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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장 주석
그리스도께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심 (마태복음 8:1-4)
첫 구절은 앞의 설교의 결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를 경청했던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에 놀랐다." 그 결과는 "그가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은 것이다." 비록 그는 매우 엄격한 율법수여자요 신실한 책망자였지만 그들은 꾸준히 그를 따랐고, 흩어지거나 그에게서 떠나기를 원치 않았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그리스도가 그 자신을 나타내었던 자들은 그와 더 친숙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은 더 알기를 원하지 않을 숫 없다는 사실이다. "그 때에 우리는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을 알려고 따르는지 어떤지를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너무나 큰 감명을 받아 그리스도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그들은 최선의 것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므로, 또한 좋은 설교를 들으려고 애썼고,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 "따라가려"고 했다. 이제 메시야에 관한 야곱의 예언, 즉 "그에게로 백성들이 모이게 될 것이다"가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모여들었던 자들은 그와 친숙하지는 않았다. 그를 밀접하게 또한 꾸준히 따랐던 자들은 단지 떼를 지어 모여들었던 많은 무리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하였다. 이 구절들에는 그리스도께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들은 마가복음 1장 40절과 누가복음 5장 12절과 비교한다면 마태에 의해 산상 설교 다음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그 이유는 그는 먼저 그의 교리에 대해 서술하고 난 후에 그의 이적을 서술하려고 한 것 같다) 그전의 어떤 때에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서술은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은 적절하게 그리스도의 첫 이적과 더불어 기록되어 있다. 1. 왜냐하면 문둥병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하나님의 지도의 특별한 표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리암이나 게하시, 웃시야가 어떤 특별한 죄 때문에 문둥병으로 매를 맞았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죄를 없이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하기 위하여 오셨음을 보여 주시려고 문둥병의 치료부터 시작하였다. 2. 왜냐하면 이 병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직접 온 것으로 추정된 것과 같이 그의 손에 의해 직접 옮겨지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따라서 의사들에 의해 고침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알려고 시중드는 제사장들 곧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검사를 받아야 했다. 문둥병이 옷이나 집의 벽에 있는 것은 전혀 초자연적인 것이며, 지금 우리가 문둥병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병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왕은 말하기를,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저가 사람을 내게 보내어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왕하 5:7)고 했다.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의 문둥병을 치유하였고, 그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권세를 제자들에게 부여함으로써(마 10:8) 그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였다. 이것은 그가 메시야 되심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다(마 11:5). 그는 역시 그 자신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하시는 구세주가 되심을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모든 병은 영혼의 무질서로서 죄의 열매요 그 상징이기는 하지만, 문둥병은 특별한 의미로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병은 그 밖의 다른 병과는 달리 그 불결성을 전염시킬 뿐 아니라 거룩한 것으로부터 스스로 구별하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둥병에 관한 율법에서(레 13:과 14) 문둥병은 병으로서 취급되지 않고 불결로 취급되고 있다. 제사장은 계율에 의해서 정결이나 불결함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문둥병자들을 깨끗케 하는 영예는 그것을 "우리의 신앙 고백의 대제사장"으로서 행하셨던 그리스도를 위해 마련되었다. 그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롬 8:3)을 행하시려고 오셨다. 율법은 죄를 발견하였고(왜냐하면 죄에 관한 지식은 율법에 의하기 때문이다), 죄인들을 불결하다고 선포하였다. 그것은 제사장이 문둥병자에게 행하였던 것처럼 그들을 감금하였으나(갈 3:23) 더 이상은 나갈 수 없었다. 율법은 "더욱이 나아오는 자들을 완전케 하지"못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를 없이 하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케 하시며, 그리하여 "성결케 된 자들을 영원히 완전케 하신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Ⅰ. 그리스도에게 대한 문둥병자의 청원. 만일 이 사실에 여기에 있는 것처럼 산상 설교 후에 일어났다면 우리는 문둥병자가 그의 병 때문에 이스라엘 성읍들로부터 폐쇄 당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들을 수 있었고 그 설교에 의해 그에게 신청하도록 격려를 받았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권세를 가진 자"와 같이 가르치셨던 그분은 능히 그와 같이 고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신적 권능으로 옷 입을 자로서의 "그에게로 와서 그를 예배하였다." 그의 청원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였다. 그를 깨끗케 한 것은 다음과 같이 고려될 수 있다. 1. 현세적인 긍휼로서. 다시 말하면 생명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괴롭게 한 병에서부터 구출하는 육신에 대한 긍휼을 말한다. 또한 그것은 우리에게 치료를 위해 육신적인 병을 이기시는 능력을 가지신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의탁할 것을 명령할 뿐만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그에게 의탁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그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가 지상에 계셨을 때오 마찬가지로 지금도 병을 고칠 수 있는 자로 믿는 것과 또한 "주여 만일 원하시면 할 수 있나이다"라고 그의 뜻에 순종함으로서 믿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일시적인 긍휼에 관하여 우리는 그의 "능력"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것만큼 그것들을 수여하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세적 긍휼에 있어서의 그의 "능력"은 제한되지 않지만, 그것들에 대한 그의 "약속"은 그의 영광과 우리의 선에 대한 고려에 의해서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뜻을 확신할 수 없을 때에도 우리는 그의 지혜와 자비는 확신할 수 있으며, 거기에 즐거이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또한 이것은 기대를 용이하게 만들며, 그 사건이 이루어질 때 보다 큰 위안이 되게 한다. 2. 전형적(상징적)인 긍휼로서. 죄는 영혼의 문둥병이다. 아직은 우리가 회복될 수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닫아 버린다. 우리는 이 문둥병으로부터 정결함을 받아야 하며 또한 이것은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이제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만일 그가 원하신다면 그는 우리를 깨끗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자신을 위대한 의사이신 그리스도에게 의탁할 때 우리의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는 겸손하고 신뢰하는 담대함을 가지고 그에게 가서 그렇게 말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1)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의 능력에 기대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는 풍부하시므로 그가 속량하지 못할 만큼 큰 죄는 없다. 그의 은혜는 풍부하므로 그의 은총이 억제시키지 못할 만큼 큰 타락은 없다. 하나님은 par negatio─즉 업무 담당의 자질을 충실히 갖추지 않은 자기 병원에는 의사를 임명하려 하지 않으신다. (2) 우리는 자신을 그의 긍휼에 맡겨야만 한다. 우리는 그것을 빚처럼 요구할 수 없으며, 겸손히 은혜로 간구해야만 한다. "주여,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내 자신을 당신의 발 아래 던지겠나이다. 내가 망하더라도 그곳에서 망하겠나이다." Ⅱ. 이 청원에 대한 그리스도의 반응은 매우 친절하였다(3절). 1.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셨다." 문둥병은 악취가 나고 역겨운 병이었지만 그리스도는 그를 만지셨다. 왜냐하면 그는 서기관들이나 죄인들과 대화를 하거나 그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둥병자를 만짐으로써 감염되는 의식적(儀式的)인 부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인들과 더불어 교제하면서 그들에게 의해 감염될 위험성이 없음을 보여 주려고 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왕은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송진을 만진다면 더러워진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비록 그들 가운데 산다고 할지라도 "죄인들과는 분리되었다." 2. 그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말했던 것처럼 "가서, 요단강에서 씻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는 지루하고 귀찮고 부담스러운 육신의 방식을 거치지 않고 말씀으로써 그를 치료한 것이다. (1) 여기에는 친절하신 말씀, 즉 "내가 원하노니"라는 말씀이 있다. 나는 네가 도움 받으려는 것처럼 기꺼이 너를 도우려고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에게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자는 그가 자기에게 얻으려고 온 긍휼과 은혜를 기꺼이, 값없이 주시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위대하신 의사로서 추구되어야 할 필요가 없으며 언제나 가능한 위치에 있다. 그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동안 들으신다고 역설될 필요가 없으시다. 그리스도는 의사로서 보수를 제공할 필요가 없으며 값없이 고쳐 주신다. 그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처럼 기꺼이 모든 것을 하신다는 모든 가능한 시위를 제시하였다. (2) 능력의 말씀, "깨끗함을 받으라"가 있다. 권위의 능력과 활기의 능력이 이 말씀 속에 발휘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령하심으로써 고치신다. "깨끗함을 받으려고 하라. 그리고 방법을 사용하라. 네 자신을 모두 불결에서 정결케 하라. 그러나 우리에게 관한 이 명령의 말씀에는 일을 하라는 말씀이수반되고 있다. 즉 "나는 네가 깨끗함을 받기를 원하노라"이다. 이와 같은 말씀은 치료하는 데 필수적이며 효과적이다. 또한 그것을 말씀하시는 전능자의 은혜는 그것을 참으로 바라는 자들에게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Ⅲ.이것에 의해 이루어진 행복한 변화.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지라." 자연은 점차적으로 역사 하지만, 자연의 하나님은 즉시로 역사 하신다. 그가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또한 그는 효과적으로 역사 하신다. 즉 그가 "명령하시면 견고히 서는 것이다." 모세에게 행해진 첫 번째 이적 중의 하나는 그 자신의 문둥병이 나음을 입은 것이었다(출 4:7). 왜냐하면 율법 아래 있었던 제사장들은 맨 처음 그들 자신의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을 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이적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의 문둥병을 고치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속죄해야 할 그 자신의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Ⅳ.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주신 나중 지시. 그리스도에 의해 고침을 받은 자는 후에 그에게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합당하다. 1.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그가 깨끗하다고 공포하기 전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전에 문둥병자였으나 지금은 완전히 깨끗하다는 법적인 증명을 받아라." 그리스도는 백일하게 자기의 기적을 행하려 했지만 그 기적들의 분명한 뜻이 드러나기까지는 그 뜻이 공포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파하는 자는 그 진리를 입증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전파한 것을 변호하고, "반박하는 자들을 확신시켜야 한다."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 그렇게 함으로써 제사장이 너를 고친 자에 대해 듣는다면 분풀이로 너에게 완쾌의 증명을 주기를 거부하지 못하게 하라. 또는 그렇게 함으로써 너를 계속 감금하지 않도록 하라." 그리스도 당시에 제사장들은 이와 같았으므로 그들과 관계를 가진 자들은 뱀과 같이 지혜스러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2. 율법대로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레 14:2). 그리스도는 율법을 법하지 않고 준수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직무를 맡은 자에게 존경을 표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영적인 상태를 보살피며 충고하고 위안을 주며 위하여 기도해 주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협조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호소하거나 자신들의 경우를 그들에게 공개하는 것은 영적인 문둥병에서 청결함을 받은 자들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다. 3.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제사장의 수고에 대한 보답의 표식으로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라." 또한 이것으로 "저희에게 증거 하라." 이것은 (1) "모세가 증거를 위해 명령하였다." 의식적인 법들은 그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의 증거요, 보살핌의 증거요, 후에 계시되어야 하는 그 은혜의 증거였다. (2) "너는 그것들 증거를 위해 드려라. 그리고 제사장으로 하여금 너를 정결케 한 사람이 누구이며 어떻게 정결케 했는가를 일 수 있도록 하라. 또한 그것은 그들 가운데 대제사장이 할 수 없는 것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것을 만일 그들이 사용하고 이용하려고 한다면 내 능력의 증인으로서, 그들에게 나를 위한 증거로서 기록해 두도록 하라. 만일 그들이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들을 거스리는 증거로서 기록해 두도록 하라." 왜냐하면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역사는 증거들이기 때문이다.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 주심 (마태복음 8:5-13)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을 고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현재 거주하고 있었던 가버나움에서 행해졌다(마 4:13). 그리스도는 각처를 다니시면서 선을 베풀었으며 그가 이르렀던 곳은 어디서나 그에게는 더 나은 곳이었다.
