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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8편 1절.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1절: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믹담’이란 ‘금언’이라는 뜻이고, ‘알다스헷’은 ‘멸하지 마소서’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붙잡고 의인은 멸하지 않는다고 하는 금언을 말씀하시는 거다. 영원불변한 궁극적인 구원에 관한 말씀을 악한 도적들을 붙잡고 하시겠느냐 그 말이다.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악한 도적들을 붙잡고 의로운 심부름을 시키겠느냐 그 말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직접 말씀하실 때도 있었지만 사람을 붙들고 말씀을 하시기도 하는데, 이 때 도적을 붙잡고 당신의 뜻을 말씀을 하시겠느냐, 의인을 붙잡고 말씀을 하시겠느냐? 본문에 누구를 붙잡고 말씀을 하시느냐? 다윗을 붙잡고 말씀을 하신다.
그러면 사단 마귀는 거짓 종들을 시켜서 무슨 말을 하겠느냐? 사단 마귀의 말은 비구원적 말이다. 구원이 안 되는 말이다. 구원이 안 되는 말이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썩는 것, 불에 타는 것, 임시성적인 것, 세상에 속한 것, 육신위주 육신목적의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단 마귀의 속셈은 성도를 넘어뜨려는 건데, 한 마디로 비진리로 성도를 넘어뜨리는데, 성경구절이 없이 넘어뜨리느냐? 그게 아니라 성경을 들고 성경구절을 대면서 말을 하는데 그 목적을 천국이 아닌 세상을 향하게 한다. 성도가 목적이 변개된 말을 들으면 신앙정신이 망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적인 뜻은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 즉 영원한 것, 신령한 것,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 사람의 인격과 속성에 속한 것, 이게 진리 진리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것을 주려는 것인데, 거짓 종들 마귀의 종들은 이게 아닌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에 목적을 두고 이것을 위해 일을 하게 하고 이것을 가지라고 강조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자기가 마귀의 종이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 누가 가르쳐 줘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자는 결국은 마귀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다. 분별을 시켜주어도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마귀의 술책인 혼돈과 혼란과 혼성과 혼합 중에 빠져 멸망을 당해야 되는 것이고, 당할 수밖에 없는 거다.
일반적으로 볼 때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국가의 일을 맡기는데 있어서 악한 도적이나 사기꾼을 데려다가 시키겠느냐? 이건 용납이 안 되는 거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이 다 죽고 나라가 통째로 망하는 거다. 우리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 있느냐? 이건 국민이 처단해야 한다. 일반사람이 개인적으로 사기를 치는 것은 죄가 작은 거다. 그러나 국가의 세금을 떼어먹는다거나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죄가 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법에, 하나님의 말씀에 반기를 들고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이걸 용납을 하시더냐? 육신적으로 처단을 해 버린다. 이에 앞서서 종들을 보내고 선지자들을 보내는데도 말을 안 듣고 반기를 들면 그냥 처단을 해 버린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반역하는 인간을 처단하는 것은 사람이 산길을 걷다가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보다 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 역시도 인간끼리 싸우고 다투고 하는 것은 용서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법에, 구원에 반기를 들고 사단 마귀 노릇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용납이 안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구약시대에 눈에 보이는 이런 심판이 있었는데, 신약시대에는 이런 일이 없는 거냐? 아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어도 자기 육신이 그대로 있으니까 심판을 안 받은 것으로 보이느냐? 아니다. 영적인 면에서는 그대로 처단이 되는 거다. 이런 일이 눈으로 보여지게 일어나지 않으니 덤덤하냐? 이건 화인 맞은 거다. 이런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육신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리고 이런 정신으로 믿는 자는 영적인 차원에서 한 치도 못 자란다. 이렇게 되는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다. 우리는 이걸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게 더 무섭다. 눈에 보이는 병균보다 안 보이는 병균이 더 무섭다.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조심을 하지 않다가는 병에 걸려 죽게 된다. 우리가 영적인 면에 깨달음이 되어서 자기를 발견하고 지혜지식으로 자기를 잘 다스려 나가면 육신도 의의 병기로 쓰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유익이고, 이득이고, 사건 환경이 몰아쳐도 이겨나갈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자기의 속사람을 다스리지 못하면 사건 환경이 오면 남 원망하고, 세상 원망하고, 사건을 원망하게 된다. 이게 사람이 되어먹은 거냐? 이러는 것 자체가 믿음이 자라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니냐?
