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물을 끓이는 동안에 홈런은 나온다. 그는 왼발을 크게 내디디며 배트를 휘둘렀다. 좌익수 키를 훌쩍 넘어가는 마음. 제기랄, 뭐하자는 거야. 마음을 읽힌 자들이 이 말을 즐겨 쓴다고 이유 없이 생각한다. 살아남은 자의 고집 같은,
커피 물이 다시 끓는 동안의 시간. 식탁 위에 놓인 찻잔을 잠시 잊고 돌아오는 시간. 오후 2시 26분 37초, 몸이고 마음이고 새까맣다. 20년 넘게 믿어 온 기정사실. 내 오후의 어디쯤에는 불이 났고 구멍이 뚫렸던 것이다. 방금 전 먹었던 너그러운 마음을 다시 붙들어 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7초. 애가 타고 꿈은 그렇게 식는다.
오후 2시 26분 54초, 커피 물이 다시 끓지 않는 시간. 식탁 위로 찻잔을 찾으러 오는 시간. 커피는 아주 조금 식었고 향이 깊어지는 바로 그때 도무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 국자를 들고 우아하게 스윙을 한다.
여태천ㆍ스윙ㆍ민음사, 2008 ----------------------------------------------- 커피잔이 놓여 있는 가장 유명한 시적 풍경은 엘리엇의 "내가 커피 스푼으로 내 삶을 재어 왔기 때문에." ('프루프록의 사랑노래') 엘리엇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저는 스푼으로 삶을 재는 것보다는 커다란 국자를 든 시인의 우아한 스윙이 더 좋군요. 스포츠는 잘 몰라요. 야구를 좋아하는 이들은 뭔가 안 풀릴 때는 포즈를 취한다면서요? 우산이든 볼펜이든 손에 잡히는 거라면 뭐든지 스윙. 삶은 내가 타자일 땐 헛스윙이 나고 투수나 수비수일 때 늘 가장 정확하고 멋진 스윙을 보여줍니다. 우리 좌익수의 키를 훌쩍 넘어가는 저 운명의 홈런. 오늘 오후도 마음 어디쯤에 불이 나고 구멍이 뚫릴지 모르겠어요. 바로 그때 필요해요. 국자 속의 슬픔을 쏟아버리고 다시 또 스윙-. 진은영 (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국외자(局外者)1 ㅡ여태천
그는 아주 멀리 떠나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한다 해가 뜨지 않는 곳에서 그는 회벽처럼 말랐고 아무 곳이나 들러 물건을 훔쳤다고 씌어져 있다
가자 가자, 이곳만 아니라면 노래 같은 것 부르지 않고, 마음 같은 것 훔치지 않을 것이다
한적한 주점에서 노래가 흘러나오자 내내 어두웠던 2백 년의 골목이 흔들렸다
이 겨울을 보내면 그래서 또 한 시절을 견디면 오늘처럼 또 해가 뜨지 않아도 차가워진 술은 다 팔릴 것이다 그때서야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편지라도 띄워봐야지
띄엄띄엄 내뱉은 말을 받아 적는다면 두고두고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될지도
노래는 소문처럼 녹이 슬어 들을 수 없었다 붉게 달아오른 해를 보고도 온몸의 뼈가 시렸다
여태천의 시 〈국외자 1〉은 아주 멀리 떠나서 생을 마감한 어떤 사람의 쓸쓸한 전기(傳記)를 들려준다. 그의 삶은 궁핍하다. 그래서 그는 “회벽처럼 말랐고”, “아무 곳이나 들러 물건을 훔쳤다”고 전해진다. 그의 삶은 점점 더 황폐해진다. “가자 가자, 이곳만 아니라면/노래 같은 것 부르지 않고, 마음 같은 것 훔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구절에 따르면 그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다. 그는 주점에서 제 노래를 팔아 밥을 사고 술을 샀을 것이다. 온 세계를 유배지로 삼은 그는 이 삶에 진절머리를 치며 다른 삶을 꿈꾸었다.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끝없이 망가지는 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의 삶을! 그 꿈은 여전히 지체되고 유예된다. 그를 망친 것은 가망 없는 다른 삶에의 기다림이다. “기다림 속에서, 기다린다는 것이 기다림의 불가능일 수밖에 없는 시간의 부재가 군림한다.”(모리스 블랑쇼) 너무 많은 시간들, 그 시간의 과잉 속에서, 정작 시간은 시간에 대해 항상 부족하다. 이 모순이 기다림의 숙명적 조건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그 시간의 부재 속에서 자신과 기다림을 분리한다. 그래서 기다림은 기다리는 자의 것이 아니다. 기다림의 본질은 기다림의 불가능을 견디는 것이고, 기다리는 자는 그런 불가능 속에 방치될 따름이다. 이 “국외자”는 항상 여행하면서 동시에 머무는 사람이다. 그는 이곳과 저곳의 경계, 문턱, 중간, 그 치외법권의 지대에 머문다. 그곳에서 그는 자기만의 노래를 만들고자 한다ㅡ 여태천(1971 ~ )은 외로움의 감식가라 할 만한 시인이다. 그는 집요하게 ‘국외’로 방출된 사람들의 정서와 의식을 추적한다. 사회적 관계망에서 떨어져 나온 국외자는 회벽처럼 마른 채 세월을 견뎌내는 사람이다. 국외자란 더불어 있는 사람과 다른 방향을 보고 다른 말로 말한다. 그들은 문밖에 있는 사람이고(〈문밖에 서 있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붉은색 버스를 탈 때 혼자 녹색 버스를 타는 사람이다.(〈월요일에서 월요일까지〉) 〈국외자 1〉에서 시의 화자는 퇴화된 꼬리뼈와 같은 외로움의 흔적을 드러낸다. 국외자들은 타자와의 다름을 신체에 각인하고 소통의 부재를 감당한다. “붉게 달아오른 해를 보고도/온몸의 뼈가 시”린 것은 외로움 때문이다. 시의 화자들이 혼자 있는 공간에서 독백의 발화를 할 때 유독 여태천의 시들은 깊은 우수를 하나의 깊이로 각인한다. 〈익숙해지는 법〉에서 시의 화자는 혼자 술을 마신다. 밖에서는 누군가 느리게 유행가를 부르고, 시의 화자는 꽃무늬 벽지가 있는 방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 “무슨 상관이야 있겠는가/지금 나는 취하는 중이고/겨울이란 여전히 추운 계절인데”라는 구절은 ‘나’의 현존에서 타자를 배제하는 심리를 무심하게 노출한다. 시의 화자는 천천히 취하는 중이고, 겨울은 깊어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월요일에서 월요일까지 ㅡ여태천
