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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백산맥 원문보기 글쓴이: 山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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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유럽 같으면 대개 자유주의 좌파와 우파 사이에, 미국 같으면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이에 좌우파의 구분선이 형성된다. 한국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좌파가 완전히 제거된 상태에서 보수주의 내부 당파, 또는 보수적 성향의 자유주의와 극보수주의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198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정치사회는 우파의 일방적인 독주체제였다.」
「야당으로의 정권 교체라는 충격이 가실 즈음인 2000년 중반, 6․15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국민이 북한을 바라보는 태도는 매우 복잡해졌다. ‘적’이라는 원시적 감정에, ‘거래 상대’라는 합리적 계산 논리와 주변 열강에 함께 맞설 ‘미래의 공동체’라는 인식이 뒤섞였던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벤처 거품, 카드 대란, 민영화, 경제의 금융화, 한미자유무역협정 등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은 결국 심각한 양극화를 낳았을 뿐이다.」
「실체로서의 좌파와 우파라는 대립개념이 해당 사회의 역사와 정치현실에 강하게 의존하는 생동감 넘치는 개념임을 잘 보여준다. 이런 생동감, 즉 모순적이기까지 한 정치적 역동성이 빠진다면, 좌우 구분은 그저 단순한 기호의 나열이나 낙인에 지나지 않는다.」
「좌우파를 가르는 두 개의 구분 축을 이용하여 한국의 정치세력, 정치인, 지식인들의 좌표를 잡아 볼 수 있다.
가로축의 왼쪽에는 평등의 확대를 중시하는 강도에 따라 극좌파, 좌파, 중도좌파 등 세 단계를, 오른쪽에는 불평등의 불가피성을 옹호하는 강도에 따라 극우파, 우파, 중도우파 등 세 단계를 설정한다. 세로축은 남북 관계에 대한 태도에 따라 위쪽으로는 남북화해의 태도를, 아래쪽으로는 대북적대의 태도를 나누어 배치한다.
대북화해의 태도는 통일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는 통일 지상주의적 태도, 한민족의 전통과 민족의 부흥을 강조하는 전통적 민족주의 태도, 한반도 평화를 추구하는 선에서 남북의 화해협력을 지지하는 태도로 나눌 수 있다. 세로축의 위로 갈수록 우파는 ‘친북’ 성향이 강하다고 지적한다.
통일지상주의
전통적민족주의
(평화추구)화해협력
극좌파 ―― 좌파 ―――중도좌파―――― 중도우파 ――― 우파 ―― 극우파
(반북공존)화해협력
흡수통일
전쟁불사
대북적대의 태도는 북한체제에 대해 비판적이며 통일보다는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화해협력의 태도, 북한을 흡수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흡수통일의 태도, 북의 위협을 제압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군사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보는 전쟁 불사의 태도로 나눌 수 있다. 밑으로 갈수록 적대성이 강해진다.」
다음 주제인 <법치주의>에서 안병진 교수는 ‘법적 지배’의 핵심 취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태도, 사법부의 위상에 대한 좌우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파는 안정과 국익, 그리고 이를 위한 엘리트의 지혜를 강조한다. 민주화 이후 우파는 법과 질서의 패러다임을 민주공화국과 선진화의 최고 가치로 간주한다. 반면에 민주화 이후 각종 권리 주장에 대한 사회적 관용의 분위기가 만연하면서 노동자를 비롯한 각 이익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전투적으로 관철하고자 하는 경향을 가장 큰 사회적 위협으로 보고 있다. 우파의 법치주의 인식은 그 밑바닥에 다수 대중의 비합리성과 이에 영합하는 정치 엘리트에 대한 불안 및 비판의식이 깔려 있다. 따라서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안전판이 법관들의 지혜로운 판결이며, 다수 대중의 여론이나 의회 정치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사법부의 최종 결정에 순응하는 것을 법치주의의 가장 이상적 지향점이라고 본다.
