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와 진술이 어우러진 유기적인 결합
- 허봉희론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허봉희는 잔잔하고 온유한 작가로 자신의 모습을 진정한 자아의 영토에서 낮추는 분이다. 예술이라고 하는 공대한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아 그곳에 탁 트인 여러 가지 전망을 마음에 새겨 미의 신비, 심연을 찾는 일, 아름다운 꽃들 또 우거진 숲, 웅대한 산을 편력하려고 하는 따뜻한 시인이다. 2013년부터 행복시낭송 강사, 시낭송대회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2015년 계간 창작산맥 시로 등단하여, 시와 수필을 쓰고 있다. 2023년에는 계간 에세이문예 표지모델, 이 계절의 시인으로 선정된 바 있다. 시창작은 물론 시낭송, 수필쓰기, 연기 등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조용하지만 뜨거운 생의 열기를 부둥켜안고 있는 분이다. 심기 속에 전류처럼 정이 따뜻하게 흐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유대가 확인되는 따뜻한 시심도 출렁인다. 인본적 태도를 지양하면서 더불어 사는 자세를 가진 그녀의 시는 어떨까 사뭇 궁금해진다.
피카소는 ‘누가 작은 새의 노래를 알려고 할 것인가’라고 말하면서 예술에 대해 모르는 것을 무리하게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예술에 있어서 이해는 감동 이외는 없다. 신비평에서 시의 가치기준은 복잡성과 구체성이다. 리차즈는 제한되고 동질적인 체험만을 조직하는 ‘배제의 시’와 대비시켜 이질적 체험, 곧 상반 모순되는 충동을 조직하여 조화와 균형을 부여하는 경우를 ‘포괄의 시’라 했다. 그리하여 시 형식이 산문보다 조직이 긴밀한 것은 세부의 보다 첨예한 선택성, 암시성의 강조, 세부 배열의 중요성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허봉희의 <루즈와 손거울>은 이와 같은 우회적 진술 어법에 더하여 감각화된 묘사적 특성을 전제함으로써 시적 진술이 전달하는 사유를 감각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겠다. 시는 축약된 발화 양식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허봉희 시를 살펴보겠다.
Ⅱ.
어느 시인은 ‘우리는 아직도 조선에 산다’고 하였다. 시대는 최첨단을 걷고 있는데, 아직도 생각하는 수준이나 제재 활용이 과거에서 못 벗어나는 경우를 비꼬아 말하는 경우라 하겠다. 시대가 변했다. 문학이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면 시도 디지털한 사회의 일면을 그려내거나 현대적 사물을 주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회 한 복판에 서있어야 하고 시인의 시선이 사회를 관통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비평가인 브룩스는 상반성을 더욱 강조하여 ‘극단적으로 상반되고 부조화하는 요소들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것을 시’라고 하였다. 브룩스가 시인의 개성과 주관을 강조할수록 체험의 빈곤화와 시의 단순화를 초래하게 되고 이것을 ‘감상적 태도’라고 비판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다. 20세기 문명을 기피하고 자연을 배타적으로 선호한 소월의 전통시나 사회역사적 체험을 배제한 김영랑의 순수시 등은 ‘감상적 태도’의 산물이라고 하겠다. 아이러니, 역설, 모호성 등 시적 장치나 차유 등 새로운 시학이 강조되는 것은 모두 예술의 복잡성적 특성 때문이라 하겠다. 낭만주의 시관이 시인을 위해 시를 버렸다면, 구조론적 신비평과 모더니즘 시는 시를 위해 시인을 버리고 사회역사적 상황을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신비평가들이 중시하는 역설, 아이러니, 모호성 등 내적 조건들은 확실히 시의 품격을 세우는 데 기여한다고 하겠다. 모바일은 근대성의 산물이다. 우리 몸에 있는 하나의 장기처럼 중요하다. 어찌 시인이 눈여겨보지 않으랴. <루즈와 손거울>에 천착한 시인이 있다. 창작산맥 출신의 허봉희 시인이다.
드러눕는 풀처럼 부드러운 자연 음도
항구의 정적을 깨는 고막 터질 뱃고동 소리도 간직한
검은 속내 유리 액정화면에 마음을 빼앗긴 지 얼마나 오래인가
내 가방 속 루즈와도 같은 그놈과 주고받는 언어적 교감은 없어도
그놈의 심장 속에는 내 영혼이 깃들어 있다
소리로 때로는 부호로 나타나는 현대문명의 이기
기상과 취침 시에도 내 곁에 머무는
운학무늬 천년 자재 옻칠로 무장된 그놈이 꼭
내 처녀 시절 하이힐 뾰쪽구두 나를 스토킹하던 가방 속
얌전한 근대문명의 손거울 같구나.
- <루즈와 손거울> 일부
이 시는 현대문명의 특징을 잘 묘파하고 있는 좋은 시다. 왜냐하면 이 시는 우리 현대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인 모바일폰을 시적 대상으로 하고 있고, 그것을 루즈와 손거울에 견주어 잘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왜 휴대폰을 가방 속 루즈와 같다고 하고, 손거울 같다고 했을까. 화자는 모바일폰이 나오기 전부터 루즈와 손거울은 여자에게 필수품이라고 여긴 것이다. 손거울보다도 더 친하게 된 모바일폰은 기승전결, 마지막 연으로 오면서 어느새 루즈와 손거울 차원으로 승격되어 대상과 일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시인은 현대문명이 가져다 준 이기들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속성’을 가방 속의 필수품과 연결시키고, ‘그놈의 심장 속에는 내 영혼이 깃들어 있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이미 기계의 도구가 된 인간의 이성을 넌지시 비판하고 있다. 모바일폰과 화자의 절연될 수 없는 성질은 ‘그놈의 심장 속 내 영혼’ ‘기상과 취침 시에도 내 곁에 머무는’ ‘나를 스토킹하던’ 등의 어구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를 재미있게 읽어내는 지점은 화자가 모바일폰을 ‘그놈’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파악하는 데 있다. <루즈와 손거울>은 진술을 통해 시인의 음성을 가청화한다. 특히 이 시는 언술을 사용하여 시인의 시적 사유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이때 ‘드러눕는 풀처럼 부드러운 자연 음도/ 항구의 정적을 깨는 고막 터질 뱃고동 소리도 간직한/ 검은 속내 유리 액정화면에’처럼 묘사적 특성을 개입시킴으로써 시인은 진술을 감각화한다. 이를 통해 묘사적 언술 양상을 전제함으로써 이 시는 선명한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바일폰에 대한 묘사적 속성은 이후에 등장하는 진술 중심의 작품 전반에 감각적 특성을 부여한다.
Ⅲ.
이 시는 묘사와 진술이 어우러지며 유기적인 세계를 형성한다. 묘사와 진술은 그런 점에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즉 묘사 중심의 시에 진술이 개입함으로써 시적 사유가 확장되기도 하고, 진술 중심의 시에 묘사가 개입함으로써 진술이 감각적으로 이미지화하기도 한다. 그런데 <루즈와 손거울>을 관통하는 진술은 과연 전적으로 직설적인 언술 양식일까? 이런 의문은 이 시를 산문시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며 한 가지 더 생각해봐야 할 점은 이 시가 산문시가 아니기 때문에 진술 역시 우회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묘사가 이미지라는 기표를 통해 그 안에 내재한 기의를 제시하는 것처럼, ‘내 처녀 시절 하이힐 뾰쪽구두 나를 스토킹하던 가방 속/ 얌전한 근대문명의 손거울 같구나.’라는 진술 역시 시인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보다 시적 정황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