그리스도와 지금 관계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1. "백부장" 그는 애원자였으며, 이방인이었고 로마인이었고 군대의 장교였다. 아마도 그는 가버나움에 배치되어 그곳에 있었던 수비대를 지키던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었을 것이다.
(1) 그는 비록 군인이었지만(이러한 직업을 가진 사람은 일반적으로 긍휼이 적은 법이다)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는 뛰어나게 경건한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남은 자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떠한 사람의 소명이나 장소가 그의 불신과 불손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심판 날에 내가 군인이 아니었더라면 종교적이었을덴테 하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이 "주님의 속량하심을 받은 자"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이 군인은 매우 선한 사람이었다.
(2) 비록 그는 로마 군인이었고 유대인들 가운데 거주하는 것은 그들이 로마의 멍에에 예속되는 상징이었으나 "유대인의 왕"이었던 그리스도는 그를 총애하였다.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원수에게 선을 행해야 하며 국가적인 적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3)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그리스도는 그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가 이방인의 어떤 동네(그것은 임마누엘의 땅이었던 가나안의 땅이었다, 사 8:8)에는 가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으로부터 인사를 받았다. 이제 나이 많은 선한 시므온이 말한 "그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하였다. 마태는 유대인이었던 문둥병자의 치료에 이 치료를 부가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문둥병에 걸린 유대인을 만져 고치셨다. 왜냐하면 그는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전파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풍병에 걸린 이방인에게는 멀리서 고치셨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가시지 않고 그의 "말씀으로 고치셨다." 그는 그들에게서 더욱 찬미를 받았다.
2. "백부장의 종." 그는 환자였다. 여기에는 역시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할례자나 무할례자가" 없는 것처럼 "종이나 자유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부한 주인과 같이 가장 보잘 것 없는 종을 고치시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가장 비천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종의 형상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이 하인의 치료에 대한 기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백부장사이의 매우 두드러진 은혜의 교제나 교환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를 향해 역사하는 백부장의 은혜. 로마 군인에게서 무슨 선한 일이 나올 수 있겠는가? 꽤 좋은 어떤 일, 더욱이 칭찬할 만한 일이 나올 수 있을까? 와서 보라. 그러면 너희는 두드러지고 모범적인 이 백부장에게서 나온 풍성한 좋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한 그의 애정어린 청원.
(1) 이것은 우리의 위대한 주님은, 가난한 청원자를 구출하고 도와 줄 수도 있고 기꺼이 그렇게 하시려는 분이라고 여기는 경건한 배려이다. 그는 치료를 받기 원하면서도 영예의 지위를 뽐내며 왔던 수리아 장군(역시 백부장) 나아만과는 달리 "간절히 원하면서" 그를 찾아왔다. 그는 겸손한 청원자로서 손에 모자를 들고 그리스도를 찾아왔다. 이것으로 보건대 그는 처음 보았을 때보다 그리스도안에 더 많은 것을 보았던 것 같다. 즉 그는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월등하게 여겼던 것이다. 군대의 장교는 마을의 감사관(comptroller)이므로 의심할 여지없이 큰 두각을 나타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청원하러 올 때에 그의 영예를 하찮은 것으로 포기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위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으려 할 때에는 거지가 되어야만 한다. 그가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고 그에게, 그의 뜻에, 지혜에, 겸손함으로,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간청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현명하고 은혜스러운 의사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에게 병을 알림은 최대한의 열성적 간청에 해당함을 알았다. 우리의 영적인 궁핍과 질병을 겸손히 고백하는 것은 화평의 응답을 얻는 데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너의 불만을 쏟아 부으라. 그리하면 자비가 쏟아 부어질 것이다.
(2) 보잘 것 없는 하인에 대한 백부장의 지혜스러운 배려가 언급되고 있다. 우리는 어린 아이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왔던 많은 사람들에 대해 읽어 볼 수 있지만 이것은 하인 때문에 그를 찾아왔던 유일한 실예이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있나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기의 하인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이들을 돌보고 보살피는 것은 주인의 의무라는 사실이다. 중풍병은 하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일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또한 그를 괴롭고 짜증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병중에 있는 하인을 쫓아 버리지 않았으며(아말렉 족속이 자기 종들에게 했던 것처럼, 삼상 30:13) 그를 친구에게 보내거나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하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구원을 모색하였다. 하인은 여기에서 주인이 자기를 위해 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인을 위해 할 수 없었다. 백부장의 하인들은 그에게 매우 충실하였으며(9절),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백부장은 하인들에게 매우 친절하였으며 그것이 하인들로 하여금 그를 기꺼이 순종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종들이 우리와 더불어 쟁변 할 때에 그들의 사정"을 멸시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욥 31:13, 15), 하나님께서 우리의 종들과 쟁변 하실 때에도 그들의 사정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일한 형태로, 동일한 손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하나님 앞에 동일한 지위를 가지며, 종들을 "개와 같이" 취급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백부장은 자기 하인을 위해 무당이나 요술쟁이에게 가지 않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왔다. 중풍병은 의사의 능숙한 의술로도 거의 고치지 못하는 질병이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방법의 능력 이상이었던 치료를 위해 그에게 온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신뢰하는 그의 믿음의 큰 증거였다. 그는 얼마나 애처롭게 자기 하인의 처지를 나타내고 있는가를 살펴 보라. 그는 "중풍병," 즉 흔히 혼자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지 않게 만드는 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몹시 괴로워하였다." 젊었으므로 고통스럽게 만든 병의 발작과 더불어 싸우려는 자신 때문에 한결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그것은 반신불수가 아니라 괴혈병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영적으로 중풍병이나 반신불수에 걸리거나 귀먹고 억울한 자, 다시 말하면 영적인 선악에 무감각하거나 영적으로 선한 것에 비활동적인 우리의 어린이나 하인들의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또한 그들을 신앙과 기도에 의해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와야 하며 또한 치료와 건강의 수단에로 데려와야 한다.
2. 백부장의 큰 겸손과 자기 비하를 살펴보자. 그리스도께서 그의 하인을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고 난 후(7절) 그는 더욱 겸손하게 자신을 나타내었다. 겸손한 영혼은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은혜스러운 겸손에 의해 더욱 겸손하게 되어진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의 겸손의 말에 대해 살펴 보라.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8절). 이것은 그 자신에 대한 비천한 생각과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높은 생각을 말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는 않고 있다. "내 하인은 당신이 그의 방에 들어갈 만한 가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초라한 작은 방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히려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고 말하고 있다. 백부장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으나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겸손은 상류인사들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이제 이 세상에 비천한 모습으로 나타내셨으나 백부장은 그를 선지자로 여기고, 아니 "선지자 이상으로" 여기고 그에게 이와 같은 존경을 표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외부적으로 우리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더욱 존경해야만 한다. 백부장은 간청을 하려고 그리스도에게로 왔으며 따라서 이와 같이 그 자신을 겸손하게 나타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근할 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하거나 그에게서 어떤 좋은 것을 받거나 그와 더불어 어떤 관계를 맺기 위하여 비천한 피조물이나 사악한 죄인들처럼 자신의 무가치함을 나타내며 낮추는 것은 우리에게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3. 그의 위대한 신앙을 살펴 보라. 겸손하면 할수록 신앙은 더욱 생긴다. 우리가 수줍어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하인을 고칠 수 있다는 신앙의 확신을 가졌을 뿐 아니라 또한,
(1) 그는 먼 거리에서 그를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적인 수술에서와 같이 육신적인 접촉이나 병이 걸린 부분에 대한 처방의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의사와 환자가 함께 만나지 않아도 능히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후에 많은 어려움을 거쳐서 "그리스도에게로 중풍 병자"를 데려왔던 사실에 대해 읽어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믿음을 "역사 하는" 믿음이라고 칭찬하셨다. 이 백부장은 "중풍병에 걸린" 자기의 하인을 데려오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그의 믿음을 "신뢰하는" 믿음이라고 칭찬하셨다. 참된 신앙은 비록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그리스도에 합당한 것이다(받아들여진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취하는 여러 가지 신앙의 방식을 모두 최고의 선의로 해석하고 있으며, 이로써 이와 같이 행할 것을 우리에게도 가르쳤다. 이 백부장은 그리스도의 능력은 아무런 제한도 없으며, 그러므로 멀고 가까운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동등하다는 것을 믿었으며 또한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실이다. 장소의 원거리가 "모든 장소를 채우는" 그의 지식과 역사를 차단할 수 는 없다. "나는 가까운 데 하나님이요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렘 23:23)
(2) 그는 약을 보내거나 더욱이 부적을 보내지 않고 그를 "말씀"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이 사실을 의심 없이 믿겠나이다. 여기에서 그는 자연의 왕국에서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모든 피조물이나 자연의 세력들을 명령할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전능하신 말씀에 의해 그 왕국을 일으키신 것과 같다. 사람에게 있어서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은 서로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팔"이신 그리스도는 그것과 다르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는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약 2:16)고 말씀하시며, 그리하여 치료하시고 덥게 하시며 채우시며 고치신다.