이런 식으로 수십 년을 예수를 믿으면 뭐하느냐? 속사람이 고쳐지지 못한 채 세상이 그대로 들어있다면 뭐가 믿음이고, 뭐가 신앙이냐? 자기의 이런 모습을 볼 때 자기가 믿음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하나님 앞에 증거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냐? 옳은 진리이치를 들으면 증거가 되어 나오게 되고 스스로 판단이 되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고 의로운 분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심부름을 시킬 때는 의롭고 거룩한 자, 신실한 종, 다윗과 같은 사람을 들어서 말씀을 주시는 거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없어도 이 이치를 무시한다거나 이 이치를 어긴다면 좋은 사람이 되겠느냐, 나쁜 사람이 되겠느냐? 신앙 믿음의 이치를 어기지 말아라. 자기가 구구절절이 성경을 해석은 못할지라도 옳은 진리이치를 거스르면 하나님 앞에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만은, 하나님 앞에 적이 된다는 것만은 알아둬라.
1절: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인자들’이란 사람들을 말함이자 당시의 재판장이요 성경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을 말하는 거다. ‘공의’란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오는 신령계에까지 들어갈 수 있는 절대 정확한 옳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이 옳음이다.
하나님의 이 절대 옳음은 세상 모든 인류의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을 판단하시는 옳음이다. 세상사람들의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절대적인 옳음이다. 단순히 사람의 행동만을 보고 ‘옳으네. 그르네’ 하고 판단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은 사람의 속중심이 영원한 생명의 법, 진리의 법, 하나님의 이치의 법에 맞는지를 보는 거다.
사람들이 진리를 이용하여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법을 이용하여 사람을 속일 수도 있다. 좋은 법인데 그 법을 가지고 사람을 속일 수도 있다. 행동으로도 속일 수 있고, 말로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속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인간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이 하나님을 속일 수 있겠느냐?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하나님의 공의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요,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 것이요, 신령계 천국에 들어가서도 영원히 효력이 있는 틀리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다. ‘어찌 잠잠하느뇨.’ 절대적인 공의는 누구에게만 있는 거냐? 하나님에게만 있다. 그런데 왜 사람을 보고 공의를 말하라고 하는 거냐?
영적 이스라엘의 도덕성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말씀에 의해 바로 세워져 가는 거다.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도 틀리지 않는 그 말씀에 사람이 바로 세워져 가는 거다. 그러니까 교회를 가르치는 인도자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가르칠 큰 책임이 있는 거다. 이스라엘 백성을 누구로 통해서 애굽을 탈출을 시키는 거냐? 모세다. 그런데 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른 곳으로 인도한다면 어찌 될까? 약속된 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직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의해서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까지 광야생활 40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법으로 신적인 도덕성, 신적인 능력성, 신적인 지혜지식성이 들어가는 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림을 받으면서 속이 완전히 바꿔져 나가지 않더냐? 그런데 오늘날 세상 속화된 거짓된 종들은 교인들에게 세상 것을 주고 있으니 이것은 성도들을 어디로 인도하는 거냐?
