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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lue Annals of Tibet」 신 ‘푸른 티베트역사’ 산책 ⓶>
** 토번 최대의 영웅 송쩬감뽀의 등장
* 전 회의 프롤로그가 좀 이어져야 할 것 같아 참고부록 삼아 한 가지 덧 부치고 나서 티베트의 푸른 역사 속으로 풍덩 빠져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이다. 다름 아닌 ‘청사(靑史)’에 대해서 이다. 우리는 ‘역사’의 의미로 ‘청사’라는 용어를 흔히 사용한다. 그러나 내가 과문한 탓인지, 다른 나라에서는 그런 이름의 역사서가 있는지는 몰라도, 이 청사라는 용어는 티베트의 ‘3대사서’의 하나인 「뎁테르 응왼뽀: ‘The Blue Annals of Tibet’ 」라는 책의 이름이다. 말하자면 보통명사가 아니고 특정 책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인데 어찌하다가 역사 전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
이 책의 원명은 “‘강쩬[雪域高原]’에 어떻게 정법이 나타났는가를 밝히는 푸른 책”이다. 1478년 숀누페(薰奴貝, 1392~1481)라는 승려학자가 저술했는데, 저자는 까담파로 출가하여 까귀빠와 쩨땅빠에서 수학하여 일가를 이루고 나서 평생 번역과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그중 청사가 대표작으로 총15권에 이 거작은, 제1권 귀경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인도, 티베트, 몽고, 중국의 왕통사를 개괄한 다음 제3~15권까지 종파별 각론으로 종파별 불교의 역사를 기술하고 제7권~제8권에서는 구전설화 같이 전해내려 오는 천계에서 하강한 얄룽왕조 초대 임금 네치쩬뽀의 건국신화를 기록하고 나서 역대 얄룽, 토번왕조 쩬뽀들의 치적을 왕통사적 관점에서 충실히 기록하고 있다.
왕통사와 불교사를 같이 아우르는 방대한 분량도 그렇지만 1027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역산법인 ‘랍중’에 의거한 간지(干支)를 사용한 점과 또한 선대에 편찬된 사서-「바섀(쌈예사사적기)」․「부뙨불교사」․「紅史(뎁데르 마르뽀)」․「넬파」등을 폭넓게 참조하고 현재는 유실된 자료까지 폭넓게 참조하여 편년체적으로 쓰여 졌기에, 티베트의 ‘3대 역사서’인「빡삼존장(如意寶樹史)」,「부뙨불교사」중에서도 첫째로 꼽히고 있다. 영역본, 일역본으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설역의 역사와 불교사의 기본 교재로 쓰이고 있다.
-G. N. Rorerich.「The Blue Annals of Tibet」,2vols, Calcutta, 1949,
-C. Bell. 「The Religion of Tibet」,Oxford, 1931
* 사실 티베트란 나라를 세계 역사에 두각시킨 인물은 토번왕조 제33대 임금인 송쩬감뽀이다. 그러나 그 초석은 그의 부왕인 남리론쩬에 의해 이미 놓아졌다. 남리임금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해지는 신성한 쩬뽀[王]들이 잠들어 있는 얄룽계곡이 새로운 나라의 도읍지로는 협소하다고 생각하고, 그가 새로 점령한 공뽀지방으로 천도를 할 생각을 하면서 눈을 들어 중원대륙을 눈독 들이면서 동북방으로 진출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남리룬쩬의 용맹은 당나라에도 알려져, 당서에도 그 이름이 처음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통일설역’이라는 그의 원대한 꿈은 근친귀족의 독수에 의해 요절함으로 서 끝을 맺고 말았지만, 그의 못 다 이룬 대제국의 꿈은 아들에 의해 실현되었으니 역사도 역시 ‘뿌린 자, 거두는 자’ 따로 있는 인과율이 존재하는 것인가?
617년 송짼감뽀는 부왕이 새로 개척한 공뽀지방에 세운 새 궁전 ‘잠빠 민주링’에서 태어났다. ‘뜻과 지혜가 깊고 크다’라는 이름의 이 어린 왕은 13살이란 나이에, 부왕이 친척들에 의해 독살되자 창망 중에 보위를 이어 받았지만 이름값을 할 재목이었던지 단시일 내에 통치권을 장악하여 먼저 부왕을 살해한 귀족들을 제압하고는 그 뒤로 명재상 가르똥쩬과 대학자 톤미쌈보따와 문무를 어우르는 팀을 이루며 원대한 꿈을 펼쳐나갔다.
천년 왕조의 초석은 부왕의 유업인 라싸로의 천도(遷都)였다. 바로 지금의 라싸의 붉은 언덕 ‘마르뽀리’, 즉 지금의 뽀딸라에 궁전을 지었다.
