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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23강
꿈꾸는 요셉
말씀/창37,38장
요절/창37: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오늘 말씀에는 야곱의 아들들 중에 중심인물로 요셉과 유다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대로 그의 삶을 인도해 가십니다. 또한 유다의 심각한 허물과 연약함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런 유다를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십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섬세한 섭리와 은혜의 손길을 깊이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꿈꾸는 요셉 (37장)
야곱은 마침내 아버지 이삭이 살던 고향 땅에 정착합니다. 이제부터 야곱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그 핵심은 요셉입니다. 그의 나이 17살 소년으로 우리로 하면 고1입니다. 요셉은 형들과 양을 치면서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합니다. 야곱은 이런 요셉을 어떻게 키웁니까?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에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요셉에게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고급스런 채색옷도 지어 입혔습니다. 자녀들은 엄마가 사과 하나를 똑같이 반으로 잘라 한쪽씩 공평하게 나누어주어도 서로 상대방의 것을 먼저 쳐다봅니다. 그 크기로 부모의 사랑을 판단하고 서운해 하곤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열두 명이나 되는 아들들을 낳아놓고 유독 요셉만 편애하였습니다. 노골적인 아버지의 편애를 보는 형들의 상처와 분노는 안봐도 비디오입니다.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는 대신 형들로부터는 ‘왕따’가 되었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하나님은 어떤 뜻을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또 9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이 두 꿈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요셉이 장차 지도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형들에게 미움 받아 고달픈 환경 가운데 좌절하기 쉬운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엄마 없이 자라 연상여인을 짝사랑하며 고독을 씹으며 지내기 쉬운 요셉에게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비록 ‘아싸’이지만 장차 지도자가 되어 시대를 구원하고 이끌어가게 될 꿈을 주셨습니다. 당시 꿈은 하나님의 계시로 인식되었습니다. 또 두 번씩이나 비슷한 꿈을 꾸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그 꿈대로 이루신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시고 그 꿈대로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현실적인 것들을 많이 쥐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입혀주었던 채색옷과 같은 사랑을 기대합니다. 다른 형들처럼 일하지 않아도 되고 아버지 품에 안겨 재롱이나 피우는 달콤한 솜사탕 같은 사랑을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빨리 아들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하늘의 뭇별을 보여주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소망을 먼저 심어주셨습니다. 야곱에게도 허허벌판 광야에서 사닥다리 환상을 보여주시며 언제나 그와 함께 하시고 열왕을 낳는 삶을 살게 될 비전을 심어주셨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채색옷의 사랑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유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아버지 품속에서 자족하고 안주하는 응석받이로 전락시킬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이 주시는 꿈은 우리를 위대하게 만듭니다. 큰 스케일의 사람이 되게 하고 역사적인 안목을 가지고 인생을 살게 인도합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어려움과 시련도 능히 감당할 힘을 줍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간직한 요셉은 어떤 삶을 살아갑니까? 요셉이 형들에게 꿈을 말할 때 나이 17살입니다. 이 정도 나이면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하면 형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나이입니다. 그런데도 6,7절 사이에 요셉이 형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는 대목을 원어로 보면 “보십시오”라는 말이 세 번이나 들어있습니다. 이는 요셉이 자기가 꾼 꿈에 대해 얼마나 형들의 관심과 주목을 이끌어내면서 집요하게 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형님들, 내 말 좀 들어보세요. 내 얘기 좀 들어봐요’하면서 자기가 꾼 꿈을 말하였습니다. 또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꿈을 말했다가 한번 욕을 얻어먹었으면 다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이번에는 형들과 엄마, 아빠에게까지 ‘보십시오. 내 얘기 좀 들어보세요’하면서 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이 주신 꿈에 흥분되고 말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19절을 보면 형들은 요셉이 오는 것을 보면서 ‘야, 저기 꿈꾸는 녀석이 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형들이 요셉을 조롱하는 소리지만 평상시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꿈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살았는지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형들이 볼 때 요셉은 꿈꾸는 소년이었습니다. 늘 꿈을 생각하고 꿈에 젖어 있고 꿈 때문에 흥분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꿈이 꿈으로 머물지 않고 현실에서 성취될 것을 확신하고 늘 꿈을 잊지 않고 꿈에 사로잡혀 살고 꿈을 말하는 사람이었음을 의미합니다. 