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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는 제9기(2014-2019년)의 5년 임기 중에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synodalitas)”이란 주제를 연구하였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해당 소위원회의 여러 회의들을 통해서,
그리고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총회의 전체 회의들을 통해서 이 주제에 대한
전반적인 토론이 이루어졌다. 이 문헌은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2017년 총회에서 대다수 위원들이 서면 투표를 통하여 ‘특수한 형태로’
(in forma specifica) 동의한 것이다. 이어서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위원장인
신앙교리성 장관 루이스 F. 라다리아(Luis F. Ladaria, S.I.) 추기경이 이 문헌을
승인하였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호의적인 동의를 얻은 뒤에 2018년 3월 2일
그 발행을 허가하였다.
이 문헌에 들어있는 자료중의 하나로 가장 성서를 잘 나타나 있는 것 같아서
인용해본다 다소 긴문장이라고 여겨지지만 이를 몇차례 나누어서 읽으셔도 좋을 것이다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1.1. 성경의 가르침
12. 구약 성경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곧 남자와 여자를 당신 모습으로
그리고 당신과 비슷하게, 곧 세상을 돌보고 세상이 그 목적을 향하게 하면서
친교의 표지 아래 그분과 협력하도록 부름받은 사회적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증언한다(창세 1,26-28 참조). 처음부터 죄는 하느님 계획의 실현을 위협하고,
창조의 진선미가 표현되는 질서있는 관계망을 깨뜨리며, 인간의 마음 안에서
그의 소명을 흐리게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풍요로운 자비로
계약을 확인하시고 또 새롭게 하시어, 흩어진 것을 다시 일치의 길로 이끄시고
인간의 자유를 치유하시며, 그 자유가 하느님과 결합하고 또한 피조물의 공동의 집
안에서 형제들과 일치하는 선물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을 지향하게 하신다
(예를 들어, 창세 9,8-17; 15장; 17장; 탈출 19-24장; 2사무 7,11 참조).
13.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실현하시면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불러
모으신다(창세 12,1-3; 17,1-5;22,16-18 참조).
이러한 불러 모음은(‘카할’[לָהָק[/’에다’[ה ָדֵע [- 첫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자주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로 번역된다.) 시나이에서 계약을 맺음으로써 확인되며
(탈출 24,6-8; 34,20 이하 참조),
종살이에서 해방된 백성에게 하느님의 대화 상대로서 품위를 부여한다.
그 백성은 이집트 탈출의 여정 안에서 주님의 배타적 속성들을 인정하면서 예배를
통하여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의 법대로 살고자 주님 주위에 모인다
(신명 5,1-22; 여호 8장; 느헤 8,1-18 참조).
‘카할’[לָהָק[/’에다’[ה ָדֵע[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합의적 소명이 드러나는 본디 형태이다.
광야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지파들의 인구 조사를 명하시고 그 각각에게 자리를
정해 주신다(민수 1-2장 참조). 그 회중의 한가운데에는 유일한 안내자이며 목자로서
주님께서 계시는데, 그분께서는 모세의 직무를 통하여 현존하신다
(민수 12장; 15-16장; 여호 8,30-35 참조). 그리고 재판관들(탈출 18,25-26 참조),
원로들(민수 11,16-17.24-30 참조), 레위인들(민수 1,50-51 참조)이 종속적이고
단체적 방식으로 모세에게 연결된다. 하느님 백성의 회중은 남자들만이 아니라
(탈출 24,7-8 참조)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외국인들도(여호 8,33.35 참조) 포함한다.
그 회중은 주 하느님께서 계약을 갱신하실 때마다 불러 모으시는
계약 상대자이다(신명 27-28 장; 여호 24장; 2열왕 23장; 느헤 8장 참조).