그러니까 월요일에서 월요일 사이에 우리는 수많은 나날을 가지고 있었지 나는 어떤 요일에도 정을 준 적이 없었지만 요일을 규정하고 있는 저 해와 달의 세계에서 방출된 지 오래된 별 하나의 꿈과 별 하나의 사랑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사람들은 붉은색 버스를 탔고 나는 늘 녹색 버스를 고집했네 환승이 안 되는 마을 버스를 타고 월요일을 향해 그곳이 멀게 느껴지는 건 구름 탓이 아니었네 골목의 구멍가게에서도 소란한 은행에서도 모든 소식을 들을 수 있었지, 하지만 나는 늘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했네 짝수 날에는 녹색 버스를 타고 홀수 날에는 그냥 걷기로 했지 아침에 들은 노래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 낙엽이 떨어지는 목요일에는 멜로디를 흥얼거려도 차가운 내용은 입 안에서만 맴돌았네 전생을 홀라당 태워먹고도 자정이 넘도록 돌아다녔던 월요일에서 월요일 사이에 수요일은 눈부시게 흘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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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ㅡ여태천
방금 지나간 4276호 구름을 바라본다 저건 1시 45분이야 소리나는 곳을 뒤돌아보았다 가방을 가슴에 품고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있던 사람 안경 속의 눈은 작고 귀는 돌돌 말려 내가 건네는 인사말도 구애의 짧은 신호도 알아듣지 못한다
7월 18일 오후 2시를 만지작거리는데 구름 아래로 빛나는 빌딩이 흘렀다 이곳을 지나친다는 당신의 기별은 묵묵부단이다 별자리를 동쪽으로 제 위치를 바꾸었고 풍경과 기후가 느리게 변했을 뿐인데 당신이 바라보았을 눈부신 맨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경적이 울리고 또 한 대의 구름이 지나갔다 번개를 타고 지나가는 저곳의 말을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저건 1시 45분이지 역무원을 따라 개찰구 쪽으로 걸어가는 오래 전 한 사람의 애인과 그가 말없이 웃는 사이에 2시가 구름처럼 지나갔다 구름을 기다리다 타야 할 차편을 놓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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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랜드 1 ㅡ여태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비가 내렸고 늙은 역장이 망명하는 한 언어를 반겼을 뿐이다.
넘치는 바닷물을 그가 보라고 했을 때 내가 떠올린 건 마약과 도박과 술, 그리고 바싹 말라버린 한줌의 수면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자전거를 가리켰다. 전등을 빨갛게 켜고 중독(中毒)의 골목을 쏘다니는 사람들 심중(心中)마다 따르릉 따르릉 비밀의 세계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오늘을 위해 내일을 버린다고 여행노트에 기록되어 있었다.
교각 아래에서 기다리는 자전거들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다.
창문이 아름다운 게 오래된 빨간 벽돌 때문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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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들 여태천
버스를 기다리는 사내의 가느다란 눈매와 한낮의 공허를 날고 있는 나비 한 세계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 사이에 모든 뜻은 빠짐없이 기록된다
기록되지 않는 것은 다만 그 뜻과 먼 어떤 물질의 이동
한낮의 나비에게서 해질녘의 저 사내에게로 아무데다 거처를 정할 수 없는 것들이 참을 수 없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모든 것은 관계의 흔적일 뿐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순환버스는 늘 같은 시간대 이곳에 정차하고 누군가는 보잘것없는 이 사실을 굳이 알고 있으며 저 사내와 나비는 아직도 오늘인 것이다
분명한 오늘이 분명하지 않은 나비의 곡선비행처럼 오는 듯 다시 떠난다
아무 관계도 아닌 저 사내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오후의 에테르
살짝살짝 떨어지면서 시드는 한 세계 그럴수록 더욱 쪼그라드는 기록들
----------------- 이사 ㅡ여태천
비가 왔다. 누군가에게는 삶의 끝이었을 어젯밤에 비가 와서 우리는 깨어 있었다. 앨범재킷처럼 오래된 집에는 쥐도 새도 모르는 음악이 흘렀고 우리는 창문을 닫지 않았다. 마당 가득 고이는 노랫말. 떠나는 귀를 밤새 비가 적셨다. 무시무시한 하루가 사라지는 소리를 우리는 기록하지 못했다.