오늘날 신학교를 보면 이미 성경에 말씀해 놓은 것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다. 구약 때 아무나 제사장이 되겠다고 하면 ‘너도 해라. 너도 해라’ 하다가 나중에는 그런 일이 워낙 흔하니까 예물을 가져와서 종이 되겠다고 하면 제사장을 시켜주고 했는데 오늘날 교회가 그 모양이다. 목사안수를 받는데 얼마? 장로안수를 받는데 일억? 안수집사가 되는데 오백 만원? 이 얘기를 들은 지 한참 됐으니까 지금은 더 올랐을 거다. 교회 안이 이렇게 돼버렸다. 교회가 쑥대밭이 돼버렸다. 아무리 봐도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시기 직전 같다.
여름이 되면 개잡는 날이 있듯이 엉터리 교인들이 때려 잡히는 날이 분명히 있을 거다. 우리는 안 잡히는 자로 살아야 하겠는데, 자기는 어느 복날에 잡힐 것 같으냐? 하나님께 때려 잡히는 날이 되면 ‘이때까지 너의 날로 살았지? 이제는 나의 날이다’ 라고 하며 완전히 잘근잘근 밟는 거다. 인간이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교회는 영적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절대 공의로운 말씀으로 바로 세워져 나가야 한다. 안 그러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걸리게 된다.
공의의 판단은 구별 분별이 들어간다. 하나님의 것은 세상 것과 구별 분별이 된다. 사람이 구별 분별되지, 사람 속이 구별 분별이 되지, 자기가 자기를 쳐다볼 때 구별 분별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공의로운 말씀은 자기를 깨끗하게 만드는 성질이 있다. 그 역사성이 들어있다. 그래서 공의로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왕의 성질을 띠고 있고, 제사장의 성질을 띠고 있고, 선지자의 역할이 되는 성질이 그 안에 들어있는 거다. 말씀 속에는 우리를 이렇게 만드는 것이 들어있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과 평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왕’ 하면 권세와 누림 이전에 왕의로서의 실력이 있어야 한다. 교회를 인도하는 사람은 다 그래야 한다. 인간정실에 치우치거나, 외모 모양에 치우치거나, 인간 다수의 판단에 의한다거나 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하나님 앞에 죄인 줄 알면서도 벙어리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거다.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알면서도 잠잠하고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상대에게 무슨 약점이 잡혀있거나, 아니면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거나, 아니면 자기도 그들과 한 패인 거다.
우리교회에서는 절대로 주일날 심방한다고 하면서 백화점 같은 데 가서 물건을 사들고 왔다 갔다 하지 말아라. 이건 용납이 안 된다. 이렇게 하려면 그런 교회에 가서 하라. 우리교회에서는 그렇게 기르지 않는다. 우리가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이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나 그 가정에는 자기가 하는 대로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하나님의 은혜가 적절하게 가는 거다.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보면 주일날 뭘 사들고 다니고, 아이들에게 뭘 사주기도 하는 걸 많이 보는데 우리의 신앙에는 이런 게 맞지를 않는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교회에 있지를 못한다. 은혜를 못 받는다. 이런 사람은 진리말씀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는다.
어느 교회에 다니던 영적 이스라엘이라면 공의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이 자라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이 사람은 육적 이스라엘이다. 이미 세상정신에 포로로 잡혀간 거다. 교회가 통째로 이렇게 흘러간다면 이 교회는 통째로 세상정신에 물이 든 것이니 이미 세상에 포로로 잡힌 거다. 이게 참으로 무서운 거다. 왜냐? 육신적으로 잡혀있다면 탈출을 하려고 하겠는데 정신적으로 포로로 잡혀놓으면 대부분 그 사실조자 모른 채 자기 스스로 그것이 좋아서 거기에 붙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영적 정신적 포로에서 탈출을 하려면 그것보다 더 강한 것이 오지 않으면 절대로 탈출을 못한다.
일반적으로 나라의 지도자가 죄를 범하면 백성들이 죄를 지어도 이 지도자는 백성들의 죄에 대해 할 말이 없게 된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지도자가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 되고, 이방사상들이 주인인 척하면서 그 교회에서 판을 치게 된다. 안 믿는 정신이 판을 치게 된다. 전도문이 완전히 막혀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게 된다.