14.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하느님 백성에게 계약에 충실하면서 역사의 길을 따라
걸으라는 요구를 일깨운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회개,
그리고 이웃과 관계에서 정의를 향한 마음의 회개로 초대한다. 그 정의는
특히 가난한 이, 억눌린 이, 외국인에 대한 것이며 주님의 자비를 눈에 보이게
증언하는 것이다(예레37,21; 38,1 참조).
이것이 실현되도록 하느님께서는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고(에제 11,19 참조),
당신 백성 앞에 새로운 이집트탈출을 열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예레 37-38장 참조).
그분께서는 이제 더 이상 돌판에 새겨지지 않고 마음에 새겨진 새 계약을 맺으실 것이다
(예레 31,31-34 참조). 그 계약은 보편적 지평으로 확장될 것이다.
주님의 종이 겨레들을 불러 모을 것이고(이사 53장 참조), 당신 백성의 모든 구성원에게
주님의 영을 부어 주심으로써 그계약이 봉인될 것이기 때문이다(요엘 3,1-4 참조).
15.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새 계약을 나자렛의 예수님 안에서 실현하신다.
그분께서는 메시아이시며 주님으로서, 당신의 케리그마를 통하여,
그리고 당신의 삶과 인격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와 은총으로
온 인류를 일치 안에 끌어안고자 하시는 사랑의 친교이심을 계시하신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영원으로부터 사랑으로 아버지의 품을 향하여 계시며
(요한 1,1.18 참조), 때가 찼을 때에 사람이 되시어(요한 1,14; 갈라 4,4 참조)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신다(요한 8,29; 6,39; 5,22.27 참조).
예수님께서는 결코 혼자
행하지 않으시며, 모든 것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다. 성부께서는
예수님 안에 머무시면서, 세상에 보내신 아드님을 통하여 몸소 당신의 업적을
이루신다(요한 14,10 참조).
아버지의 계획은 예수님의 파스카 안에서, 곧 그분께서 당신 생명을 내놓으신
뒤에 부활로 다시 새로운 생명을 얻으시고(요한 10,17 참조) 성령을 “한량없이”
(요한 3,34) 부어 주심으로써, 당신 제자들을 그 생명에 참여하도록
그 자녀적이고 형제적 삶을 이루게 하실 때에, 비로소 종말론적으로 성취된다.
예수님의 파스카는 새로운 이집트 탈출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신앙 안에서
그분을 믿는 모든 이를(요한 11,52 참조)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당신과 일치시켜 마침내 하나로 모으신다(συναγάγῃ εἰς ἕν).
구원의 업적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눈앞에 두시고 아버지께 청하심으로써
이루어진 일치이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1).
16.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길”(루카 20,21)을 알리시고 그 방향을
따라가시며(루카 9,51-19,28 참조),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는
(루카 4,14-15; 8,1; 9,57; 13,22; 19,11 참조) 순례자이시다.
그분 자신이 아버지께 가는 “길”(요한 14,6)로서, 성령 안에서(요한 16,13 참조)
사람들에게 진리, 그리고 하느님과 또한 형제들과 친교라는 생명을 전해 주신다.
예수님의 새 계명의 기준에 따라 친교를 이루고 산다는 것은, 역사 안에서
새계약의 하느님 백성으로서 자신이 받은 선물에 합당하게(요한 15,12-15 참조)
걸어가는 것을 뜻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당신의 말씀으로 비추어
주시고 생명의 빵으로 양육하신다.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의 인도로 길을 걸어가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살아 있는 표상을, 우리는 루카 복음서 저자가 묘사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루카 24,13-35 참조).
17. 신약 성경은 예수님께서 구원을 전달하시는 능력을 가리키고자 한 가지
특별한 단어를 사용한다. 예수님께서 성부로부터 받으셨으며,
‘성령의 힘’인 ‘뒤나미스’(δύναμις) 안에서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행사하시는
그 능력은 곧 ‘엑수시아’(ἐξουσία, 신적 권위를 의미함)라고 일컬어진다.
