있고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으나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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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기재에는 반락원(反樂院)이 있었다. 지금은 대신 밥집이 있다. 밥집조차 새 국도가 나면서 찬밥 신세가 됐다. 빠르기의 경제학을 따라 옛길과 옛 국도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래기재로 가려면 함양 안의면까지 새 국도와 옛 국도가 일치하는 구간을 따라오다가 새 국도가 옛 국도와 갈라지는 용추교차로에서 옆으로 나와야 한다.
옛날에는 장승도 있었고 사람들이 머무는 원(院)도 있었지만 지금은 휑뎅그렁하다. '반락'은 중국 이태백의 한시 '삼산은 푸른 하늘 밖으로 반쯤 걸려 있고(三山半落靑天外)'라는 대목에 따왔다는데 이와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옛날 선비들이 서울 가서 치른 과거에서 낙방을 하고는 귀향길에 들러 여기서 먹고 잤기 때문에 떨어졌다고 우기며 탐탁찮다는 뜻으로 반락(反樂)이라 했다 한다. 그 뒤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는 이들조차 이곳을 피해 거창 남상면의 관술령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 쌀다리
병항마을 앞 개울에 놓인 널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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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기재를 넘어 700m 정도 내려가면 왼쪽에 망한 주유소가 나타난다. 새 국도 3호선이 뚫리면서 이런 변화가 생겼겠다. 여기서 200m 가량 나아가면 왼편으로 옛길이 있다. 전형적인 옛길이다. 여기로 650m쯤 들어가면 병항마을이 나온다. 평범한 농촌마을이지만 앞에 놓인 다리는 비범하다. 마을에서 길을 따라 대략 200m 나간 지점의 개울가에 있다. '쌀다리'인데, 중심 받침돌 위에 커다란 돌 두 개를 이어붙인 널다리다.
1758년 오성재·성화 형제가 쌀 1000석을 들여서 놓았다고 한다. 당시 안의현감 이성중이 들러 "어찌 오씨 가문이 번창하지 않겠는가"라고 칭찬하며 세운 설교사적비(設橋事蹟碑)도 있고 1910년과 1911년 세워진 오세안·오석규 공덕비도 있다. 고단함을 덜어주려고 다리를 놓은 데 대해 서울로 이어지는 이 길을 오가던 보부상들도 공덕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쌀다리를 건너 용원정(龍源亭)이 있다. 용원정은 병항마을 입향조(入鄕祖)인 구화공 오수 선생을 기리려고 후손이 세웠다. 앞에 착한 일을 했다는 오씨 집안 사람은 모두 이 오수 선생의 후예다. 둘레에 좋은 바위가 많다. 옛날에 이 길을 오가던 사람들에게 훌륭한 쉼터였겠다. 여기서 북으로 가는 옛길은 사라졌다. 일부 남아 있으나 이어지지 않으니 소용없다.
- 말흘리
가야고분 등 가야시대 자취 남아
병항마을에서 옛 국도로 나와 3.7km 가량 달리면 마리면사무소 소재지 말흘리가 나온다. 말흘리에는 가야시대의 자취가 있다. 국도 3호선과 국도 37호선이 갈라지는 마리삼거리 오른쪽 언덕에 가야고분이 있다. 최근 발굴에서 접시·항아리·쇠도끼·화살촉 등이 나왔다. 북서쪽에는 창촌(倉村)이 있다. 창촌은 옛적에 안의현의 동창(東倉)이 있었기에 얻은 이름인데 여기 사람들은 '창말'이라 이른다.
마을 남쪽 200m 지점에는 커다란 돌다리가 있었는데 모퉁이에 장승이 있었기에 장승배기다리라 했다. 지금은 같은 마을 뒤쪽에 있던 송림사지 석조여래좌상(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11호)과 함께 거창박물관으로 옮겨가 있다.
고제 가는 길은 여기서 국도 3호선을 버리고 37호선을 따른다. 37호선은 경남 거창군과 경기도 파주시를 잇는다. 창촌에서 나와 북쪽으로 3.3km 가면 왼쪽에 학동마을이 나온다. 소나무로 이뤄진 마을숲도 있고 1640년(인조 18년) 옆에 있는 영승마을에서 옮겨와 마을을 연 전시언을 기리는 우수재도 있다.
