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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강해노트 (28-1)
5리, 10리, 구하는 자, 꾸는 자
원저자: 김성수 목사 / 편집자: 카이로스
(마 5:41~42)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오늘 본문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철저한 희생과 인내를 강요하는 듯한 말씀으로 읽힐 수 있다. 억지로 오리(5里)를 가게 하거든 기쁘게 십리(10리)를 함께 가주고, 구하는 자에게 구하는 만큼 다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는 거절하지 말고 꾸어 주라는 말처럼 들린다.
억지로 가게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가기가 싫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을 잘 다스리면 그 ‘억지로’가 ‘자발적으로 기쁘게’로 바뀔 수 있을까? 나의 감정을 나의 의지에 복종시킬 수 있을까? / 아무든지 나에게 무언가를 구하면 거절하지 말고 다 주어버리고, 아무든지 꿔달라고 하면 사양치 않고 다 꿔주는 것이 진정한 선일까? 혹시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상대방을 타락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 본문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이 내용 역시 겉옷과 속옷의 이야기처럼 43절에 이웃사랑이라는 그 ‘에스카톨로스 코드란테스’를 가능케 하기 위해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본문에서 ‘5리’라고 번역해 놓은 그 단어를 원문으로 보면, ‘밀리온 에이스’라고 되어 있다. ‘밀리온’은 ‘천’이고, ‘에이스’는 하나라는 뜻이다. 아마 천 걸음을 환산해서 ‘5리(2Km)’라고 번역한 것 같다. (註: 이것은 한 걸음이 2미터라는 얘기인데 적절한 계산법이 아닌 것 같다.) 아니면 당시 로마에서는 ‘밀리온’을 거리의 단위(약 1.5Km)로 쓰기도 했는데, 그것을 ‘리(里)’ 단위로 바꾸어서 ‘오리(5리)’로 번역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로마 강점기에는 로마 사람의 요구에 따라 식민지 백성이 의무적으로 2Km 정도를 부역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한 법을 떠올려서 5리(2Km)라고 번역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2Km를 함께 가자는 로마 사람에게 4Km라도 함께 가 주어 아량을 베풀라는 취지로 오늘 본문을 번역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과 환경을 사용해서 복음을(진리를) 설명하신다.
헬라어 성경의 ‘십리’에 해당하는 단어가 ‘듀오’이다. ‘짝’, ‘둘, 두 번째’라는 뜻이다. 앞의 ‘밀리온 에이스’를 오리로 번역했으니 거기에 둘울 곱해서 ‘십리’라고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 41절의 원문: καὶ ὅστις σε ἀγγαρεύσει μίλιον ἕν, ὕπαγε μετ’ αὐτοῦ δύο. / 직역: ‘누군가가 하나(첫째)의 천(1000) 안에서 강제로(억지로) 하게 하거든 그 천의 짝(두 번째 천)으로 데리고 가라.’ -> 의미가 사뭇 다르다.
여기서 ‘억지로’라고 번역된 ‘앙가류오’는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히브리어에는 ‘억지로’라는 단어가 없다.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억지로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기쁘게 그 일을 한 것 같다. 그래서 ‘억지로’라는 말 자체가 없다. 그들이 그렇게 자발적으로, 기쁘게 율법을 지켜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것 자체가 죄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에는 있지도 않은 ‘억지로’라는 말을 주님께서 굳이 끌어다 쓰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대표적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종들이다. 종은 자기의 일이 없다. 모두 주인의 일이다. 그래서 종들이 하는 일을 ‘억지로 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주님께서 유대인들을 보고 ’죄의 종’이라고 부르신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요 8:31-36)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진리로, 진리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성전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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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절: 너희들이 하는 일이 죄이다. 지금 우리는 자발적으로 훌륭한 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너희들 지금 죄짓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죄짓고 있는 너희들은 죄의 종이다.’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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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서 열심히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내 말에 거하라’ 말씀하시고, 그들을 가리켜 ‘죄의 종’이라 부르시고,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진리밖에 없다고 하신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때까지 성전 안에서 하고 있던 모든 율법적 행위는 억지로 행했던 것이고 그게 바로 종살이라는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억지로’의 개념은 하기 싫은 것을 강제로 하게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것의 원래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의 두 마음(생래적으로, 운명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선악 구조 속의 두 마음)으로 ‘인식한(옵타노마이, 껍데기로 인식한)’ 수준으로 하는 것을 ‘억지로’라고 하고, 그렇게 억지로 하는 자들을 ‘종’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우리가 누구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다, 너희가 억지로 일하는 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억지로 일하게 하는 율법의 성전이 첫 번째 천(千)이고, 그 첫 번째 천이 내용으로 담고 있는 진리가 짝(듀오)으로서 두 번째 천이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바로 그러한 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떤 이가 너에게 율법의 천 아래에서 억지로 하게 하거든 그를 그 짝인 진리로, 두 번째 천으로 인도하라.’는 말인데, 성경은 그것을 ‘오리, 십리’라고 번역한 것이다.