그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마치 주인이 자기 종을 부리듯, 그가 백부장으로서 자기의 부하들을 부리는 지배권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그의 수하에 있어 그가 시키는 대로 행하였으며, 따라서 멀리서도 일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은 그들에게 하나의 법(dictum fictum)이었다. 잘 훈련된 군인은 그들의 장교의 명령에 논쟁하지 말고 순종해야 함을 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말씀하실 수 있고 그것은 그대로 행해진다. 그는 이와 같이 모든 육체적인 질병에 대해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백부장은 비록 그 자신이 "수하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자기 부하에게는 이렇게 명령할 수 있었다. 그는 지휘관으로서가 아니라 부관으로서였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이 능력을 가지고 계셨으며 모든 것들 중 최고의 지배자요 주인이셨다. 백부장의 하인은 매우 순종적이었고 그의 주인의 의사에 잘 따르는 사람이었다.
[1]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께 대하여 이 하인과 같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그의 말씀의 지시와 섭리의 처분에 의해 그가 명하시는 대로 가고 오고 해야 한다. 그가 보내는 곳으로 달려가고 그가 요구하실 때 돌아오며, 그가 지시하는 것을 행해야만 한다. "내 주님이 자기 하인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의 뜻이 우리자신의 의지와 서로 엇갈린 때 그의 뜻이 대신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의지는 한쪽으로 물러서야 한다.
[2] 하인들의 육체적인 질병도 그리스도에게 그렇게 했다. 질병은 그가 보낼 때 사람들을 붙잡는다. 그러나 그가 소환할 때는 질병들이 사람을 떠난다. 질병들은 그리스도가 명하는 대로 우리의 몸과 영혼에 대해 영향을 미친다. 모든 질병은 그리스도가 명한 입무를 가지고 있고 그 명령을 수행하며 그의 통제하에 있으며 또한 그의 은혜의 목적을 만족시키려고 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자들(그의 능력은 그들을 위해 수행되고 약속된다)에게 위로의 주제가 된다. 질병이 매우 좋은 친구(Friend)의 수중에 있음을 아는 자는 병고를 두려워하거나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Ⅱ. 여기에는 백부장에게 나타난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은혜스러운 자에게 그 자신을 은혜스럽게 나타내 보일 것이다.
1. 그는 첫마디에 그의 청원에 응하고 있다. 그는 단지 그리스도에게 자기 하인의 처지를 말하였으며, 그의 치유를 빌고 있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절)라는 친절하고 위로하는 말씀으로 그를 독려하였다. 그는 "내가 가서 그를 보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 이것은 그를 친절한 구세주로 입증하고 있다. 오히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 이것은 그가 전능하신 구세주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위대한 말씀이었지만 그가 실현할 수 있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날개 아래 치유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오심은 치유하기 위함이다. 파생된 능력에 의해 이적을 행했던 자는 그 자신의 능력에 의해 기적을 행하셨던 권세 있는 자와 같으신 그리스도가 하셨던 것처럼 이오 같이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교역자가 병든 자에게 보냄을 받았을 때 그는 단지 "내가 가서 그를 위해 기도하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교역자들이 할 수 있는 일보다 우리를 위해 더 많이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참 좋은 일이다.
백부장은 그리스도가 자기의 하인을 고칠 수 있게 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리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말씀은 그가 요청하거나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은혜스러운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종종 보잘 것 없는 탄원자의 기대를 능가하여 행하신다는 사실이다. 보잘 것 없는 군인을 방문하려는 그리스도의 겸손의 본보기를 보라. 그리스도는 자기를 내려오시라고 간청하였던 왕의 신하의 병든 아들을 만나러 내려가시려고 하지 않으셨다(요 4:47-49). 그러나 그는 앞서서 병든 하인을 만나러 내려가시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자기 백성들 중 "낮은 신분의 사람"을 유의하시며 "약한 지체에 더 많은 영광을" 베푸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내려가시려는 겸손은 백부장으로 하여금 그가 내려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노라는 겸손을 초래케 하는 모본이 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스러운 자기 비하는 우리로 하여금 그 앞에 더욱 겸손하고 자신을 낮추게 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으며 보잘 것 없는 이방인에게 이를 계기로 칭찬의 말씀을 하고 있다(10-12절). 비록 일반적이고 공공적인 용건이기는 하였지만 강하면서도 자기 부정적인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얼마나 큰 일을 획득할 수 있는가를 살펴 보라.
(1) 백부장 자신에 관하여. 그리스도는 그를 시인하고, 받아 들였을 뿐만 아니라(모든 참된 신자들은 이 영광을 가지고 있다), 그를 칭찬하고 치하하였다(위대한 신자들은 욥과 같이 이 영광을 가지고 있다). "그와 같은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1] 그리스도께서 그를 칭찬한 것은 그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은혜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기셨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새롭고 놀라운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며 그는 백부장의 믿음을 아셨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대하고 탁월하였으며, 드물고 흔하지 않은 믿음이었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놀라운 것으로 말씀하셨으며 칭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세상적 칭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세상적인 허식이나 훈장이 아니라 성결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관점에서 큰 가치가 있는" 장식품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은혜의 이적 기사들은 자연이나 섭리의 기적보다 우리에게 더욱 영향을 미치며, 또한 영적인 도달은 이 세상의 어떤 성취보다 더욱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금과 은에 부요한 자"가 아니라 "믿음에 부요한 자"에 대해 우리는 그들이 "이 같은 거부가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창 31:1). 그러나 어떤 사람의 믿음 속에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면, "놀라운 일들"을 그들에게서 또한 그들을 위해서 행하신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는 멀지 않아 모든 "믿는 자들 중에서 경배"를 받을 분이다.
[2] 그는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그를 "칭찬하셨다." 믿는 자는 모두 "다른 세상에서" 칭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또한 그들과 더불어 특별히 나타날 때에 "이 세상에서"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공언되고 인정되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첫째 이것은 "먼저 백부장에 대한 영예"를 말하고 있다. 백부장은 비록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의 상속자였으며 그리스도는 그렇게 여기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찾으시는 것은 "믿음"이며, 그것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비록 "겨자씨" 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찾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만한 큰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 마치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눅 21:3)고 말해진 것과 같다.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지만 그는 이와 같이 칭찬을 받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교파나 경내에 들어있지 않은 자들에게 그들에게 합당한 칭찬을 하는 데 있어서 앞장서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것은 "양자 됨"과 "영광," "계약들," 그리고 신앙의 모든 도움과 격려가 속해진 "이스라엘에게 대한 수치"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인자가 올" 때에 그는 거의 "믿음"을 발견하지 못하며 따라서 매우 작은 "열매"를 찾게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신들의 영혼을 위해 아무런 도움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재능은 많은 은혜의 수단을 가졌으나 그것들을 좋게 활용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죄와 파멸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쨌든 그리스도는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그들로 하여금 거룩한 경쟁을 하도록 이것을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셨다(롬 11:14).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다. 이 영예에 대한 질투 때문에 특히 아브라함이 탁월하였던 은혜에 있어서 이방인에 의해 능가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2) 다른 사람들에 관하여 그리스도는 이를 계기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비교하였으며, 또한 "구원은 유대인의 것"이라고 가르쳤던 자들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 될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일을 그들에게 말씀하고 있다.
[1] 즉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될 것이다"(11절). 백부장의 믿음은 이방인의 회심의 본보기와 그들이 교회에 양자 됨에 대한 서론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님이 종종 언급하셨던 주제였다. 그는 그것을 확신 있게 말씀하시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즉 "모든 사람을 알고 있는 내가 말한다." 또한 그는 그 자신을 보다 더 기쁘게 하거나 유대인을 보다 더 불쾌하게 하는 어떤 일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종류의 암시는 나사렛인들로 하여금 격노케 만들었다(눅 4:27).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구원"받게 될 "사람"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즉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구원받게 될 것이다. 그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찾는 이가 적다"(마 7:14)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많은 사람이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어떤 때나 어떤 장소에서는 매우 적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이를 때는 많은 사람이 될 것이다. 지금은 여기 저기에서 은혜에로 이끌려 온 몇몇 사람들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멀지 않아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히 2:10) 우리 구원의 대장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수만의 거룩한 자"(유 14)와 함께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계 7:9) 무리와 함께, "구원받은 자들의 나라들"(계 21:24)과 함께 오실 것이다. 그들은 "동서로부터 이르게"될 것이다. 즉 서로가 멀리 떨어진 장소로부터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개체(단일성)의 중심인 그리스도의 오른편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그의 남자를 각처에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즉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이다(말 1:11). 선택받은 자는 사방에서 모이게 될 것이다(마 24:31). 그들은 사방에 흩어져 "땅에 심기워진 것이다." 이방 세계는 "동에서 서로" 놓여져 있으며, 특별히 여기에서 그들을 의미하고 있다. 비록 그들은 지금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는 나그네"이며 또한 오랫동안 그러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때 그들 가운데에서 "숨겨진 자들"을 가지고 계셨음을 누가 알랴? 마치 엘리야 당시의 이스라엘에 있었던 남은 자(왕상 19:14)와 같으며, 그 후에 이내 그들은 큰 무리를 이루어 교회로 모여들었다(사 60:3, 4).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천국에 갈 때 우리는 거기에서 이미 가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없음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을 그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구원 그 자체"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오게 될 것이며, 함께 오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에게로 함께 오게 될 것이다(살후 2:1).
첫 그들은 땅 위에 있는 "은혜의 나라," 즉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더불어 맺은 은혜의 계약에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될 것이다. 그들은 축복이 이방인들에게 이르는 "신실한 아브라함과 더불어" 축복 받게 될 것이다(갈 3:14). 이것은 삭개오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만들고 있다(눅 19:9).