비가 왔다. 비가 와도 아침부터 생활의 달인들이 짐을 날랐고 저녁까지생활의 달인들은 용감했다. 비를 뚫고 달리는 파란 트럭의 운명. 와이퍼가 낑낑대도 젖은 담배를 물고 노랫말을 흥얼거리는 생활의힘.
비가 왔다. 트럭은 위태롭게 목표를 향해 갔고 비가 와서 신호등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미끄러졌다. 손가락 사이로 비가 내렸고 방울소리와 함께 드디어 당신이 이사를 갔다. 후렴 같은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시인세계》2009년 봄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얼음사탕 ㅡ여태천
전당포 아저씨의 빛나는 회중시계와 헌 옷 가게 아줌마의 덜덜거리는 재봉틀. 멀리 있는 것처럼 기차가 지나가는 그런 밤이면 전당포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얼음사탕처럼 생긴 집 나온 별. 덜덜덜 기차가 은하를 횡단할 때마다 흔들리고 있었는데도 재봉틀이 고장이 났는데도 어른이 되기 위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구름 위로 바람이 불고 있다고 안경을 이마에 걸친 채 아저씨는 말했다. 빨간 꽃잎 아래서 개미와 대화를 나누는 일에 대해 키다리 아저씨와 이야기할 때 멀리서 굴을 뚫고 있는지 발파 소리가 들렸다. 가슴께 있던 별이 머리 위로 와 있는 그런 밤이면 꼭 안경을 갖고 싶었다. 밤하늘의 철새에게 신호를 보내느라 별이 빛난다고 키다리 아저씨는 적색의 별을 가리키며 말했지만 별은 몇 년째 바람만 먹고 있었다. 별이 빵빵해져 다시 발파 소리가 들리고 전당포 아저씨가 별이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는 그런 밤이면 나는 은하를 헤매고 다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내가 아주 잘 아는 이야기 5ㅡ 여태천
오늘은 유난히 눈이 커서 잃어버린 게 너무 많습니다.
모든 기별은 생각보다 너무 늦게 왔고 불편한 이 아침에 생각하기 이전보다 별이 오래 남아 반짝입니다. 쏟아지던 별도 적막하던 달도 사실은 우리 모두가 너무 오랫동안 오고 있는 까닭입니다.
하나의 별처럼 지붕 위에서 빛나던 생각들 그 밤하늘의 별자리에 참견하던 어리석고 저속한 날들 우리의 운명엔 평균 같은 건 없습니다. 그것도 감정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마가 넓어서 내내 근심이라고 몇 자 적어 당신에게 다시 기별을 넣습니다.
작년보다 좀 더 길어진 가로수의 길이를 생각하면 평균의 속도로 가고 있는 지금이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유심》2010년 5-6월호
-------------------- 여자의 바깥ㅡ 여태천
한 여자가 울고 있다. 그러니 여기 이 말은 온전히 그 울음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울음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날렵한 눈과 시원한 이마를 지나 점점 커지는 여자의 둘레 쌓이고 쌓인 여자의 바깥을 천천히 눈물이 덮고 있다.
여자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공손하게 쓸어올리는 저 검은 머리카락이 조용히 빛날 때
나는 마지막인 것처럼 어둠 깊숙이 손을 넣어 여자의 차가운 가슴을 만져본다.
단 하나의 문장도 완성할 수 없는 납작한 감정 어느새 다 새어버린 여자가 바닥에 누워 있다.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만큼 평평해진 여자가 젖은 눈을 깜빡인다.
떨리는 손가락으로도 파닥거리는 목덜미나 가냘픈 입술로도 재구성할 수 없는 여자
오직 기우뚱한 침묵으로 문장을 만드는 여자
나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888ㅡㅡㅡㅡㅡㅡ
출구 ㅡ여태천
사전을 들고 가기엔 어울리지 않는 곳 자꾸만 빨간 코트에 눈이 가는 날 한 알의 소마*가 필요한 날
구급차가 크게 달려오다 천천히 사라질 때 나는 12월 31일처럼 납작해지고 심장의 소리는 일정하다
커피에서 지난여름의 햇빛을 뽑아낼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한 뼘 정도의 입구가 생기겠지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곳 아니라면 빠르게 되감기는 자막 없는 영상 속으로
시간은 점점 가늘어져 이제 모든 일은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이제 가장 가까이 간다
———— * 『멋진 신세계』에서 사람들은 신경 안정제인 소마로 고민이나 불안을 해결한다.
—《詩로 여는 세상》 2011년 봄호
----------------- 피도 눈물도 없이 ㅡ여태천
여자가 소리를 지른다. 우산도 없이 비가 오는데 죽을 듯이 소리를 지르는 저 여자에게 남자는 영혼을 팔았던 것일까. 남자는 아무 말이 없다.
흙비가 내리는 밤 아스팔트에 머리를 박고 죽어라! 죽어라! 울음을 울음답게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스테이플러 침처럼 남자의 메마른 피부를 파고든다. 피도 눈물도 없이
한 여자가 죽겠다고 결심한 그날 밤 소리의 한가운데 서서 소리만 남은 길바닥에서 남자는 어처구니없게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백을 위해서 남자는 우산을 버렸지만 바닥엔 남자의 영혼을 관통하지 못한 울음이 넘쳐나고 있다.
비가 오는 밤 여자는 남자의 귀를 의심한다. 영혼을 판 남자들이 귀를 막고 밤을 걷고 있다.
