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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리타 도자기'의 어머니 | ||||||||||||||||||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의 대모 백파선 (1560 ~ 165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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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하지만, 한 국가나 지역의 문화를 다른 곳으로 전파하고 새로운 기술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임진왜란을 달리 '도자기전쟁'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런 맥락에서다. 전란 중 일본은 조선의 사기장들을 무수히 끌고 갔다. 도자기 생산 기법을 몰랐던 일본은 이들 덕에 비로소 도자기를 생산하게 됐고, 도자기 발전의 혁명적 계기를 맞았다. 일본 규슈 사가현 아리타쵸(有田町)는 일본의 전통 공예품 가운데 하나인 '아리타도자기(아리타야키)'의 산지이다. 그런데 아리타쵸의 조선사기장 중에 '백파선'이라는 조선 여성이 있었다. 아리타쵸 조선사기장들의 대모이자 지도자였던 백파선(白婆仙·1560~1656), 그는 김해 사람이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가장 먼저 보낸 전리품이 김해향교의 도자기 제기라는 말이 있다. 왜군이 조선의 도자기를 약탈했고, 900여 명에 이르는 조선의 사기장들을 끌고 갔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는 대목일 것이다.
김태도는 1618년 10월 29일 세상을 떠났고, 남편이 죽은 후에도 백파선은 아들 종해(일본 이름 헤이자에몬)와 함께 백자 제작에 몰두했다. 그러나 조선과 타케오 지방의 토질이 달라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가 없었다. 백파선은 영주의 허가를 얻어 조선사기장 일족을 데리고 아리타로 옮겨 도자기 제작을 계속했다.
백파선은 온화한 얼굴에 귀에서 어깨까지 내려오는 귀걸이를 했으며, 큰 소리로 웃었고, 사람들을 편안하게 감싸주는 덕을 지녔다고 한다. 효심이 깊은 손자가 그 자취와 덕을 기려 '백파선'이라 칭했는데, 그게 이름처럼 되어버렸다. 이우상 교수는 "백파선은 96세까지 장수하며 조선의 사기장들을 이끌어 왔으니, 백발이 성성하고 또 성스러운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백파선이라는 이름에서 그런 모습을 연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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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자기의 원조는 조선이다>
Ⅰ. 임진왜란과 일본의 도자기
일본에서는 임진․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 혹은 ‘밥그릇 전쟁’, 또는 ‘기술 전쟁’이라고 부른다. 왜군의 침략으로 조선에서는 군사들은 물론 수많은 백성들이 왜병에 의하여 도륙되었으며, 활자, 염색, 직물, 고서, 불경, 그림, 종, 도자기……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화재의 약탈이 이루어졌으며, 수많은 조선의 기술자들을 전쟁 포로와 함께 일본으로 끌고 왔다.
이것은 주로 임진․정유재란 때 선봉에 섰던 서일본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던 영주(藩主)들이 앞을 다투어 문화재를 약탈하였으며, 기술자들을 사냥하였다고 자신의 전공을 자랑스럽게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도자기를 굽던 도공의 수난이 가장 심하였는데 그 이유는 당시 왜군의 영주들이 차를 마실 때 가장 애용하는 다기(茶器)가 바로 조선의 다기였던 것이다.
일본 전국시대(戦国時代)부터 전국 무장들이 전쟁을 하는 가운데도 잠깐씩 시간을 내어 다도(茶道)를 즐겼다고 한다. 다도를 모르면 전국 무장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차를 마시는 것이 유행하였으며, 이 가운데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광적으로 다도를 즐겼다고 하는 것은 당시 일본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오오사카(大阪)와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인 나고야성(名護屋城)을 오고 갈 때에 황금으로 만든 다실을 가지고 다니며 차를 즐겼다고 한다. 당시에는 다도를 즐기는 것이 상류계급의 교양처럼 유행하였으며, 또 당시의 모든 정치가 다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다실에서 사용되는 다기는 조선 웅천(熊川)지방에서 생산된 다기를 이도짜왕(井戸茶碗)이라고 하여 최고품으로 생각하였으며, 일반 백성들도 투박한 토기보다는 유약이 바른 사기그릇을 사용하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다고 한다.
