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꽃
흐드러지게 피어 노랗게 물들여 놓은 강변길 파란 하늘 떠가던 뭉게구름 멈춰서 빙긋이 내려 보고 현숙한 조선 여인네처럼 우아한 목련
꽃송이도 활짝 피어 바람결에 하늘하늘 춤을 추며 화사한 봄날을 노래한다.
하늘과 땅 그리고 꽃들이 저질러논 아름다운
반란, 이 땅위에서 호흡하고 있음에 더없는 감사를 되뇌이며 中國의 黑龍江省 목단강 행 비행기의 트랩을 올랐다.
검푸른
바다위에 보여야 할 출렁이는 바닷물은 간곳없고 타다 남은 숯덩이가 얼기설기 버려진 것 같은 황량한 갯벌에 먹이를 찾는 갈매기 몇
마리 애처롭게 날아다닐 뿐이었다. 같은 바다인데 한쪽은 물이 말라 초라한 꼴로 버려져 있음은 왜일까? 해외로 출장을 갈 때마다
느껴보는 바보스런 궁금증이다. 달과 태양의 변덕에 의한 사리와 조금의 이치가 어떻든 간에…….
오랜 세월 파도가 그려놓고
바람이 다듬어놓은 해안선을 따라 春風을 가르고 유유히 날아가던 비행기도 어느새 우리가 살고 있는 땅덩어리를 왼편으로 슬쩍
비켜서 망망대해를 떠간다. 곧은길을 바로가면 오죽이나 좋으련만 그놈의 이념이 무엇인지? 차라리 눈을 가려 안 보려 눈밭 같은 구름
위를 자맥질하며 날아간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세상을 한참이나 지나 창문으로 보여지는 검으스레한 산과 들 그리고 멀리
미꾸라지 같은 강줄기도 보인다. 이윽고 듬성듬성 성냥갑 같은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간혹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까지 시야에
들어오고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온다. "여러분은 10분후에 목단강 하이랑 공항에 착륙하시겠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
아래 펼쳐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아차! 잘 못했구나" 하며 나직이 외마디 소리를 토해낸다. 왜냐하면? 엊저녁에 해림시 정부
관리로 부터 받은 이메일에는 해림시의 날씨가 완전한 봄이라고 들었기에 별 생각 없이 정부 관계자들을 만날 때 입기 위한 양복 한
벌과 가벼운 봄옷들로 가방을 채워 왔는데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텅 빈 논밭에 누워있는 게으른 얼음 덩어리와 눈으로 가득 덮인 하얀
雪原에 부는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앙상한 나무들만 보이니......, " 林海雪原 " 을 한갓 낭만스런 이름으로만
알았더니 결국은 이것이었구나 하며 준비 부족을 실감하였다.
인천 공항을 떠나 2시간 반 남짓 날아서 도착한 흑룡강 성
목단강시 멀지 않은 곳에 우리 민족의 애환과 눈물을 싣고 갔던 강이 흐른다. 만주어로 "구불구불 흐르는 강"이라는 이름의 목단강,
여전히 해랑 철교 아래를 지나 목단강 시내를 관류 북상하여 송화강과 합류 ,黑龍江에 섞여 東海로 흘러 든다는 야속하지만
미워할수 없는 강이 지금도 흐르고 있다.
암울했던 일제시대 엔 우리의 유민들이 두만강을 건너고 노송령을 넘어 북으로북으로
살길을 찾아 올라갔던 곳, 그러나 죽을힘을 다해 올라갔지만 해방이 되었어도 돌아 올수 없었던 한이 맺힌 땅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의 어느 지역보다 우리 동포와 민족 문화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곳이목단강 시가 아닌가
생각된다.