- 영승마을
삼국시대 사신을 맞이하고 보냈다 하여 '영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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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승(迎勝)마을은 매우 크다. 역사도 오래 됐다. 조선 초기 정선전씨가 가장 먼저 옮겨왔고 뒤이어 광주이씨, 선산김씨, 파평윤씨가 들어와 함께 살게 됐다. 영승의 옛 이름은 '영송(迎送)'이었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사신을 여기서 맞이하고(迎) 보냈다(送)고 붙은 이름인데, 퇴계 이황이 1543년 '영승'이라 고쳤다.
개울가 영승숲이 멋지고 사락정이라는 정자도 있다. 사락(四樂)은 농사·누에치기·고기잡이·나무하기와 같은 농촌 마을의 네 가지 즐거움을 뜻한다. 영승숲은 전통 수구막이 노릇도 한다.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띠 모양을 이루고 있어 마을 앞쪽의 트임을 막아주는 것이다.
풍계(豊溪)마을은 북쪽 2.2km 되는 지점 오른쪽으로 위천과 당산천이 만나는 자리에 장풍숲과 함께 있다. 위천을 지르는 다리는 '장풍다리'라 했다. 옆에 주막도 있었으니 주막과 다리와 숲이 어우러지는 풍경이었다. 원래 다리는 없어지고 대신 1960년대 놓은 콘크리트 다리가 있다.
국도가 나면서 다리는 기능을 다했고 사람들만 걸어서 지나다닌다. 국도 위에 나 있는 새 다리에서 바라보는 옛 장풍다리는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느낌이다.
서둘러야 하는 걸음이 아니라면 여기 즈음에서 하룻밤을 묵어도 되겠다. 하지만 여기에 민박이나 여관 따위가 없는지라 장소를 옮겨야 한다. 영승마을과 함께 퇴계 이황과 관련이 있는 수승대(搜勝臺)가 맞춤이다. 퇴계는 여기 이름도 수송(愁送)에서 '수승'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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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산마을
나라에 큰 일 있을 때마다 '웅웅' 울며 예고한 당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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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마을은 상율·도동 마을을 지나 2km 남짓 떨어져 있다. 여기는 마리면이 아닌 위천면이다.
당산마을 또한 역사가 오래 됐다. 들머리에 서 있는 당송(천연기념물 제410호)이 증명한다. 600살 정도 됐고 일부 가지가 꺾였으나 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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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정월대보름마다 제사를 지내는 등 각별하게 보살피는 정성이 여기 있다. 당송은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웅웅' 소리를 내어 미리 알려줬다고 하는데 그래서 '영송(靈松)'이라고도 한다. 1910년 경술국치, 1945년 국권 회복, 1950년 한국전쟁 때 몇 달 전부터 밤마다 소리 내어 울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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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모전·원당마을을 거쳐 4.7km 정도 떨어진 왼쪽에 무월마을이 있다. 들머리에 오장군 사적비가 있는데 옛것과 요즘것이 함께 놓였다. 요즘것은 드높고 크며 옛것은 조그맣다. 하지만 눈길은 옛것에 훨씬 많이 간다. 오장군은 조선 선조 대에 부사를 지냈다는 오적(吳勣)을 이른다. 오장군은 전북 무주 구천동에서 뼈재를 넘어 여기로 다니며 호랑이도 제압할 만큼 기상이 대단했다는 인물이다. 그이가 이곳에다 돌지팡이를 꽂았다.
이어지는 주상면 넘터마을은 1.8km 떨어져 고개 너머에 있다.
넘터는 마을 앞 고개 월치(越峙)를 이르는 우리말이다. 넘터마을에는 문의공(文毅公) 김식(1482~1520)과 관련된 자취가 있다. 김식은 조광조와 함께 훈구파를 제거하고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개혁정치를 펼치다 1519년 기묘사화를 맞아 여기로 몸을 숨겼다. 들머리 동구바위 아래 숨어 지내다 바위에 '白巖(백암)'이라 써 놓고는 이듬해 6월16일 목숨을 끊었다. 헌종 때 이 마을에 그를 기리는 완계서원이 들어섰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지고 지금은 모정비가 서 있다.