조선에 출병하여 있던 번주들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이러한 취미와 서민들의 욕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도자기를 최고의 전리품으로 생각하고 진귀한 도자기를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바침으로서 충성의 경쟁을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수많은 도자기들이 약탈이 되어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그 단편적인 예로서 청자와 백자는 물론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도자기의 파편까지도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왜병끼리 싸웠다고 하며, 도자기에 관계된 것이라면 아예 뿌리째 뽑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임진․정유재란으로 인한 조선의 피해는 더욱 극심하여 길거리에는 왜병들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귀와 코를 전리품으로 챙겨갔기 때문에 귀와 코가 없는 사람들이나 시체가 즐비하여 마치 아비지옥을 보는 것 같다고 종군승으로 참가한 왜승인 慶念은 자신의 종군 일기인 『朝鮮日日記』에서 왜병들에 의해 저질러진 각종 만행을 개탄하면서 그 참상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이런 전쟁의 참화는 40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아픈 상처를 내보이며 각지에 유적으로 남아있고, 그때 강제로 잡혀간 조선인들의 자손들은 4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일본인으로 동화되고 흡수되어 자신의 조상이 누군인지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일본 최초로 일본에서 나는 흙을 가지고 백자를 구워 도자기의 신으로 추앙을 받는 아리타(有田)의 이삼평(李參平), 사츠마(薩摩)반도에 조선 도자기의 꽃을 피운 심수관(深壽官), 기라츠가마(唐津窯)와 시이노미네(椎ノ峰)의 조선 도공들이 남긴 유적과 일본인들이 남긴 자료를 중심으로 일본 도자기의 뿌리를 찾아가 본다.
2. 일본 도자기의 신 이삼평
일본에서 아라타 도자기라고 하면 아리타를 중심으로 주변의 타케오(武雄), 하사미(波佐見), 우레시노(嬉野), 이마리(伊万里)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를 통틀어 아리타 도자기라고 부른다. 아리타 도자기의 시작은 정유재란 때 나베시마의 영주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에 의해 강제로 끌려 온 이삼평이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을 찾아보라는 영주의 명을 받아서 아리타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도토를 발견하고 처음으로 일본 땅에서 나는 흙으로 백자를 구워내면서부터이다. 이삼평은 일본 도자기 문화를 한 단계 상승시킨 사람으로서 사후에 일본 도자기의 신으로 추존되어 현재 도쟌신사(陶山神社)에 신으로 모셔져 있다.
사가켄(佐賀縣) 고등학교 교육연구회 사회부회에서 발간한 『사가켄 역사의 산보』에서는 사가켄의 도자기에 관하여 ‘일본의 도자기는 이삼평에 의하여 개발된 것으로써 이후 아리타 야키모노(有田焼もの)라고 불려지게 되었으며, 에도시대(江戶時代) 중기 이후에는 유럽에까지 수출되어 대번영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농업이 중심이던 사가한(佐賀藩)의 쌀 생산량이 십만 석이었는데 비하여 사가한의 적극적인 상업 진흥 정책의 추진 결과 도자기의 출고는 팔만 량으로서 농업중심 사회에서 산업중심 사회로 발전을 시키는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도자기의 생산은 당시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고 있던 사가한의 재정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또 1960년 아시히(朝日)신문사가 발행한 『일본의 연륜』에 의하면 당시 아리타에는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102곳, 도자기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도자기 상인들의 가게가 155곳이 있었으며, 연간 도자기 매출액이 45억 엔(한화로 450억 원 정도)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본 도자기의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이삼평에 대하여 문헌과 유적을 중심으로 고찰하여 보면 먼저 우리나라의 문헌에는 백제시대 왜국으로 건너가 천자문을 전하여 준 왕인 박사나 코마진쟈(高麗神社)의 약광(若光)처럼 이삼평에 대한 자료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일본측 문헌에만 나타날 뿐이다. 이것은 고려시대 과거제도를 도입한 송나라 사람 쌍기가 중국 문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우리나라 문헌에만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삼평은 정유재란 당시 나메시마군에 의하여 강제로 현해탄을 넘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문헌적인 자료를 근거로 이삼평이 강제로 끌려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본인이 원하여 바다를 건너왔다고 한다. 