그 신적 권위는 “하느님의 자녀”(요한 1,12)가 되게 하는 은총을 전달하는 데 있다.
사도들은 그러한 신적 권위를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받게 되었으며,
그분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라고 사도들을
파견하신다(마태 28,19-20 참조).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은
세례를 통하여 이 신적 권위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성령의 기름부음’
(1요한 2,20.27 참조)을 통하여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으며(요한 6,45 참조)
“모든 진리 안으로”(요한 16,13) 인도되는 것이다.
18. 부활하신 주님의 ‘엑수시아’, 곧 그 신적 권위는 교회 안에서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몸을 건설하시고자 하느님 백성 안에 베풀어 주시는
다수의 영적 선물들(τα πνευματικά) 또는 ‘은사들’(τα χαρίσματα)을 통하여 표현된다.
그런데 그 선물들과 은사들을 사용하는 데 객관적인 질서(τάξις)가 존중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며 전개되어 모든 이를 위한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1코린12,28-30; 에페 4,11-13 참조). 그 가운데 첫째는 사도들이며,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시몬 베드로에게 고유하고 가장 뛰어난 역할을
주셨다(마태 16,18-19; 요한 21,15 이하 참조). 사도들에게는 신앙의 유산
(depositum fidei)을 충실하게 보존하며 교회를 이끄는 직무가 맡겨졌다
(1티모 6,20; 2티모 1,12.14 참조).
그렇지만 은사(χάρισμα)라는 단어는, 또한 공동의 유익을 위하여 각자에게
고유한 선물을 주시는 성령의 자유로운 주도권 속에 드러나는 무상성과 다양한
형태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1코린 12,4-11. 29-30; 에페 4,7참조).
그러므로 모든 은사의 사용은 항상 상호 복종과 상호 봉사의 논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1코린 12,25참조). 모든 것을 다스리는 최고의 선물은 사랑이기
때문이다(1코린 12,31 참조).
19. 사도행전은 하느님의 백성이 부활하신 주님의 뜻을 공동체적으로 식별하도록
부름받았던, 사도 교회 여정의 몇몇 중요한 순간들을 증언한다. 이 여정을 이끌고
인도하시는 주인공은 오순절에 교회에 부어지신 성령이시다(사도 2,2-3 참조).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걸어가야 할 길을 식별하려고 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바로 제자들의 책임이다
(사도 5,19-21; 8,26.29.39; 12,6-17; 13,1-3; 16,6-7.9-10; 20,22 참조).
그 좋은 예로서, 사도들이 “식탁 봉사”의 임무를 맡기고자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선택한 것(사도 6,1-6 참조)과,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에서 결정적인 문제에 대하여 식별한 것(사도 10장 참조)을
들 수 있다.
20. 이러한 문제는 전통적으로 ‘예루살렘 사도 공의회’라고 불러온 회의에서 다루어진다
(사도 15장; 또한, 갈라2,1-10 참조). 여기에서는 사도 교회가 그 여정의 결정적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 현존의 빛을 통하여 선교의 관점에서 자신의 소명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공동합의의 사건이 이루어짐을 알아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여러세기를 거치면서
교회 안에서 거행된 시노드들의 원형적 모습으로 해석될 것이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그 사건의 역동성을 정밀하게 묘사한다. 안티오키아의 공동체는
공동체에 제기된 분쟁과 논란 때문에, 이에 관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원로들에게”(사도 15,2) 문의하기로 결정하고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그들에게 파견한다.
예루살렘 공동체, 곧 사도들과 원로들은 곧 함께 모여(사도 15,4 참조) 상황을 검토한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일어난 일을 보고하자,
이어서 활발하고 솔직한 논쟁(ζητήσεως, 사도 15,7ㄱ)이 이루어진다.
특히, 베드로의 권위 있는 증언과 신앙 고백을 모두가 듣는다(사도 15,7ㄴ-12 참조).