—《현대시》2011년 9월호
----------------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가고 (외 2편)ㅡ 여태천
책이 파랗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긴 문장의 색깔처럼 혼자 걸어가는 저 깜깜한 복도에서 오렌지가 파랗다고 아이는 재잘 재잘거리며 복도 끝에서 큰소리로 부릅니다 저 파란 오렌지가 갑자기 무서워지는 순간 아직 쓰지 않은 시를 나란히 책과 함께 세워두고 나직이 읽어 봅니다 오렌지의 문장을 모르기 때문에 아빠는 아이를 몰라서 문장의 길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아이가 복도를 뛰어옵니다 아이가 내딛는 발자국마다 파란 오렌지가 시도록 눈이 부십니다
번역
나는 당신과 달라. 나는 당신을 몰라. 인격이 없는 투명한 두 문장을 가슴에 끌어안고 나는 울었다네. 한때 나는 완벽하게 마음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향해 부서지는 모든 기표에 전념했지. 무엇이 그리 짧았던가. 가늘게 떨어지는 소리의 발자국이여. 나는 이제 한 문장에서 한 문장으로 건너가는 죽음처럼 오래 슬프구나. 낱말과 낱말을 건너 비문처럼 자유로웠다면 나는 당신과 다르고 나는 당신을 몰랐을 텐데.
철학하는 여자
우리의 바깥은 고요합니다, 라고 말한 건 그녀였습니다. 수채화 물감 같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점점 번질 것만 같은 눈빛으로 하얀 손가락이 피워 올리는 저녁의 꽃 그녀의 손을 무조건 믿기로 했습니다.
언젠가는 달을 가리킬 것처럼 기다란 그녀의 손가락 다음 달에는 입가의 꼬리가 조금 더 치솟아 올라갈 것이라고 믿으며 적금을 부었습니다.
오래 기다리는 언어 신기하게도 그것은 그녀로부터 내일의 평온과 오늘의 절제를 배우고 난 뒤의 일 모두가 부러워하는 높이에서 잔고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기술 점심을 굶는 그녀의 오늘과 수줍어하는 얼굴 그녀의 이력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금씩 손가락으로부터 이별하기로 한 건 혼자 말을 배워 책을 읽게 된 한참 뒤의 일이지만 오늘 밤 멀리 있을 그녀에게 가능하다면 이 저녁의 허기를 꼭 돌려주고 싶습니다.
십 초씩, 나와 그녀 사이를 지나가는 여백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요의 바깥입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상상하는가? 뭔가를 찌를 것같이 불안해 보이는 날카로운 욕망이라면 그것이 알 수 없는 암흑의 세계라면 지금 당신은 누군가의 연인이다.
당신은 빈틈없는 표정을 기대했는가? 말랑말랑한 목소리를 예상했는가?
보이지 않는 것을 감출 수 없어 흑심(黑心)의 끝은 저렇게 깜깜하게 빛나고 있다.
밤새 술잔을 간절히 쥐고 있었을 한 사람의 얼굴과 불편한 속을 쏟아냈을 한 사람의 목소리와 그리고 초록색 연필 한 자루
애처롭게 말쑥하고 점잖게 쓸쓸한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않는다. 고 적혀 있다. 이제 당신이 연필을 깎을 차례다.
—《유심》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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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의 세계
마술을 보여줄게. 눈앞에서 비둘기가 날아가고 장미가 피어나지. 하지만 약간의 진실과 행운이 필요해.
위기란 보는 사람마다 다르므로 세종로 간판에 걸린 문구들을 떠올려봐. 그리고 불편한 것들을 하나씩 지워나가야 해. 동그랗게 오므린 입으로 풍선을 만들고 친구의 눈에 맺힌 불꽃의 눈물을 보고 우린 감상적인 사람이 되는 거지.
이곳에선 누구든지 환영이야. 우리는 되풀이해서 말하기를 좋아해. 너는 뭘 내놓을 거니?
우리가 덧없이 안심이 되었을 때 해야 할 일의 가짓수가 늘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조금, 덜 외롭고 싶어 하는 친구들은 길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시와 환상》2012년 가을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큰 바위 얼굴ㅡ 여태천
그분은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얼마나 오랫동안 한쪽만 보고 있었는지 목과 뺨이 빌딩처럼 빛났다. 그분은 선천성 장애라고 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항상 오른쪽만 본다고 했다. 언젠가 그의 출판기념회에서는 부모님의 말씀 때문이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옳은 일 하기 어렵다는 그분의 우회적인 말은 사람들에게 신념이 되었다.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사랑했다. 그분이 교통사고로 왼쪽을 볼 수 없다고 했을 때 연말모임에 왔던 사람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그분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왼편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했다. 하고 싶은 말도 곧장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직선처럼 명쾌하다고 그냥 시원해서 좋다고 했다. 그분은 여전히 오른쪽만 보고 있다. 그분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걸 본 사람은 없다. 가끔 그분도 놀라는 눈치다.
—《시사사》2014년 9-10월호 ------------- 기념일ㅡ 여태천
우리는 비밀스럽게 앉는다.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서 가지고 온 문제를 차례대로 올려놓는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숫자들 13 7 44 9 28 35 그리고 주머니에서 꺼낸 주사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추측한다.
우리는 빙빙 돌면서 노래하고 우리는 빙빙 돌면서 문제를 내고 우리는 빙빙 돌면서 상상한다.