2. 그들은 "하늘에 있는 영광의 나라"로 들어감이 허락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창에 있는 비둘기"와 같이 날면서 즐겁게 올 것이며, 그들은 낮 동안에 일을 하였으므로 그들은 수고에서부터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앉게 될 것이다. "앉는다"는 것은 "지속성"을 나타낸다. "서 있는" 동안 우리는 "간다" "앉는다"는 것은 "멈추는"것을 의미한다. 하늘나라는 "계속적으로 머무르는" 휴식의 장소이다. 그것은 "지속되는" 성도이다. 그들은 보좌와 같은 곳에 앉게 될 것이다(계 3:21). 즉 "침상"과 같은 것에 앉게 될 것이다(역주:원문의 뜻은 상에 기대는 것을 말함). 여기에서 사용된 것은 온유적이다. 그들은 "잔치에 초대받아" 앉게 될 것이다. 이것은 "교제의 완성"과 친교의 "자유성"과 친밀성을 나타낸다(눅 22:30). 그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앉게 될"것이다. 이 세상에서 일찍이 서로가 시간과 장소, 외부적인 조건이 매우 달랐던 자들이 하늘 나라에서 모두 함께 만나게 될 것이다. 고대인이나 현대인, 유대인이나 이방인, 부자나 가난한 자가 함께 만나게 될 것이다. 부자는 지옥에서 아브라함을 "바라"보지만, 나사로는 그의 가슴에 기대어 "그와 함께 앉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거룩한 교제(단체)는 하늘 나라의 행복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의 말단에 있던 자들, 또한 가장 세상에 알려지지 않던 자(者)등이 유명한 족장들과 더불어 영광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2] 많은 유대인이 망하게 될 것이다(12절).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이상한 선고가 내려졌다. 즉 "나라의 본 자손들은 쫓겨나게 될 것이다." 불신앙에 계속하여 머무르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들이 비록 "나라의 본 자손"으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보이는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에서부터 잘리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자손"이었다고 자만하였던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에게서 취하여질 것이며 또한 그들은 "백성"이 되지 못할 것이며 "의(긍휼)를 얻지 못할" 것이다(롬 11:20; 9:31). 큰 심판 날에 유대인이나 기독교인 같이 "나라의 본 자손"이 그들이 무엇이라고 "불리웠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에 의해 심판 받을 것이다. 만일 참으로 "자녀"라면 "상속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참 자손이 못되고 고백으로나 가족상의 자녀라면 기업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신앙 있는 부모에 의해 태어났으므로 우리를 "나라의 자손"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거기에만 만족하고 계속 머문다면 우리는 "내어 쫓김을" 받게 될 것이다.
둘째,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이상한 형벌이 기술되었다. 즉 "그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교회 없는 자들의 어두움, 교회밖에 있었던 이방인들의 어두움으로 내어 쫓김을 받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곳에로, 더욱 나쁜 곳으로 던지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도가 보여 준 것과 같이 어둡고 강퍅해졌으며 두려움으로 채워졌다(롬 11:8-10). 교회원의 특권을 빼앗긴(unchurched) 사람들이나 영적인 심판에 넘겨진 사람들은 이미 "완전한 흑암" 가운데 있다. 그러나 이것은 더 나아가 지옥에로 정죄받은 죄인들의 상태에 대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들은" 하나님과 모든 참된 위로에서부터 "쫓김을 당하게 될 것이며 어두운 데로 내어 던져질 것이다." 지옥에 불(fire)이 있지만 빛(light)은 없다. 그것은 "완전한 어두움"이다. 극단적인 어두움, 최고의 어두움만이 있으며 빛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 흑암은 빛의 땅인 하늘 나라에서 단절되었기 때문에 비롯되는 흑암이다. 하늘 나라가 없는 자는 "어두운 곳"에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더욱 나쁜 것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1. 지옥에는 큰 슬픔과 헛되이 흘리는 눈물의 홍수가 있다. 하나님의 진노의 의미에서 볼 때 영원히 온 몸을 괴롭히는 영혼의 고통은 정죄받은 자들의 괴로움이다.
2. 큰 분개. 정죄받은 죄인들은 "주님의 분노가 가득찬" 분풀이와 화냄 때문에 "그들의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즉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시기하는 마음으로 보면서, 또한 지금은 이미 지나가 버린 그들 자신의 이전 가능성을 두려움으로 회상하면서 이를 갈게 될 것이다.
3. 그는 백부장의 하인을 치료하고 있다. 그는 자기에게 대한 백부장의 청원에 대해 칭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청원한 것에 대해 실제적인 응답을 하고 있다(13절).
(1)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살펴보자. 그리스도는 백부장이 그의 하인에게 대했던 것과 같은, 아니 그보다 더 큰 은혜로서 치료하는 말씀을 하셨다. 즉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인은 그의 병에서 완쾌함을 얻었으며 주인은 그의 신앙의 확증과 찬동을 얻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종종 자기의 백성이 다른 사람을 위해 간구할 때 그 기도하는 사람에게 격려하는 응답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이 경청되는 것은 우리에게 대한 친절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그 벗들을 빌 때 그의 곤경(captivity)을 돌이키셨다(욥 42:10).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말씀은 백부장이 백지를 그리스도에게 드렸을 때 그가 이 백부장에게 적어준 큰 영예였다. 그는 무엇을 더 가질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에게 말씀하셨던 것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믿어라, 그러면 받게 될 것이다." "믿기만 하라."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능력과 신앙의 능력을 보라. 그리스도께서 그가 하시려는 것을 "하실"수 있는 것처럼, 능동적인 신자가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받으려는 것을 "가질"수 있다. 은혜의 기름은 신앙의 그릇이 없어지기까지는 증가하며 멈추지 않는다.
(2) 이 말씀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신앙의 기도는 승리하는 기도였으며, 그것은 일찍이 그러하였고 앞으로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그것이 "기적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은 치료가 순간적이었음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 그 기적이 "그의" 기적이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치함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가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이것은 그의 전능성의 증거이며 그는 긴 팔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치유하신 병, 특히 중풍병은 자연적인 수단으로 고치기에는 매우 어려운 병이었다고 하는 것이 박학한 의사의 견해이다.
Omnis paralysis, praesertim vetusta, aut incurabilis est,aut difficilis curatu, etiam pueris;abque solecego dicere, morbos omnes qui christo curandi fuerunt proposii, difficillimos sua natura curatu esse, Mercurialis De Morbis Puerorum(lib, 2. cap5).
-즉 모든 중풍병, 특히 오래 지속되는 중풍병은 치료할 수 없거나 어떤 방법으로도 거의 치료가 불가능하다. 나는 종종 그리스도에게 치유를 청원했던 모든 병들은 고치기 힘들거나 가망 없는 종류의 병들이라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심 (마태복음 8:14-17)
복음서 기자들의 공관서(Harmony)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은, 이 구절들과 9장 끝에 뒤따르는 모든 구절들을 마가와 누가가 그것을 둘 때에 유의한 순서를 따라 산상 설교 앞에 두고 있다. 라이트푸트(Lightfoot)박사는 이 구절들만을 산상 설교 앞에 두고 있으며, 18절 이후는 그대로 두고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Ⅰ. "열병"을 앓고 있었던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신 특별한 기사.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1. 이상(異常)한 것이 아닌 "경우." 열병은 가장 일반적인 병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기록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제자들의 친척에 대해 특별한 배려와 친절을 가지고 있음을 본보기로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1) 베드로는 "아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로 불리워졌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베드로의 "아내"의 친척을 친절하게 보살핌으로써 결혼의 상태를 은근히 장려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역자들의 결혼을 금하고 있는 로마교회는 그들이 무오설을 이끌어내려는 이 사도(베드로)에게 있어서 모순을 법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집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가지고 있었다(20절). 이와 같이 제자는 그의 주인보다 더 많이 가구를 갖추고 있었다.
(3) 베드로는 원래가 벳새다 출신이었으나 가버나움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그리스도께서 이곳으로 옮겨오셨을 때 베드로도 이사를 와서 그의 주요 거처로 삼은 것 같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에게 접근하기 위하여 또한 그와 더불어 교제하는 기회를 가지기 위하여 우리의 거처를 바꾸는 것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다. 언약 궤가 옮겨질 때 이스라엘은 옮겨야 하며 그것을 따라 가야만 한다.
(4) 그는 "장모"를 그의 가족 중에 함께 거느리고 있었다. 이것을 동역자가 다른 동역자의 가족에 대해 자기 자신처럼 친절하게 대하는 본보기이다. 아마도 이 착한 부인은 늙었지만 나이 많은 사람에게 마땅히 해야하는 것처럼 모든 가능한 친절함으로 존경을 받았고 보살핌을 받았다.
(5) 그녀는 "열병"에 걸려 있었다. 젊은이의 힘이나 나이의 연약함과 싸늘함(연소)도 이런 종류의 병에 대한 울타리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중풍병은 만성적(고질적)인 병이며, 열병은 급성적인 병이다. 그러나 둘 다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와졌다.
2. "치료"(15절).
(1) 그것은 어떻게 "완치"되었는가? "그는 그의 손을 만지셨다." 의사들이 하는 것처럼 맥박으로 병을 진단하시지 않고 그것을 고치셨다. 이것은 그의 친절함과 온유함을 암시하고 있는 그는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만지셨다." 그것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말씀으로 수행하심으로써, 직접 우리에게 적용하심으로써 영적인 치유의 방법을 보여 주고 있다. 성서는 "말씀을 하고 있으며," 성령은 만지시는데, 마음과 손을 만지신다.
(2) 그것은 어떻게 "입증"되었는가? 이것은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이 사실에 나타나 있는 것은,
[1] 자비는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자연의 힘에 의해 열병에서 회복된 자들은 일방적으로 약하고 쇠약하며 오랫동안 일을 못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 치료는 자연의 힘 이상의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녀는 즉시로 완쾌되어 가사 일을 돌보았다.
[2] 자비는 성결케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자비는 참으로 완성되고 있다. 그녀는 이와 같이 특별한 은혜에 의해 고귀하게 되었지만 거드름을 부리지 않고 하인과 같이 무슨 일이 있으면 시중들려고 상 곁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하신 자들은 마땅히 겸손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녀는 이에 대한 보답을 강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치유하신 자들은 겸손한 하인과 같이 온종일 그를 섬겨야만 하는 것이 합당하다.