" 바다 동쪽에 융성했던 나라 " 발해국의 영토중 일부에 해당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역사에서 멀어져 갔던
불운의땅, 목단강. 그럼에도 지금까지 같은 피가 흐르는 우리 민족들이 여전히 살고 있어 왠지 모르게 애착이가는 우리 땅 어디쯤 같아
漢字로 쓰여진 간판을 제외하곤 별다르게 남의 땅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대대로 우리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으며
동북삼성과 내몽골 지역으로 흘러간 우리 유민들의 눈물도 얼룩져 있고, 뒤늦게 " 온돌과 디딜방아 " 등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이
속속 발굴되는 여기도 역사 속에 우리 땅이 아니었나? 더더욱 잔잔한 감동을 피할 수 없었다. 이국 나그네의 낯설 움
보다는......,
특별히 이번 여행은 목단강시에서 12km 정도 떨어진 해림시에 무공해 농산물 수입을 위한 현지 방문을
목적으로 왔기에 인민 정부의 외자유치국장과 실무 직원이 목단강 공항으로 마중을 나와 내 이름 석 자를 크게 쓴 피-켓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등소평과 종씨라는 漢族 국장과 高씨 성을 가진 인민정부 실무자(중국 동포)가 함께 나왔는데 작은 용모에 평범한
차림을 한 高氏 성의 중국 동포는 왠지 첫눈에도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엿볼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내가 해림에서
업무를 보고 떠날 때까지 그림자처럼 함께했던 그는 30대 중반에 젊은 나이로 소수민족의 어려움을 딛고 하얼빈 대학에서 열공학을
공부한 엘리트였으며 양친 모두가 교육자로 정년을 마친 아주 훌륭한 중국 동포 집안의 자제였다. 탁월하게 구사하는 중국어 솜씨와
우리말을 잊지 않기 위하여 공부할 책을 부탁할 정도로 확실한 민족의식을 지닌 앞날이 기대될만한 중국 동포였다. 아주 귀한 파트너를
만난 덕에 좋은 중국 비즈니스를 예감해 보기도 하며 시종일관 나를 도와서 함께한 그를 앞으론 高先生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이곳으로 오기 몇 일전 이메일로 고 선생에게 부모님 고향이 어디시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기대와 달리 다소
충격적이었다. 대답인즉, " 나도 그거이 알고 싶어 답답합니다. 내 아버지는 고아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기에 할아버지 할머니도 또 고향도 모른답니다." 그야말로 더 물어볼 말이 없는 통한의 대답이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사흘이면 돌아갈 줄 믿었다가 평생의 이별이 되고만 수많은 이산가족들과 만주 벌판을 떠돌며 막연히 귀향의 날을 꿈꾸며 힘겹게 목숨을
부지 했던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들쳐 낸 듯한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아 고 선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홀홀단신
월남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즐거운 듯 살았지만 언제나 마음 한 귀퉁이는 실향의 언저리를 맴돌며 외롭고 힘든 삶을 營爲할수
밖에 없었던 내 어머니의 지난 세월이 그러셨듯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 선생의 아픔을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었다.
가족의
사랑이 아무리 크다 한들 떠나온 고향을 그리는 마음만 할까?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는 반갑다던데.....,
제법 쌀쌀한 눈바람이
불어대는 목단강 공항을 빠져나와 30여분 해림시로 가는 동안 도로 좌우로 펼쳐진 비옥한 농토.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융단을 깔아 놓은
듯 광활하게 뻗어나간 옥토가 휴면 상태라 하니 높고 낮은 산들이 국토의 대부분인 우리나라를 생각해볼 때 심히 부러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점점 썩어져가는 지구촌에 최후의 청정지역으로 남기려는 창조주의 깊으신 뜻이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 해
본다. 과거 이념이야 어떠했었든 간에 그 땅을 지키는 사람들의 순종에 익숙한 마음 , 그 가난한 양심을 아시고서 말이다.
