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상숙 - 못밥이야기 -
논배미에 덩치 큰 이앙기가 오락가락하더니, 여남은 사람이 종일 심어도 버거울 천오백여 평의 모내기를 두어 시간에 해결했다.
새참으로 통닭과 자장면이 논두렁까지 달려오고 입가심으로 커피까지 주문해 마시는 광경을 신기해하던 이웃들이 보이 질 않는다. 새참을 담아 나르던 광주리와 어른들이 맏손자처럼 애지중지 여기시던 농사용 도구까지 헛간 후미진 구석으로 좌천이다. 쟁기와 써레가 사라진 논두렁에 못 줄잡이의 흥겨운 가락마저 수렁논으로 가라앉은 지 오래다.
논농사에는 모내기가 제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집집마다 못자리와 모판을 만들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들였다. 지금은 기계로 모든 작업이 이루어지고, 한 술 더해서 모판이 판매와 동시에 배달도 가능하다니, 못자리 걱정과 모판 걱정은 그만 내려놓아도 좋을 게다. 한데, 뭔 이유인지 여자들 일거리 줄어든 만큼 사람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 아이들 웃음소리와 갓난아기 울음소리조차 하늘로 치솟은 건지 온 동네가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 일부러 동네 한 바퀴 돌아다녀 봐도 어른과 아이를 만나기가 그리 쉽지 않으니 도대체 까닭을 모르겠다.
밭농사와 논농사 모두 사람의 손을 빌려야 만 가능하던 시절에는 소가 큰 재산이고, 농사일도, 소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전답이 턱없이 부족한 소농은 송아지 한 마리 키우는 것조차 그림의 떡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남의 소를 빌려다가 논이나 밭을 갈아야 하는데, 쟁기질과 써레질도 나름 기술이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낯가림하는 소에게는 함부로 다가설 수도 없는 노릇이니, 소 주인에게 품삯을 곱으로 챙겨주며 논갈이와 밭갈이를 부탁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혼 후, 시댁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다. 두 집에서 소 한 마리를 한 달 간격으로 번갈아 가며 키우는 게 아닌가. 우리 남편 가라사대 살림살이 넉넉하지 못한 이웃끼리 송아지를 사서 어우리로 기르는 것이라 한다. 이 금쪽같은 송아지가 자기네 집으로 오는 날이면 가족 모두가 함박웃음이다. 가마솥 가득 쇠죽을 쑤어 놓고 외양간이 보송하도록 볏짚도 깔아 놓고, 앞마당에 비질까지 하면서 훌쩍 자란 중송아지가 사립문으로 들어서길 기다리는 모습들이 참 순박해 보였다. 이처럼 살가운 이웃들이 부잣집에서 새로 들여놓은 농기계가 뿜어내는 굉음에 기가 죽어 아주 멀리 달아난 건 아닌가 싶다.
친정 부모님께서 농사지으실 적에는 동네 여자들이 모내기하는 집으로 총출동했다. 국 광주리와 밥 광주리 반찬 광주리까지 따로따로 이고서 일터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땐, 소문난 말괄량이라도 엄청나게 조신해진다. 혹여, 엉성한 광주리 바닥을 통과한 반찬 국물이 등줄기로 흘러내려 단벌 적삼을 다 벼려놓을까 싶어 조심에 조심을 더하는 것이다. 우리가 농사를 지으면서 곁두리라는 새로운 단어를 알았다. 궁색한 살림에 새참과 곁두리까지 준비하느라 이 동네 어머니들 먹을거리 준비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아이들 삼 남매가 초등학교 다닐 때이다. 부모님의 부족한 일손을 돕기 위해서 서울 수유리에서 내려온 큰 며느리에게 우리 시어머니 새참 광주리 머리에 얹어주시며 들녘으로 나아가라 하셨다. 광주리 머리에 이는 것도 요령이 필요할 터, 새참 광주리와 똬리가 정수리에 힘을 가할 때마다 머리가 빠개질 듯 아프고, 다리가 휘청거려서 논배미에 처박혀 죽는 줄 알았다. 새참을 자동차로 실어 나르면서 자라목처럼 움츠러드는 목의 통증과 아킬레스건의 아픔도 사라졌다. 하지만, 새참 광주리에 남겨온 반찬과 무쇠 밥솥에 남아있는 쌀밥으로 새참을 나눔 하던 달가운 풍습마저 사라져서 씁쓸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모내기하는 날이다. 새참을 싣고 달리는 자동차 속에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것이다. 새참을 먹을 사람이라야 이앙기 운전자와 모판을 나르는 우리 남편, 그리고 일손 도와주는 시동생까지 고작 셋뿐이니 왜 아니겠는가. 이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자동차에 싣고 집으로 오는데 착한 생각이 떠올랐다. 낡은 초가집에 혼자 사시는 어르신과 함께 먹은 못밥이 꿀맛이다. 나중에 드시라고 남은 반찬을 다 내어 드리고 집으로 오는 내내 삼복더위에 등물 한 것처럼 등줄기가 여간 시원한 게 아니었다. 겨우 밥 한 그릇의 나눔으로 어수선한 마음이 이렇게 맑아질 수 있다니, 큰 기쁨으로 다가온 못밥 한 그릇의 감사가 언제 다시 찾아오려나 싶었다.
지금은 논농사를 남에게 부탁해 놓은 상태여서 이 논배미 저 논배미로 물꼬 보러 다닐 걱정도 없다. 따라서 논두렁을 거닐 때마다 바짓가랑이에 이슬 털어내던 추억은 어릴 적 그림 솜씨로 詩 속에 그려 넣고 싶다. 가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으니, 아마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조짐 일 게다. 서툰 농사일로 몸 고생 마음고생을 그리하고도 아직도 철이 덜 들었나, 이런 내가 나도 딱하다. 수시로 변하는 게 세상일이라 하니, 부모님의 손때가 잔뜩 묻어있는 농사용 도구들과 못밥 나눠 먹던 풍습까지 농업 박물관에 보관이 가능하다면 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