Ⅱ.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많은 치유에 대한 일반적인 기사가 있다. 이 베드로의 장모에 대한 치료는 많은 환자가 그에게로 몰려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러한 사람을 고치셨다. 왜 나를 고치지 않는단 말인가? 이러한 사람의 친구를 고치셨는데 왜 내 친구는 고치지 못하시는가?"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말해지고 있다.
1. 그는 무엇을 하셨는가?(16절).
(1) "그는 귀신들을 쫓아 내셨다." 즉 "말씀으로 악한 영들을 쫓아 내셨다." 마치 욥의 고통에서와 같이 자연적인 원인으로 돌려 질 수 있는 그러한 병들에 있어서도, 특히 마음의 병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 사탄의 많은 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을 무렵에는 사람의 육신을 사로잡거나 성가시게 하는 사탄의 역사가 보통 때 이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큰 진노를 가지고"왔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때가 짧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현명하게 그렇게 하도록 명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사탄을 이기는 권세와, 사탄을 무력하게 하고 쫓아내며 그 능력을 깨뜨리고 그 역사를 파괴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보여 주는 분명하고 빈번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성공은 그의 목적이 은혜스러웠던 것만큼 영광스러웠다.
(2) "그는 병든 자를 다 고치셨다." 비록 환자는 매우 보잘 것 없었고 그 처지는 매우 나빴지만 모두 예외 없이 고쳐 주셨다.
2. 성서의 말씀이 여기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17절) 구약 성서의 예언의 성취는 그리스도가 목표로 했던 위대한 일이었으며 그의 메시야 되심에 대한 위대한 증거였다. 다른 일들 가운데에서도 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사 53:4). 이 말씀은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언급되어 있으며, 거기에서는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해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우리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언급되고 해석되어 있다. 우리의 죄는 우리의 병을 우리의 슬픔으로 만든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의 공로에 의해 죄를 없이 하셨으며 그의 생활의 기적에 의해 병을 없이 하셨다. 아니, 그러한 이적이 그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가 우리병을 짊어지셨으며, 그때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죄는 병의 원인과 고통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몸에 걸리기 쉬운 많은 질병과 불행이 도사려 있다. 철학자들의 모든 기록보다 우리를 더 잘 후원하고 위로하는 내용이 복음의 이 한 절에 들어 있다─즉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으며,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 그는 그것들을 우리 앞에서 지셨다. 비록 그는 결코 병드신 적이 없으셨지만, 주리시고 갈하시고 지치셨으며, 근심하셨고 슬퍼하셨고 힘겨우셨다. 그는 그의 "수난"으로 우리를 위해 그것들을 지셨으며, "우리의 연약함을 만지시"면서 "긍휼"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그것들을 참으신다. 따라서 그는 그것들을 우리에게서 없이 하시며, 그것이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면 그것들을 가볍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여기에서 얼마나 강조적으로 표현되어 있는가를 살펴 보라.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그는 그 일에 개입하실 수 있으며 기꺼이 간섭하려고 하시며, 또한 우리의 의사로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담당하시게 되어 있다. 인간 본성의 불행의 이 부분은 그가 특별히 배려한 것이었으며, 그는 이것을 치유하시려는 자신의 큰 준비에 의해 입증하셨다. 그는 역시 지금도 능력이 있으시며 온유하시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로 가는 것이 결코 악조건일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두 사람 (마태복음 8:18-22)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Ⅰ. 그리스도께서 "디베랴 바다의 저편"으로 옮기시는 것과 그의 제자들에게 배를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일(18절)이 기록되어 있다. 의(義)의 태양의 영향력은 한 장소에 매어 있지 않고 모든 지역에 확산되었다. 그는 선행을 베풀기 위해 두루 다니셔야만 한다. 영혼의 필요성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9)고 그를 불렀다. 그는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옮기셨다. 이것을 보면 비록 그들은 그가 그곳에 계시기를 바랐던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자기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계셨으며 그들은 그에게 참여해야만 한다. 그는 한 장소에서 받아들여지고 유용하였으므로 아무런 반대도 받지 않았으나 다른 곳으로 갈려고 할 때는 반대를 받았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설교를 먼 곳으로 가서 하게 될 때 "자기를 에워싼" 많은 무리들이 그를 열심히 따를지 안 따를지를 시험하시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도움이 바로 문 곁에 있을 때는 기뻐하지만, 고통스럽게 "다른 편"까지 따라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열심히 없는 사람은 떨쳐 버림으로써 완전한 자(者)만이 그대로 드러나게 하려고 하셨다.
Ⅱ. 그리스도는 "다른 편"으로 옮겨갈 때 뒤에 남아 있기를 싫어하고 그를 따르려는 마음을 가졌던 두 사람과 대화를 하셨는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과는 달리(사람들은 대개 부끄러워했다) 그의 친밀한 제자가 되려고 마음먹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닮을 수 없거나 잘 어울릴 수도 없는 엄격한 면을 그가 지녔기 때문에 꺼렸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교제를 가지려고 원하는 듯하였으나 올바르지 못하였던 두 사람에 대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에게 접근하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는 실례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출발하는 일에 있어서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경고하고 있다. 우리의 건물이 설 수 있도록 기초를 두어야 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다른 기질을 가진 사람, 즉 하나는 급하며 진지하며, 또 하나는 우둔하고 더딘 사람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처리 방법을 살펴볼 수 있다. 그의 교훈은 그들 각자에게 적용되며 또한 우리를 위해 의도되고 있다.
1. 여기에는 "성급하게 약속했던" 사람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어떤 서기관"(19절)이었으며, 학자와 박학한 자였고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였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들 가운데서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을 발견할 수 없다. 대게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대한 적수로서 바리새인과 함께 나오고 있다.
"학자(서기관)가 어디 있느뇨?"(고전 1:20) 서기관이 그리스도를 따를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한 서기관이 제자가 될 것을 공포하고 있다. 이는 마치 "선지자들 가운데 있는 사울"과 같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 그는 어떻게 자신의 결심을 나타내었는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쫓으리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어떻게 더 잘 말할 수 있었는가를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에게 대한 자기 헌신의 고백은,
[1]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것이었으며, (exmero motu)─즉 그의 편견이 없는 성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리스도에 의해 제자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으며 또한 제자들 중의 어떤 자에 의해 권유를 받지도 않았다. 그 자신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친밀한 제자가 될 것을 제의하고 있다. 그는 강제적으로 징발된 사람(a pressed man)이 아니라 자발적인 사람(a volunreer)이다.
[2] 결심이 매무 강하다. 그는 이 일에 있어서 정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나는 당신을 따를 마음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결심이 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3] 그것은 제한되지 않았고 무조건이었다. "어디로 가서든지 저는 쫓으리이다. 저편 지방뿐만 아니라 세상 끝이라 할지라도 쫓으리이다." 우리는 이 사람과 같은 확신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성급하였으며, 그의 목표는 저급하고 육적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질문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 그는 전혀 심사숙고를 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이적 기사를 보았고 그가 현세적인 왕국을 세우기를 원하였다. 또한 그는 적당한 때에 그 왕국에 참여하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충분한 심사숙고 없이 급작스럽게 결심함으로써 결국 실패를 초래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빨리 익으면, 빨리 썩는다.
(2) 그리스도는 그의 결심이 진지한 것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시험하였는가?(20절) 그리스도는 그가 열심히 따르려고 하는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음"을 그로 하여금 알게 하였다(20절). 그리스도의 극심한 가난에 대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1]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을 때 낮은 피조물들(공중의 새나 여우)도 거처가 있지만 그 자신은 이렇게 낮은 상태에까지 두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만일 그가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면,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는 최고의 신분과 환경에서 그것을 취하셔야만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장 악조건의 인간성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하등의 피조물들을 위해 얼마나 잘 마련되어 있는가? "여우도 굴이 있다." 여우는 사람에게 쓸모 없는 동물일 뿐만 아니라 해치는 동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들을 위해 거처할 구멍을 마련하고 있다. 사람은 그것들을 파괴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것들은 이와 같이 보호되고 있다. 그들의 구멍은 그들의 저택이다. "공중의 새"는 비록 그들 자신을 위해 염려하지는 않지만 보살핌을 받으며 "깃을 들이고 있다"(시 104:17). 들판에 "깃"을 들이고 있으며, 그것들 중에 어떤 새는 집안에서, 하나님의 제단(정원)에서(시 84:3) 깃을 들이고 있다.
둘째, 주 예수님은 얼마나 초라하게 마련되었는가? 짐승과 새가 이렇게 좋은 설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필요한 것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격려를 해 준다. 또한 우리 주인께서 우리 앞에 그와 같이 행하셨던 일은 만일 우리가 일용할 것이 결핍할 때 위로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 주 예수님은 그가 이곳 세상에 계셨을 때 극단적인 가난의 치욕과 고통을 감수하셨다. "우리를 인하여 그는 가난하게, 매우 가난하게 되셨다." 그에게는 거처나 휴식처가 없었으며, 머리를 들여 넣을 집이나 머리를 둘 베개도 없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그를 섬겼던"(눅 8:2) 호의를 가진(성품이 좋은) 사람들의 자선에 의지하여 살았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감수하신 것은 모든 점에서 그 자신을 겸손케 하고 또한 그를 "가난하고 궁핍한 자"로 언급했던 성경 말씀을 성취하실 뿐 아니라, 세상 부귀의 허무성을 보여주고 그것을 거룩한 멸시로서 하찮은 것으로 여길 것을 가르치시며 그가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구입하시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시기 위함이다(고후 8:9).
[2] 이러한 선언이 이 경우에 행해진 것은 이상한 일이다. 서기관이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말했을 때 흔히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는 모든 것을 격려할 것이며 또한 "오라, 내가 너를 보살피겠노라"고 말씀하실 것으로 생각한다. 한 사람의 서기관은 열 두 명의 어부보다 더 큰 명에와 봉사를 그를 위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마음을 아셨으며, 그 생각에 응답하셨으며,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에게로 어떻게 올 것인가를 가르치고 계시다.
첫째, 서기관의 결심은 급작스러운 것인 듯하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신앙 고백을 할 때 "앉아서 값을 계산하거나"(눅 14:28), 그것을 지혜롭게 심사숙고하여 행하거나, 경건의 방법을 취하도록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알기 전에 그들의 허를 찌르는 것(take men by surprise)은 신앙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번민 가운데서" 공언을 하는 자는 "짜증 가운데서" 그것을 다시 떨쳐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서두르지 않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들은 곧 행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들로 하여금 거짓이 최악의 것임을 알도록 하며 어려움을 당할 것을 기대하도록 하라.