42장 9절을 보면 요셉이 나중에 총리가 되어 그의 앞에 와서 절하는 형들을 보면서 그때 자신이 꾸었던 꿈을 생각했다고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보면 그는 일생 동안 이 꿈을 잊지 않고 놓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의 꿈과 거리가 먼 현실로 자꾸만 그 인생이 미끄러져 갈 때도 요셉은 그 꿈을 놓지 않고 붙들었습니다. 그의 꿈은 절망적인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야’라는 확신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간직하므로 고난의 환경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로서의 꿈이 있었기에 인생을 함부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소망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그 꿈 때문에 현실이 어려워도 인내하게 됩니다. 꿈을 잃은 청년은 환경이 조금만 어려워도 절망합니다. 꿈을 잃은 청년은 안주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간직하고 붙들고 있는 사람은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아름다운 미래를 소망하면서 현재를 절제하고 인내합니다. 청년이 꿈이 있을 때 절망과 안주와 쾌락에 함부로 자신을 내맡기지 않습니다. 요셉에게 있어 꿈은 그의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간직해야 할 꿈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요셉에게 어떤 꿈을 심어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요셉에게 결코 개인의 성공과 야망을 심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신의 영달이나 욕심을 이루기 위한 포부를 심어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 꿈은 하나님의 오랜 인류구원의 계획과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요 그 일에 쓰임 받는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주시는 꿈은 나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꿈이 아니라 이타적이며 희생적이고 역사적인 꿈입니다. 우리의 잠시 욕망을 만족시키는 일장춘몽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계획에 쓰임 받는 하나님과 관계된 꿈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시몬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라는 꿈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 핍박자요 포행자로 살던 바울에게는 이방의 빛이 되어 땅 끝까지 다니며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꿈을 주셨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진주 캠퍼스 개척의 조상으로, 어떤 분에게는 12제자양성을 통한 교회 토대를 다지는 제자양성가로, 어떤 분에게는 해외 선교사로, 또 우리 삶의 현장에서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하시는 뜻을 두시고 꿈꾸게 하시고 하나님은 그대로 이루어 가십니다.
그럼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나타내실까요? 요셉 당시에는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많이 계시하셨지만 지금은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 두신 바를 많이 알려주십니다. 물론 우리의 기도 속에, 또 우리가 꾸는 꿈과 환상, 예언, 주위의 상황과 환경들을 통해, 또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목자님들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해주기도 하십니다. 굳게 붙잡고 나아가도록 감동을 주시는 말씀들이 우리 각자에게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나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꾸게 하신 꿈을 깨닫고 그 꿈에 붙잡혀 살아가고 인도함 받는 삶 되기를 기도합니다.
반면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그 꿈을 짓밟고 묻어버리고자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의 꿈이 과연 어떻게 되나 보자” 비웃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인생이 그의 꿈과 거리가 멀어지도록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이는 요셉에게 꿈꾸게 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꺾어버리고자 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몸뚱이를 구덩이에 던질 수는 있었지만 그의 마음에 간직된 꿈을 묻을 수는 없었습니다.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길 수는 있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꿈까지 팔아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요셉의 채색옷은 벗겨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었지만 요셉의 가슴속에 간직된 그 꿈을 찢을 수는 없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꿈을 훼방하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요셉의 꿈을 앞당기는 터널을 뚫어주는 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셨다고 해서 바로 그 꿈이 성취되도록 꿈같은 인생을 살게 하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주신 때는 17살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성취되는 때는 13년이 지난 30살 때였습니다. 그 13년의 세월은 요셉이 철저하게 부서지고 인생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과정이었습니다. 물론 요셉은 어려서부터 순수하고 정직하게 자랐습니다. 그래서 형들의 작은 과실도 용납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일러바쳤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도 숨김없이 형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그런 순수하고 정직한 것만 가지고는 큰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요셉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큰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생의 쓴맛 단맛, 즉 산전수전을 다 겪어봐야 합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고 굶겨 죽이고자 했습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시련입니까? 