일본 측의 자료인 「카네가에유래서(金ケ江由來書)」에 의하면 ‘이삼평은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조선에 출병하여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나베시마군에게 길을 안내해준 역할을 한 사람으로서 나베시마군이 귀국을 할 때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이삼평을 불러서 그 동안의 공적을 치하를 하면서 그대로 조선에 머물러 있으면 이적 행위를 한 것이 알려져 보복의 위험이 있으니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이 어떠냐고 권하여 스스로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일본으로 와서는 이삼평이란 이름을 버리고 나베시마 영주가 지어준 카네가에 산베에(金ケ江三兵衛)란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나베시마 영주는 이삼평의 고향이 조선의 금강 근처임을 알고 이삼평의 이름을 카네가에(金ケ江)라고 지었다고 자기 성이 바뀐 경위에 대해서도 유래서에서는 기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카네가에유래서(金ケ江由來書)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카네가에유래서(金ケ江由來書)가 쓰여 지게 된 동기가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가문을 정리하거나, 혹은 자신들의 역사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이삼평이 발견한 이즈미야마의 채굴권을 둘러싸고 사가한에 소송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소송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증거 자료로서 제출하기 위하여 급하게 쓰여 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역사적인 자료로서 카네가에유래서(金ケ江由來書)에 쓰여 진 사실을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그러나 이 유래서가 일본에서는 정설로 굳어져 아리타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나 아리타를 알리기 위한 각종 안내 팜플렛에는 이삼평은 나베시마군에게 협조하고 길을 안내한 사람으로서 강제적으로 끌려온 것이 아니라 본인의 뜻에 의하여 일본에 왔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이삼평 뿐만이 아니라 일본 도자기 발달에 큰 업적을 남긴 백파선(白婆仙), 이종한(李宗勸), 이구산(李九山), 고취(高取), 종전(宗傳) 등도 모두 타의가 아니라 스스로 원하여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에 건너오게 된 것이 자신의 뜻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학자들이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고 당시의 상황을 보더라도 그리운 고향과 부모형제들을 두고 문화적으로 미개한 왜국 땅으로 본인이 원하여,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닌 수많은 조선 도공들이 모두 스스로 건너갔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을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바다를 건너온 이삼평의 초기 행적에 대하여 알려진 문헌은 없다. 그러나 조선인 이종권이 나베시마 영주의 허락을 얻어 사가성 밖에 설치한 조선 사람들의 마을인 도진마찌(唐人町)에 머무르면서 조선에서 가지고 온 흙을 가지고 조선 도공들과 함께 도자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도공들만이 아니라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도 채취하여 배로 실어날랐던 것이다. 도진마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세부리야마(脊振山) 근처에 남아있는 가마터의 유적으로 보고 추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가지고 온 흙이 얼마지나지 않아서 모두 떨어지자 히젠(肥前)지방의 각지에서 시험적으로 흙을 채취하여 도자기를 만들었으나 흙의 성분이 도자기를 만드는데 적합하지 않아서 조선에서 가지고 온 흙과 차이가 나므로 모두 실패하였다고 「엽은문서(葉隱聞書)」에서는 전하고 있다. 더 이상 도자기를 만들 수 없게 된 나베시마 영주는 이삼평에게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흙을 찾을 것을 명하였으며, 이삼평은 영주의 명으로 히젠지방의 산야를 누비며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이 있는 곳을 찾아 헤맸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곳을 어떻게, 몇 년 동안을 찾아 헤맸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삼평이 온갖 고생 끝에 도자기를 원료가 되는 흙을 발견한 곳은 왜란이 끝난 지 20여년이 지난 1616년이었으며, 당시에는 아무도 살지 않던 궁벽한 산골 이즈미야마(泉山)로서 여기서 캐낸 흙을 가지고 도자기를 만들어 시라가와(白川) 냇가 옆에 텐구다니(天拘谷)에 계단식 가마를 만들고 백자를 구워내는 데 성공을 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아리타는 아무도 살지 않던 산골에서 일본 제일의 도향(陶鄕)으로 발전하였으며, 17세기 초부터 지도에도 아리타라는 지명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삼평이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흙인 도토를 발견한 이즈미야마를 보면 4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몇 개의 산이지는 모르지만 수직으로 깎여 없어지고 그 아래의 넓은 평지는 공설운동장을 몇 개 합친 것보다 넓은 크기의 면적으로 주위가 거의 흰색을 띄고 있다. 이삼평이 도토를 발견한지 4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곳에서 매년 수천 톤씩 흙을 파내어 도자기를 만든다고 한다.