촛불처럼 환하고 폭죽처럼 소란한 시간들이 의자와 의자 사이를 오고간다.
눈이 내릴까? 어디로 가지? 다음에 만나요?
우리는 두 눈을 비비며 펭귄처럼 입을 모은다.
—《시와 사람》2014년 가을호 --------------스윙 외 25편 / 여태천 수상작은 ‘스윙’ 외 49편이며, 그의 시는 웹진 시인광장이 선정하는 ‘2008 올해의 좋은시’에 뽑히기도 했다. 심사위원들은 “여태천 시인은 말의 최소화로 여백을 창조하는 시, 의미의 증식이 아니라 의미의 붕괴를 통해 여백을 창조하는 시를 씀으로써 무기교의 기교를 선보였다”고 평가했다.
스윙 / 여태천
커피 물이 끓는 동안에 홈런은 나온다. 그는 왼발을 크게 내디디며 배트를 휘둘렀다. 좌익수 키를 훌쩍 넘어가는 마음. 제기랄, 뭐하자는 거야. 마음을 읽힌 자들이 이 말을 즐겨 쓴다고 이유 없이 생각한다. 살아남은 자의 고집 같은.
커피 물이 다시 끓는 동안의 시간. 식탁 위에 놓인 찻잔을 잠시 잊고 돌아오는 시간. 오후 2시 26분 37초, 몸이고 마음이고 새까맣다. 20년 넘게 믿어 온 기정사실. 내 오후의 어디쯤에는 불이 났고 구멍이 뚫렸던 것이다. 방금 전 먹었던 너그러운 마음을 다시 붙들어 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7초. 애가 타고 꿈은 그렇게 식는다.
오후 2시 26분 54초, 커피 물이 다시 끓지 않는 시간. 식탁 위로 찻잔을 찾으러 오는 시간. 커피는 아주 조금 식었고 향이 깊어지는 바로 그때 도무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 국자를 들고 우아하게 스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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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 아웃 / 여태천
이번에도 중견수는 머리 위로 날아오르는 볼을 놓쳤다
조명 탑의 불빛 속으로 사라진 볼. 뻔히 눈 뜨고도 모르는 사실들. 판단에도 경계라는 게 있어 봐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의 자리가 있다.
플라이 볼의 실재는 볼에 있는 걸까, 플라이에 있는 걸까. 비어 있는 궁리(窮理)에 있는 걸까.
플라이 볼이 흔적만 남기고 간 허공. 모양이라고도 할 수 없게 물방울들이 모여 있다.
커피 잔 위의 방울들 유난히 골똘하다. 물일까 아닐까. 안과 밖 어디도 아닌 곳에서 동글동글 굴러다니는,
어떤 날은몸도 마음도 공중에 있다. 공중을 선회라는 비행기는 날아가는 중일까, 가라앉는 중일까. 갑자기 다리가 사라진 듯 가볍다.
비둘깃과에 속하는 새 한 마리가 긋고 지나가는 하늘. 조류의 마지막에 대해 할 말이 많지 않다.
적당한 높이에 마음을 걸어 두면 어두워서 뚜렷해지는 생각들. 모두 플라이 아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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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病)에 대하여 / 여태천
나무가 마누에 집중하는 시간. 작년의 잎이 그랬던 것처럼 올해의 잎은 기를 쓰고 자란다.
나무에게 봄은 잃어버린 시간. 나무가 나무에 집중하는 동안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그 女子1)를 나는 생각한다. 이무래도 알 수 없는 이 몹쓸 병에 대해 이웃집 의사는 휴가를 권했다.
나무가 올해의 잎에 집중하는 동안 세탁기는 빙글빙글 돌아가고 나는 대청소를 한다. 쭉 뻗은 내부순환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처럼 이리저리 청소기를 밀고 나딘다. 벚꽃의 거리를 가득 메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한 권의 책도 읽지 않고 애를 쓰고 있는 행운목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다리미질을 한다. 분무기를 떠나는 오늘의 물처럼 봄이 요란하고,
하얀 셔츠를 입고 거울을 본다. 이미 몸은 병이 깊어 하얗게 말라 가고 있으니 나는 불현듯 소년이 될 수 없을까. 나무가 나무에 대해 집중하는 동안 나는 하얀 다리의 그 女子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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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와 함께 / 여태천
무슨 말을 할까 눈인사를 하고 우리의 임무는 서로의 오해를 제거하는 데 있다고 그냥 알은체를 할까 동물원에서 좀 놀았을 뿐인데 모든게 짐승처럼 보여 스타킹처럼 매끈한 오해의 밑바닥 나는 너의 스타킹에서 자주 미끄러지고 낙타에겐 관심도 없다는 듯 뒤도 보지않고 떠나는 너 내가 낙타처럼 오래오래 김밥을 먹고 있을 때 생각은 과거로부터 의심은 외부로부터 범주와 관념이 떠나간 그녀로부터 온다는 생각 어쩐지 식민지적이지 않나요 감정은 순수하게 외부에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고 있기에 눈을 부릅뜨고 있지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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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독증 / 여태천
진지하게 뜻을 내비쳤을 때 세상은 갑자기 사라진다.
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과는 다른 기분으로 행간(行間)은 보이지 않는다.
묵독도 낭독도 허락하지 않고 너의 혀는 멀리서 움직인다.
길가에 지은 집처럼 너무 많은 밑줄이 너를 지나갔다.