- 넘터마을
과거급제에 얽힌 남매 이야기 전해져
넘터마을에는 바래기재에서 고제원을 넘어 서울로 이어지는 옛길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여기살던 남매 얘기다. 동생은 과거급제를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누나는 동생을 정성껏 보살폈다.
어느 날 누나의 꿈에 도사가 나타나 "내일 아침 너와 동생의 신에 보리를 심어 동생 것에 먼저 싹이 나면 과거를 보러 가고, 네 것에 먼저 나면 동생이 과거에 떨어질 운명이니 과거를 보러 가지 말라" 하고는 사라졌다.
이튿날 동생과 누나는 제각각 신발에 흙을 담아 보리를 심었는데, 사흘 뒤 누나 신에만 싹이 났다. 동생은 오히려 화가 나서 과거를 보러 황산을 지나 모동을 거쳐 서울로 넘어가는 길로 갔는데 웬 일인지 보름이 지나도록 산을 넘지 못했다. 보름 동안 헤매다 겨우 넘어갔지만 이미 과거는 끝난 뒤였다.
동생이 넘지 못한 그 고개를 그래서 '보름재'라 하는데 동생은 그 뒤 문과는 포기하고 무술을 닦아 장군이 됐고 그로써 마을 뒷산을 넘어갔다고 해서 마을을 넘터라 이르게 됐다.
마지막 고제원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고제원에 앞서 고제면 원농산마을에 잠시 들른다. 원농산마을은 넘터마을과 2.9km 정도 떨어져 있다. 용원정과 돌무더기가 있다. 냇가 언덕에 있는 이 정자는 둘레에 숲이 있고 아래로 시내를 따라 펼쳐진 들판과 먼 산이 눈맛을 시원하게 해 준다. 돌무더기 앞에서 옛날에 사람들이 당제를 지내기도 했다.
- 고제원
길손의 고달픔 덜어준 높은다리(고제)
고제원은 원농산마을에서 1.3km 정도 더가야 한다. 옛날 역원인 고제원은 사라졌지만 원터라는 땅이름은 남았다. 아울러 여기가 옛길의 중요한 지점임을 일러주는 높은다리와 음각선인상과 영세불망비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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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한 도승이 골짜기 시내에다 큰 돌로 다리를 놓아 길손의 고달픔을 덜었다고한다. 높이가 6m, 길이가 11m였다는 '높은다리(高梯)'의 유래다. 높은다리는 마을과 면(面)의 이름이 됐다. 돌로 된 높은다리는 없어지고 대신 콘크리트다리가 있다. 지금 다리도 그럴 듯하다. 아래로 자연 암반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물이 제법 낙차 있게 떨어져 흐르는 품새도 보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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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옆 높직한 데에는 입석(立石, 선돌)이 있다. 음각으로 선인상까지 새겨져 있어 거창 농산리 입석음각선인상(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24호)이라 일컫는다. 입석은 이정표 또는 수호신 노릇을 했겠다. 자연 화강암인데 높이 2.2m, 너비 1.5m, 두께 30cm 정도에 좌불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입석 왼쪽 아래에 알구멍(성혈·性穴) 자취가 있다.
높은다리와 입석 사이에 있는 영세불망비도, 여기 옛길이 있었음을 일러주는 지표다. 영세불망비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세워야 했을 터이다.
옛길은 다만 통로로서의 길 이상이었다. 길은 그 시대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이 아로새겨져 있는 역사이자 문화였다. 과거길이 그랬고, 장터길이 그랬다. 길과 길이 이어지는 고개는 저마다 사연을 한자락씩 품고 있다.
옛길이 사라지면서 주막도 사라지고, 버스정류장이 되어주던 시골 점방도 덩달아 사라졌다. 이제 길의 주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함양 삼산마을에서 바래기재를 거쳐 고제원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다. 옛길은 그저 희미한 자취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이 빠름과 편리함에 익숙해질수록 더딤과 느림에 대한 향수는 더 강렬해진다. 이제는 거의 사라져버린 이 옛길은 우리가 지금 누리는 편리함만큼 잃어버리고 있는 소중한 무엇의 가치를 되살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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