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 3일 ·
제2 르네상스 시대가 돌아오게 하소서
[박도의 치악산 일기] 제202회 - 산책길 단상
평소보다 저녁 밥을 일찌감치 먹은 뒤, 오랜만에 산책을 나서는데 웬일인지 허전했다. 뭐라도 손에 짚고 싶었다 누군가 말하기를 사람의 일생을 ‘4-2-3’으로 풀이했다. 이는 어려서는 두 손 두 발로 기어 다니다가, 곧 두 발 만으로 직립 보행을 한 다음, 늙어서는 두 발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 말을 복기해 보니 꼭 들어맞는 명언이다.
나는 좀 건방진 사람이었다. 지난해까지는 누군가 “할아버지” 하고 부르면, 그 말이 듣기 싫었다. 교단에서 물러난 뒤 강원도로 귀촌 하자 마을 내 또래 노인들이 경로당에 나오라고 권유해도 입때까지 단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1945년 해방둥이인 나는 올해 80세로 이제는 꼼짝 없이 노령기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나도 이제는 별 수 없이 노인이라고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 에스카레이트(Escarate)를 탈 때면 그 곁에 으레 붙어 있는 말 - '옆의 벨트를 꼭 잡으라'는 그 경고 문을 나는 줄곧 외면한 채 빳빳하게 서서 오르곤 했다.
그러다가 올 봄 원주 역 플랫폼 에스카레이트를 빳빳이 선 채 오르다가 뒤로 넘어지는 불상사를 당할 뻔 했다. 그때 내 뒤를 따라 오르던 어떤 분이 뒤로 넘어지는 나를 안아줘서 다행히 대형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는 반드시 안전 벨트를 꼭 잡고 오르내리며 매사에 이전보다 몹시 조심하고 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속담이 어쩌면 그렇게도 맞는 말인지? 내 오만한 언행이 팔순에 든 이후로는 겸손해 지고 있다.
나는 고교 시절 3년 간 신문 배달을 했다. 그때 신문은 조 석간 제로 매일 아침저녁으로 두세 시간 이상 뛰어다녔다. 대학 3, 4학년 때는 학훈단(ROTC) 후보생으로, 군사 교육이 있는 날은 으레 대운동장에서 구보를 했다. 졸업 즉시 육군 소위로 임관한 후, 광주 보병학교 시절은 ‘3보 이상 구보’라는 구호 아래,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땅개처럼 산야를 누볐다.
보병학교 기초 훈련 수료 후 전방 보병 제26 사단에 배치됐다. 그날부터는 초록색 견장을 단 소총 소대장으로 전역 때까지 밤낮 뜀박질 생활로 24개월 군 복무를 오지게 마쳤다.
전역 후 교사, 시민 기자 및 작가 생활로 유별나게, 국내 뿐 아니라 세계 곳곳을 누볐다. 중국 동북지방의 청산리와 봉오동 전적지, 뤼순 안중근 의사 감방, 백두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미국 문서기록관리청(NARA) 등을 전천후로 누비며 자료를 찾고 역사 현장을 취재했다. 그리하여 2천 여 꼭지에 이르는 기사와 40 여 권의 책도 펴냈다.
젊은 날에는 하룻밤에 단편 소설 한 편을 쓰는 왕성한 필력을 보였고, 50대까지도 고3 졸업반 담임을 하면서 일과 후에는 장편 소설을 썼다. 그때는 밤을 지새우며 쓰고 싶어도 다음 날 수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한밤중에 만년필 뚜껑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하루 24시간 내도록 널널한 자유 시간이지만, 젊은 날처럼 도무지 글이 쓰이지 않는다.
거기엔 애써 글을 써도 요즘은 책을 내기도 어렵고, 참 힘 들게 책을 펴내도 읽어주는 독자 층이 엷어진 탓도 있다. 어느 유명 가수(패티 김)는 객석에 청중이 없으면 노래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아마도 작가도 그런가 보다.
한 후배 작가가 여러 달 고생 고생 끝에 장편 소설을 탈고했다. 그는 아주 어렵게 책을 펴냈다. 하지만 판매 부진으로 인세 한 푼 받지 못하자 그만 우울증으로 오래 앓았다. 그가 끝내 그 우울증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타계했다. 그의 비애가 남의 얘기가 아닌, 요즘 문인들의 한 단면으로 읽혀졌다.
얼마 전, 한 후배 작가는 절필을 선언하고, 카페의 바리스터가 됐다고 개업 안내장을 보내왔다. 또 다른 한 후배 문인은 노가다 자리도 마땅치 않아 이따금 편의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단다.
엊그제 한 제자가 내 묵은 글을 보고 자기가 선뜻 출판해 주겠다고 나셨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고맙네. 근데 인세는 내 책을 출판 후 다 판매한 다음, 이익이 나거든 그때 챙겨 주시게.”
“선생님! 고맙습니다.”
오늘 저녁, 치악산 밑 행구 수변공원을 모처럼 산책하면서 다짐한 결심이다. 세 끼 밥 먹을 거리가 있는 한, 후배나 제자들 앞에서 궁상을 떨지 말고 살아야겠다고.
오랜만에 서울에 가서 시내 버스를 타도, 지하철을 타도, 책 읽는 승객을 도무지 찾아보기 어렵다. 어쩌다가 이처럼 책을 읽지 않는 세상이 도래했는지?
나는 다행히 은퇴 후 입에 풀칠할 만큼 다달이 연금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단군 이래 최대 출판 불황이라는 세태 속에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후배 작가들이나 출판인들이 시대를 잘못 만난 것 같아 무척 가엽게 여겨진다. 오늘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하늘을 향해 기도 드렸다.
“ 제2 르네상스, 문예 부흥 시대가 돌아오게 하소서.” (2024. 9. 11.)
* 사진 설명 ;
위 - 보병 제 26 사단 73 연대 소총 소대장 시절, 파주 심학산 밑 산남리 부대 연병장에서.
아래 왼편 - 시민 기자 취재 중, 서해 바다 선상에서 Ⓒ 박철 목사 님 촬영.
아래 오른 편 - 일본 기타도호쿠(북동북) 지방 눈 취재 길에 아오모리 현 오이라세 계곡에서 어린 소녀를 안다. 그 소녀의 어머니가 뒤에서 흐뭇하게 지켜 보고 있다.
장원호
부끄럽습니다. 생각이 얕고 여리고 가벼워지기 쉬운 세상에서 중심을 잡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자 책을 가까이 하는데 진력하겠습니다. 경종을 울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젊으신 날의 기상과 기백이 저에게도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장원호드림
박도
장원호 원호 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네들이 있기에 나는 용감하게 살아간답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고 여러 제자들 앞에 또 다시 맹세합니다. 아래 사진 ; 이대부고 제자들과 함께 모의 올림픽 행사를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