아무도 모르는 당신의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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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 여태천 ㅡ 신문 배달원에게
당신은 모든 걸 너무 일찍 해치우고 유유히 또 다른 입구로 걸어간다. 404호와 504호를 건너뛰는 것은 당신의 큰 잘못은 아니다.
신문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사이에 국물을 떠먹으며 나는 당신의 오늘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어쩐지 미안해지려고 한다.
501호 남자의 생머리와 그 아들의 곱슬머리가 502호와 503호 개들이 의심스러울 때 끼어 들어온 스포츠 신문을 보며 당신의 길고 길 하루를 이해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결국에 도착하는 출구처럼 바뀌지 않는 요일과 바뀌지 않는 이름의 순서. 아침에 넥타이를 매면 바뀌지 않는 믿음이 생긴다.
입구가 출구인 오늘 비상구를 찾아 우리는 출근을 서두르고.
원더랜드 1 / 여태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비가 내렸고 늙은 역장이 망명하는 우리를 반겼을 뿐이다.
넘치는 바닷물을 그가 보라고 했을 때 우리가 떠올린 건 마약과 도박과 술, 그리고 바싹 말라버린 하루의 수면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자전거를 가리켰다. 전등을 빨갛게 켜고 중독(中毒)의 골목을 쏘다니는 사람들 심중(心中)마다 따르릉 따르릉 비밀의 세계가 들리는 것 같았다.
교각 아래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노란 자전거들.
창문이 아름다운 게 오래된 빨간 벽돌 때문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구멍 / 여태천
검은 구멍 속에서의 일이다.
셔터를 처음 눌렀을 때 열병을 앓게 한 꽃샘추위가 지나갔다.
시린 손으로 두 번째 셔터를 누르자 거리에 때아닌 폭설이 내렸고 차가운 음식[寒食]으로 하루를 견뎌야만 했다.
세 번째는 으슬으슬 추워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같은 구멍 속에서 오래 살았다.
벚나무를 움츠러들게 했던 공기를 뚫고 처음으로 몸에 싹이 돋았다. 간지러웠다. 때마침 한 줄기 비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게 네 번째다. 죽지 말라고 살아 있으라고 내리는 비[穀雨]는 아름다웠다. 비에 목을 맨 것도 처음이었다.
씨를 뿌리고 여름의 끝[夏至]에 도착했을 때 백일몽을 팔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지하철에서 여러 이름을 사칭했고 또 누군가는 팔다리가 없어도 잘 기어 다녔다. 버리고 간 신문으로 내일의 날씨와 운세를 읽었다. 하루하루가 비밀스러웠다.
가로수의 벌레 먹은 사과를 따는 동안 여섯, 일곱, 여덟 구멍의 수가 자꾸 늘어났다.
이상한 방 / 여태천
이 방은 물 위에 있다 나는 햇볕을 즐기며 주워 온 책을 읽는다 자꾸만 떠밀려가고 있는 글씨들 가만히, 흐르는 방을 생각한다 색깔도 냄새도 맛도 없이 녹아내리는 기분처럼
문이 끝없이 달린 긴 복도를 걸으면 초록색 문이 당신을 뱉는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고 멀미처럼 쏟아지는 말들 누가 쉬지 않고 불을 때는 것일까 아궁이처럼 뜨거워진 방
어둠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모른 채 여전히 똑 같은 저 바깥의 풍경들 부피와 아무 상관없이 마실 수 있을 만큼만 습해지는 방안의 공기들
신발의 힘 / 여태천
신발을 샀습니다. 백화점을 지나가다 발톱이 자란 발이 아파 신발을 하나 샀습니다. 작고 노란 신발. 사뿐사뿐 눈 위를 걷는 신발입니다. 삼십 년 저쪽에서부터 공사 중인 비포장도로를 걸어오고 있는 신발입니다. 양말까지 사고 나니 감춰진 발에 힘이 납니다. 신발 끈을 질끈 동여매고 어디로든 금세 달려갈 신발입니다. 날아가는 신발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비에도 젖지 않을 때가 묻지 않을 신발은 정말이지 처음입니다. 럭키슈퍼와 행복 만화방이 보이고 눈 덮인 운동장의 트랙도 보입니다. 오늘 신발을 샀습니다. 감기약처럼 따끈따끈합니다.
국외자 3 / 여태천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은 채 우리는 또 봄을 맞았고 눈을 감고 침묵했다
초콜릿과 사탕을 먹으며 혀 짧은 소리로 멀리서 온 손님과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꽃이 피는 건지 지고 있는 건지 몰랐다. 그리고 잠시 숨을 멈추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숨도쉬지않고말하지않기는 오늘의 꽃에 대한 우리의 정중한 인사였다.
신문은 점점 면이 많아지고 불안한 문자들이 자꾸만 늘어 갔다.
