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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본부 - 아침
약 10여 평의 좁은 지서 안은 우글거리는 형사들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주 형사는 그 광경이 흡사 대목을 앞두고 터미널 대합실에서 매표를 위해 진을 치고 있는 여행객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 젠장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군.
덩치 큰 안 형사를 선두로 해서 일행은 인파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뒤쪽 구석자리로 갔다.
형사 2팀은 수사본부에 어젯밤보다 더 많은 인파가 갑작스레 몰린 이유가 뭔지 의아했다. 알고 보니 대부분이 파견 일수를 채웠거나 중간에 다른 업무 차출 등의 이유로 본 근무지로 복귀준비를 하는 형사들이었다. 복귀하는 그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자신들이 지금까지 공들여 수사한 모든 것들이 허사로 끝나버린 것에 대해 분통해하는 형사들과 범인을 잡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조금은 홀가분해하는 형사들이다.
반면 남아있는 형사들은 하나같이 후줄근하게 지친 모습에 근심이 가득한 표정들이었다. 주형사는 남아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고립된 성에 수용된 패잔병 같다는 생각을 했다. 복귀하는 인원들이 부산하게 빠져나가고 간부들이 한둘씩 들어오자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고 금세 주위는 조용해졌다.
수사본부를 축소하기로 한 정확한 이유는 수뇌부들만 알고 있겠지만 남아있는 형사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유는 수사본부를 한번 치르고 나면 관할경찰서는 큰 빚을 지는 게 상례인데다 서경 사건본부는 역대 최장기간 동안 최대 인력이 동원되었고 들은 바로는 요원들 한 달 밥값만 평균 600에 수사비는 연 1억 가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침 8시가 되자 조회가 시작되었다. 수사본부장은 수사방향과 팀별 임무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 제1조는 사건 현장 인근 주민을 상대로 목격자 탐문수사를 계속하고 제2조는 7차 사건 이후 오산, 서경 지역을 비롯해 경기 서남부 일대에서 구속 수감되었다 최근 출소한 전과자와 장기 출타했던 자들의 명단을 파악하고, 제3조는 서경, 수원, 오산, 용인 일대 정신병원을 대상으로 정신질환 치료 전력이 있는 자들의 알리바이를 확인하고…
지침을 확인한 수사요원들은 각자의 임무에 따라 2~4명의 조로 나뉘어 수사 활동을 하고 오후 6시에 다시 수사본부에 모여 당일의 수사 결과 등을 보고한다. 그리고 수집된 정보와 내용을 종합하여 오후 11시에 종회를 마지막으로 본부에서의 일과를 마치게 된다.
아침 조회가 끝나자 형사 2반은 서울, 인천 등지에서 새로 투입된 인원들과 함께 관할 경찰서 소속으로 보이는 젊은 형사로부터 사건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을 받았다. 그 자리에는 인천 시경에서 파견된 한동훈 수사과장도 함께 있었다. 한동훈 수사과장은 형사2팀에겐 낯익은 인물이었다. 한 과장은 인천 시경으로 발령 가기 전에 서울 시경에서 그들의 상사로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과장과 함께 부본부장으로 새로 부임한 최 총경도 서울시경 출신의 상사이자 대선배였다.
관리계 직원이 나눠준 서류에는 그동안 발생했던 사건을 요약 정리한 내용과 분석표 현장의 약도 등이 그려져 있었고 국과수로 넘어간 증거함 대신 유류품과 현장을 찍은 사진들을 형사들이 돌려보게끔 앞자리마다 배열해 놓았다. 피살자의 인적 사항, 사건발생장소 약도 등을 제외하고 관할형사의 설명과 서류에 적혀 있는 중요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사건발생일과 발견 장소 요약 :
1차 - 이정이(71) →86년 9월 15일 새벽 6시 20분경. 집근처 목초 밭에서 발견.
2차 - 박현아(25) →86년 10월 20일 저녁9시경 이후. 농수로 발견
3차 - 강점순(24) →86년 12월 12일 오후 11시 이후. 축대 논고랑 흙속에서 발견.
4차 - 이희선(21) →86년 12월 14일, 저녁 9시 이후. 논둑 들 깻단 밑에서 발견
5차 - 홍상희(18) →87년 1월 10일 밤 8시 15분 이후. 논에 쌓아 둔 볏단 속에서 발견
6차 - 박은주(30) →87년 5월 2일 오후 10시 30분 이후. 야산의 솔가지 다발 속에서 발견.
(수원여고생살인 - 87년 12월 24일)
7차 - 안희주(54) →88년 9월 7일 저녁. 농로 주변에서 발견.