예약된 린하이 호텔의 9층 전망이 좋은 방에 여장을 다 풀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해림시 인민 정부 관리들이 우르르 몰려와
호텔 3층의 리셉션 장소로 안내되어 상견례를 하게 되었다. 아직도 엄동설한의 끝 무리인 것도 모르고 홑껍데기 봄 옷만 가득 담아 와서 마음 쓰이는 이국 나그네의 속도 모르고 가득채운 술잔을 쉴 새 없이 들이 대기 시작하였다. 나름대로 피한다고 피했지만 탄알을 가득채운 집중 사격을 완벽히 피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상술이 아닌 손님 접대를 철저한 미덕으로 여기는 중국 사람들의 환영하는 마음이 고맙기도 했지만 참 힘들었던 밤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림에서 가장 좋다는 호텔임에도 불구하고 둘째 날 아침부터 전기가 나가는 뜻밖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샤워는커녕 면도할 물까지 데스크에 부탁해야 될 형편이 되었다. 그 내용인즉 해림시 도시 전체의 전기설비 정기점검 때문에 일년에 한두 번 전기가 나간다는데 하필이면 그날이 바로 오늘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더니, 원 참! 어쨌든 빡빡한 5일간의 일정 때문에 따지고말고. 할 것도 없이 일찍 찾아온 고 선생의 안내로 첫 방문지인 산시진(진:한국의 "리"정도의 행정 단위)이라는 산간오지 마을에 버섯과 잣 등 유기농 농산품 재배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해림시에서 대략 30여 킬로 좁은 비포장 길을 지나는 동안 우리나라 50년대에 사람이 끌던 인력거와 소와 말이 끌고 가는 우마차가 우리가 탄 최신형 아우디 승용차와 뒤 섞여서 함께 길을 가기도 하였다. 늦게 간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고 굵직한 클랙션으로 나팔을 불어 대도 들은숭 만숭 피하는 사람도 없거니와 그럼에도 교통사고가 별로 없다는 믿기 어려운 설명에 무질서 속에 질서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런 저런 생각 속에 한 시간 이상 비포장 길을 달려 산시진 마을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영원한 광복군 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었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부농의 아들로서 개화사상이 투철하여 15세 때 집 노비들과 머슴들을 풀어주고 죽기까지 평생을 항일 운동에 몸바쳐온 독립 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유적지가 인적조차 드믄 흑룡강 성 해림시의 벽촌마을 산시진에 있었음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타도하고 黑龍 강 쪽으로 부대를 이동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여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25년에는 만주로 돌아와 신민회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잘 알려진 성동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고 1929년경에는 한족연합회를 결성하여 이곳 산시진에서 황무지 개간, 문화계몽 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민족의 단결을 호소하다가 이듬해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한 민족의 별 백야 김좌진 장군, 그가 생활하던 초라한 숙소와 차마 보고 싶지 않은 암살 장소에 이르러 숙연함으로 애국애족의 참다운 정신을 조용히 다짐해 보기도 하였다.
지금의 중국은 결코 자동화로 무장된 첨단 산업만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 자동화로 생산하면 농촌에 많은 저임금의 인력들이 손을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동화에 의한 대량 생산 체재보다 인력 소모가 더 중요한 국가 과제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산시진에서 처음 방문한 잣 공장도 지극히 원시적 방법으로 잣을 생산하고 있었다. 불과 십 여살 정도의 소녀에서부터 머리가 하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내일의 풍요로움을 꿈꾸며 즐거운 표정으로 뽀얀 알 백이 잣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골라 담고 있었다. 초라한 주변 환경에 낙후된 시설 그리고 온종일 일해도 얄팍한 월급봉투를 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바쁘게 손을 놀리며 얼굴 가득히 잣 색깔만큼이나 뽀얀 희망의 빛이 감돌고 있음을 볼수 있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 내내 땀 흘려 가꾸고 그리고 가을의 풍년을 겸손하게 기다리는 욕심 없는 농부의 마음처럼…….
오전 내내 잣 공장 상담을 끝내고 흑목이 버섯 재배 공장으로 안내 되었다. 아직 시기가 아니라서 생 버섯은 볼수 없었지만 쉼 없는 노력과 개발의지로 명실 공히 세계 최대의 버섯 생산국이 되기 위하여 땀 흘리는 그들의 표정과 광활하리 만치 드넓은 식용균 생산 단지와 정부 측의 전폭적 뒷받침에서 오래지 않아 세계 최고의
무공해 농산물 생산국 위치에 오를 날도 결코 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잘 정돈된 비옥한 농토와 저렴한 인건비 그리고 묵묵히 도전하는 만만디 정신 지금의 중국이 꾸준히 지탱해 갈 수 있는 확실한 밑거름인 것 같았다.