그 다음이 ‘나라글’을 만드는 일이었다. 어린 왕은 16명의 총명한 귀족청년들을 인도로 보내 세계의 문자들을 배우게 한 뒤 새로운 티베트 문자를 만들게 하였다. 말하자면 선진국으로의 조기 국비유학이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인도에 머물며 산스크리트(Sanscrits)문자에서 자음 24자를 따고 범어에는 없지만 티베트어를 적을 수 있는 6자를 새로 만들어 총 자음 30자와 모음 4자를 합하여 총 34자를 만들었다. 이 원대한 작업은 송쩬임금의 여러 위업들-왕국을 안정시키고, 천도를 하고, 국토를 넓히고, 외국문물을 들여오고, 선진종교를 들여오는 등-중에서 가장 윗자리에 두어야 하는 위대한 사업이었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대 몽골제국의 법령을 기록하여 전 세계적으로 사용된 ‘팍파문자’라는 것도 실은 이 티베트문자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라는 점도 그 실례라 할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보아 왔다. 세계 역사상 자기 문자와 문화가 없는 나라가 무력의 힘만으로 일시에 일어났다가 사라져 간 사례를…. 가까운 중국의 예만 보아도 그렇다. 몽골족의 원나라, 만주족의 금나라, 청나라가 비록 일시에 강력한 무력으로 중원에 입성했지만 결국 정복민족 자체가 ‘한족으로 동화’라는 어이없는 결과만 초래했을 뿐이다. 문화와 문자가 없었던 민족이 겪어야 했던 사필귀정의 결과였다.
역설적 역사관으로 보면 중국이란 나라는 이민족에 의해 잡아먹힐수록 더욱 몸집이 커진 불가사의한 일면을 갖고 있다. 이는 그들이 오랑캐[南蠻, 北狄, 東夷, 西戎]라고 부르며 멸시했던 이민족들이 문자가 없었던 사실이 중화민족으로서는 큰 행운이었던 셈이다. 점령했지만 결국은 점령당한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에 그들은 현재 ‘56개 소수민족’이란 대접을 받으면서 모두 중화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세계역사무대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물론 역사란 ‘만약’이란 가정을 세울 수 없지만, 만약 티베트에 문자가 없었다면 그 결과는 원, 청나라를 닮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7세기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나라 글을 정책적으로 만들어 실용화한 송쩬의 업적은 무엇보다 우뚝하다.
각설하고, 이렇게 나라의 내정을 공고히 하자 송쩬은 부왕의 또 다른 유업이었던 동북방 원정에 나섰다. 마침 송뽀국에 -현재의 사천성의 동북부 ‘캄’ 지방에 심한 재해가 생겨 어부지리로 어렵지 않게 드넓은 땅을 병합하게 되자 온 나라가 사기충천했다. 이어서 여세를 몰아 보급병참부대가 따로 필요 없는 토번의 빠른 기마병은 드디어 중원과 설역의 분수령이었던 당구라 산맥을 넘어 양자강 발원지 타타하를 건너 황하 발원지인 황하구곡(黃河九曲)과 청해 호반의 투욕훈 왕국에 이르는 북방 원정을 감행함으로써 토번의 영토는 당시 세계 최대의 대제국인 당나라와 국경을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
이에 대국에 걸 맞는 행정조직의 개편도 뒤를 이었다. 중앙에 내외대신을 비롯한 ‘9대신’을 두어 국사를 총괄하게 하고 관료들의 신분등급인 고신제도(告身制度)를 정하여 ‘6종 12급’으로 나누었고 형법, 민법의 ‘6대 법률’를 제정하여 국정의 지표로 삼았다. 또한 군사제도 새로 개편하여 전군을 ‘위, 예, 웨, 짱, 송뽀’의 5개 ‘루쩬[冀]’으로 나누었다. 하나의 ‘루쩬’은 4천 호(千戶)로 구성했으며 별도로 친위대는 1천 호로 구성하여 각기 말, 갑옷, 깃발의 색깔을 달리했다. 왕의 말년에 서부의 오지 샹슝국까지 병합하자 막강한 티베트군은 다시 6개 루쩬으로 개편되었는데 이 직제는 토번왕조 내내 지속된 왕조의 군사력의 바탕이 되었다.