둘째, 그의 결심은 세속적이고 탐욕스러운 행동 원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았고 그는 큰 사례금을 가졌고 곧 재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으며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하게 되려는 소망을 가지고 그를 따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오류를 수정하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자기는 부하게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다. 또한 만일 그가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그가 지내는 것보다 더 잘 지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세상적인 유익을 목표로 하여 그를 따르려 하는 자나 자기들의 종교의 하늘나라 이외의 것을 얻으려고 하는 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에 있는 서기관이 당초 예상한 것이 빗나간 것에 슬퍼하면서 돌아간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득을 얻을 수 없다면, 그를 따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2. 여기에는 "수행하는데 너무 더디었던" 또 다른 사람이 있다. 수행을 더디하는 것은 성급히 결심하는 것만큼 나쁜 일이다. 우리가 심사숙고한 후에 결정하였을 때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 하도록 내버려두었다고 말하지 말라. 이 교역자 후보생은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 하나였으며, 그를 따르던 많은 추종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21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옛 전설로부터 미루어 이 사람은 빌립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앞의 사람보다는 더 자격이 있고 하려는 마음이 더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신만만하거나 건방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담하고 열심 있고 지나치게 앞서는 기질은 종교에 있어서 가장 믿음직한 것은 못된다. 때로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법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1) 그리스도를 즉각적으로 따르기를 늦추기 위해 이 제자가 늘어놓은 변명이 있다(21절).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내가 당신의 친밀하고 항구적인 추종자가 되기 전에 나로 하여금 내 아버지와 관계된 마지막 존경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시옵소서. 잠시동안 내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때 종종 당신의 경청자가 되기에 족하도록 하소서." 그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지금 병들어 있거나 죽어가고 있거나 죽었다. 다른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의 아버지는 단지 나이가 많았거나 그리 오래 사실 것 같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병 중에 있는 자기의 아버지를 보살피거나 그의 임종을 보고 장사지내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난 후 그리스도를 섬기려고 하였다. 이것은 합리적인 요구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옳지 않았다. 그는 일을 하기 위해 가져야 하는 열심을 가지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이와 같이 간구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럴듯한 간구로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지못해 하는 마음도 결코 변명에는 궁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Non vacat의 의미는 Non placet이다. 즉 "여가의 부족은 마음의 부족이다." 우리는 그것이 자기의 아버지에 대한 참된 효도심과 존경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더 좋아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가족과 친척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진지한 경건(믿음)의 길"에서부터",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방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이러한 정당한 일은 우리 모두를 원상태로 돌이키며, 또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는 세상에 대한 빚을 갚는다는 구실 아래 무시되고 연기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방어를 이중으로 할 필요가 있다.
(2) 그리스도는 이 변명을 인가하지 않으셨다(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쫓으라."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다른 사람에게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대한 이 말씀에는 능력이 수반되었다. 앞 구절에서 서기관은 오르바(역주:나오미의 며느리)와 같이 그를 떠났지만, 그는 롯이 나오미에게 대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랐고," 그를 꼭 붙잡았다. 그는 "나는 당신을 따르겠나이다"고 말하였고, 이에 대해 그리스도는 "너는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을 함께 비교한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 아닌, 우리들에게 대한 그의 부르심의 힘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린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그는 그가 쓰시려는 자를 부르신다. 더욱이 유의할 것은, 비록 선택된 그릇들이 변명을 늘어놓거나 잠시동안 신적 부르심에 순응하는 것을 늦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마침내 그들의 변명에 응답하실 것이며, 그들의 마지못해 하는 것을 정복하시고, 그들을 그의 발 아래로 데려오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부르실 때에 그는 극복할 것이며 그 소명을 초과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삼상 3:10). 그의 변명은 부적당한 것으로 버려지고 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그것은 속담적인 표현이다. "죽은 자들로 다른 사람을 장사하게 하라."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가 무시되는 것보다 오히려 장사하지 않은 채로 내버려두는 것이 낫다(내버려두도록 하라). 영적으로 죽은 자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자를 장사하도록 하라. 세상적인 직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맡겨 두어라. 그것들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라.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거나 특별히 죽은 아버지를 장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 때에 네가 할 일은 아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용된 너만큼, 부르심을 받지 않고 자격도 없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잘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 너는 그 밖에 해야 할 일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비록 양친에게 대한 효심은 우리 종교의 위대하고 필수적인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이 선행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나실인은 율법에 따라 그들 자신의 양친을 위해 통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께 거룩하기"때문이다(민 6:6-8). 또한 대제사장은 "그 자신을 시체에 더럽히거나" 그 "자신의 부모로 인하여 더렵혀서는" 안되기 때문이다(레 21:11, 12). 또한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려는 자들에게 "부모를 미워할 것을"(눅 14:26) 요구하고 있다. 그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경쟁하거나 그를 위한 우리의 행동과 고난과 더불어 겨루게 될 때 우리의 가장 친근한 친척들을 비교적 무시하고 냉대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폭풍을 잔잔케 하심 (마태복음 8:23-27)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요단강 동쪽에 있는 갓 지파의 가다라 지방, 곧 "디베랴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셨다(18절). 그는 거기에서 직면하게 될 것을 미리 아셨지만 "마귀의 군단"을 소유한 보잘 것 없는 피조물을 구출하기 위해 가시려고 했다. 그런데,
1. 그는 바다를 통해 갔다. 육지를 통해 가는 거리는 그렇게 먼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호수를 택하여 건너간 것은 그 자신이 육지와 마찬가지로 "바다의" 하나님이 되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또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가 그의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배로 항해하려는 자"나 그곳에서 종종 위험에 직면하는 자들은 그들이 신뢰하고 기도하는 그런 구세주, 즉 바다에 어떤 일이 일어나며 폭풍이 있을 것인가를 잘 아시는 주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회상하는 것은 그들에게 위로가 된다. 그러나 그가 바다를 건너갈 때 그는 그를 수행할 요트나 유람선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의 제자들의 고기잡이배를 이용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는 모든 점에서 초라하게 순응하였다.
2. "그의 제자들이 쫓았다." 다른 사람들은 발디딤이 든든한 "육지"(terra firma)에 뒤쳐져 있을 때 제자들은 그를 계속하여 따랐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기꺼이 바다로 가려고 하거나 그를 따라 위험이나 어려움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는 아니 그들만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발견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위험스러운 바다를 통해 천국을 가는 것보다 오히려 안전하고 뒤돌아갈 수 있는 육지를 통해 가려고 한다. 이후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휴식을 얻으려는 자는 지금 그가 인도하는 곳은 어디든지, 그것이 궁전과 마찬가지로 배나 감옥이든지 그를 따라가야만 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유의하자.
Ⅰ. 이 항해에 있어서 제자들의 위험과 당혹.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따르는 자는 어려움을 당해야 한다(20절)고 방금 말씀하신 진리가 나타나 있다.
1.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났다"(24절). 그리스도는 이 폭풍을 막을 수도 있었으며, 순탄한 항해를 하도록 명령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신앙과 구원의 영광과 또한 확신을 위한 것이었다. 이 폭풍은 "그들을 위한 것이었다"(요 11:4).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소유함으로써 잔잔한 미풍을 가지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실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와 함께 이 세상의 바다를 건너 저 편으로 가는 자는 모름지기 도중에 폭풍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져야 할 것을 보여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광풍에 요동되고 있다"(사 54:11). 영원한 잔잔함을 즐기는 곳은 천상이며, 이 낮은 지방은 때때로 요동되고 혼란 되고 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이 폭풍 가운데서 주무시고 계셨다." 우리는 이 때 이외에는 그리스도께서 주무셨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종종 깨어 계셨으며, 밤새동안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그러나 이 잠은 폭풍 가운데서 요나가 잤던 불안한 잠이 아니라 거룩한 평온의 잠, 그의 아버지를 신뢰하는 잠이었다. 그가 이렇게 주무신 것은 그 자신이 실제적이고도 참된 인간이라는 사실과 인간의 본성의 무흠한 연약함에 계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의 일은 그를 피곤하고 주무시게 하였으며, 또한 그는 그의 휴식을 혼란시키는 허물이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으셨다. 깨끗한 양심의 베개에 머리를 둘 수 있는 자는 폭풍 중에서도 조용하고 달콤한 잠을 잘 수가 있다(시 4:8). 마치 베드로와 같이(행 12:6). 그가 이때에 주무신 것은 그가 그들을 소홀히 하는 것처럼 보일 때 제자들이 자신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깨움을 받으려는 의도보다는 기운을 회복하기 위해 주무셨다.
3. 이 가련한 제자들은 바다에 익숙하였지만 매우 놀랐었고 그 두려움 때문에 그들의 주인을 찾아왔다(25절). 그 외에는 그들이 어디로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곁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었던 것은 실로 다행이었다. 그들은 기도함으로 그를 "깨웠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기도하기를 배우려는 사람은 바다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재적이고 지각적인 위험은 사람들을 필요할 때에 오직 도우실 수 있는 분에게로 몰아친다. 그들의 기도는 생명을 내건 기도였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1) 그들은 "주여, 구원하소서"라고 간구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그가 구원해 주시기를 빌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임무는 "구원하는 것"이었지만,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구언을 얻게 될 것이다"(행 2:21).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원과 신앙에 의해 연관된 자는 겸손한 확신을 가지고 일시적인 구출을 위해 그에게 요청할 수 있다. 그들은 그를 "주여"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다음에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사실에 유의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를 기꺼이 주님으로 삼고 있는 자만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왕이시며 구세주이시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간구하고 있다. 이것은,
[1] 그들의 두려움에 찬 음성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절망적이라고 여겼으며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당신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간구하였다.
[2] 그것은 그들의 열성에 찬 음성이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구걸하는 사람들처럼 진지하게 기도하고 있다. 이오 같이 기도에서 분투하고 씨름하는 것은 우리에게 합당하다. "그러므로"그리스도께서 주무신 것은 이렇게 끈덕진 요구를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Ⅱ.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발휘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 그 때에 주 예수님은 원기를 회복한 자와 같이 깨셨다(시 78:65).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가 폭풍 가운데 있을 때 주무실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주무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고통 받는 교회를 긍휼히 여기실 때, 정한 기한이 올 것이다(시 102:13).