그럼 우리 민족에겐 과연 그런 밑거름이 없는 것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우리에겐 세계 만민이 경이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격려의 박수를 쳐주었던 IMF 환란 때의 신명나는 히스토리가 있지 않았던가? 돌배기의 돌 반지에서 부터 신혼부부의 결혼반지, 목숨처럼 간직했던 칠순을 넘긴 할머니의 금비녀에 이르기까지 아낌없이 겨레와 국가 앞에 던저져 풍전등화 같은 이 나라의 운명을 거뜬히 구해내지 않았던가?! 지구촌 어디를 둘러봐도 찾아볼 수 없는 전대미문의 그 민족적 사건을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거울삼아 지혜롭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쌀 개방을 중지하라고 과일 수입을 중단하라고 이런저런 나라끼리의 약속도 저버리고 중단하라고 시위하는 소박한 우리 농민들의 속 타는 마음을 모를 리 없지만 그러나 이제는 구시대적 흑백 논리에서 벋어나 지구촌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무한 경쟁 체제를 겸허히 인정하여 WTO든 FTA든 당당히 접수해버리고 환란 때의 자생능력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거뜬히 극복하는 지혜로움이 필요한 것 같다. 필경 우리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어려움이 아니라면 지구촌 모든 나라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일인즉, 우리만 유독 큰소리로 신음하는 것은 보기 좋은 모양세도 아닐뿐더러 선진국을 향한 경제규모 세계 10위의 대한민국 국위에도 걸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방문한 두 업체 모두가 아직은 수출 상담에 기본적 준비가 덜된 상태라서 의외로 상담 시간이 길어져 늦은 밤까지
산시진에 머물러야만 했다. 바쁜 일정에 쫓겨 제법 쌀쌀한 눈꽃 추위도 잊은 채 상담을 마치자마자 산시진을 치리하는 미모의 기려굉 당위
서기와 촌장이 베푸는 만찬에 초대되어 중국식 소주와 특유의 흑룡강 성의 특별한 요리로 후덕한 대접을 받았다.
그 다음날도
아침 9시에 무려 40킬로나 멀리 떨어져있는 횡도화자진의 버섯 재배 단지를 방문하였는데 꽤 추운 날씨에 몸살 기운이 슬슬 돌아
호텔로 가서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알고 보니 방문한 그곳이 흑룡강 성에서도 눈이 가장 많이 오고 유난히
추운 지방이라는 것이었다. 털 점퍼를 입었어도 모를 일인데 살랑살랑한 봄 점퍼를 입었으니 춥지 않고 배길 수 있었으랴, 상담하는
넓은 사무실에는 미지근한 라지에터가 벽 언저리만 간신히 지키고 있을 뿐 무공해 버섯 사겠다고 찾아간 이국 나그네의 추운 마음을 녹이기엔
턱없이 미지근한 있으나 마나한 화롯불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깔끔한 매너와 다양한 무역 경험을 지닌 그곳 동사장(대표자)의
협조로 신속히 상담을 끝낼 수 있었음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우리는 인근의 동북 호랑이 보호소를 방문하여 백두산 호랑이의
사촌들을 만나 보았다. 국내에서도 많이 보았던 낯설지 않은 생김새들이었다. 가까이 간 우리 일행을 보고 으르렁거리는 새끼 호랑이의
장난스런 엄포에 잠시도 쉬지 못하고 뛰어다닌 피로가 일시에 풀리는 듯 즐거워하며 다음 행선지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이미
3년 전부터 나의 母校를 통해 교류하게 된 해림시 부시장께서 점심을 대접하겠다는 갑작스런 전갈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우리의 상담 장소까지 찾아와서 대접을 하겠다니 그들의 따뜻한 인간적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우리는 이후로도
오전 오후를 나누어서 할 수 있는 한 여러 업체를 방문해서 거래 상담을 하였다. 시내에서 꽤 먼 산속에 사슴 120 마리를 키우면서
녹용을 소재로 "루寶酒"(루: 사슴)라는 기능성 술을 만들어 한국으로의 수출 길을 마련키 위해 노력하는 漢族 黃사장도 만났고 특별히
호박씨와 잡곡 등을 수출한다는 무역업체를 방문했을 때는 고향집 대청마루에서나 볼 수 있었던 부자지간의 정겨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백발의 연로하신 아버지는 한가로이 카드놀이를 즐기고 있었고 그곳의 사장격인 아들은 투명한 유리로 막힌 옆방에서 아버지의
시중을 들어가며 회사 일을 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다정다감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난 나로선 갈급한 풍경이어서 큰절이라도 덥석 하고 싶은 자상하신 아버지의 잔영으로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또 효성스런
그 아들이야말로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됐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이미 지나 버린 세월을 향해 悔恨의 소리 없는 외침을 질러본다.
더구나 내가 해림을 떠나던 날 연세 높으신 아버지와 효자 아들은 " 앞으로의 거래가 어떻든 계속 안부를 전하고 싶다며 오늘
점심을 꼭 대접하겠다." 는 것이었다. 사실 그날 인민정부의 담당 국장과의 점심 약속이 예약되어 있었지만 잦은 전화에 워낙 독촉이?