8차 - 김영미(14) →90년 11월 15일 오후. 야산 소나무 밑에서 발견.
9차 - 양옥자(69) →91년 4월 3일. 야산 아카시아 나무숲에서 발견.
살해방법: 액살(1.2차), 교살(3~9차)
살해도구: 스타킹, 브래지어 끈, 블라우스 끈, 털목도리
범행수법: 양손결박 (피해자 스타킹, 블라우스 등) - 3.4.5.7.8 차
재갈 (피해자 양말, 손수건 등) - 3.4.7.8 차
팬티, 거들로 얼굴 씌움 - 3.4 차
음부난행: 숟가락, 포크, 복숭아 9조각, 양손 손잡이 등 - 4.7.8.9 차
특징: 살해도구, 반항제어도구, 난행도구 모두 피해자의 물건을 이용.
범행 후 옷을 입힘. 시체 유기하고 얕은 매장.
(피해자의 소지품 또한 시체 옆에 나란히 놓고 함께 매장)
범행 장소: 농수로, 농수로 둑, 논바닥, 목초지, 야산
납치 장소: 주로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외길이나 모퉁이 길, 버스정류장 부근, 야산 아래
…그래서 피해자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버스정류장 인근에서 마을로 향하는 오솔길에서 납치되었다는 것과… 사건현장에서 체모와 체액이나 지문이 발견된 적이 있으나 체모는 작은 쪼가리들이 대부분이었고 체액도 미세한 양이라 분석이 거의 불가능했고… 지문도 쪽지문이라 비교 대조하는 작업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이미 알려진 것들 외에 특별한 내용이 없는 브리핑이 끝나자 누군가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 발견된 담배꽁초는 어떤 담배였죠?
- 담배종류 말입니다. 담배마다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88이라던가, 솔이라던가.
질문한 이는 인천팀 중 4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눈매가 날카로운 형사였다.
- 기록에 그런 것 까지는…
- 그럼 필터가 있는 담배입니까? 아니면 막 궐련처럼 필터가 없는 담배입니까?
- …
- 필터가 있는 담배였을 거야.
관할형사가 대답을 못하고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과장이 껴들었다.
- 몸체가 거의 다 타서 꽁지만 남아 종류는 확실히 파악할 수가 없었을 거야. 꽁지가 남은 모양을 보면 필터가 있는 담배겠지.
- 알겠습니다. 그럼 혹시 처음 사체와 현장주변을 검시한 형사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 기록에 나와 있듯이 처음에는 관할구역 형사들이 했고, 4차 사건 이후로는 수사지도관이신 백계장님이 직접 하셨습니다.
형사들이 질의문답을 이어가는 사이 왕대는 옆에 앉은 주형사의 귓가에 바싹 대고 속삭였다.
- 저 녀석은 왜 자꾸 담배꽁초만 갖고 저러는 거야?
왕대는 주형사가 예전에 수사본부로 파견 나온 경험 때문인 것도 있지만, 간혹가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주형사는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버릇이 있었다.
- 이 지역 근처에서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다른 강간추정사건이 있었어요. 현장에서도 여성의 흰 팬티와 빈 백조 담배 갑이 발견됐지만, 신고자가 없고 뚜렷한 목격자가 없어 수사가 어려웠다는군요. 백조는 70년대 단종 된 상품인데 일명 ‘막 궐련’이라고 정하는 필터 없는 담배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초기 수사본부에 있던 관할 경찰서 백 계장이란 분도 범인이 백발의 독거노인일거라 말했다나 봐요…
- 그런 일이 있었어? 헌데 담뱃갑 하나 때문에 범인이 백발노인일 거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가 있지?
- 물론 담뱃갑이 전부는 아니죠… 다른 이유도 있는데 결정적인 것은. 8차사건 현장흙더미에서 범인의 유류물로 추정되는 새치 3가닥이 발견되고 나서부터랍니다. 그 중 분석 가능한 것은 한 가닥뿐이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사건 당일 어떤 노인이 어린 소녀를 업고 가는 것을 누군가 목격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어요. 그리고 1차, 7차, 9차 사건의 피살자가 노인이고 주로 젊은 피살자의 사체에 불필요한 난행을 한 것 때문에 범인이 성욕을 해결할 길이 없고 정신기능이 악화되기 시작하는 노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 것입니다.
- 아니 그럼… 정말로 범인이 노인일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니야.
- 주일우 너는 어떻게 생각해?