1. 그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다(26절).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가 그들을 꾸짖으시는 것은 기도로서 자신을 어지렵혔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그들 자신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먼저 그들을 책망하시고 그 다음에 그들을 구원하셨다. 자비를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고 난 후에 그 자비를 주시는 것이 그의 방법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1) 그들의 두려워함에 대한 그리스도의 싫어함.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너희는 내 제자들이 아니냐? 시온에 있는 죄인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라. 이방 선원들로 하여금 폭풍 중에 두려워하게 하라.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의 두려움의 이유를 조사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숙고하라."
(2) 그들의 두려움의 원인과 근원에 대한 그리스도의 발견. "믿음이 적은 자들아." 참된 신앙을 가진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약하다. 그것은 거의 아무 일도 못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풍랑 이는 날에 두려움으로 불안케 되기 쉬우며, 사태가 악화되는 경계심과 악화되리라는 침울한 결론으로 괴로워하기 쉽다.
[2] 폭풍이 이는 과도한 두려움의 풍미는 영혼에 대한 닻과 같과 기도의 노를 바쁘게 움직이는 우리의 신앙의 연약성이 기인하고 있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폭풍을 통해 잔잔한 해안을 바라볼 수 있으며, 난국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소망으로 격려 받을 수 있을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폭풍에서 두려워한 것이나 그들의 불신앙, 그 원인은 주님을 매우 불쾌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에 대한 불명예를 초래하며 자신들에 대해 혼란을 야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2. "그는 바람을 꾸짖으신다." 그는 전자(前者)를 그가 우리 "안에" 기쁘게 하실 수 있는 "은혜"의 하나님 마음의 통치자로서 행하셨지만, 그는 이것을 그가 우리를 "위해" 기쁘게 하실 수 있는 "자연"의 하나님, 세상의 지배자로서 행하셨다. 그것은 "바다의 흉용"과 두려움의 소동을 "진정케 하시는" 동일한 능력이다(시 65:7). 여기에서 살펴볼 것은,
(1) 이 일은 말씀 한 마디로 어떻게 "쉽사리" 이루어졌는가? 모세는 막대기로 물을 명령하였다. 여호수아는 언약궤로, 엘리사는 선지자의 겉옷으로 물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명령하셨다. 그들 편에서 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의 영예와 행복을 나타내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보라.
(2) 이 일은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는가? 갑자기 "아주 잔잔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폭풍 후에는 물결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들이 정착하기까지는 오랫동안 시간이 걸려야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면, 폭풍이 그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나 모든 후유증도 깨끗이 그치는 것일 뿐 속박의 영의 세력하에 영혼의 의심과 두려움의 큰 폭풍은 때로 양자(養子)의 영예 의해 창조되고 말씀된 놀라운 잔잔함으로 끝난다.
3. 이것은 놀라움을 야기시켰다(27절). "사람들은 기이히 여겼다." 그들은 오랫동안 바다에 익숙해 있었으나 이렇게 즉시 폭풍이 완전히 가라앉는 것을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것은 이 이적에 대한 모든 표적과 표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신 것이며, 그들의 눈에는 기이한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
(1)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찬탄. "이 어떠한 사람인가!" 그리스도는 "돌도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분만큼 현명하고 전능하고 온후한 분은 아무도 없다.
(2) 그것에 대한 이유.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이 사건 때문에 그리스도는 "바람과 바다"까지도 명령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찬탄을 받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병을 치료한다고 자부하였지만 그리스도는 단지 "바람"을 단언하여 명령하셨다. 우리는 "바람"의 방향을 알지 못한다(요 3:8). 하물며 우리는 그것을 조절할 수 없다. 그러나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 자(시 135:7)는 그것이 나가있을 때 그것을 그의 장중에로 모으신다(잠 30:4).이 이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어떠한 일도 하실 수 있으시며, 최악의 폭풍의 날에 안과 밖에서 그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위로로 충분히 하실 수 있으시다(사 26:4). 주님은 "홍수 위에" 앉아 계시며, "많은 폭포 소리보다 더 크시다." 그리스도는 "바다"를 명령하심에 의해 그 자신이 "세상을 만드신 자"와 동일하심을 보여 주셨으며, 그때 "물들은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갔다"(시 104:7, 8). 지금도 "그가 꾸짖으실 때" 그것들은 조용해진다.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심 (마태복음 8:28-34)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귀신들린 두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장(章)의 의도는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인 육체적 질병과 더욱 조절할 수 없는 바람과 물결에 대한 그의 지배권의 본보기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또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만만찮은 귀신(마귀)들에 대한 신적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정사와 권세"는 그가 영광에로 들어가리라는 전조로서, 비록 지금은 비천한 처지에 있었지만 "그에게 종속되었다"(엡 1:21). 그는 정사와 권세자들을 쳐부셨다(골 2:15). 그것은 그리스도"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셨다"(16절)의 일반적인 말속에 드러난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른 경우보다 더 두드러진 사정에 놓여있는 특별한 실례를 살펴 볼 수 있다. 이 기적은 거라사 지방에서 행해졌다. 어떤 사람은 그들이 옛 가르가스 족속의 후손이었다고 생각한다(신 7:1). 그리스도는 원천적으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보냄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에서처럼 때로는 변방 주민들에게도 나타나서 사탄을 쳐 부셨다. 이것은 이방 세계에 있는 사탄의 군대를 이기신 그의 승리의 한 전조였던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 사탄을 무력하게 하고 타파하려는 그의 계획을 제시하는 일반적인 본보기인 동시에 특별히 사람에게 대한 악령들의 적의에 가득찬 수단과 방법을 우리에게 나타내고 있다. 이 귀신들의 군대가 어디에서, 또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는지를 살펴보자.
Ⅰ. 악령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에서 어떤 일을 만들었는가? 이것은 귀신들에게 사로잡혔던 이 두 사람의 비참한 상태에 나타나 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이 둘이 남편과 아내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한 사람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그들은 "무덤" 사이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여기에서부터 그리스도를 만나러 왔다. 귀신(마귀)은 심판자가 아닌, 집행자로서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의 승리의 노획품(trophy)인 사람의 시체들 사이에서 교제하기를 즐거워하였다. 마귀는 후에 해골의 장소인 골고다에서와 같이 그 자신이 큰 승리를 하였다고 으시대었지만 그리스도는 그를 정복하고 복종시켰다. 무덤 사이에서 거하는 것은 불쌍한 귀신들린 자들의 우울과 광포를 증가시켰으며 또한 그들은 성격이 매우 사나왔으므로 그들을 더욱 단단히 붙잡아 매었으며, 또한 "무덤"에서 움직이는 어떤 것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다른 사람들을 더욱 무섭게 하였다.
2. 그들은 "매우 사나웠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며,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고, 상처를 입혔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마귀는 인류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품게 하거나 악의를 가지게 함으로써 그것을 보여 준다. 서로가 사랑하고 협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미워하는 것은 사탄이 전 인류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는 증거요 결과이다. 그는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 대하여 이리나 곰, 마귀(Hcmo hemini lupus)가 되게 한다. 사탄은 자기들이 분쟁이나 교만, 시기, 악의 보복에 의해 영적으로 사람을 지배하는 곳에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 가련한 귀신들린 자와 같이 인간 사회에 어울리지 않거나 그것에 무가치하거나 그 위로에 원수가 되게 한다.
3.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반항하였으며, 그와의 관계를 부인하였다(29절). 귀신들은 이 가련한 자들"에게", 또한 그에게 "의해서" 해를 끼치려고 애썼지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도록 만들지는 못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만나게끔 사태를 명하셨다. 이것은 마귀를 이기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본보기이다. 이러한 불결한 영들을 그들이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는 그리스도 안으로 끌어낸 것은 그의 압도하는 손이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만들었던 사슬은 소용없었지만, 그리스도의 사슬은 그들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앞에 이끌려 왔을 때 그들은 그의 지배권에 대해 항의하였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 귀신이 "성도"와 같이 한 한마디의 말.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역주:우리 성경에는 번역이 안됨)여"라고 불렀다. 이것은 "좋은"말씀이었으며, 또한 이때에 이 말씀은 진리였다. 또한 그것은 혈과 육이 베드로에게 알게 한 것이 아니었던 "위대한" 말씀이었다(마 16:17). 귀신들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믿으며 또한 고백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귀신들로서 그리스도에게 대한 적개심을 더욱 고조하고 북돋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는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도와 귀신을 구별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귀신은 지옥의 맏아들로서 그리스도를 알지만 그를 미워하며, 그와 그의 법에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 오래지 않은 때에 마귀가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의심케 했고 그것을 의심하도록 설득(마 14:33)했던 사실을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의 없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시험 때에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케 하는 사탄에 의해 많이 동요될 수 있지만 양자의 영은 마침내 마귀가 부인하지 못할 만큼 만족하게 그것을 해결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2) 그가 "귀신"과 같이 한 두 마디의 말.
[1] 반항의 말.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첫째, 귀신이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타락한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시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을 붙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히 2:16). 그들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으며 그에 대한 어떤 은전을 가지거나 가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타락한 천사가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때 타락한 인간이 "그리스도와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오묘한 신적 사랑인가! 여기에 때가 이르기 전에(before the time) "그리스도 안에 있는" 탁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은 정녕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지만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귀신들이 지배자인 "그리스도와 어떠한 관계도 가지려고"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미워하며, 그에 대한 적개심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와는 반대적인 입장에 서며, 공공연하게 그의 영광과 위엄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들은 멍에를 꺾고 "속박을 깨뜨리시며," 마귀로 하여금 그들을 지배하지 못하게 할"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법, 규례들과 아무런 상관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고 그들이 말한 것을 살펴 보라. 온 시내는 전능하신 예수님께 "떠나시기를" 간구 하였다. 그들은 마귀인 그들의 아버지에게 속해 있으며, 그의 정욕들을 행하며, 그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셋째, 귀신들이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판자이신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귀신들은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은 귀신들의 심판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은 흑암의 사슬에서 그의 심판에 묶여져 있다. 그들은 그것을, 그것에 대한 생각을 떨어버려야 할 것이다.