야고보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ἐξ ἐϑνῶν λαόν) 백성을”(사도 15,14)
선택하신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증언하는 예언에 비추어서 지금 일어난 일들을
해석하고(아모 9,11-12; 사도 15,14-18 참조), 몇 가지 행동규칙을 제시하며
최종 결정을 내린다(사도 15,19- 21 참조). 그의 담화는 하느님의 계획에 견고하게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구원 역사의 점진적 전개를 따라 함께하고자
하는 열린 교회의 사명에 대한 전망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내려진
결정과 함께 지켜야 할 실천 지침들을 전달하는 편지를 전하려고 파견할
이들을 뽑는다(사도 15,23-29 참조). 그 편지는 안티오키아 공동체에게 전해져서
낭독되고, 공동체는 이를 기뻐한다(사도 15,30-31 참조).
21. 각자의 역할과 기여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만, 그 과정에서는 모든 이가
다 주인공들이다.
그 질문은 예루살렘교회 전체에게(πᾶν τὸ πλῆϑος, 사도 15,12) 주어진다.
예루살렘 교회 전체가 이 전개 과정에 모두 함께하여
마지막 결정에 참여한다. “그때에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ἔδοξε τοῖς ἀποστόλοις καὶ τοῖς πρεσβυτέροις σὺν ὅλῃ τῇ ἐκκλησία,
사도 15,22) 마지막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 질문을 받은 것은
권위를 가지고 그들의 특별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도들과 원로들이다.
여기서 사도들은 특히 베드로와 야고보를 가리키는데, 이들이 직접 말을 하게 된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는, 교회가 예수님의 복음에 충실하도록 보증하며
그 여정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작용에 힘입어 결정을 내린다.
“성령과 우리는 [……] 결정하였습니다”(사도 15,28). 예루살렘 공동체전체가
그 결정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삼고(사도 15,22 참조), 이어서 안티오키아
공동체도 그렇게 한다(사도 15,30-31 참조).
처음의 의견 차이와 활발한 토론은, 하느님의 활동에 대한 증언과 서로의 판단을
교환하여 서로 함께 성령의 뜻에 귀 기울이는 가운데 만장일치적 합의
(ὁμοϑυμαδόν, 사도 15,25 참조)에 도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그합의는 교회의 복음화 사명을 위한 공동체적 식별의 결실인 것이다.
22. 예루살렘 공의회의 전개 과정은, 각자 자신의 위치와 고유한 역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서로 결합되어 있어 질서 정연한 실재인 하느님 백성의
여정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1코린 12,12-17; 로마 12,4-5; 에페 4,4 참조).
바오로 사도는 성찬 모임에 비추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의 표상을
제시함으로써 유기체의 단일성과 더불어 그 지체들의 다양성을 표현한다.
인간의 몸 안에서 모든 지체 각각의 고유성이 필요하듯이, 교회안에서도
모든 이가 세례에 힘입어 동등한 품위를 지니는(갈라 3,28; 1코린 12,13 참조)
동시에, 또한 모든 이가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에페 4,7)
구원 계획을 실현하는 데에 각자 이바지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모든 이는 공동체의 삶과 사명에 공동 책임이 있다. 모든 이가 같은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는다는 점에서(1코린 15,45 참조), 이들은 각자의 특별한
직무와 은사를 존중하며 상호 연대성의 법칙에 따라 일하도록 부름받고 있다.
23. 하느님 백성의 여정의 종착점은 하느님 영광의 찬란한 광채에 싸여 있고
천상의 전례가 거행되는 새예루살렘이다. 요한 묵시록은 거기에서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을 본다. 그 어린양 은 하느님께 자신의 피를 통하여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였고,
“그들이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이 땅을 다스릴 것”이다. 천상의 전례에는 천사들과 “수백만 수억만”의
사람들과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이 함께 참여할 것이다(묵시 5,6.9.11.13 참조).
그 때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가장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다”(묵시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