우리 기독자가 기본구원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없으면 그 신앙심은 빈약하다. 그리고 이룰구원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세상 모든 거짓된 신앙에 속고, 이용을 당하고, 사망적인 성공을 이뤄놓게 되고, 영능의 실력도 없고, 참 사람이 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고 만다. 교회를 수십 년 다니고 충성봉사는 많이 했지만 깨닫는 것이 없다면 이 사람은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사는 거고, 일반적인 소원 목적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망한 사람이다.
사람은 인격이 고상해야 한다. 인격이 저질이면 몸도 개처럼 살게 된다. 정신이 저질이면 이 사람은 몸도 개처럼 살게 된다.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격화 시키면 얼마나 고상한 사람이 될까?
성도가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무시하면 그 차원이 세상사람과 똑같아진다. 이게 무슨 말이냐? 예수를 믿는다면, 첫째는 아무리 믿음이 없어도 주일은 꼭 지켜야 한다. 주일을 까먹으면 어떻게 되느냐? 일반사람과 똑같아진다. 그러니 주일만은 꼭 지키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직장을 구할 때는 월급이 적더라도, 장사를 하려고 할 때는 위치가 좋지 않더라도 주일만은 지킬 수 있는 곳을 선택해야 한다. 이런 부모가 있으면 그 자식이 부모의 신앙심을 본받는다. 이러면 후대가 좋아진다. 이게 안 믿어지느냐? 그렇다면 엉터리로 살아봐라. 그러면 그 자식은 부모보다 한 술 더 뜨게 된다.
내가 지금의 기독교 전체적인 면을 볼 때 아무리 생각을 해도 긍정적이고 희망이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 이게 또 성경말씀이기도 하다. 영적 차원에서 엄청난 타락이고 환난이다. 옳은 신앙심을 가지고 살아나가기가 정말 어려운 시대다. 앞으로 더 그럴 거다. 그래서 우리 자식들을 생각해 보면 ‘이것들이 지금의 신앙심을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세상을 이겨나갈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대에 살면서 진리신앙이 희석이 된다거나 일반화 되어서 속화된 자들과 몰려다닌다면 기가 막히는 거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비진리적인 정신 사상을 다 이기고 헤쳐 나갈 수 있느냐?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이럴 때일수록 하나를 가르쳐도 절대로 일반차원으로 가르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렇게 하다 보니 따라오다가 떨어질 놈은 떨어질지라도 끝까지 견뎌서 이기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이 이상 하나님께 영광이 없을 것 같다. 이런 신앙의 길을 가려고 하니 순교를 각오해야 될 것 같다.
우리가 기본신앙을 철저히 가지고 있으면서 또한 말씀을 받아서 자기 인격화 시키고 있다면 이 사람은 신앙정신이 살아있는 거고, 사건 환경에서 탈출을 할 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는 거다. 생명력이 있는 신앙이라 그 말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에게 늘 지혜를 구하라. 의로운 성도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지키신다고 성경에 약속을 해 놨다.
그런데 참으로 골치 아픈 것은 옳은 것을 받기는 했는데 자기의 주관적인 소원 목적은 버리지 않고 자기의 세상적인 목적에 성경을 둘러씌워서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라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도무지 자기 것을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거다.
목사님들의 모임에서 내가 하는 말은 성경을 모르면 목사를 그만두라고 한다. ‘누가 성경을 모르는 너에게 목사를 하라고 하더냐? 신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목사냐? 하나님이 나에게 말해주는데 너는 목사를 하지 말라고 하더라’ 라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는 것을 내가 비유적으로 말을 하는 거다.