이삼평이 이즈미야마에서 도토를 발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리타 사람들은 아리타 도자기 창업 350주년이 되는 1967년에 이즈미야마의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이삼평발견지자광지(李參平發見之磁鑛地)라는 대형 기념비를 만들어 그의 업적을 추모하였으며, 대형 기념비 옆으로는 자신의 이름 석 자도 남기지 못하고 아리타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숨져간 수많은 도공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무명 도공들을 위한 비를 세웠다.
이삼평은 이즈미야마에서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흙을 발견하고 시라가와 하천의 오른쪽 언덕에 텐구타니라는 곳에서 계단식 가마를 쌓고 백자를 구웠다는 이 가마는 우리나라 경기도 광주에 있는 계단식 가마를 본떠서 만들었으며 일본에서 발견한 흙으로 처음 백자를 구워 일본 도자기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도공들은 일본에서 나는 흙으로 가지고는 기술의 차이인지 흙의 성분의 차이인지 모르지만 도저히 자기를 구울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삼평이 이즈미야마에서 흙을 발견한 뒤 백자를 굽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가한 영내에 흩어져서 살고 있던 조선 도공들이 아리타로 몰려들었다. 그 중에서도 타케오(武雄)라는 곳으로 잡혀 와 우찌다(內田)에서 가마를 만들고 신타로료(新太郞窯)라는 이름으로 도자기를 만들던 백파선은 남편인 후카미신타로(深海新太郎=宗傳)가 죽은 후에 미망인의 몸으로 휘하의 도공들을 이끌고 1630년 아리타로 옮겨왔다. 그리고 텐진잔(天神山) 아래에 텐진잔요(天神山窯)라는 계단식 가마를 만들고 도자기를 만들어 아리타 사라야마(有田皿山)의 개조가 되어서 이삼평과 함께 아리타를 일본 제일의 도자기 마을로 만들어 놓았다. 백파선 역시 다구분쇼(多久文書)에 의하면 정유재란 때 승려로 참가하였던 타케오의 코후쿠지(廣福寺) 승려 별종화상(別宗和尙)을 김해에서 만나 함께 현해탄을 넘어와 타게오 우찌다(武雄 内田)에서 부군인 종전과 함께 도자기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역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이삼평이 처음 백자를 구웠던 텐구타니 가마는 사가켄 교육위원회의 발굴조사를 마치고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옛 모습을 추측할 수 있으나 백파선의 텐진잔요는 사가켄 교육위원회에서는 발굴조사를 마친 후에는 방치되어 지금은 옛 자취는 찾을 길 없고 지금은 커다란 웅덩이만 패인 채 쓰레기장처럼 방치되어 있다. 아리타교육위원회의 발굴조사 자료를 보면 이 두 가마터를 발굴조사를 하면서 나온 초기의 아리타 도자기는 조선의 백자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아리타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백파선은 아흔 아홉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무덤은 현재 아리타의 호온지(報恩寺) 경내에 남아있으며 그의 비에는 「만료묘태도파지탑(滿了妙泰道波之塔)」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는 백파선의 증손인 실선(實仙)이 1715년 건립하였다고 하며 비문의 뒷면에는 백파선의 일대기가 음각되어 있다고 하나 오랜 세월의 풍우에 마모되어 지금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조선 도공들의 노력으로 1672년 아리타에는 약 180여 가구가 도자기를 만드는 일본 최대의 도향으로 발전하였다. 도자기 산업의 발달은 도자기를 만들어 굽는데 목재가 상당히 필요하므로 주변의 산림이 황폐화지자 사가한에서는 산림의 보호를 위하여 조선 도공들만 남겨두고 일본 도공들은 모두 아리타 밖으로 추방하기도 하였다.
