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16. 주일예배설교
민수기 20장 1~29절
죽음, 상실, 거부, 사별의 신앙적 의미
■ 긴 본문임에도 함께 읽는 일에 기꺼이 동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네 개의 사건/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1절에 있는, 미리암의 죽음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2~13절에 있는, 모세가 반석을 두 번 내려친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는, 14~21절에 있는, 에돔 땅 통과 협상 실패 이야기입니다. 네 번째는, 22~29절에 있는, 아론과의 사별 이야기입니다.
이 네 개의 이야기는 시간표상 차례대로 일어났다는 것 말고는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이야기를 중심으로 네 개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하나의 메시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입니다.
아마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사실이야 맞지만, 뭔가 뜬구름 잡기식 설명이 아닌가 싶으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그 진한 신앙적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 두 번째 이야기를 중심으로 읽는 것을 전제로 했으니, 두 번째 이야기인 ‘반석 두 번 내리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모세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담고 있습니다. 물이 없자 백성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찾아와 난동을 부리고 행패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모세와 아론은 대꾸 없이 뒤로 물러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렸습니다. 이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이에 8절을 말씀하셨습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이에 모세와 아론은 10절과 11절의 행동을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이렇게 해서 물을 충분히 마셨고, 물을 확보했는데,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바로 이 부분에서 많은 주석가들은 ‘도대체 모세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두고 논쟁했습니다:
- 10절에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에서 보듯, ‘모세가 백성들에게 화를 참지 못한 것 때문이다.’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 11절에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에서 보듯, ‘그가 물이 나오라고 말만 하면 되는데 바위를 친 것이 잘못이다.’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 10절에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에서 보듯, ‘그가 바위를 친 것은, 물에 대한 책임과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모세 자신과 아론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분명 이 여러 해석 중에 하나는, 진실에 더 가까운 해석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해석도 많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정작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사실은 다른 것에 있습니다. ‘도대체 왜 모세는 그 순간에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는 전에도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백성들은 마라에서 물이 써서 먹을 수 없다며 불평했습니다. 그때 그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르비딤에서 물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때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어 바위를 치라고 하셨고,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8절을 통해서 하신 말씀은 늘 하신 명령, 늘 들었던 명령이었습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는 이번에도 바위를 치라는 뜻으로 생각했을 것이다.’라는 해석을 하면 너무 나간 상상일까요? 할 수 있는 상상입니다. 늘 있었던 상황에, 늘 같은 명령이셨으니까요. 모세는 ‘선례대로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 만일 바위를 치라는 뜻이 아니셨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왜 모세에게 지팡이를 잡으라고 명령하셨을까요? 분명 우리 모두 이러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백성들을 모이게 하라. 바위에게 물을 내라고 명령하라.
그렇기에 우리는 여기 이 지점에서 ‘도대체 하나님은 왜 모세에게 지팡이를 잡으라고 명령하셨을까?’라는 질문에서 ‘도대체 모세는 왜 명령에도 없는 행동인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씩이나 내려쳤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위를 내려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해결책을 이미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감정이 격해졌을까요? 화를 내지 않고 늘 침착하던 그가 왜 침착함을 잃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이 사건 직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통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민수기 20장의 첫 구절은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머물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그 실마리는 ‘미리암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물은 끊어졌고, 백성들은 난동을 부렸습니다.
바로 여기에 모세가 침착성을 잃고 화를 냈습니다. 누이 미리암의 죽음이 모세가 침착성을 잃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심에 주저하던 모세에게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을 붙여주심으로 대과업인 출애굽을 이룰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크고 작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은 하나님 다음으로 의지의 대상이었습니다. 지도력에 시비를 받을 때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을 때마다,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은 든든한 지원군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모세의 현재이자, 미래였습니다.
그런데 누이 미리암이 죽었습니다. 이 슬픔은 온 우주를 잃은 듯한 슬픔이었습니다. 실존적인 블랙홀을 느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실수라도 하신 것 같은 슬픔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귀와 입, 그리고 눈과 마음은 일체감을 잃었습니다. 이성적 감각을 잃은 것입니다. 슬픔은 귀를 둔하게 했고, 슬픔은 말을 거칠게 만들었습니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성을 냈고, 반석을 두 번씩이나 쳤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 과연 우리는 모세의 이 행위에서 무엇을 되짚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인간은 한계를 가진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라는 사실입니다.
침착함을 놓치지 않고 완벽해 보이던 모세지만, 그 역시 인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인생이지만, 미리암이 죽은 것처럼, 인간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계시면 천하무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에돔 왕의 저항에 아무런 반응도 없으신 하나님의 태도에,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가나안에 들어가 살 날을 기대하며 사명을 감당하던 동지요 형을 사별케 하신 하나님의 행위에,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운명적 한계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것으로 메시지를 마감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메시지의 결론은 <그 과업을 완성하는 일은 당신이 아니다!>입니다.
모세, 아론, 그리고 미리암은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지도자 그룹이었습니다. 모세는 최고 예언자였고, 아론은 첫 번째 대제사장이었으며, 미리암은 최초의 여선지자였습니다. 이 세 사람은 출애굽을 이끈 환상의 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 사람은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완성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은 가나안 완전 정착으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프로젝트인데, 가나안에 입성하기도 전에 세 사람 모두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그 과업을 완성하는 일은 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과업을 완성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를 맞이했고, 그의 지도력 아래 가나안 입성, 그리고 정착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도 죽었고, 이후 다른 지도자들이 세워졌으나, 그들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됐습니다. 왜요? 그 과업을 완성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 과업을 완성하는 일은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고백한다면, 여러분은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 톨스토이가 소설가로서 성공했지만, 그는 삶의 무의미함을 절감했습니다. 그는 전도서를 읽으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합리적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생명력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톨스토이의 고백처럼 신앙이 우리의 모든 삶의 생명력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과업을 완성하는 것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때 우리의 삶은 생명력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미리암이 죽었을 때, 모세와 아론은 슬픔에 압도당했습니다. 심지어 모세는 통제력을 상실할 정도로 슬픔에 잠겼습니다. 잃은 통제력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죽게 되었고, 이로써 인간의 한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론과의 사별을 통해 ‘인간은 죽는다. 인간은 한계를 가진 존재다.’는 사실을 더욱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모세처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시작했던 일은 다른 사람들이 계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별했지만, 우리가 사랑한 사람들은 우리 안에 계속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가 8장 6절의 말씀처럼,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 오늘은 세월호 참사 9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 170일째 되는 날입니다. 시간이 흐르기에 사람은 죽고, 환경도 바뀌지만, 애도는 여전하고, 진실을 밝히는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삶은 계속될 것이고, 진실은 승리할 것입니다. 이 메시지에 참여하시는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