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한 켠에 군자란이 단단한 꽃대를 올리고 있다. 이 군자란은 몇 해 전에 언니가 분갈이하여 준 것인데, 우리 집에 와서는 언니 집보다 해마다 보름쯤 늦게 꽃대를 올리고 있다. 물론 물 주기와 양지의 차이도 있겠지만 꽃도 주인을 닮는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나는 무슨 일이든 동작이 늦다. 동작이 늦다는 것을 잘 해석하면 준비 과정이 길다는 뜻도 된다. 꽃이 늦게 피는 이유도 꽃대를 튼튼히 다독여 피워 내려는 애씀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 늦은 동작도 나쁜 것만은 아닌 듯 싶다.
먼저 핀 꽃이 먼저 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리 늦게 태어나도 각종 질병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많다.
작은 형부는 스물세 살의 젊은 나이에 월남전에서 전사를, 했다. 언니와 형부는 동갑이었고 스물한 살에 결혼을, 했다. 형부는 9남매의 장남이었다. 언니가 시집간 마을은 우리 집에서 십 리쯤 떨어져 있었다. 그 길은 돌길과 산길을 두어 번 지나는데, 새소리 물소리 갖가지 꽃들로 줄을 잇지만 인적이 드문 외길이다. 그때 내 나이 일곱 살쯤 되었는데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키면 한적한 길을 혼자 걸어서 언니 집에 가곤 했다.
언니가 밖에 나가고 없는 날에는 언니의 새 살림방에 십자수를 예쁘게 놓아 걸어둔 활대 보, 이불, 베개, 분가루 그런 새것들이 너무 좋아서 그것을 만지며 냄새를 맡아보며 놀다가 잠이 들곤 했다. 언니의 방은 분 향기로 가득했다.
그렇게 새살림을 시작한 형부는 신혼의 단꿈도 다 꾸지 못하고, 결혼 몇 달 뒤 군에 입대했고 군 생활 얼마 뒤 월남전 전투 부대에 파병되었다. 미국이 한국에 파병을 요청한 한국 최초 국군 해외 파병이었다. 영화 ‘클래식’을 보면서 베트남 맹호부대 전투장면이 지날 때마다 형부 생각이 가슴을 쓰리게 파고들었다.
남편을 머나먼 타국 전쟁터로 보내고 마음의 갈피를 못 잡은 언니는 홀로 강가에 섰다. 강을 바라보며 임이 떠나간 항구에서 꼭 닻을 내릴 거라는 희망을 걸고 비손을 하며 쓰라림을 달래고 달랬다. 그런 가운데도 대가족의 시집살이는 녹록하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형부는 우기에 전개된 산악전에서 북베트남의 총알에 떨어지고 말았다. 태극기 높이 들고 맹호부대 용사라 우렁차게 외치며 조국을 위해 부산항을 장렬히 떠날 때의 국건한 모습이, 한 줌의 재가 되어 하얀 사각 보에 싸여 전우의 가슴에 안겨 돌아왔다. 한 줌의 재가 고국 땅에 묻히던 그 잔인한 봄, 언니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과 서러움에 미친 듯이 강가로 나갔다. 이별을 차라리 배반이라고 내뱉으며 울고 또 울었다.
어두운 고독이 파고드는 외롭고 쓸쓸한 긴 여정의 끝, 그때서야 비로소 남편의 완전한 부재를 보았다.
이후 꽃이 피는 봄이 되면 언니는 정말 힘겹게 봄을 보내곤 했다. 목련잎은 꽃이 진 후에야 돋아나 또다시 꽃을 피우기 위해 애써 한해를 돌아오지만 결국은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꽃도 잎도 긴 기다림의 시간에 든다. 언니와 형부의 사랑이 목련꽃 같은 사랑이 이니던가?
해마다 봄이 되어 잎도 없이 꽃만 피고 지는 하얀 목련을 바라보면 꽃이 아니라 영혼을 바라보는 마음이 된다.
외롭게 살아가는 언니를 바라보는 세월이 몇 년쯤 지났을까. 어느 사이 언니도 꽃과 잎이 서로 받쳐주며 어우러져 살아가는 한 포기 군자란으로 옮겨져 아름다운 꽃 같은 생활을 한다. 예쁜 조카들도 잘 자라고 집안에 활기가 넘친다. 사람 사는 맛이 난다.
원래 군자란 학식과 덕행 벼슬이 높은 사람으로 아내가 남편을 일컫는 말이며 꽃 이름 또한 그런 뜻으로 지어진 것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그 본뜻과는 달리 언니가 나에게 분갈이하여 준 꽃으로 언니를 생각하는 뜻에 둔다. 내가 바라보는 군자란은 잎의 끝이 뾰족하고 꽃대가 굵은 것이 아니라. 편하게 누운 듯 부드럽게 쳐진 잎 사이에, 뚜렷하고 선명한 아름다운 주황색 꽃을 피운다. 정갈한 여인의 모습을 바라봄이다. 그 여인이 바로 언니이다.
나는 언니가 분갈이하여 준 군자란을 마치 언니를 바라보듯 소중하게 키운다. 우리 집에 와서는 꽃이 늦게 피어도 피지 않아도, 그저 거실에서 베란다에서 함께 있어 주면 그만이다.
올해도 군자란이 환하게 피어나는 날 나는 언니를 생각한다. 내 삶이 거듭나는 부활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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