요셉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형들에게 버림을 받아 깊은 구덩이에 빠져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요셉이 가지고 온 도시락을 까먹고 있습니다. 요셉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친형들이 자기를 깊은 구덩이에 쳐 박아 놓고 히히덕거리며 간식을 먹고 있는 그 모습이 잔인하고 끔찍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42장 21절에 보면 이때 요셉은 형들에게 애걸했다고 했습니다. “형님들, 제발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 채색옷 안 입고 다닐께요. 꿈 이야기 안할께요.” 통사정했을 것입니다. 자기는 아버지 심부름에 순종하기 위해 무려 100킬로미터를 걸어서 도시락을 형들에게 가져다주었건만 형들은 그 도시락을 다 까먹고 자신을 노예로 팔아먹고 은 20냥까지 챙기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때 요셉은 인간 내면의 밑바닥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채색옷을 입고 다닐 때 형들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자기는 정직하게 형들의 잘못을 일러바친다고 했지만 그때 그 형들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을까? 자기는 그저 순수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꿈 이야기를 하고 다녔지만 형들은 자기를 얼마나 아니꼽고 얄밉게 생각했을까? 비로소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련과 아픔을 통해 요셉의 마음을 넓히시고 깊이 있는 생각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분명 아름답고 찬란합니다. 고상하고 멋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꿈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요셉도 그렇습니다. 요셉은 앞으로 주변에 수많은 국가들과 백성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섬길 큰 지도자가 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채색옷 입고 다니면서 잘난 체하면 되겠습니까? 자기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잡아내고 입바른 소리나 하면 되겠습니까? 꿈 하나 잘 꿨다고 자기가 세상에서 최고인 것처럼 뻐기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가 꿈대로 장차 민족의 구원자요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꿈도 꿈이지만 그 꿈을 하나님이 이루실만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꿈을 주시고 많은 연단의 인생길을 반드시 우리에게 던져주십니다. 우리는 그 연단의 인생길을 잘 걷고 감당해야 합니다. 요셉이 진정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심도 넓어야 하고 삶의 현장도 체험해봐야 하고 각종 인생들의 아픔을 알아야 합니다. 배도 고파봐야 하고, 사랑받지 못한 자의 설움도 느껴봐야 합니다. 소외된 자, 구덩이에 던져져 억울해하는 자들의 서러움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형들을 쓰셔서 요셉에게서 채색옷을 벗기시고 구덩이에도 던지시고 노예로도 팔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분명 꿈꾸는 시간은 행복하지만 연단 받는 시간은 괴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연단 받는 그 시간이 바로 꿈이 영글어가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현실이 때로는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꿈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고 때로는 정반대로 가는 것 같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잘 감당하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반드시 그 꿈대로 인도하시고 쓰실 것입니다.
Ⅱ. 유다와 다말 (38장)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후 유다는 자기 형제들을 떠나 멀리 아둘람으로 가출을 합니다. 요셉을 노예로 판 것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때문일까요? 아무튼 형제들을 떠나 살게 된 유다는 거의 신앙을 버린 듯이 살아갑니다. 우선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는 사람의 딸을 만나 결혼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조상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세 아들을 낳았는데 다말이라는 여인을 큰 며느리로 맞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신혼 첫 날 밤 큰 아들을 데려가셨는데 그가 하나님 앞에 악했기 때문입니다. 졸지에 다말은 과부가 되었는데 더욱 슬픈 것은 후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런 불행한 사태를 조금이나마 돕기 위한 관습이 있었는데 그것은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고 그 남편의 형제가 그녀를 아내로 삼으라”는 계대결혼입니다. 이는 형의 끊어진 가문을 이어주고 과부된 자를 돕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유다는 이에 따라 둘째 아들을 형수에게 장가들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에 두었던 다른 여인이 있었는지, 아님 죽은 형의 재산이 탐이 났는지 일부러 아이를 갖지 않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십니다. 유다는 덜컹 겁이 났습니다. 졸지에 두 아들을 연거푸 잃고 이러다가는 세 아들을 모두 잃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셋째는 큰며느리에게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며느리가 아들 잡아먹는 귀신같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셋째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끕니다.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내며 그녀가 스스로 팔자를 고치길 바랍니다. 그렇지만 유다 가문은 이 일로 말미암아 대가 끊어질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 위기가 어떻게 극복됩니까? 얼마 후 유다의 아내마저 세상을 뜨자 유다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친구를 찾아갑니다. 이 소식이 며느리 다말에게 전해집니다. 