좌파는 사회적 강자에 대한 견제, 자유, 민주주의적 합의를 강조한다. 법이란 약자들의 자유를 확대하거나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인식의 배경에 깔려, 한국의 법은 자유로운 동의에 기초하기보다는 사실상 기득권자의 편익에 따른 자의적 적용이기에 진정한 의미의 법치주의라 부를 수 없다고 본다. 이같이 자의적 지배에 비판적인 문제의식은 자연스럽게 현재의 법질서에 대한 저항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약자의 자유를 강조하는 좌파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동기가 강한 엘리트들의 지혜가 의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법부가 행사하는 최종 심판관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김용옥 교수는 엘리트 사법부가 아닌 민중이 최종 결정자라는 이론적 문제의식을 강조한 바 있다. 좌파가 인민적 의지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이 없으면 법은 지배계급의 안정화 기제로 쉽게 활용되기 때문이다.」
다음 주제인 <남북 관계>에서 구갑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파는 남북 관계가 적대적인 국가 사이의 관계라는 기본 인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남북 관계에서 안보를 제일의 가치로 설정하여 군사력의 우위에 기초한 대북 정책을 선호한다. 강압에 기초한 공격적 관여 정책을 선택하기도 한다. 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해야 협력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궁극적으로는 흡수통일을 지향한다.
좌파는 군사력에 기초한 안보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북의 핵과 남북 협력은 분리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정치 ․ 군사적 의제를 제기하기보다는 경제 ․ 사회문화적 협력을 통해 북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한 대북 화해협력 정책은 방어적 관여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한반도식 통일은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단계를 점진적으로 밟는 것이며, 동시에 이 과정에서 ‘시민참여형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궁극적으로는 국가연합안을 지향한다.」
이 주제에 대한 구갑우 교수의 담론을 바탕으로 남북 관계와 통일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본다.
한반도 통일, 주변 4강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꿈에서도 소원인 통일, 분단 69년 동안 참 많은 한국인들과 조선인들이 통일을 염원하였지만 통일은 아직 신기루일 뿐이다. 1950년에 북한의 통일욕구에 따른 전쟁을 경험한 이후로는 남과 북 사이에 더욱 적개심과 의심만 누증하였다.
그러나 벌써 두 세대가 흘렀다. 1950년 전선에서 마주쳤던 주력 세대들은 이제 모두 사라지고, 손자 세대들이 남과 북에서 생산 세대를 이루고 있다.
분단 초기가 다시 합쳐지기 위한 극렬한 몸부림의 시대였다면, 중기는 통일에 실패하고 오히려 증오만 깊어진 외면의 시대였다. 2014년 현재의 한반도는 삼국시대나 고려, 발해의 남북국 시대처럼 앞으로 수백 년 동안 두 개의 나라로 존재하느냐 아니면 극적인 통합을 이루느냐하는 기로 점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로 점에서,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등 네 나라에 대한 통일 정책을 어떻게 펼칠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 그들을 통일 성공에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는 통일의 한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주변 4강인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가 한반도 통일에 대하여 갖는 지분을 비교해 보면 5 : 3 : 2: 1 정도가 될 것이다. 각자의 지분을 보장받는 한반도의 평화적인 분단 구조 유지가 모두에게 현재로는 유익하지만, 한국의 국력 강화와 외교 노력에 따라 앞으로 각국의 이해관계가 변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해가 갈수록 미래에 만들어질 통일한국에 대한 계산에서 다양한 차이가 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평화통일을 이룩하려면 이 차이를 빈틈없이 파고들어 쐐기를 박아 지렛목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물론 지렛점은 강소국의 힘과 단결된 국민정신이다.