그런데도 왜 그만두지를 않느냐고 하니까 이유가 있다고 했다. ‘무슨 이유냐?’ 하고 물으니까 교회에서 용돈을 얻어 쓰려고 한단다. 이게 말이냐 뭐냐? 그러면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목회를 하는 거냐? 용돈을 벌어 쓰려고 목사를 한다는 말밖에 더 되느냐? 이게 하나님 앞에 가질 생각이냐? 자기의 생활문제에 놓고 목회를 하고 있으니 이건 하나님의 옳은 종이 아니다.
이 목사만이 아니다. 지금 보면 자기 생활위주에 놓은 목회가 얼마나 많은지? 앞으로도 이런 사람이 계속 나올 거다. 이게 다 예수이름을 팔아먹는 거다, 우리는 말씀을 자기 인격화 시켜라. 말씀으로 늘 자기를 분석 분별을 하며 약한 자기를 스스로 책망하며 하나님을 향해 진리 깨달음의 큰 힘을 달라고 하라. 사람이 바로 못 서 놓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
바벨론에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다. 70년이란 한 세대가 넘어가는 거다. 포로에서 풀려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거다. 교회에서 성도들을 잘못 가르치면 70년이, 즉 한 인생이 그냥 포로로 날아가 버리는 거다. 그래서 성경에 말씀을 뿌리는 것을 울면서 씨를 뿌린다고 하는 거다. 말이 70년이지 말씀을 잘못 뿌리면 그 악영향이 70년이 아니라 700년도 간다.
성도 한 사람의 일생이 목사의 메시지에 걸려있는 것이니 목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차대하냐? 그런데 거짓 종들은 이 면에 대해 생각을 하느냐? 못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공의가 없어지면 영적 이스라엘이 정리정돈이 안 되고 완전히 무질서가 되고 마귀의 집단과 온상이 돼버린다.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판단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이 판단은 절대적인 공의의 판단이다. 그래서 판단은 하나님께 속했다고 하는 거다. 따라서 성도들은 판단을 할 때도 하나님의 공의로서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후에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을 버리고 인간 주관적 생각과 지식으로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인본주의적인 판단이 하나 더 생긴 거다.
하나님의 판단은 영을 살리는 판단, 영을 살리려는 판단, 그러면서 육은 의의 병기로 쓰이게 하는 거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은 모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영이 죽었기 때문에 영적인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육만 위한 판단이요, 결국은 하나님의 형벌로 육도 죽는 판단을 하고 있다.
아담 타락 이후로 모든 인간이 육을 위한 판단을 하며 살지만 영이 중생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을 하며 영 위주로 살아야 하는데, 영적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부터 하나님의 공의를 몰라서 일반적인 판단을 하는 건지, 아니면 일반적인 판단을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으로 착각을 하는 건지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이 아닌 일반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 말씀을 듣는 것. 성경공부를 하는 것 등은 전부가 하나님의 공의를 듣고,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고, 일상생활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을 내리며 살게 하기 위함이다. 이룰구원은 이렇게 해서 되는 거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이렇게 해서 입어져 가는 거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왜 공의의 판단을 하지 않느냐?
우리 기독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인고로 하나님의 판단으로 살아야 한다. 육신을 위한 판단을 하면서 이것이 영을 위한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이라고 주장을 하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과 대적이 되고 죄가 되는 거다.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적 교훈에서 성도의 죄가 도말이 된다. 죄가 없어진다. 참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일반적인 판단을 아무리 정직히 내려도 참 사람은 안 되고, 오히려 대가지불이나 보복성이 돼버린다. 인간 속에서 그 작용이 되어 들어간다.
일반세상에서는 온 세상사람들이 다 옳다고 하는 판단일지라도 절대적인 판단은 없다.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과 같은 것은 없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법적으로나 인륜적으로 아무리 옳은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이 바로 세워지지 않는 거다. 사람을 바로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이라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을 거스르면 하나님 앞에 대적이 되는 거고, 하나님 앞에 형벌을 자초하는 셈이 된다. 자기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거스르면 영원히 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