백파선의 묘 뒤로는 칸논야마(觀音山)가 있다. 칸논야마는 말이 산이지, 실제로는 산이라고 할 수 없고 조금 높은 동산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 정상에 오르면 「조령묘(祖靈廟)」라고 새겨진 조그만 석비가 있으며 여기에 오르면 아리타 시내가 울창한 노송 사이로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칸논야마는 조선에서 잡혀 와 아리타나 아리타 주변에서 도자기를 굽고 있던 조선 도공들이 일년에 한 번씩, 음력으로 매년 유월 열 이틀이 되면 모두 이곳에 모여 조상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각자 준비하여 가지고 온 떡과 술을 마시며 잊혀져 가는 고향의 노래를 부르고, 그 고향의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고, 두고 온 선조들의 고향 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보냈던 곳이라고 한다. 이때 조선 도공들이 추던 춤은 사츠마한에 잡혀온 조선 도공들과 같이 학춤을 추웠다고 문헌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어떤 춤인지는 전해져 오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조령묘는 조국을 떠나 낯설고 물 설은 왜국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생계의 수단으로 도자기를 만들던 조선 도공들의 마음의 안식처요, 휴식처였으며 그 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의 안부를 주고받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러나 매년 한번씩 만나 도공들의 마음을 달래주던 조령묘 행사도 조선 도공들이 도자기를 만드는데 지장을 준다고 하여 금지를 시켰다고 당시의 사라야마 타이칸 일기(皿山 代官日記)는 적고 있다. 이 이후로 조선 도공들이 부르던 조선의 노래와 조선의 춤은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조선 도공들이 모여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두고 온 고향산천을 생각하며 이야기하는 단 하루의 시간조차도 나베시마 영주는 허락하지 않고 도자기 생산을 독려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에는 이삼평의 후손과 백파선의 후손이 모여서 이곳에서 조상의 제사를 지냈는데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백파손의 후손이 아리타를 떠난 후 소식이 없으므로 매년 음력 유월 열 이틀이 되면 간단한 제물과 향을 차려놓고 자기 혼자서 지내고 있다고 이삼평씨는 안내하면서 말한다. 지금은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전해주는 안내판도 없이 조령묘 주위는 철책만이 둘러진 채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지만 우리에게 이보다 더 소중한 유적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다음은 시라카와(白川) 하천 오른쪽, 텐쿠다니 계단식 가마 조금 옆에 있는 공동묘지에 자리 잡은 이상평의 무덤을 찾아보았다. 「조월창정심거사(祖月窓淨心居士)」라는 비석의 명칭과 함께 「사적 초대 도공 카네가에삼베에(이삼평) 묘비(史跡 初代陶工 金ケ江三兵衛(李參平) 墓碑)」라고 쓰여진 이삼평의 묘가 있었다. 그러나 아리타 사람들에게는 인간이 아니라 신으로서 경외와 공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삼평의 무덤은 너무 왜소하고 초라하였다. 하기야 이삼평의 무덤도 찾지 못하다가 1966년 주변 토지공사를 하던 중 발견되었으며, 비석의 상단부의 일부는 떨어져 나가 찾을 길이 없고 남아있는 부분도 이삼평의 묘비라고 해서 알 정도이다.
이 묘는 1967년 아리타 교육위원회에 의하여 사적으로 지정이 되었으며 아리타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이삼평은 1655년 세상을 떠났다고 니시 아리타(西有田) 류센지(竜泉寺)에 보관되어 있는 과거장에서 이삼평의 마지막 흔적을 찾을 수가 있었다. 이런 초라한 무덤임에도 불구하고 이삼평의 묘에는 언제나 아리타 사람들에 의하여 꽃과 향 내음이 그칠 날이 없다고 한다.
아리타 사람들이 자주 찾는 아리타 공원에는 이삼평과 일본의 오진텐노(應神天皇), 나베시마영주를 주신으로 모셔놓은 도쟌신사(陶山神社)가 있다. 원래는 오늘날 아리타를 있게 한 이삼평 한 분만을 모셔놓은 신사였으나 어느 틈엔가 오진텐노와 나베시마 한슈까지 신으로 함께 추존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마 국가의 권력이 토쿠가와 에도막부에서 명치천황(明治天皇)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군국주의자들이 천황을 신격화하고 국가의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오진천황과 나베시마 영주가 신으로 추존된 것이다. 이것은 도쟌신사만이 아니라 일본의 다른 신사들도 같은 마찬가지였다. 아리타 사람들은 이런 것에 관계없이 이삼평을 모셔놓은 신사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도자기의 신을 모셔놓은 신사라서 그런지 신사 주변의 석등이나 신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도리이(鳥居), 신사의 난간, 신사 좌우에 배치되어 신사를 지키는 사자……모두 아리타 사람들이 이삼평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도자기로 만들어 건립을 하였다. 이 신사는 일본에서 도공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찾아와서 참배를 하고, 신사에 모셔져 있는 이삼평의 축복을 받아야 훌륭한 도공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의 신사가 다 그렇듯이 도쟌진쟈는 조선 도공들 뿐만이 아니라 일본 도공들의 마음의 안식처이자 마음의 영원한 고향인 것이다.