- 글쎄요. 9차 사건은 다른 사건과 달리 피살자의 손과 발이 활처럼 함께 묶여 있었고 하의 속옷만 입혀진 채 교복으로 덮어 논점 등 기존 사건과 다른 모방, 편승범죄일 가능성도 있다고는 생각해봤지만… 제가 생각하는 범인은 아닙니다.
- 무슨 소리야 증거가 있는데 방금 네가 말해 놓고는 새치3가닥!
- 그게 문제가 있습니다. 발견된 건 맞는데 현장수색 때는 발견되지 않았다가 4일 후에 발견됐답니다. 그것도 행동 추정범위 30미터 이내의 흙과 풀, 나뭇잎 등을 모두 수거하여 경찰서 강당에 쏟아놓고 분석해서 나온 거라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김 형사가 자신이 다 보고 난 사건사진들을 왕대에게 건넸다. 왕대는 건네받은 사진들을 흩어보다 검은 스타킹사진에 눈이 멈추었다. 자세히 보니 매듭지어진 스타킹에는 피해자의 머리카락들이 뒤엉켜 붙어 있었다.
- 1,2차 때는 손으로 목을 조르다가 도구를 이용했다. 근데 왜 하필 스타킹이지? 스타킹은 잘 늘어나서 목을 조르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 손의 완력으로 목을 조르는 것보다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쉬운 편이지요. 하지만 신축성이 좋은 스타킹으로 피해자를 단번에 절명시키는 것은 힘들 겁니다. 놈은 가방끈과 속옷 등을 이용해서 피해자의 목을 조르다가 마지막으로 스타킹으로 목을 두 번이나 들러 매듭을 지어놨어요. 제 생각엔 강간 하면서 피해자가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즐긴 게 분명합니다…
왕대는 예상치 못한 주형사의 대답을 듣고 굳은 표정으로 한동안 그의 이글거리는 눈을 바라봤다.
- 그래서 주일우 자넨 범인이 어떤 놈이라고 생각하나?
어느 틈엔가 그들 옆에 나타난 과장이 주 형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어느 순간부터 변 반장과 김 형사와 도경소속 간부들까지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을 주형사만 의식하지 못했다.
- 일단 정신질환자는 아닙니다.
주형사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 이 기록의 내용대로라면 범죄현장에 대한 정돈 또는 연출까지 하고 시체를 옮겨 유기하고 은닉한 것으로 보아 정신질환자의 범행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정신이상자들은 대부분 살해현장에 사체를 방치하고 범죄현장을 정리 정돈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정신 질환자들의 수법과는 반대로 서경사건은 증거물들을 남기지 않는 철저하고 고도로 지능적인 수법입니다.
- 그럼 자네도 언론에서 누군가 말한 것처럼 성도착자나 정실질환자가 아닌 이외로 증산층 이상의 뛰어난 지능을 가진 지식인이나 고학력자… 그런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건가?
도경소속으로 보이는 한 간부가 그의 말을 듣고 약간 빈정거리는듯한 말투로 물었다.
- 제가 말하는 것은 아이큐 같은 지능이 아니라 범죄지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뛰어난 범죄지능을 가졌다는 것은 곧 범인이 전과가 있거나 유사한 범행경험이 있을 가능성이 높고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고 계획한 범행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글쎄… 뛰어난 범인이 같은 지역에서 같은 수법으로 뻔히 같은 범인임을 드러내는 짓을 왜 했을까? 잘 이해를 못 하겠는데 자네가 말하는 범죄지능이 높다는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해주겠나?
- 그 이유는…
첫째, 사전에 머리털과 거웃을 정리하고 범행 시 피해자의 옷가지와 물건만을 범행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둘째, 범행 후 피살자의 옷가지를 다시 입히고 시신을 유기한 후 주변을 정리하고 매장했습니다.
소지품을 한데 모아 묻거나 물속에 던지고 농수로나 논둑 또는 야산의 비탈진면(사면)에 시신을 유기하여 빗물이나 수챗물에 유류물질이 쓰려가게끔 한 것은 범죄흔적의 훼손을 의도한 행동이 분명합니다. 한마디로 범행 후 나름의 뒤처리로 증거를 인멸하려 했고 자신의 유류품을 남기지 않은 점 등으로 보아 매우 침착하고 용의주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놈은 안개 낀 흐린 날, 비나 진눈깨비가 내린 날 밤에 주로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첫댓글 3화는 언제 올라오는건가요? 기다리고 있는 독자를 생각해주세요 ㅋㅋ
올렸습니다 ^^; 부끄럽네요...
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끄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