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146)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6장 진소양왕의 무력 정책 (10)
제(齊)나라가 전단(田單)의 활약으로 악의를 축출하고 빼앗긴 땅을 모두 수복한 후의 일이었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제민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제(齊)나라의 군주는 세자 법장인 제양왕이었다.
제양왕(齊襄王)은 빠른 속도로 제나라를 재건해 나갔다.
연(燕)나라와 연합하여 제나라를 쳤던 주변국들은 제(齊)나라의 빠른 회복세에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언제 보복을 당할지 몰라 앞다투어 사절단을 보내 제양왕(齊襄王)과 친선을 맺으려 했다.
이로 인해 제나라는 수년이 지나지 않아 예전의 국력을 회복했다.
위(魏)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무렵 위나라는 위안리왕(魏安釐王)이 왕위에 올라 있었다.
위안리왕은 중신들과 의논한 끝에 선군인 위소왕 때의 일을 사죄하기 위해 제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사절 책임자로는 중대부 수가(須賈)를 임명했다.
수가(須賈)는 제나라 임치성을 향해 떠나갔다.
많은 수행원이 뒤따랐는데 그 수행원 중에 수가의 사인(舍人) 노릇을 하고 있던 범수도 끼여 있었다.
수가(須賈)는 제양왕을 알현한 후 위소왕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제양왕(齊襄王)은 지난날의 수모와 원한과 상처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노기 섞인 음성으로 수가를 꾸짖었다.
"위(魏)나라가 연나라를 도와 우리 제(齊)나라 땅을 짓밟은 것을 생각하면 과인은 지금도 이가 갈린다.
그대는 무슨 면목으로 이곳에 왔으며, 만일 우리와 진심으로 화친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무엇으로써 과인을 믿게 할 작정인가?"
수가(須賈)는 제양왕의 가을 서릿발 같은 호령에 오금이 저려왔다.
눈사람처럼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뒤편에 서 있던 수행원인 범수(范睢)가 보았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곤경에 처하자 과감히 앞으로 나서서 대답했다.
"대왕의 말씀은 옳지 못합니다. 지난날 저희 선군께서 연(燕)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제민왕(齊湣王)이 위ㆍ초나라와 함께 송나라를 쳐서 멸하신 일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때 제민왕(齊湣王)은 위ㆍ초나라의 도움으로 송(宋)나라를 멸망시켰으면서도 나누어 갖기로 약속한 송나라 땅을 모조리 독차지했습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신용을 잃은 것은 제(齊)나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민왕(齊湣王)은 천자 흉내를 내며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교만함을 부렸습니다.
이리하여 다섯 나라가 연합하여 제수(濟水) 싸움을 벌이기에 이른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이래도 우리 위(魏)나라만을 탓하시렵니까?"
"...................!“
"또 있습니다. 방금전 대왕께서는 대왕을 믿게 할 증거를 내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또한 제민왕(齊湣王) 때의 교만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고로 나라와 나라 간의 우호는 사신의 왕래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번에 위(魏)나라가 제(齊)나라에 사신을 보내 지난 일을 사죄하는 것보다 더 큰 우호의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만일 대왕께서 지난 일을 핑계로 위나라 사신을 계속 책망하신다면, 이는 제민왕(齊湣王)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뜻하지 않은 범수의 일장 연설에 제양왕(齊襄王)은 정신이 어리벙벙할 지경이었다.
충격을 받았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깨어나듯 몸을 털고 나서 말했다.
"오늘 과인은 좋은 말을 들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범수(范睢)는 수가를 돌아다보았다.
정사(正使)인 당신이 대신 대답하라는 눈빛이었다.
수가(須賈)는 황망함에서 벗어나 대답했다.
"신의 사인(舍人)으로 있는 범수라는 자입니다."
제양왕(齊襄王)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심히 범수의 얼굴을 살핀 후 명했다.
"위(魏)나라 사신은 일단 공관에 나가 쉬도록 하라."
그날 밤이었다.
