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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아! 내 삶속에 보람된흔적을 남겨라
백제성왕 전사장소: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관산성)부근 구진벼루 ■ 무너진 백제의 꿈, 신라의 민낯이 드러나다 ■ 등 돌린 신라, 백제의 뜻밖의 선택 ■ 백제 VS 신라, 건곤일척의 한판 승부 관산성 전투의 초기에는 백제가 우세해 각간우덕과 이찬,탐지등이 거느린 신라군을 패주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신주군주,김무력의 신라 원군이 당도하자 양국 사이에 대접전이 벌어졌다. 이때 성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직접 보기 50여 기를 거느리고 야간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 복병의 기습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성왕은 전선에 나가 있는 왕자 여창을 위문하러 가는 길에 신라군에게 길을 차단당해 포로가 되어 죽임을 당했고, 그의 머리는 신라북청계하에 매장되었다고 한다.성왕의 전사로 관산성에서의 양국 대결은 신라의 대승리로 끝났다. 이때 백제는 왕을 비롯해 4명의좌평이 전사하고, 또 3만 명에 가까운 사졸들이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관산성 전투는 양국이 국가의 운명을 걸었던 싸움이었다. 따라서 승리한 신라는 이미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 유역에 대한 기득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반면, 백제는 막대한 전쟁 손실과 그여파로 인해 동성왕이후 성왕대 일시 강화되었던 왕권이 다시 동요되기 시작하였다. 천여년전 옥천-탄현(대전)가는길 현 옥천 세천 터널은 천혜 절벽으로 갈수 없었으며 대전 식장산 (식량기지 사령부) 주둔중인 성왕은 금산 추부-옥천 군서-군북 고리산 ( 백제 사령관 태자 여창27.000명 주둔지역) 여창 병문안 가기위하여 관산성 협곡부근 구진벼루를 50여명 군사를 대리고 가다가 신라군 매복에 걸려 전원 몰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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