버드나무는 녹색의 잎을 허공으로 밀어 넣고 내일의 꽃은 온몸으로 힘을 쓰느라 얼굴이 더 빨개졌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무리는 분명하지 않은 채 침묵에 맞춰 손뼉을 치며 봄의 중심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년 동안 / 여태천
횡단보도 신호등이 깜빡거린다 빨간 우체통 앞에서 안절부절 마음도 함께 점멸한다 허공에 어둠이 번지고 은행나무 아래로 오래전에 지나갔거나 지나가야 할 얼굴들이 척척 쌓인다 표정을 되찾은 이들은 두 갈래 길로 은행잎이 되어 하나 둘 떠났다
이게 마지막이다 다시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일은 없을 거다 마주보지 못한 사랑은 냄새를 피웠다 그리고 백년 동안은 평범한 적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노란 은행의 열매들은 믿음이었다가 두려움이었다가 불안이었다가 결국엔 독이 되었다 점멸하는 신호들이 모든 기억을 어지럽혔다
돌아와 빨간 우체통에 머물고 있을 어둑어둑한 그리움에 대해 생각하는 저녁이다 노란 은행의 열매들이 우는 저녁이다 누군가 그 마음을 훔치는 저녁이다
손님 / 여태천
구름이 베란다 안으로 들어와 앉는다. 새벽이면 잠시 비 내리고 때때로 동남풍이 부는 이곳에 벚꽃이 무더기로 피었다. 지상으로부터 20여 미터 상공. 엘리베이터 소리도 계단을 오르는 기척도 없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신발장의 신발들. 백열등 아래서 빤히 쳐다본다. 백혈구가 떼를 지어 다니는 먼 안드로메다를 생각했다. 손을 뻗어 지그시 눌러 본다. 중심이 새까맣게 변하더니 바깥에서부터 천천히 밝아졌다. 이곳에 세를 들어 살기 시작했다.
퇴행성 감정 / 여태천
이것은 정말 오래된 현실입니다.
온몸의 반을 잃고 힘겹게 헤엄치고 있는 니그로. 저 열대어는 다량의 눈물을 흘리고 너그러워진 게 틀림없습니다.
말브량슈는 눈물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눈앞에서 오래 머물다 사라진 사람은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지루한 표정이었습니다.
찬밥을 물에 말아 혼자 먹는 늦은 점심. 마음이 쌀뜨물처럼 몽롱합니다. 같이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놓고 나간 사람을 천천히 발라먹는 오후입니다.
거북이처럼 느리게 저녁의 골목을 걸어가다가 시장을 묻는 여자에게 수족관을 알려 줍니다.
골목 / 여태천
조금 우스워지고 싶을 때 골목을 걷는다.
김씨 아저씨가 구워 내는 붕어빵 냄새는 즐겁다. 달콤한 붕어빵 생각에 나는 조금 가벼워진다.
종일토록 종이만 줍는 이씨 노인과 날씬해지고 싶은 홍씨 아줌마는 황금잉어빵을 먹으며 기억상실증에 걸린 붕어처럼 매일매일 골목을 이야기한다.
아이들은 꼬리가 잘릴까 두려워 꼬리를 물고 골목을 달리지만 골목은 붕어의 것이다.
나는 삼다수 한 병을 들고 목구멍이 간질간질할 때까지 골목을 걷는다. 골목은 사라지기 좋은 곳이다.
어게인, 당신 / 여태천
우리는 기억 속에서 드문드문 있었다. 낡은 모자를 쓰고 예전의 유니폼을 입고.
오래된 글로브는 어디로 갔을까? 스코어보드의 빨간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당신.
당신의 얼굴과 입술이 낯설어지는 저녁. 몸이 점점 어두워졌다.
기억으로 돌아가 순수하게 기억의 형식이 되기로 작정하자 당신도 나도 진짜 흑백의 사람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 여태천
두 손을 높이 들고 불안은 고드름처럼 자란다.
당신은 맨발이었고 나는 유령처럼 당신을 안았다.
굴뚝과 굴뚝처럼 우리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 여태천
새벽 2시, 그녀는 부어오른 종아리를 매만지고 있겠지. 욕조에는 뜨거운 물이 넘치고 시계의 태엽은 조금씩 풀리고 있을 것이다.
고공 크레인 위에서 도시의 외곽을 바라보다 그냥 떨어지기로 마음 먹은 사람. 어느 집에선가 그를 위한 밥상이 차려지고.
새벽 기도를 가는 여자의 단단한 몸집 뒤로 꼬리를 내린 고양이 한 마리 지나간다.
고양이가 사랑하는 생선과 생선의 비린내를 좋아하는 파리와 입을 벌린 채 기다리는 분리수거함.
신물을 잔뜩 싣고 털털거리는 스쿠터 1, 스쿠터 1, 스쿠터 3. 내일의 물건들이 내일의 일에 골똘할 때
쓰레기봉투처럼 자꾸만 쌓이는 요일들. 아파트 단지를 다 돌자 우리는 연결돼 있었다.
빙하기 소녀 / 여태천 ㅡ 루시에게
오늘 밤은 그냥 자려고 해. 불을 끄고, 아무 생각도 없이 겨울밤들을 우수수 건너가는 저 눈을 보며 그 눈을 보고 휘둥그레진 초원의 커다란 눈을 떠올려.
큰곰, 작은곰, 페가수스, 긴 수염의 염소마저 사라지고 처음으로 해가 뜨지 않았던 그날. 은행나무가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은 쌓이고 그 속에 잠시 가려운 몸을 눕혔는데 누가 그걸 기록으로 남겼을까.
독한 술을 희망으로 알았던 저 겨울밤들을 오늘 밤 가만가만 생각하면서 오래된 이 유리 안에서 그냥 자려고 해.
펄펄 내리는 저 빙하기의 눈은 아름답고 펄펄 눈이 내리는 이 도시의 내일을 보고 있으면 익숙한 노래가 생각나. 아, 전구 알처럼 따뜻해지는 몸. 투명하게 밝은 이곳에선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아.
눈이 그쳐도 모든 건 그대로야. 치마는 여전히 짧고 불행은 불행을 닮고 이곳의 개들도 저 폭설을 밟고 지나가겠지.