제양왕(齊襄王)은 심복 내관 하나를 위나라 사신 일행이 묵고 있는 공관으로 보냈다.
내관은 공관으로 들어와 범수(范睢)를 찾아 작은 방으로 들어가 말했다.
"우리 대왕께서 선생의 높은 재주를 사모하고 계십니다.
선생을 우리나라 객경(客卿)으로 모시고자 하니, 선생은 위(魏)나라로 돌아가지 마시고 부디 임치에 머물러 주십시오."
범수(范睢)는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저는 위나라 사신을 따라온 수행원입니다. 함께 왔으니 함께 돌아가야 합니다. 어찌 홀로 임치(臨淄)에 남을 수 있겠습니까?"
범수의 말을 전해들은 제양왕(齊襄王)은 더욱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다시 내관에게 지시했다.
"너는 한 번 더 공관으로 가 범수에게 황금 10근(斤)과 술과 쇠고기를 내주고 재차 권해보라."
그러나 여전히 범수(范睢)는 제양왕의 제안을 거절했다.
다만 하사품만은 사양할 수 없어 술과 고기만 받고 황금 10근(斤)은 도로 돌려주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수가(須賈)가 눈치챘다.
그는 범수를 자기 방으로 불러 물었다.
"제나라 내관이 여러 차례 그대를 찾아왔다고 하는데,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가?"
범수(范睢)는 곤란했다.
차마 객경(客卿)으로 남아달라고 청한 사실을 얘기할 수가 없었다.
예물에 관한 것만 대답했다.
"제왕(齊王)이 저에게 황금 10근(斤)과 술과 고기를 보내왔더군요. 처음엔 사양했으나 여러 차례 권하기에 술과 고기만 받고 황금은 돌려보냈습니다."
수가(須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제왕(齊王)이 어째서 그대에게 그런 선물을 보냈을까?“
"아마도 사신인 대부를 존경하는 뜻에서 저에게까지 물건을 보낸 것이 아닐런지요?"
"그렇다면 정사(正使)인 나에게는 아무 것도 보내지 않고 어째서 사인(舍人)인 그대에게만 선물을 보낸단 말인가? 아무래도 이번 일은 수상하다."
더 이상 숨겼다가는 더 큰 의심을 받을 것 같아 범수(范睢)는 다시 말했다.
"실은 제왕(齊王)이 앞서 사람을 보내 객경으로 남아달라는 청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위(魏)나라를 버릴 마음이 없다고 분명히 잘라 말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건을 보내온 듯싶습니다."
수가(須賈)는 범수를 돌려보내긴 했지만, 의심은 이미 마음 깊이 들어찼다.
'괘씸한 놈이로다.'
그 후 수가(須賈)는 몇 달을 임치에 머물며 제양왕의 마음을 돌리려 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범수(范睢)가 임치에 남기를 거절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수가(須賈)는 할 수 없이 귀국길에 올랐다.
위(魏)나라로 돌아와 위안리왕에게 다녀온 경과를 보고한 후 다시 재상인 위제에게로 달려갔다.
위제(魏齊)는 선군 위소왕의 아들로 위안리왕(魏安釐王)과는 이복형제간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신료들이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
수가(須賈)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이번에 제나라 임치(臨淄)를 다녀왔는데, 다소 미심쩍은 일을 목격했습니다.“
"미심쩍은 일이라니?“
"제 사인(舍人) 중에 범수라는 자가 있는데, 제왕으로부터 객경(客卿) 벼슬을 제의받았다고 합니다."
"제왕(齊王)이 황금과 술까지 보낸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범수(范睢)가 그전부터 제나라와 내통한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한 번 잡아다 조사해보심이 좋을 듯싶습니다."
수가의 말을 들을 위제(魏齊)는 그 즉시로 심복 무사들에게 명했다.
"범수(范睢)를 잡아들여라!"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첫댓글 회장님, 반갑습니다.
늘 푸른 소나무처럼
늘 시조계에 우뚝 서 계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