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악산과 곽주가 하동도 북단에 보인다 (하동도 남부지역이 海라고 불렸다)
아래는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서 그동안 간과되어 오던 부분중 당태종 이전까지의 고대 강역추적에 있어 이정표가 될 매우 중요한 기록입니다.
섬서 <형산荊山>에서 황하를 건너서 지리를 설명하는데 <대악大嶽-태악太嶽>의 산군을 지나면 다음으로 나오는 거대한 산군이 <왕옥산王屋山>이라고 합니다.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며 지리를 설명하는데 왜 <대악大嶽-태악太嶽>다음에 <왕옥산王屋山>이 나올까요? 여기서, <대악大嶽-태악太嶽>은 바로 곽태산霍泰山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 二를 보면 태악太嶽에 대해 색은索隱을 인용 주석하기를, 태악太嶽은 곽태산霍泰山이라 하였습니다.
[원문] 道九山[一]:汧及岐至于荊山[二],踰于河;壺口﹑雷首[三]至于太嶽[四]; (중략) [주석] [四]" 集解孔安國曰:「三山在冀州;太嶽在上黨西也.」 索隱即霍泰山也.已見上."
곽태산霍泰山은 즉 곽산霍山은 <왕옥산王屋山>북쪽인데 왜 동쪽의 <호구산壺口山>을 설명하다 뜬금없이 북으로 올라가 다시 남으로 내려와 서쪽의 <왕옥산王屋山>을 설명하는지 의문이 듭니다.더우기, <왕옥산王屋山>의 태행산太行山, 긍산恆山 다음이 바로 갈석碣石과 해海로 이어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상上》
길이 갈라지어 <형산荊山>에 이르며 하수河水-黃河-를 건너가 호구산壺口山、뇌수산雷首山이 나온다. <대악大嶽-태악太嶽>-으로 나아가 이르면 지주산厎柱山、석성산析城山이고 <왕옥산王屋山>으로 가면 태행산太行山, 긍산恆山에 도달하니 나아가 갈석碣石에 이르러 해海로 들어간다... (중략)
[원문] 道钐及岐,至于荊山,逾于河;壺口、雷首,至于大嶽;厎柱、析城,至于王屋;太行、恆山,至于碣石,入于海。西傾、朱圉、鳥鼠,至于太華;熊耳、外方、桐柏,至于倍尾。道嶓冢,至于荊山;內方,至于大別;崏山之陽,至于衡山,過九江,至于敷淺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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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원문은 첫째, 현재의 산동성의 태산太山을 지나면 갈석碣石과 해海가 나오는 것이아니라 산서성 중남부의 <왕옥산王屋山>에 포함된 산악들인 태행산太行山, 긍산恆山을 지나면 바로 갈석碣石과 해海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둘째 태악太嶽이 곽태산霍泰山이라 말하고 있습니다.사실, 사기史記를 읽어보면 곽태산霍泰山 혹은 곽산霍山이라 부르는 이 산은 상당히 영험하고 신령스러운 산이라고 수많은 기록들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임분시 북쪽의 현재의 곽주시에 있다고 말하는 곽태산霍泰山, 즉 태악太嶽의 여러산들중 대표적으로 언급된 지주산厎柱山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료를 탐색해보니, 사기史記에도 언급되었지만 주석서인 정의正義에 그 기록이 나와 있었습니다.