먼저 성경이 말하는 ‘짝’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이어서 본문의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하려고 한다.
(사 34:16) 16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도 전부 짝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이 서로 짝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성경 말씀 전체가 다 진의를 품고 있다는 의미도 있다. 성경은 표피적 의미 안에 내용을 담고 있는 (그래서 짝을 이루고 있는) 책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성령이 모으셨기 때문에 단어 하나, 책 하나 거기에 우발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없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이 서로 짝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성경 신학이 가능해진다.
(註: 아래의 ‘베레시트’ 설명은 김성수 목사의 설교 여러 군데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내용이지만 항상 혼란스럽다. 여태까지는 그 내용이 어려워서 그러려니 하고 편집자도 제대로 이해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런데 편집자만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김목사의 설교를 수십 번 듣고 또 듣는 성도들이 많은 것도 이제 생각해 보니 김목사의 강해 설교가 참신한 내용으로 충만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어려운 내용이 논리적으로 잘 정리되지 못하여 그 진의가 명쾌하게 전달되지 못하는 부분에도 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이번 장의 편집에서는 편집자도 작심하고 제대로 내용을 정리해서 ‘베레시트’ 설명을 깔끔하게 정리해보기로 하였다.)
창세기 1장 1절은 ‘베레시트(בְּרֵאשִׁית)’ 즉, ‘태초에(In the beginning)’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레시트’ 앞에 전치사 ‘베(בְּ)’가 붙어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시면서 첫 단어로 주신 ‘베레시트’는 첫 글자 ‘알레프’가 아니라, 두 번째 글자인 ‘베트(בְּ)’로 시작한다. 히브리어의 첫 번째 글자인 ‘알레프(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알레프는 또한 [하나, 1,000, 소]라는 뜻도 있다. 하나가 천이고, 천이 소이며, 그 소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문자의 세계에 갇힐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경의 첫 단어를 (하나님을 뜻하는 ‘알레프’라는 첫 글자를 감추고) 히브리어의 두 번째 글자인 ‘베트(בְּ, 성전)’로 시작해서(레시, רֵאשִׁ) ‘타브(ת, 완료)’로 끝내신다. 그래서 그 단어는 ‘태초에’라는 뜻이지만 ‘창조’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설명하려면 보이는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보이는 성전(베, בְּ)으로 하나님 설명을 시작하신다. 하나님은 ‘호 코스모스’의 세상으로 즉, 피조물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계시하기 시작하시는 것이다.
성전(베, בְּ,)은 ‘호 코스모스’(아래의 것. 성전, 옛 성전, 성경, 율법, 천지, 아래의 것들)이고, ‘로쉬(머리)’는 ‘시작하여’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그 성전을 머리라고도 하시고, 예수님도 자신을 머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머리 둘 곳이 없다.’ 말씀하신 것이다.
‘태초에’라는 뜻의 ‘베레시트(בְּרֵאשִׁית)’를 파자하면 ‘성전(베, בְּ,)에서 시작하여(레시, רֵאשִׁ) 완성(타브, ת)하시는 하나님’, (‘성전으로 시작해서 진리로 완성해 내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베레시트’ 다음에 ‘바라(בָּרָא)’라는 단어가 나온다. 한글로 ‘창조하다’라고 번역하지만 ‘바라(בָּרָא)’도 파자해 보면 ‘하나님이 시작하신다.’라는 뜻이다. / ‘바라’ 다음에 이어지는 단어 ‘엘로힘(אֱלֹהִים)’은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를 시작하시는지를 설명해 준다. ‘엘로힘’을 파자하면 ‘하나님께서 말로 물(진리)을 주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말로 진리를 손을 펴서 주다.’)