[2] 두려움과 비난의 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이 사람들에게서 내쫓으려고, 우리가 행하려는 것을 방해하려고 오셨나이까?"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손상을 못하게 하거나 삼가는 것은 마귀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며, 또한 마귀의 모든 위로와 만족은 사람의 불행과 파멸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일이 잘되면 그것이 우리의 하늘 나라요, 또한 안이든지 밖에서든지 우리의 번성이 방해되면 그것은 우리의 고통이라고 간주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런데 우리는 "때로 이르기 전" 당신에 의해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귀신들은 그들이 받는 것보다 더욱 고통을 받게 될 때가 있다.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마지막날 최후의 심판은 그들의 완전한 고통을 위해 지정된 시간이다. 그 최후 심판을 옛부터 "용들과 마귀와 그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된 도벳에서 받게 될 것이다(사 30:33; 마 25:41). 그들은 "그날의 심판을 위해 예비 되고 있다"(벧후 2:4). 신적인 위임에 의해 땅을 두루 다니는(욥 1:7) "큰"죄인들인 악의를 가진 그러한 영들은 지금까지도 사슬에 매어 있다. 그들의 능력은 지금까지 미칠 수 있지만 더 이상은 미칠 수 없다. 그 때에 그들은 "감금된"죄수가 될 것이다. 그들은 지금 조금은 안전하다. 그러나 그때에 그들은 편안함이 없이 고통 중에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결코 고통받게 되지 않기를 구하고 있지는 않다(구원의 절망은 그들 경우의 불행이다). 그러나 그들은 "때가 이르기전" 고통받게 되지 않기를 간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판의 날이 언제 올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지금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둘째, 귀신들은 그리스도께서 접근하거나 그들의 능력과 행위에 주어진 제어 때문에 "그 심판과 맹렬한 분노"에 대한 어떤 두려운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모습과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명령의 말씀은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고통에 대해 염려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귀신들도 믿고 띠는 것이다"(약 2:19). 그들로 하여금 따끔한 맛을 보이거나 "때가 이르기 전 그들을 괴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그들 자신의 적개심이다. 정죄 받기로 결정될 가장 절망적인 죄인들도 "그 날이 가까움을 볼 때는" 두려움에 찬 놀람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Ⅱ. 악령들은 자기들이 "가는" 곳에 어떤 일을 만들었는가를 살펴보자. 그때에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나와서 "마친 멀리" 있었던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다(30절). 이 거라사인들은 비록 요단강 저편에 살고 있었지만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율법에 의해 불결하고 먹거나 만지거나 할 수 없는 "돼지"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변두리에 놓여 있으므로 그들 가운데는 이 "돼지 떼"가 속해 있었던 많은 이방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또는 그들이 지금 큰 거래를 하고 있거나 "돼지"고기를 매우 좋아했던 로마인에게 팔거나 교환하기 위하여 이것들을 기르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여기에서 살펴볼 것은,
1. 귀신들은 어떻게 "돼지"를 붙잡았는가? 비록 그것들은 "마침 멀리" 있었지만 또는 어떤 사람은 위험을 벗어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귀신들은 손해를 입히기 위해 그것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귀신(마귀)들은 "삼킬 것을 찾아," 기회를 찾아 "두루 다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찾은지 오래지 않아 발견한다.
(1) 그들은 "돼지 떼"에게 들어가도록 내버려두기를 "간구하였다"(31절). 그들은 매우 열심히 "간구하기를,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보내소서"라고 하였다. 이로서,
[1] 그들은 손상을 입히려는 자신들의 성벽과 또한 그것이 얼마나 자신들에게 즐거운 일인가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들은 이 마귀들의 자녀이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않는"(잠 4:16) 그들과 비슷하다. "고통의 장소에 들어가는 것보다 손해를 끼칠 수 있는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자." 만일 그들이 사람의 몸을 상처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들의 재산을 손상 내려고 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그들에 대한 짐으로 만들므로써 그들의 영혼을 해치려고 할 것이다. 이 사악한 계교는 교활한 옛 뱀에 가졌던 것이다!
[2] 귀신들은 그들을 이기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다. 그의 손해와 허락이 없이 그들은 "돼지"를 해할 수 없다. 마귀의 능력은 비록 크기는 하지만 그것은 제한되어 있고 그의 악의와 동등하지 않으며(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될 것인가?), 특히 우리의 가장 신실하고 능력 있는 친구요, 구세주이신 주 예수님의 통제 아래 있으며 또한 사탄과 그 하수인들은 그가 기꺼이 허락하는 것보다 그 이상을 더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위로가 된다.
(2) 그들 귀신들은 "떠났다." 그리스도는 사탄이 욥에게 고통 주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들에게 "가라"(30절)고 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종종 현명하고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사탄의 격노의 수고를 허락하시며 사탄으로 하여금 원하는 불행을 행하게 하며, 더욱이 그것에 의해 그 자신의 목적을 수행케 하신다는 사실이다. 귀신들은 그리스도의 포로일 뿐만 아니라 그의 노예이다. 악령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는 그들이 더 이상 피해를 입히지 않게 한 방해와 또 그들이 끼친 피해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리하여 그들의 진노도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바지한다. 그것은 그가 하는 일과 그가 금하는 일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허락하신 것은,
[1] 영의 존재를 부인하며 이러한 존재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그 이유는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유대인들 가운데 있었던 사두개인들을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이것에 의해 악령들의 존재, 무리, 능력과 악의에 대해 시각적으로 더욱 가까이 나타내려고 하셨다. 만일 그들이 이것에 의해 확신을 얻지 못하였다면 자신들의 불신임에 대해 변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바람을 볼 수는 없지만 나무나 집이 그것에 의해 쓸어지는 것을 볼 때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유대인이었지만 아마도 율법과는 반대가 되는 "돼지"고기를 자유스럽게 먹었던 가다라인들을 심판하기 위함이다. 어쨌든 그들이 "돼지"를 기르는 것은 거의 악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들이 소름이 끼치는 패거리에서 어떻게 구출되었는가를 보여 주려고 하였으며, 또 만일 그가 허락했다면 그들이 자기들의 "돼지"에게 행했던 것처럼 즉시 그들을 질식시키려 하였던 것을 보여 준다. 귀신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허락을 받자마자 "귀신들은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갔다." 사탄은 얼마나 부지런하며 급속한가를 보라. 사탄은 불행을 끼치는데 있어서 시간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볼 것은,
2. 귀신들이 그것들을 포착하였을 때 "어느 방향으로 재촉하였는가?" 그들은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도록" 명령되지 않았으므로 "비탈로 내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약 2천 마리의 돼지"(막 5:13)가 그곳에서 몰사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귀가 무엇을 점령하는 것은 파멸시키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마귀는 사람들을 죄악으로 몰아내며, 그들로 하여금 수치스럽고 비참한 것인 줄 아는 일을 하게 한다. 악령들이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역사 하는"힘이 얼마나 강한가! 불순종의 자녀들은 엄청나게 어리석고 악한 성욕에 의해서 신앙에는 물론이요, 건전한 이성과 자기들의 세상권익에까지 정면으로 반대되는 일을 하게끔 된다. 이리하여 악령은 그들을 파멸에로 내어모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큰 파괴자인 아볼루온과 아바돈이기 때문이다.
3. "이 사건은 소유주에게 어떤 결과를 야기시켰는가?" 이 소문은 무엇보다도 돼지를 잃어버린 것에 더 관심이 있던 것으로 보인 "돼지 치던 자"들에 의해 그들에게 전하여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돼지를 잃어버리기 전에는 "귀신들린 자의 일"을 말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3절). 그리스도는 "시내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가 거기에 있다는 소식은 그곳에 들어갔으며 그는 그들의 의중을 떠보려고(feel their pulse beat)하였으며 또한 이 사실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아본 후에 이에 따라 행동하려고 하였다.
(1) 그들은 호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보러왔다. "온 동네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온 것"은 자기들도 이러한 놀라운 이적을 베푼 사람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그리스도를 만나러 몰려들었지만 그와 친근하거나 알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2) 그들은 욕심 때문에 그에게 "떠나시기를" 간구 하였다. 그를 시내로 초대하거나 병든 자를 고치려고 데려오는 대신에 그들은 마치 귀신들의 말, 즉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을 빌려온 것처럼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바랬다. 그런데 이제 귀신들은 돼지를 빠뜨리게 하는 목적을 달성하였다. "자기들이" 그것을 행하고도, 그 후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했다고 믿게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공연히 싫어하게 만들었다. 마귀(귀신)는 우리의 첫 조상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강퍅한 생각을 가지게 함으로써 그들을 유혹하였으며, 또한 가다라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는 그들의 성을 파괴하려고 왔으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는 더욱 손상케 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를 배척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마귀는 하나님의 밭에 가라지를 심고 있으며, 기독교 교회에 해를 끼치고 있으며, 기독교를 비난하며, 그것에 대해 몹시 성을 내게 한다. 그들은 그가 애굽에 있는 모세와 같이 또 다른 손역을 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떠날 것을 간구하였다. 구세주보다 앞서 돼지를 내세우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에 의한 구원에 미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서 떠나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의 말씀을 자신에게 머물러 두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은 그들의 야수적인 욕망─즉 그들이 먹이기를 포기한 그러한 돼지들을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연히 이와 같이 그를 싫어한 자들을 내버릴 것이다. 또한 지금 전능자에게 "우리를 떠나소서"라고 말한 자들에게, 이후에 "저주받은 자들아 떠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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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을 해주시는 분이 아무도 안계셔서 카페운영이 어렵습니다
쌀과 김치라도 마련하도록 오늘은 후원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자동이체 정기후원 회원님이 계셔야 카페를 운영 할 수 있습니다 공과금으로
30만원 병원약과 주사비가 30만원 40만원으로 먹을거라도 사야 삽니다
겨울철에는 난방비가 더 듭니다 현재 자동이체 회원이 세분밖에 없습니다
꼭 기도해 보시고 주님이 감동주시면 저희 가정을 도와 주세요..
후원으로 카페운영을 잘하도록 용기를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시는 분이 계셔야 통신료를 내고 카페운영을 합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카페후원계좌-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후원-농협 233012-51-024388 예금주.황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