매년 4월 29일부터 시작되는 아리타 도자기 축제의 출발점도 바로 이 토쟌진쟈부터 시작하며, 옛날에는 아리타 주변의 모든 도공들은 축제기간 동안에는 일을 멈추고 쉬었으며, 상인들도 영업을 하지 않고 그 날 하루를 도공들과 함께 즐겼다고 한다. 지금도 이 도자기 축제는 매년 4월 29일부터 5월 5일까지 일주일동안 열리고 있으며, 이때는 마을 전체가 도자기를 파는 시장으로 변모한다고 한다. 또한 도자기 축제 기간 중에는 특별히 도자기를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전국에서 도자기도 싸게 사고, 축제를 구경하기 위하여 몰려든 인파는 매년 수십만 명을 헤아리고 있으며, 여관이나 호텔은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하지 않으면 머물 수 없다고 한다. 또 이 기간 중 학교에서는 가정학습 기간으로 정하고 휴교를 하며, 학교 운동장은 이때 아리타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토쟌진쟈 옆에는 시멘트로 잘 포장된 길이 있다. 도조 이삼평 기념비 올라가는 길이다. 그래서 아리타 사람들은 이 길을 「도조의 언덕(陶祖の坂)」이라고 부르고 있다. 길 양 옆에는 도자기를 구워서 한글로 만든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며, 좌우에는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도 심어져 있다. 그러나 한글로 만든 도자기 안내판에는 이삼평을 ‘리참평’이라고 표현하는 등 잘못된 점이 많이 있었다. 무궁화가 피는 여름에 이 도조의 언덕길을 올라 렌게이시야마(蓮花石山) 정상에 오르면 「도조 이삼평비(陶祖 李參平碑)」라는 거대한 이삼평의 기념비가 서있다.
이삼평 기념비는 조선이 일본에게 합병된지 7년이 지난 1917년, 아리타 도자기 창업 350주년을 맞이하여 아리타의 주민들이 오늘의 아리타를 번영하게 만든 대은인인 이삼평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성금을 모아 건립한 비석으로 높이는 8-9m 정도로 화강암으로 만든 대형 기념비인 것이다. 당시 이 비를 건립할 때 조선이라는 나라 일본에 합병이 되어 지구상에서는 없어진 나라인데 「조선인 이삼평」, 즉 조선인 이라는 문구를 넣어야 하는가를 놓고 격론을 벌리다가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서 마을 사람들이 주민 투표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이 투표를 한 결과 이삼평은 아리타를 개척할 당시 조선인으로서 조선인을 넣지 않는 것은 대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여 대부분의 주민들이 찬성을 하여 일본인 이삼평이 아니라 조선인 이삼평의 비석이 건립된 것이다.
또 1990년에는 이삼평의 고향이라고 추정되는 대전 유성에서 공주 쪽으로 가다보면 공주와 계룡산이 갈라지는 학봉리에 박정자 조각공원이 있다. 이 조각공원에 아리타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이삼평의 은혜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이 비문에는 일본의 도조 이삼평공 기념비 건설위원회에서 쓴 글에는 ‘李參平公は文祿慶長の役に来日され……’라고 일본어로 쓴 비문과 사단법인 한국도자기문화진흥협의회에서 쓴 비문 ‘이삼평공은 임진․정유 난에 일본에 건너가……’라고 쓴 우리말과 비문이 있는데 다시 한 번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일본 문장 그대로 해석을 한다면 이삼평은 일본에 강제로 건너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건너갔음을 알 수 있으며, 사단법인 한국도자기문화진흥협의회에서는 아무런 비판도 없이 일본어를 그대로 한국어로 번역하여 비문을 만들었던 것이다. 현재 이 부분 즉 이삼평이 일본에 건너 간 것이 자의적이었다고 쓴 이 비문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이 첨예하게 대립을 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 나라의 일방적인 주장을 그대로 싣는 것보다 한국과 일본의 사학자들이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과 일본의 사학자들이 여과과정을 거친 뒤 기록을 해야지 일본 측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한 이 비문은 이삼평 한 사람의 문제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왜란 때 끌려간 전체 조선 도공들, 더 나아가서는 조선인 기술자들에 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유명한 도자기 중에서 이시카와켄(石川県)에 큐타니(九谷)라는 유명한 도자기가 있다. 항상 아라타 도자기와 큐타니 도자기는 일본 도자기의 여명기를 개척한 것이 서로 자신들이 먼저라고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1982년 요미우리(讀賣)신문사가 일본 공업기술원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 큐타니에서 만든 도자기의 원소가 아리타에서 만든 도자기의 원소와 같으므로 일본 도자기의 여명은 아리타 도자기가 열었음을 입증하여 아리타의 자존심을 지켰다고 한다.