하나님은 너무 크신 분이라 소리도 없고 모양도 없다. 엄밀히 말해서 피조 세계가 감지할 수 없는 소리와 모양을 가지신 분이라 해야 옳다. 그래서 그분이 피조물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피조물이 감지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소리와 모양이 필요하다. 그렇게 피조물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소리와 모양으로 주신 하나님이 ‘엘로힘’이다. 너무 커서 ‘없음(무)’으로 밖에 감지가 되지 않는 그 진짜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에서 설명하시기 위해 ‘엘로힘’으로 하나님을 담아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다.
하늘이라는 단어는 ‘샤마임(שָׁמַיִם, = ‘쉠’ + ‘마임’, 거기에 물이 있다)’이고 땅(에레쯔, אָרֶץ)은 ‘하나님께서 잡기 시작하신다’라는 뜻이다. (거기에 물이 있는데 땅에는 물이 없다. 땅이 그 물을 받아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그 물이 흘러 내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물(진리)을 비처럼 흘려(레마, 흐르다) 물이 없는 땅에 물을 대심으로 하늘과 땅을 하나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 ‘호 코스모스’의 그물에 걸려 잡히는 자가 진리의 물을 마시는 자가 되어 하늘과 연합된다.
그래서 [아래의 것들, 땅]으로 하늘을 설명하여 ‘아, 이게 그거야!’ 하고 깨달아지면 그 사람을 ‘하늘’이라고 한다. 그래서 진리를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경이 ‘하늘들’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여러분을 하나님 나라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물, 진리를 빛처럼 흘려서 물이 없는 땅에 물을 대심으로(‘물댄 동산’) 그 하늘과 땅을 하나로 만드신다. 그런데 천•지에서 그 하늘들은 복수가 아니라 쌍수이다. 히브리어의 쌍수는 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하늘은 어떤 것의 짝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땅으로 (그 짝이 되는) 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바로 그 땅이 갖고 있는 진짜 내용이 하늘이라는 의미에서 ‘샤마임’을 쌍수로 쓰고 있다.
하나님이 물을 흘려(비를 진리로 흘려, 물이 없는 땅에 물을 대심으로) 그 땅과 하늘을 하나로 만드는 것, 진리로 하나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 ‘호 코스모스’의 땅에서, (하나님이 던지시는) 그물에 잡히는 이가 진리의 물을 마시는 자가 되어서 하늘과(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이다. 그러한 현실을 신명기가 이렇게 묘사한다.
(신 32:1-2) 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2 나의 교훈은(=하나님의 말씀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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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 말 = 물 /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 ‘내가 말한다. 땅아, 물을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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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진리)를 전부 비로 묘사하고 있다. 율법에서도 사람들이 정결 예식을 행할 때 항상 흐르는 물에 씻으라고 한다. / 이스라엘도 ‘흐르는 물, 요단, 요르단’을 건너간다. 다 진리로 정결하게 되는 것을 모형 한다.
땅은 진리의 말씀을 비로 받아서 물 댄 동산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거기가 하늘이 된다.
(사 58:11) 11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땅)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끊임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바라크’(בָּרַךְ, 복)라고 한다. (생명=복) / 그래서 ‘내가 너에게 계속 물을 대겠다.’ 하신다. 그러면 네가 산다.
(렘 31:11-12) 11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이제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12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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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새 포도주는 ‘물 포도주’이다. ->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나오는 물 포도주. / 물로 만든 포도주가 아니다. 그냥 ‘물 포도주’라는 명사이다. 왜 ‘물 포도주’인가? 그냥 포도주는 누룩이 들어가는 섞인 술이지만, 물 포도주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정결하게 하는 포도주’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피는 반드시 물이 되어야 한다. 새 포도주는 물 포도주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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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땅에서 진리의 물을 받아(=> 윗물을 받아, [샤마임, 거기(하늘)에 물이 있다]의 그 물을 받아) 하늘이 된 하나님 백성들의 모습이다. 요한계시록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도 보좌에서 생명수의 강이 흘러넘친다. 그리고 열두 실과를 맺는다. 그 열두 실과가 생명나무 열매이다. 그것이 어린양의 신부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을 받은 성도들을 ‘하늘들’이라고 한다. (열둘이 아들이니까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 물을 가진 자. 거기에 물이 있다(샤마임). ‘성령을 받으면 네 안에서, 네 배에서 생수가 흘러넘친다.’라고 했다. 그게 ‘거기에 물이 있다’ 즉, 하늘이다.)