중국은 한반도 분단 구조 상태를 유지해야만 동북지역 국경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기본적 인식을 갖고 있지만, 통일 운동이 시작되면 전쟁이 아니라 협상의 방법을 통한 한반도 통일을 일단 수긍은 할 것이다. 그러나 통일한반도가 장차 친미반중 정책을 펼 정치세력에 의해 통일되는 것은 극력 반대할 것이다. 미국의 군사력과 결합하여 훨씬 더 강력해진 한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동북지역의 불안정성이 높아질 우려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친중반미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아서 적극적으로 통일을 주선할 것이고, 그 정도는 안 되어도 中美中中, 즉 중국과 미국에 똑같이 등거리 외교를 할 중립 정권 정도라면 한반도 통일을 용인할 수 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친미중중이라 하더라도 중국을 적대시하지 않고 보통의 이웃나라로 대우하는 정도만 되도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는 현 상태보다 통일한반도가 국익에 도움이 클 것이기 때문에 경제적 이득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 통일을 주선할 가능성이 많다. 통일한반도는 남한의 지속적인 경제 발전 뿐만 아니라 북한 지역의 경제 개발을 위하여 필요한 시베리아의 원유, 가스, 석탄, 목재 등을 대량으로 구입할 큰 고객이 될 것이 분명하고, 한국과 일본이 시베리아 대륙횡단 철도, 항공 노선, 육로 등의 기간교통시설을 이용하게 됨으로써 얻는 통행료 등의 이득이 매우 많을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가 통일운동에 참여할 명분을 주고 지분을 보장해 준다면 소극적이나마 참여할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한반도 분단 상태의 장기 유지를 넘어 영원한 유지가 최선이다. 통일한반도는 일본에게 바로 이웃에 매우 강력한 라이벌이, 역사적으로 구원이 짙은 주적이 재등장했다는 재앙적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래서 중국과 미국의 묵인 하에 남북이 협상을 시작하게 되면, 통일을 방해하고 분단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공세를 본격적으로 펼 것이다.
일본 우익 국수주의들이 가장 바라는 상황은 제2의 한국전쟁이다. 그러나 시대정신의 변화와 세계정세와 동북아 상황의 변화에 따른 한반도 민중들의 각성과 남북지도자들의 경륜 향상, 특히 2014년 2월에 중국외교부 왕이 대변인이 “한반도의 전쟁은 중국의 재앙이다. 중국은 한반도의 비핵화와 안정 유지를 목표로 한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한국과 중국은 경제적으로 이미 이인삼각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한국전쟁이 재발할 가능성이 차츰 낮아지고 있다.
또한 2010년대 현재 남과 북에서 실무를 장악하고 있는 4~50대들은 한국전쟁 이후 세대로서 남북 공히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윗세대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통일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데에 감정적 영향을 적게 받는다. 남에서는 경제 활황기인 8~90년대를 통과하며 민족자존을 자각한 민족주의 세대가, 북에서는 1980년대 중반부터 주창된 ‘우리민족제일주의’ 교육을 받은 민족주의 세대가 사회 각 분야에서 중추 세력을 형성하게 됨으로써 한반도 통일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인식과 의지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무력통일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합리적인 목표와 자세로 남북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을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한반도통일 반대정책의 방향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선 중국은 워낙 조종하기 어려운 상대이기 때문에 정책 대상에서 제외하고, 어떻게 하든지 미국을 조종하려고 할 것이다.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이 미래의 경쟁자임을 숙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정치, 경제, 과학, 문화, 인종, 종교 등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 선전전을 전개할 것이다. 일본인 그들이 말하는 ‘탈아입구론’이 그러한 공작의 정서적 근거로 미국인들에게 어필 될 것이고, 영리한 미국은 자기들대로의 국익에 따라 다각도로 반응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북한을 강화하여 남한에 흡수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쓸 것이다. 북한이 남한에 흡수되지 않고 독립 국가로 계속 존재할 수 있도록 수교 협상을 통해 수백억 달러의 보상과 대량의 경제 원조를 할 것이다. 또한 외교적으로 고립된 북한이 국제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탈출구를 마련해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남북이 화해하지 못하도록 하고, 주변 강대국들이 한반도 통일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계속해서 갖도록 하기 위하여 총력을 다 할 것이다. 그 방법의 하나로 남북 간에 싸움 붙이기와 국지전 도발을 감행하기도 할 것이다. 하여튼 주변 3강이 통일에 찬성 또는 묵인을 하여도 일본만큼은 끝까지 반대할 것이다. 한반도 통일은 국가 생존에 직결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반대를 넘어 훼방질을 할 것이다. 일본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하지만 일본을 적으로 만들어선 통일운동이 자주 난관에 봉착하게 되고, 통일 이후에도 지역안보에 불안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원만한 평화통일과 지역안보를 위해선 미국을 통하여 일본을 조정하도록 하여야 한다.