토번군은 당시 무적 무패의 전적을 자랑하는 가공스런 군단이었다. 기마군단 특유의 번개 같은 이동으로 전 설역고원과 사천성 서남부, 네팔, 인도북부, 하서사진, 서역사진, 그리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대․소발률국까지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이런 전략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별도의 병참보급부대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짬빠[미숫가루], 마른 육포, 차, 소금을 합해 한자루만 병사들 각자의 말 잔등에 실으면 나머지 먹거리는 현지조달이 가능했기에 번개처럼 치고 빠지고를 반복하는 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세계전쟁사를 이야기할 때 거론되는 ‘몽골군의 전략’도 실은 이 토번에서 모방한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
* 욱일승천하는 토번과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던, 특히 태종(太宗)의 정관(貞觀)치세의 당나라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 싸움의 빌미는 토번의 청혼을 거절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당 태종(太宗) 정관(貞觀) 8년(633년)에 토번 쩬뽀 롱쩬[弄贊:송쩬감뽀]이 왕위를 이었다. 이에 태종이 빙덕하(憑德遐)을 보내 치하했다. 쩬뽀를 만날 때 덕하가 이르기를 “돌궐과 투욕훈 등이 모두 공주를 원하여 덕하가 입조할 때 금은보화의 궤짝을 보내 구혼을 했지만 임금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는 주위 이웃나라로부터 공주를 데려와 부인을 삼는 이른바 ‘정략결혼’이 대세였던 만큼 토번도 거침없이 공주를 내 놓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렇게 뜸을 들인 당나라와는 반대로 토번의 위협적인 청혼에 주위의 군소국들을 비롯하여 히말라야 남쪽 네팔의 암슈바르마 왕(Amsuvarma, 605-621)은 공주[부리쿠티;尺尊公主]를 히말라야 너머로 시집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정략결혼의 결과로 후에 송챈에게는 네팔의 부리쿠티, 문성 공주를 비롯하여 무려 5명의 공주부인을 거느리고 살게 되었다.
한 편 괘씸죄에 걸린 당나라를 향해 토번은 전방위 압박전술로 들어갔다. 이미 동남방으로 현재의 사천성 서남부의 당의 속국이었던, 현재의 운남성 서북부의 다미(多彌), 부국(附國), 당항(党項), 백난(白蘭) 등이 이니 토번으로 귀속된 상태였기에 638년 재정비를 끝낸 토번의 기병들은 드디어 당구라 산맥을 넘어 청해호반의 투욕훈 곧 죵카국을 향해 진군의 뿔나팔을 힘차게 불었다. 당시 투욕훈은 이미 당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어 있었기에 죵카국을 치는 것은 바로 당에 대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청해 호반 서남의 드넓은 초원을 무대로 두 나라의 기병은 부딪혔다. 그러나 3백 년간 초원을 제패했던 이 나라는 당군을 믿고 대항했으나 토번의 상대가 되지 못해서, 끝내 투욕훈의 왕 뤄허보는 당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청해 대초원을 점령한 토번군은 내친 김에 사천성 동남부에 위치한 당의 검남절도사가 주둔하고 있는 송주(松州)[현 四川 松燔]를 향해 진군하여 송주성을 포위했다. 이에 송주 도둑 한위(韓威)가 조정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그곳이 실크로드의 인후에 대당되는 요충지라, 이에 큰 위협을 느낀 당 태종은 이부상서(吏部尙書) 후군집(候君集)을 대총관에 임명하여 송주를 구하러 출병시키기로 결정한다.
이때 토번 재상 가르똥쩬은 새로운 전략을 짜서, 먼저 휴전을 제의 한 후, 다시 한 번 당에 청혼사절을 보내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체면상 토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공격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체면상 거절했던 청혼을 선뜻 받아드리기 어려운 처지의 당 태종의 속내를 읽은 것이다. 이 화공양면(和攻兩面) 작전은 즉시 주효하였다. 결국 당 태종은, 문성공주가 자청해서 나라를 위해 토번으로 시집가겠다고 올린 상소문을 수락하는 것으로 토번과의 휴전을 조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의 상황을 당서는 아전인수식으로 이렇게 적고 있다.
토번 쩬뽀가 재상 녹동찬(綠東贊)을 보내 황금 5천 냥과 진기한 보물을 보내 청혼을 했다. 태종이 이를 허락하여 문성(文成)공주를 출가토록 했다.(중략) 예부상서(禮部尙書)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의 여식을 양녀로 삼아 토번 왕에게 시집보내게 했다. 이에 쩬뽀가 기뻐하고 도종을 보고 사위의 예를 취했다.
이렇게 해서 정략적인 결혼을 위해 공주가 된 ‘문성’이란 이름의 16살 난 소녀는 641년 장안을 떠나 곤륜산맥과 당구라산맥을 넘어 황하의 발원지의 개울을 건너 라싸로 향하게 된다. 이 초원의 결혼사건은 아직도 풀지 못한 나제들이 많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다음 회에서 따로 꼭지를 잡아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고 우리는 다시 말발굽 소리 요란한 전쟁터로 들어가 보자.