[땅, 성전, 호 코스모스의 세상]은 전부 하늘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을 보이는 하늘로 제시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옛 성전을 ‘호 우라노스, 하늘’이라고 부른다. 성전은 하늘을 설명하는 것이지, 성전 그 자체를 섬김의 대상으로 놓으면 안 된다. / 율법도 마찬가지이다. 율법은 하늘,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이지, 그 율법을 지키는 법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이 구약의 율법을 죄라고 자꾸 지적하는 것이다.
아래의 것으로 위의 하늘을 깨닫지 못하고, 물을 받지 못하고, 아래에 갇혀 버리면 그것을 [땅, 아래, 어두움]이라 하고, 아래의 것으로 위의 것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빛, 위, 하늘]이라고 한다. 결국 둘은 같은 것이다. 그것을‘짝’이라고 한다.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그게 첫째 날이다. 그전에는 그냥 혼돈과 공허, 흑암이었다.) 그 빛이라는 단어 ‘오르(אור)’는 ‘하나님이 시작하신다’라는 뜻이다. 무엇을 시작하신다는 말인가? 이 땅의 것들, 어두움들을 사용하여 그 어두움들이 내용으로 담고 있는 진리를 나타내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때는 흑암밖에 없었으니까 그 흑암이 뭔지를 빛이, ‘오르,’ 하나님이 밝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게 첫째 날의 창조이다. 그래서 첫째 날에 ‘빛’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 ‘빛’은 어두움의 정체를 드러내고 나타내는 것이다. 그 실체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아래의 것들 즉, 피조물은 어두움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빛을 못 알아본다. 그래서 그 어두움이 뭔가를 가르쳐서, 나타내고 드러내어서, 그게 하늘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빛’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도 진짜 그 빛은 아니다. 계시록에 가면 그 빛이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래서 해도 필요 없다. / ‘오르 =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따라서 옛 성전, 율법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빛’이라고 하고, 그냥 옛 성전의 표피적 개념에 갇혀 버리면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한다. 그 빛과 어두움은 그래서 ‘짝’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말씀, 더 나아가서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그것이 아래의 것으로, 말로 준 것이다. ‘우리의 것, 우리의 말’로 주어진 것이다. 그게 ‘로고스’이다.) 그 진의를 깨닫지 못하면 그 성경을 가지고 어두움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옛 성전을 주시고 이 성전으로 내가 하늘을 설명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구약이 그 성전에 갇혀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죄, 사망이라고 하셨다. 마찬가지로 성경이 하늘, 하늘의 성전, 하나님을 그리고 있는데, 그냥 문자에 갇혀 버리면 그게 어두움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 안에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그것 자체가 어두움이다. 성경 그 자체가 걸림돌이다. 그래서 주님이 ‘내가 말하지 않았으면 너희들이 죄가 없었을 텐데, 내가 말했기 때문에 너희에게 죄가 있다.’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말에 걸린다는 말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이 ‘진리를 내 마음에, 심비에 새겨주신다.’ 그것이 우리가 마음으로 진리를 갖는 것이다. 그 진리를 마음에 가지면 하나님과 한마음이 되어서 모든 것을 진리로 보게 된다. 그런데 내가 가진 것은 진리인데 그게 밖으로 나오면 또 이 아래의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된다. 내가 갖고 있는 진리를 또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또 아래의 것이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다. / 그런데 이 말을 통하여 어떤 이가 진리를 듣더니 그 마음으로 진리를 가지게 된다. 이것을 이심전심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것은 누가 한 것인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다 보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떻게 이 마음이 그리로 가서 그 마음이 되느냐고.
(신 30:19)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 [솨마임 에레츠 = 천지]를 가지고)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계시한다. 설명한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택하라!)
하나님이 천지를 사용하여 당신의 말씀을 증거하신다. 그 말이 어떤 이에게는 생명과 복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사망과 화가 된다. 진리로 보면 복과 생명이요, 껍데기로 보면 사망과 화이다.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의 관계가 이와 같다. / 하나님의 말씀을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나무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에 좋은 나무로 보면 죽음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로 보면 생명이다. 다시 말해 같은 나무를 두고 ‘보고 행하면’ 죽음이요 ‘먹고 간직하면’ 생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