주변 4강 가운데 미국의 태도와 의도가 가장 모호하여 해석하기가 난해하다. 미국에게 남한은 대중정책을 떠받치는 한 개의 보조 기둥 역할을 하는 곳일 뿐이다. 중국에 대한 견제가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는 한국이 주도하는 통일운동을 찬성하지 않는다. 참여하더라도 매우 소극적이 되고 결과를 얻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통일운동이 본격화되더라도 미래의 통일한반도가 친미 일변도라면 적극 지지하겠지만 친중 노선이라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친미중립 정도라면 묵인할 것이다.
미국이 통일운동을 용인하느냐 마느냐 하는 관건은 중국과의 관계이다. 미국이 중국을 전략적 동반자로 본다면 한반도 통일 문제를 중국과 협의하여 순리로 풀겠지만, 전략적 라이벌로 본다면 남한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또한 군수산업상의 필요에 의해 한반도 긴장 상태의 유지가 필요하고, 장기적인 경제 침체나 공황과 같은 위기가 닥치면 그 타개책으로 한반도 분쟁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연속적인 무력시위를 통해 중국에 강력한 경고를 보낼 것이다. 무력시위와 분쟁을 통해 부흥시킨 군수산업을 바탕으로 미국 경제의 활황을 도모할 것이다. 이렇게 군수산업 면에선 한반도 분단이 미국에게 꿀단지 역할을 한다. 그런 꿀단지를 쉽게 포기할 것인가 미국이?
이처럼 2014년 봄에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 정세는 겉으로는 평화스러워 보이지만 속으로는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주변 어느 나라도 진심으로 통일을 도우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한반도 정책을 펼치고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보편적 인도주의나 동북아 평화론 같은 고상한 대의는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피동적으로 끌려갈 수만은 없는 것,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통일운동 전략을 세워 꾸준히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 그래도 형식상으로는 우방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과 일본에 대한 분석과 외교정책의 정립, 수교는 했지만 아직 적성국가의 이미지가 가시지 않은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협상과 설득을 병행할 수 있는 대책 수립과 치밀한 추진이 필요하다.
한반도의 중립화가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변 강국들은 중립화 통일을 용인하는 조건으로 군사력의 축소를 요구할 것이다. 특히 북한의 핵무기 완전 파괴와 핵 기술력 제거를 반드시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군사력을 포기한 나라는 이미 주권 국가가 될 수 없으므로, 한반도가 중립화 통일이 된다 해도 군사력이 미약하면 오히려 이전보다 더 약소한 국가로 퇴전할 것이다. 그러므로 핵무기는 제거하되 차후에 일본이 핵무장을 하면 다시 핵무장을 하도록 하고, 군사력은 일본에 필적할만한 정도를 중립화의 목표로 해야 한다.
중립화는 외교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국한시켜야 한다. 물론 주변 강국들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립 외교의 실체와 방향을 충분히 설득한다면 그들의 오해를 해소시킬 수 있을 것이다.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 방안은 역동적 가변성이 짙은 동북아에서는 종이꽃과 같을 뿐이다.
이러한 외교, 통일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선되어야 할 점은 그에 합당한 정치 구심체의 결성이다. 그리하여 그 구심체의 정책 방향이 국론이 되어야 한다. 북한은 김정은을 중심으로 조선노동당이란 구심체가 있어서 어떤 정책이든 전개하기가 편리하나, 남한은 5년 단임제 대통령에 다당제라서 통일정책의 개념과 추진에 가변성이 많아서 북한과 협상하는데 일관성이 미흡하다. 그래서 북한에 약점이 잡혀 협상에서 밀리는 경우가 다분하다.