642년 문성공주와의 신혼의 꿈이 가시기도 전에 송쩬은 샹슝을 공략하기 위하여 ‘쨩’ 지방을 지나 서부로 출정한다. 샹슝은 인더스강 유역을 통로로 인도와 서역 그리고 대식국과 통상을 하고 있었던 부강한 나라였기에 서남방으로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그러나 샹슝국은 뵌뽀교의 고향이고 또한 본거지여서 지금까지 공략을 미루어 온 터였다. 왜냐하면 당시까지 뵌뽀교는 비록 예전만은 못하지만 국정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에 사제들의 반대를 물리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왕자를 낳은 그의 큰 왕비가 바로 샹슝 출신이었고 자신도 여동생 샤마칼을 샹슝 왕에게 출가시킨, 이른바 처남매부의 나라였기에 그 원정의 결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샹슝은 설역 최후의 미평정 지방으로 남아 있었던 곳이었다. 644년 드디어 완강하게 버티던 뵌뽀의 성지이며 민족의 성산, 강디쎄가 솟아 있는 샹슝국이 무릎을 꿇었다. 마침내 전 설역고원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온 세상을 평정하고 개선한 쩬뽀는 피곤함을 문득 느꼈다. 피비린내 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문성과 부리쿠티 두 왕비와 명재상 톤미쌈보따가 늘 말하던 불교적 이상세계를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였다지만 살생으로 일관했던 자신의 행위들이 정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생길 때도 있었다. 그냥 무상한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두 왕비를 위해 뽀딸라 궁전 아래에 투루낭[大昭寺]과 라모체[小昭寺]를 짓기 시작하였다.
649년,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부음(訃音)이 날아들었다. 둘 다 일세를 풍미했던 불세출의 영웅들이었지만 같은 시기에 태어난 관계로 평생을 서로 겨루고, 싸우고, 속이고 또한 화해했던, 숙명의 라이벌 관계였다. “만약 두 사람이 다른 시기에 태어났다면 두 나라의 운명 또한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역사의 가정설(假定說)이 나올 정도로 두 사람은 호적수였다. 만약 송쩬이 당나라 말기에만 태어났더라면 전 중원이 토번에게 점령되었으리라는 가정은 무리한 것이 아니다. 또한 반대로 당 태종이 토번 말기에 태어났었다면 역시 티베트의 역사가 변했을 것이다.
평생의 호적수를 잃은 송쩬임금은 문득 허무했다. 다음해 가벼운 병으로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 일세의 영웅 송쩬감뽀도 당 태종을 뒤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난다. 서기 650년의 일이다.
돈황본 티베트의 역사서는 이 위대한 인물과 그가 일으켜 세운 왕조에게 순종과 헌신을 약속했지만 왕조 자체가 없어진 지금에야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우리는 송쩬감뽀와 그 자손들에게 믿음 없을 수 없으리라.
우리는 송쩬과 그 자손들에게, 어느 때, 무엇이든지 순종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우리는 다른 인간들 중에서 그같이 숭배할 만한 인간을 찾을 수 없으리라.
우리는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쉽게 대할 경우가 있을 수 없으리라.
우리는 독이 든 음식을 드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우리는 임금에게 첫 번째 말을 걸지 않을 수 없으리라.
만약 우리들의 자손 중에서, 그가 남자거나 여자거나,
순종 없음을 고백하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우리들의 아들이 순종 없는 사람에게 우정 있게 대할 수 없으리라.
만약 우리가 임금에게 순종 없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고백하지 없을 수 없으리라.
비방 혹은 부러움을 우리의 결점 없는 친구에게 퍼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리라.
만약 우리가 행할 일을 지목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복종시키는 것에 부정하게 맞서는 일을 할 수 없으리라.
우리는 쩬뽀가 명하는 무엇이든지 순종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예고) #3회에는 장안에서 라싸까지의 당나라의 문성공주의 신행길 <당번고도(唐蕃古道)>가 이어진다. 또한 이어서 히말라야를 넘어 라싸로 시집오는, 네팔의 부리쿠티 공주의 신행길, <중네고도(中尼古道)>도 처음으로 새롭게 조명할 예정이다.
첫댓글 너무 늦었지요?
몽골은 몽골문자라는 고유의 문자가 있고 만주족도 만주문자라는 고유의 문자가 있습니다. 거란의 요나라도 거란문자라는 고유의 문자가 있었으며 금나라도 여진문자라는 고유의 문자가 있습니다. 중국 주변의 민족들이 고유의 문자가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틀린 이야기입니다. 돌궐도 고유의 문자가 있었고요 아래 링크를 통해서 글을 읽으면 제 말이 사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gil092003/221774508532
넵~~ 마니마니 기다렸지요.
서사시
청사에 기리 빛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