어게인 당신 / 여태천
우리는 기억 속에서 드문드문 있었다. 낡은 모자를 쓰고 예전의 유니폼을 입고.
오래된 글러브는 어디로 갔을까? 스코어보드의 빨간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당신.
당신의 얼굴과 입술이 낯설어지는 저녁. 몸이 점점 어두워졌다.
기억으로 돌아가 순수하게 기억의 형식이 되기로 작정하자 당신도 나도 진짜 흑백의 사람이 되었다.
투명인간 / 여태천
나는 잘 보이고 싶은 사람입니다.
손님은 메뉴판에도 없는 안주를 주문하고 종업원은 30분마다 담배를 피웁니다. 어디에 속하는지 몰라 그냥 웃습니다.
당신이 옆 테이블에 한눈을 파는 동안 가장 부끄러운 일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상상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기를!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키스를 하고,
누군가 이 세상으로부터 눈을 감아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통화를 하는 그사이에 메뉴판을 세 번이나 읽고 있습니다.
당신이 내 앞에서 내 뒤통수를 빤히 보고 있을 때.
버릇 / 여태천
영화에 등장하는 개의 수는 홀수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골목의 전봇대 수를 헤아린다. 골목은 사라지기 좋은 곳.
백만 스물하나의 얼굴처럼 만두 집 사내는 둥글고 만두 집 고양이는 손을 들고 웃는다.
둥글게 얼굴을 감싸며 사라지는 만두의 냄새. 네가 멀리서 팔을 움직여도 나는 너무 쉽게 전염되고.
백화점을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택시의 번호판. 모든 걸 말해 주는 네 자리가 멀어지고 있다.
사소한 운명처럼 스물한 번째의 버스를 타고 누군가는 사라질 것이다.
호주머니를 돌아다니는 동전처럼.
연애를 읽다 / 여태천
그녀가 웃었다 생각보다 하얀 손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폭설로 교통이 두절된 먼 여관 간신히 머리만 내놓은 표지판처럼 두 사람은 그렇게 서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멀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한 여자가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표정으로 낡은 침대 위의 그녀가 따라한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한 여자의 눈은 순결했다
세상에 없는 계절에는 밤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는 남자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늦은 저녁의 우편배달부는 마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그곳을 지나갔다 한 여자의 이마에 불이 켜지고 한 남자는 지상의 남은 겨울을 바쳤다
오늘은 안 되겠어 자꾸만 낯선 숫자가 떠올라 질서가 잡히지 않는 하루와 어수선한 여관이 그녀는 이 모든 게 못마땅했던 걸까
눈의 나라 창밖에는 폭설이 내리고 나는 오래된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기록들 / 여태천
버스를 기다리는 사내의 가느다란 눈매와 한낮의 공허를 날고 있는 나비 한 세계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 사이에 모든 뜻은 빠짐없이 기록된다.
기록되지 않는 것은 다만 그 뜻과 먼 어떤 물질의 이동
한낮의 나비에게서 해질녘의 저 사내에게로 아무 데다 거처를 정할 수 없는 것들이 참을 수 없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모든 것은 관계의 흔적일 뿐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순환버스는 늘 같은 시간대 이곳에 정차하고 누군가는 보잘것없는 이 사실을 굳이 알고 있으며 저 사내와 나비는 아직도 오늘인 것이다
분명한 오늘이 분명하지 않은 나비의 곡선비행처럼 오는 듯 다시 떠난다.
아무 관계도 아닌 저 사내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오후의 에테르
살짝살짝 떨어지면서 시드는 한 세계 그럴수록 더욱 쪼그라드는 기록들
세상의 집 / 여태천
밤이 되면 집은 뚱뚱해진다. 저마다 하나씩의 방을 차지하고 사람들이 꿈을 꾸는 것이다. 안녕 안녕 번역되지 않은 말들이 밤의 철창 사이로 환하게 손을 내민다. 우리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지만 세상의 모든 집에서 꿈은 흘러나와 밤이 뚱뚱해진다.
전력질주 / 여태천
우두커니 몰려오는 저녁의 비를 바라보는 새의 표정으로.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저 타자. 한때 그도 몰려오는 저녁의 비만큼이나 감정의 두께를 가졌겠지.
게임은 언제나 정교한 자세를 요구해. 내리는 저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큼의 주의력이 필요한 거야.
그런데 아무런 준비 없이 배트를 휘두르고 싶어. 정말이지 근사하게 오늘만큼은 저 새와 함께 우아하게 저공비행을 하는 거야. 그 어디쯤에 분명 네가 있을 테고 무심한 너의 그림자에 놀라 나는 잠깐 당황하겠지.
차례로 자리를 일어서는 저 관중들 앞에서 헛스윙으로 삼진을 당하고 돌아서는 타자의 무표정한 얼굴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싶어. 오늘따라 너의 꽉 다문 입술이 슬퍼 보이는 걸까.
이미 끝난 게임 9회 초 마지막 공격에서 터지는 장외 홈런. 우리의 생은 펜스 너머로 아득히 멀어지고 낮게 몸을 낮추며 비행하는 저 새는 오늘의 비를 무사히 피할 수 있을까.
먹이를 발견한 첫 비행의 저 새를 봐. 그렇게 다시 전력을 다해서 비가 내리는 베이스를 우리는 돌고 또 돌고.
- 여태천 시집 <스윙> 중에서...
여태천 시인 여태천197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국외자들>이 있다. 2008년 제 27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동덕여대 국문과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