그러면서 임진․정유재란 때 잡혀간 조선 도공 문제는 자국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어느 것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위와 같이 역사적인 방법만이 아니라 문화전파적인 방법이나 과학적인 방법 등 다양한 형태의 방법을 접목시킨다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조선 도공들에 의하여 시작된 아리타 도자기의 자존심을 되찾는 것만이 아니라 아리타가 더욱 발전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삼평에 의하여 시작된 아리타 도자기는 발전을 하여 유럽의 왕실은 물론 귀족들까지도 소장하고 싶은 도자기로 평가 받아 수출까지 되었던 것이다, 현재 아리타 도자기는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이 선호하였던 코이마리계(古伊万里系), 당시의 일반 서민들을 위한 카키우에몬계(柿右衛門系), 황실이나 각 지방의 다이묘(大名)들이 사용하기 위한 이로나베시마계(色鍋島系)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아리타를 있게 한 아리타의 대 은인인 이삼평의 집안 내력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면 지금 카네가에 요시비토(金ケ江義人)씨는 이삼평의 13대 후손으로서 그의 외아들인 카네가에 쇼헤이(金ケ江省平)와 함께 아리타에서 이삼평요를 설치하고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 초대 이삼평이 아리타에 남긴 족적에 비하여 그 후손들은 게으른 탓이었는지 7대 이삼평부터는 조상들이 남겨준 가마를 잃고 전전긍긍하였으며 12대 이삼평까지는 남의 집 가마에서 고용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한번 잃어버린 조상들의 도자기의 가마를 되찾는다고 하는 것은 후손들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13대 카네가에 요시비토씨가 가마를 되찾기 위하여 그는 신칸센(新幹線) 열차 승무원으로 취직하여 평생을 일한 대가로 받은 퇴직금을 일시불로 찾아서 조그만 가스 가마를 마련하여 아들 카네가에 쇼헤이씨와 함께 부자가 합심하여 이삼평 가마를 만들었다고 한다. ‘늦었지만 조상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조선의 백자를 연구하면서 가마에 불을 지피고 있는 것이다. 카네가에씨는 이즈미야마에서 나오는 흙과 쿠마모도(熊本)에 있는 아마쿠사(天草)에서 나오는 흙을 가지고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이삼평가의 가스 가마에서 불길이 훨훨 타오르는 날- 카네가에 부자는 지난날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가난과 설움을 극복하고 초대 이삼평이 아리타에 이룩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陶祖 李參平을 생각하며
산으로 둘러싸인 조그만 마을에
사백년 시공을 뛰어넘어
아리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신으로 살아 숨쉬는
영원한 조선의 도공.
왜군의 말발굽 아래
고향의 하늘이 피 빛으로 물들던 날
피난도 하지 못한 채 왜군에 끌리어
현해탄의 검푸른 파도를 너머
도착한 낯 설은 미개의 땅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밤을 새우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내를 이루어도
돌아가기에는 너무 머나먼 고국이기에
흙 내음 따라서 방황하다 머문 곳.
바로 여기 아리타의 언덕이어라.
고향의 흙이 있는 곳에서 고향의 가마를 만들고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하며 고향의 흙을 빚고
고향의 냄새를 유약에 담아 바르고
가마에 불을 지피고 또 지피며
돌아갈 고향만을 꿈속에도 그리워했어라.
가마의 불길이 사그러져
사백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님을 추모하는 도공들에 의해
신으로 추존되어 도쟌신사에 모셔지고
연화석산에 기념비를 세웠다네.
우리가 나라 잃고 식민지가 되어
온갖 고생을 다할 때
조선 도공 이삼평처럼
조선을 생각하게 한 사람.
일본 땅에 그런 사람 어디 있으리오.
첫댓글 아리타도자기에 대한 역사를 알게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