그녀는 몸 파는 여인으로 변장하고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합니다. 이는 14절을 보면 셋째 아들이 어른이 되었는데도 자기에게 장가를 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다말을 창녀로 생각하고는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그리고는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담보로 잡힙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다말은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유다의 친구가 유다에게 속삭입니다. “자네 며느리가 임신 했대. 지금 인터넷 실검 후끈 달아올랐어.” 유다는 놀라 말합니다. “그녀를 끌어내 불사르라!” 일종의 명예살인을 시키고자한 것입니다. 다말은 장작더미에 서서 최후진술을 합니다.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이 도장과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입니까?” 그것은 유다의 것이었습니다. 이로서 유다의 소행과 가식과 위선이 다 드러났습니다. 유다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면 유다는 무엇이 자기보다 옳다는 걸까요? 우리는 다말의 행동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며느리가 몸 파는 여자로 변장하고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동침하고 부정한 씨앗을 낳은 것은 윤리적으로 용납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런 다말의 행동이 자기보다 더 의롭다고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다말의 행동의 어떤 점이 자기보다 옳다고 말한 것일까요? 자신의 집에 끊어진 대를 잇고자한 다말의 열망과 행동이 자기보다 더 옳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둘째 아들까지 잃고 하나 남은 셋째마저 잃지 않고자 다말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셋째에게 집착하고 다말에게 거짓말까지 하며 며느리를 친정에 보내 그가 재가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본문을 보면 유다는 당시 관습법에도 신실하지 못했고 며느리 다말에게도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가문의 대가 끊어질 위기 속에서도 유다가 한 것은 셋째 아들을 며느리에게 주지 않고 버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자기 아내가 죽자 곧바로 육의 소욕에 이끌려 몸 파는 여자를 찾아 동침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며느리의 불륜에 대해서는 곧바로 불살으라고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말의 행동을 정죄하거나 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에게서 쌍둥이가 태어나게 하시고 자식들의 온갖 악과 유다 자신의 허물로 대가 끊어질 위기에 처한 유다 가문의 계보를 잇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중 둘째 아들 베레스는 보아스와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그를 통해 다윗 왕가가 탄생하였습니다. 나아가 그의 후손을 통해 그리스도가 오시는 통로가 되게 하십니다.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나 있고 그중에는 요셉 같은 훌륭한 사람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유다를 택하시고 그와 다말에게서 태어난 아들을 메시야의 조상으로 축복해주셨습니다. 또한 다말은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인물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오직 은혜로 구속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37,38장을 보면 요셉과 유다는 서로 비슷한 시기에 아버지 집을 떠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가 됩니다.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지만 다음에 보면 그는 힘들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언제나 신실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삽니다. 반면 유다는 37장에서는 동생 요셉을 팔아넘기는 일에 앞장섰고 38장에서는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고 두 아들은 어떻게 키웠는지 하나님 앞에 악하므로 모두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아내가 일찍 죽자 너무나 쉽게 몸 파는 여인을 찾아 잠자리를 함께 합니다. 그의 삶은 육신의 정욕에 이끌리는 대로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당시 제도에 대해서도, 며느리에 대해서도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유다를 통해 인류의 구원자를 보내십니다. 가나안 여자인 다말의 신실함으로 유다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계보가 이어지게 하십니다. 이로 볼 때 하나님은 구속역사를 이루시되 죄인의 허물과 실수, 그리고 부끄러움을 감당하시며 그를 들어 쓰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사람을 택하시고 쓰시되 그의 주권대로 쓰시는 분이시며 오직 은혜로 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는 다만 택함 받고 쓰임 받는 것 자체로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무리 내가 부족하고 허물이 있어도 낙심하고 절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쓰임 받고자하는 소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캠퍼스 구속사역에 쓰임 받는 것 또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전히 허물이 있고 연약함에도 변함없이 택한 우리를 은혜로 귀하게 쓰실 것을 바라보고 소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일방적인 은혜로 택하시고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쓰심을 생각할 때 감사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주신 꿈을 깨닫고 굳게 붙들어야겠습니다. 상황과 현실이 어렵더라도 요셉처럼 하나님이 주신 그 꿈을 생각하고 꿈에 사로잡히고 하나님이 이루실 그 꿈에 대한 확신가지고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루시기까지 우리에게 주어지는 연단과 훈련을 잘 감당하므로 장차 위대한 꿈의 주인공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