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에 딸 부부와 손자, 손녀, 사위 조카 도합 7명이 한국 관광을 했다. 가이드가 부산 보수동책방골목에 우리들을 안내했다. 일제가 망하고 일본사람들이 본국으로 가면서 버리고 간 책, 한국전쟁시절 피난민들이 가지고온 헌책들이 모여서 형성된 헌 책방 골목이다. 나는 김구의 백범일지와 여운형 자서전을 찾았다. 여운형 자서전은 없었고 백범일지를 구할 수 있었다.
그동안 인터넽이나 유튜브를 통해서 김구에 대한 이야기는 귀가 아프도록 들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그가 시대를 뛰어 넘는 선각자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어린이들이 자라면서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자랄때는 학원사에서 출판한 위인전과 세계명작집을 많은 학생들이 읽었다. 아마 각각 50권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서구의 위인은 포함 되었어도 김구에 대해서는 읽어 본적이 없다.
치아포 사건을 비롯한 김구의 청장년기 시절의 이야기는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 것 처럼 흥미진진하다. 치아포에서 일본인을 살해하고 도주했다가 붙잡혀 사형당하기 직전 고종의 전화로 사형을 면하고 인천 형무소에 수감 중 옥중 탈출하여 방랑하다가 스님이 된 인생드라마는 재미있는 한 편의 영화였다.
그의 중국상하이 독립운동 시절 기록에서는 그가 조선이 일본에게 점령당한 역사적인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에 대학도 다니지 않은 학력으로 이런 정도의 역사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구는 윤봉길의사의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 이후 중국 남쪽 가흥에서 숨어 지냈다. 경치 좋은 곳, 역사적인 유적, 농촌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한가한 나날을 보냈다. 농촌의 농부들이 조선 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농사 짓는 것을 보고 속이 뒤집어져 한마디 했다.
"농촌을 시찰한 나는 한마디 않을 수 없다. 중국의 한, 당, 송, 원, 명, 청 각 시대에 우리의 선인(선조)들이 사절로 다닐 때, 그들은 모두 장님었던가? 필시 허깨비나 쫓고 국가의 계책은 무엇이며 민생은 무엇인지 생각도 못한 것이니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닌가!
문영이라는 조상은 면화씨를, 문로라는 조상은 물레를 중국에서 들여왔다 하나, 그 외에는 말인즉 오랑캐(청)라 지칭하면서도 명대의 의관, 문물을 '모두 중국제도를 존중한다'라하여 쫓았으니-예를 들어 망건과 갓처럼 실제 아무 이익도 없고 불편과 고통만 주는 망종 기구들-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렸다.
우리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에서 비롯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리민복의 실제는 도외시하고 주희의 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의 것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주장했다. 그리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몇백년을 아옹다옹하니 민족적 원기는 모두 소진되어 남은 것이 없고 발달한 것은 오로지 의존성 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쩌 겠
는가." - 백범일지에서
조선은 건국 이래 명나라를 군주의 나라로 섬겼다. 조선은 신하의 나라였다. 그런데 명나라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게 망하고 금나라는중국에 청나라를 세웠는데도 조선은 명나라를 버리지 않았다. 송시열은 명나라의 법통을 이을 나라가 조선이라고 하며 조선이 작은 명나라임을 자청하고 수중화주의를 내 세웠다. 그리고 청을 오랑캐라고 무시하며 겉으로는 청을 섬기면서 청나라로 부터 새로운 문물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나라는 그 동안에 세계 최대 강국으로 발전했다. 1880년대 중반 아편전쟁 이후 패망했지만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 했고 한 때는 요지음 미국에 버금가는 국민 총생산량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청이외의 나라와는 외교관계가 없는 쇄국을 했던 조선의 유일한 창구였던 청을 도외시 했으니 조선이 은둔의 나라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김구는 자신의 정치 이념은 자유라고 했다. 그리고 자유가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의 차이는 법이 어디서 나오느냐에 달려있다고 하면서 법이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나오면 자유가 있는 나라이고 특정 개인이나 하나의 계급에서 나오면 자유가 없는 나라라고 했다. 법이 하나의 계급에서 나오면 계급독재 인데 이중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라고 하면서 조선의 성리학을 기초로한 통치도 그중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수백년동안 이조 조선에서 행하여 온 계급독재는 유교, 그중에서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었다. 이 독재밑에서 우리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었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쳤다. 우리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원인이 실로 여기에 있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공산당을 계급독재 중에서 가장 철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의 계급독재보다 더 악질적인 것임을 지적했다.
"지금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의 민주주의란 것은 독재정치 중에서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서 받은 변증법,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이 두가지와 아담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맑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 데 모아서 맑스의 학설에 일점 일획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 대하니 이는 옛날의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은 맑스주의 하나로 통일 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분명히 잘못된 이론일 진데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백범일지에서
*사문난적은 주자의 가르침인 성리학의 해석을 벗어난 학설을 펼치는 사람을 비방할 때 사용되던 명칭이다.(나무위키). 공산주의 국가에서 흔히 쓰는 반동분자와 비슷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김구 선생은 하나님이 내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면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해방 후 한국 국민이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는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38선 이남에 친미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미국에게 남북한을 통합한 민주주의 국가를 꿈꾸는 김구는 방해 꾼에 불과했다.이승만은 미국의 계획에 재빠르게 동조했다. 미국과 이승만은 극우 세력에게 김구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그들과 협조하고 있다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주어 그들에게 김구를 제거할 수 있는 대의명분을 주었다. 김구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민족주의자였다. 미국과 이승만은 김구를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민족주의는 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악이었다.
김구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조국은 둘로 갈라져 있고 북은 일인 독재국가이고 남은 미국의 관용에 매달려 있는 나라이다. 북은 김구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조선"을 그들의 국명에 사용하고 있다. 남에는 아직도 외국 군대가 안보라는 미명아래 주둔하고 있고 전시 작전권은 그들이 가지고 있다. 세계 역사상에 자국 군대가 전시 작전권을 외국 군대에게 주고 있는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김구가 하늘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