심해서 결국은 선약된 담당 국장을 무역회사로 오라고 양해를 구하여 의미 있는 점심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더구나 좋은 만남을
뜻하는 선물이라며 냉동 송이버섯을 정성스레 얼음까지 채워서 챙겨주던 중국인 아버지와 아들, 그야말로 나라가 틀리고 족속이 다르고 삶의
문화가 다른 것이 진솔한 인간관계에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고 비록 한 가지 언어로 시원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었을지라도 무언가 건네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넘치도록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대로 중국의 여러 곳을 다녀 봤지만 이렇듯 따뜻한 인간
거래에 후덕함은 처음 누려보는 즐거움인 것 같았다.
마지막 일정까지 시종일관 함께하며 나를 도왔던 高선생의 제의로 자신의
대학
동창생이 살고 있는 신합촌이라는 조선족 마을에 중국 동포(조선족)들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아
즉석에서 털털 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에서 멀지 않은 동포 마을을 방문하였다. 먼저 찾아 간곳이 떡 공장을 한다는 田氏성의 젊은
동포의 집이었다. 대문 앞에 서투른 우리말로 " 떡공장 " 이라고 써놓은 것이 좀 장난스럽긴 했어도 화려한 네온의 간판보다 더
정겨워 보이는 것은 같은 피가 흐르는 동족에의 이심전심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조부께서 독립 운동가였기에 전 가족이 긴 세월 생명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없었다며 험난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을 회고하는 듯 잠시 멈추었던 말문을 천천히 열기
시작했다.
일본군을 피하기 위하여 하얼빈으로 갔다가 발각되어 다시 목단강으로 옮겼지만 그것도 힘들어서 작은 도시 이곳 해림으로
피해 와서 겨우 정착하게 되었다는 파란 많았던 독립 운동가의 삶과 누구하나 돌보지 않는 그 후손들의 어려운 처지를 볼 때 송구스런
마음을 감출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름 없이 평생을 헌신하다 빛도 없이 사라져간 그분들이 있었기에 조국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고 그러기에 우리가 여유론 生을 보낼 수 있음을 잘 알면서도 고마운 마음은커녕 그런 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고 희희낙락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自問해 보십지요" 라는 말이 있기도
전에 우리의 선구자들은 풍전등화 같은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독립운동에 나선 것이다. 황량한 만주 벌판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의 존립을 위한 험난한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젠 전쟁도 끝이 나고 독립운동도 끝이 났지만 그들의 가족들은
여전히 어려운 삶을 면치 못하고 중국의 한 소수민족으로 묵묵히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명예로움도 그리고
조국의 아무런 배려도 누려보지 못한 채로 말이다. 아무쪼록 국가적 차원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는 정책이 확고하게 수립되어
꾸준한 관심 속에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따사로운 報恩의 계절이 빨리 올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한편 조선족
소학교에서 어린 아이들을 육성하는 30대 중반의 젊은 교장 선생님 한분이 동석하여 최근에 학교에서 일어난 심각한 사건 하나를 듣게
되었는데 다름 아닌 " 코리안 드림 "에 얽힌 여덟 살짜리 여자 아이의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이제 소학교 2학년인 여아의 어머니는
남편과 어린 딸을 남겨두고 오래전에 돈을 벌기위해 한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처음 몇 달간은 꼬박꼬박 적지 않은 돈이 남편과 아이에게
송금돼 왔지만 최근 얼마 전부터 무슨 연유인지 송금이 끊겼다는 것이다. 마땅한 직업이 없던 남편은 극도의 실망과 불안으로 허구한 날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그러다 어떤 일로 공안(경찰)에 구속되는 설상가상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빨리 나와야 6개월 정도라니 이제 소학교
2학년 밖에 안 된 여자아이를 어떻게 보호해 줄 것인가?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교사들이 며칠을 고민한 결과 교사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양육시키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고 옷을 갈아입히는 문제는 그럭저럭 해결한다 해도 문제는 심각한
