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의
〔채모(蔡謨), 이덕손(李德孫)의 기사 첨부〕
권의는 충렬왕 때 사람이다. 성질이 사악하며 간사하였고 매양 내료(內僚)에 의뢰하여 각 처 지방 장관의 자리를 구하여 가지고 혹독한 형벌과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았음으로써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였다.
권의가 승지 염승익과 친근해서 염승익의 추천으로 경상도 안렴사(按廉使)로 된 후 염승익의 세력에 의지하여 꺼리는 바가 없었다. 권의가 진주 사람 정연(鄭延)의 사랑하는 기녀(妓女)를 강탈하였던바 정연은 용기와 힘이 있는 사람이라 달려가는 말 뒤를 따라가서 권의의 침소까지 바로 들어가 그 기녀를 업고 달아났다. 권의가 정연의 모친을 잡아 가두었으므로 정연이 자수하여 옥으로 갔던바 권의는 그를 죽였다.
원나라 사신 야속달(也速達)이 일본(日本) 정벌 문제로 경상도에 갔다가 돌아와서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식량 난으로 남녘 백성들은 모두 얼굴에 굶주리는 기색이 보인다. 귀국에서는 별감(別監)을 많이 파견하여 횡포하게 수탈하며 형벌을 남용함으로써 과중한 속죄금(贖罪金)까지 받는 등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있다. 이리하여 백성이 많이 죽었는데 백성은 천자(天子)의 백성이다.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여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이 이것을 왕에게 전하니 왕은 말하기를
“정역 별감(程驛別監) 이영주(李英柱)가 일찍이 말하기를 ‘조정(朝廷)에서 고문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또 재물로써 속죄(贖罪)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누구도 그 명령에 복종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하더니 야속달의 말이 이런 자를 가리키는 것일까?”라고 하였다. 이때 김방경이 말하기를 “안렴사 권의가 횡포하게 혹독한 형벌을 쓰고 있으니 죄를 주어서 백성의 원한을 풀어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내료(內僚) 유복화(劉福和)는 전부터 권의와 의형제(義兄弟)를 맺고 있었으므로 왕에게 “권의는 교체할 기한이 이미 가까웠으니 아직 그대로 두라!”라는 명령을 내릴 것을 청하였다. 염승익은 마치 권의와 교제가 없는 듯이 하면서 “권의가 이와 같이 횡포하다는데 누가 추천하여 안렴사가 되었는가?”라고 말하니 재추(宰樞)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후에 대신들이 또 다시 야속달의 말을 왕에게 고하여서 왕은 감찰 시사(監察侍史) 민훤(閔萱)을 권의로, 낭장(郞將) 김의광(金義光)을 이영주로 교체시켰으며 각 도(道) 안렴사에게 가혹한 형벌을 쓰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그 후 권의가 정랑(正郞) 벼슬을 했을 때 정연을 살해한 사실이 탄로되어 첨의부(僉義府)에서 탄핵하여 권의를 섬으로 귀양 보내고 진주 부사(眞州副使) 서녕(徐寧)을 파면시켰다.
충렬왕 13년에 권의는 전라도 왕지 별감(王旨別監)으로 되어 그 공진(供進) 사업을 잘 하였다는 이유로 판도총랑(版圖摠郞)으로 승진되고 또 붉은 가죽띠 1개, 은 15근, 쌀 15섬을 상 받았다.
그때 충선왕이 세자(世子)로서 원나라로 가는데 권의가 은 40근과 호피(虎皮) 20장을 바쳐서 여비로 쓰게 하였던바 충선왕은 “이 물건은 모두 다 백성들에게서 약탈한 것으로 원한에 젖은 재물인즉 나에게는 필요없다”하면서 그 물건을 임자에게 돌려보냈다.
권의는 안렴사 이희(李熙)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희가 공진(供進) 사업에 태만하다는 이유로 왕에게 참소하여 파면시켰다.
채모(蔡謨)라는 자는 평강(平康) 사람으로 여러 가지 벼슬을 거쳐 시어사(侍御史)로 되었다.
충렬왕이 일본 정벌 문제로 인하여 합포(合浦)에 갔다. 당시 경상도는 모여드는 군대로 인하여 식량이 결핍되고 백성들이 편히 살지 못하였다. 그런데 채모는 왕지 별감(王旨別監)이 되어 백성들에게서 가렴주구하여 왕을 호종하는 권세 있는 대관들을 먹이고 또 선물 주었다. 그리고 내수(內竪) 양선대(梁善大)에게 기름과 청밀을 선물로 보냈더니 양선대는 그것을 받지 않고 가져온 사람을 잡아서 조리돌렸다.
그 후 채모는 좌승지(左承旨)로부터 지신사(知申事)로 승진되고 부 지밀직(副知密直) 첨의 참리(僉議參理)를 역임하였으며 충렬왕 28년에 첨의 시랑 찬성사로서 치사(致仕)하였다.
채모는 일찍이 경상도 권농사(勸農使)로 있을 때 세마포(細麻布)를 많이 징수하여 왕에게 바쳤으며 또 왕 좌우의 권세 있는 대관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들의 환심을 샀다. 그런데 이덕손(李德孫)이 채모의 후임으로 가서 그 수량을 약간 증가하였으며 그 후 또 설인영(薛仁永)이 한 필의 척수(尺數)를 2배로 정하고 베를 극히 가는 것으로 요구하였으므로 백성의 고통이 심하였다. 왕이 이런 사정을 듣고 세마포 공납을 금지하였다.
이덕손(李德孫)은 복야(僕射) 이순목(淳牧)의 아들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잡단(監察雜端)을 지냈으며 경상, 전라, 충청 3도 안렴사로 위엄을 피웠으므로 아전이나 백성들이 모두 무서워하였다.
충렬왕 때에 그가 동경 유수(東京留守)로 있었는데 왕이 일본 정벌 문제로 하여 동경을 통과하였을 때 이덕손이 왕에 대한 공급을 잘 했다는 이유로 부윤으로 진급되었다. 그 후에 경상도 왕지 사용 별감(王旨使用別監)으로 되어서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왕의 총애를 사서 위위윤(衛尉尹)으로 뛰어올랐다.
근시 별감(近侍別監) 김용검(金龍劒)이 역관 벽에다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경상도 백성의 붉은 피 짜서
덕손의 삼품 관복 물들여 냈네!
(慶尙州道殘民血
染出德孫三品職)
이덕손이 이것을 왕에게 고소하여 김용검을 귀양 보냈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지 도첨 의사사(知都僉議司事)로 되었을 때에 나이 61세였는데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원하였던바 왕은 찬성사(贊成事) 직함을 주어 치사케 하였다.
16년에 죽었으며 시호(諡號)는 장숙(莊淑)이다.
아들 이설은 벼슬이 찬성사까지 이르렀다.
그 전에 이설의 매부 송린(宋璘)이 왕유소(王惟紹) 일당에 가담하여 왕의 부자(父子)를 이간시켰으므로 이설은 송린에게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원컨대 그대는 극력 노력하여 왕의 부자의 사이를 전과 같이 할 것이며 옳지 못한 말로써 남을 그르게 인도함으로써 자기의 전정을 그르치지 말라!”라고 하였다. 송린이 처단된 후 충선왕이 그 편지를 얻어 보고 이설의 충직함을 가상히 여기고 밀직부사(密直副使) 벼슬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