==================================================================================================== 『정의正義』에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해 이르길, 「지주산厎柱山은 속칭 이름이 삼문산三門山이다. 섬주陝州 협석현硤石縣 동북 오십리의 황하黃河의 중류에 있다. 공안국孔安國이 이르길, 『지주厎柱는 산이름이며 하수河水-황하黃河-가 나뉘어 산을 감싸 안으며 흘러서 산을 지나가므로 물 한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
[원문] 正義括地志云:「厎柱山,俗名三門山,在陝州硤石縣東北五十里黃河之中.孔安國云『厎柱,山名.河水分流,包山而過山, 見水中,若柱然也』.」
☞ 주석에 인용된 사료들
『사기집해(史記集解)』 남조(南朝) 송(宋·420~479)나라 배인(裴駰)의 사기 주석서, 모두八十卷 『사기정의(史記正義)』 당(唐) 현종(玄宗) 개원년간(713~741) 장수절(張守節)의 사기 주석서, 모두 三十卷 『괄지지(括地志)』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넷째 아들 이태李泰가 주찬한 지리서, 정관 16년(642년) 완성되어 당태종에 바침
==================================================================================================== 놀랍게도, <태악太嶽>-곽태산霍泰山-의 대표적 산봉의 하나인 지주산厎柱山은 산서성 중부인 곽주시霍州市서부가 아니라 산서성 남서부인 섬주陝州 , 바로 삼문협시三門峽市일대에 위치한 것입니다.
한서지리지의 기록에 나온 지리 설명 또한 이제 이해할 수 가 있습니다.
황하를 따라 서에서 동으로 잇달아 있는 왕옥산王屋山까지 이르는 산군들의 지형을 설명했던 것이며 갈석碣石 또한 왕옥산王屋山이 끝나는 지점에 있었던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 해海란 바다가 아니라 하남과 산서 사이의 황하를 따라 왕옥산王屋山이서로 펼쳐진 대평원을 일렀던 것입니다.
대청광여도에서도 또한 이러한 점을 상고할 수 있습니다.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넷째 아들 이태李泰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편찬한 지리서인 『괄지지括地志』에 당당하게 <태악太嶽>-곽태산霍泰山은 현재의 산서성 중부의 곽주시 霍州市가 아니라 산서성 서남변의 하남성의 접계에 있다고 스스로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기록으로 중대한 역사적 지위를 갖는 것으로 당태종唐太宗의 아들 이태李泰가 그것도 당태종唐太宗에게 헌납한 당唐의 공식적인 사료로서 <태악太嶽>은 곽태산霍泰山이고 그 위치는 산서성 서남변의 현 삼문협시三門峽市일대라고 대내외에 선포한 것입니다.
당唐조정과 당태종唐太宗과 당唐의 사가史家들이 스스로 기록하고 대내외에 공표하였으니 당唐나라이전의 한대부터 북위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전인 춘추전국시대의 곽霍땅 또한 현 삼문협시三門峽市 일대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唐나라때에 현재의 태원太原은 물론이고 곽주霍州 또한 현재의 위치가 아니었고 곽주霍州가 현재의 산서성 서남변이었음을 당唐나라 황제와 그 아들인 이태李泰와 사가史家들이 자인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남쪽으로 내려와야 하고 이것은 또한 남북조시대 배인裴駰의 기록과도 일치하며 이로서, 우리역사를 깍아내리기는 했지만 현재와 같이 지명을 변조해 역사왜곡한 주범은 당唐이 아니라 바로 그 후대로서 명대에 주로 이루어졌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덧붙여 쐐기를 박을 곽태산霍泰山의 또다른 주봉인 석성산析城山의 위치 또한 당나라 무측천때의 사가史家 사마정(司馬貞)가 쓴 주석서인 색은索隱의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색은索隱에 이르길, 석성산析城山은 하동河東 호택현濩澤縣 서남이다. 왕옥산王屋山은 하동河東 원현垣縣 동북쪽에 있다.수경주에 이르길, 석주산砥柱山은 하동河東 대양현大陽縣 남쪽 하수河水-황하黃河- 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였다.
[원문] 索隱: 析城山在河東濩澤縣西南.王屋山在河東垣縣東北.水經云砥柱山在河東大陽縣南河水中也. ☞ 『사기색은(史記索隱)』 : 당(唐)나라 측천무후때 사마정(司馬貞)의 사기 주석서인 三十卷
솟대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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