정서불안으로 인한 여아의 정신 건강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에 대한 걱정이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여아가 두렵고 외로우면 엄마를
부르고 아빠를 부르곤 하지만 어느 한쪽도 아이 곁에 없으니 스스로 정서를 조절할 수 없는 어린 마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가 남겨질까
전교사가 전전긍긍 고민하며 자식을 키우는 교사로서의 사명감과 동족에의 사랑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아무쪼록 돈벌러간 엄마로 부터의 소식과 구속된 아빠가 풀려나길 기원해 본다. 그야말로 남의 일 같지 않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그리고 파산 직전의 가정이지만 어린아이의 마음에 평생의 상처로 남지 않게 극적으로 가족이 다시 모여 원래의 모습이 회복될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해 본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아닌 상처를 주었던 " 코리안 드림 " 수혜자이자 피해자가 하필이면 중국
동포들이 대부분이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빠듯한 일정 때문에 현지 업체가 미처 자료 준비를 못한 원목 건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불과 닷새 밖에 안 됐는데 꽤 오래전에 집을 떠난 느낌이다. 오후 4:30분 출발하는
비행기 일정이기에 최소한 3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어서 고 선생과 나는 목단강가에 유서 깊은 빈강 공원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겨레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민족이 가장 활발하게 항일 운동을 벌인 도시 중의 하나로 불세출의 독립운동가 김좌진장군을
비롯한 많은 항일 운동가들이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며 "애수의 소야곡"을 부른 가수 남인수와 “눈 물젖은 두만강” 을 부른 가수
김정구 등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어쩌면 우리 민족만이 느낄 수 있는 삶의 애환과 실향의 아픔이 도시 곳곳에 묻어
있어 이국에의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나 보다. 차라리 오래전에 왔었던 고향 근처의 어느 도시쯤이란 말이 더 편할 것
같았다.
또한 목단강시에는 옛 발해국의 유적지로 알려져 있는 용두산 성새, 남성자성새가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 조선족 약 4
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조선족 소학교. 중학교. 조선민족상점, 조선민족예술관, 조선민족도서관, 조선민족출판사 등 우리의
문화의 얼이 깊이 스며있어 말 그대로 북방의 "코리아타운" 이라고 불리 우는데 전혀 손색이 없는 도시라고 전해지고 있었다.
목단강역에서 쭉뻗어나온 太平路가 목단강에 의해 막히는 지점의 '빈강공원'에 강을 따라 길쭉하게 잘 정돈된 산책길이 나있어
많은 시민들의 좋은 휴식 공간이 되어준다.
제일 먼저 빈강 공원 한복판에 부상한 두 사람을 안고 있는 항일투쟁의
상징 「팔녀투강상(八女投江像)」의 육중한 모습이 강렬하게 시야로 들어온다. 멀리 1938년 10월 하순경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던
항일연군 제5군 예하 제 1사단의 백여 명의 전사들이 우수훈 하 서안의 로도 구에서 숙영하다가 일본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급한 상황에 "랭운"을 비롯한 8명의 여전 사들이 비장한 각오로 백여 명의 전우들을 엄호하기 위한
저격 임무를 띠고 우수훈 하에 뛰어들어 일본군의시선을 모은 끝에 집중 사격을 받고 야생화같은 향기론 삶을 접은
것이다.
곱게 핀 스믈 다섯살의 언니 戰士로부터 부모님 앞에서 어리광이나 부렸어야 할 열세살의 애띤 소녀 전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이 땅의 해방과 건설을 위해 소중한 생명을 아낌없이 바친 인물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
여덟 사람의 女戰士 중에 漢족 여성이 여섯이고 두 사람의 조선 여성이 바로 항일련군 제5군 제1사 피복창 창장인 안순복과 戰士
리봉선 이다.
탄약이 다 떨어질 때까지 일본군과 싸우다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던 항일 게릴라 여성
대원 여덟 중에 두 사람,
오직 한번 피울 수 있는 생명의 꽃을 두려움 없이 강물로 던졌던 그날의 피맺힌 절규도 잊은
채 무심한 목단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저 이방의 나그네로 잠시 들렀다가 우연히 알게 된 그대들의 숭고한
이야기 그냥 듣고만 가기엔 숙연한 마음이 발길을 잡아 이렇게 빈강 언덕에 서서 강물을 바라보며 어디쯤인가 그대들을 싣고 간 먼
세월을 찾아봅니다.
그대들의 고향이 어디신지? 어떻게 이곳에서 멈추게 된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우수훈 하에 몸을 던져 지지 않는 헌신의 꽃을 피웠던 그대들의 넋을 보았기에.
훗날 고향에 가면 말
하리라 만주 벌판 목단강 나루에 장한 두 아낙이 꽃이 되었다고 영원히 시들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