그러므로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의 일관성을 정당이 갖고, 정당이 대통령과 권력을 배출(창출이 아니라)하는 정당정치가 확립되는 게 꼭 필요하다. 그 전제로 통일론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여론이 수렴되어야 한다. 전문가들의 편협하고 일방적인 논의나 발표보다 일반 국민들의 활발한 토론을 거쳐서 수렴된 통일정책이 생명력을 갖는다.
다음으로, 주변 강국 네 나라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 글에 제목에서 ‘이용’이란 말을 썼는데, 독자들 가운데에는 ‘이용’이라니, 오히려 우리가 이용당할 처지인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주어질 조건에만 얽매여 고민하기 보다는 우리가 조건을 만들어서 주변 강국들에게 요구하는 적극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오랜 숙명론의 함정에서 벗어나 진취적인 태도를 가진다면 반드시 해결 방안이 생길 것이다. 주변 강국들을 대상으로 한 통일 외교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란 말이 갖는 부정적인 의미보다 긍정적인 의미에 집중한 설득을 꾸준히 해야 한다. 그 설득의 효과 유무는 당대 위정자들의 자질과 노력에 달렸다. 또한 국민 여론이 그들의 노력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줘야 통일 외교의 활력이 유지된다.
설득의 키워드는 ‘경제’와 ‘평화’이다. 이 두 어휘가 ‘분단’과 ‘전쟁’보다 미래의 동북아에 유효하다는 점을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지구촌 사람들의 삶은 과거에 기본적인 의식주에 만족하던 시대와는 달리 해가 갈수록 고급화에 욕구가 증가한다. 인구 또한 증가하며 더 많은 에너지와 자원을 소비하게 된다. 즉 미래로 갈수록 경제적 욕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과거의 식민제국주의를 부활시킬 수도 없고, 침략 전쟁을 벌려 승리하더라도 상대국과 비슷한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으므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아 수지타산에 안 맞고, 한정된 국내 경제 규모만으로 충족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무역 밖에는 없다. 즉 동북아지역 경제협력이 유일한 해결 방법이 된다.
동북아지역을 구성하는 국가들로서는 한국, 조선, 일본, 중국, 대만, 러시아, 몽골 등이 있고 오키나와, 일본, 한국에 둔 군사기지를 거점으로 미국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한 세기 전부터 현재까지 한반도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긴장과 대결의 접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1910년에는 한반도가 매우 허약하여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고, 일제는 한반도의 인력과 물력을 수탈하여 전쟁 도구화함으로써 만주, 중국대륙, 태평양까지 침략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4년 현재의 한반도는 이전 시대와는 판이하게 외세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자주적인 상수로 작용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한국의 경제력이 강대해졌으며 남북의 군사력이 더 이상 외세의 침략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강력해졌다. 특히 북한이 핵을 보유한 사실은, 남한에게 큰 위협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주변 강국들에게 일종의 견제 장치가 될 수가 있다. 과거와 달리 이런 조건들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능동적인 통일 외교정책 전개의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러시아는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의 경제적 이익이 크기 때문에 무난히 설득할 수 있다. 일본 역시 동북아지역 경제권의 장점과 함께 부산-대마도-구주 간에 해저철도와 도로 개설을 조건으로 설득할 수 있다.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는 쉽게 설득할 수 있지만 중국과 미국은 설득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중국은 한반도가 통일되어 안정됨으로써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이 다대하기 때문에 내심으로는 통일을 묵인할 용의가 있지만 외면적으로는 통일을 반대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미국이 펼치는 대중외교에 따른 변수일 수밖엔 없다. 즉 안보 면에서의 완전한 보장이 약속되지 않는 한에는 북한 지역을 결코 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반도 통일의 최종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다.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단한 것도 미국이었고, 에치슨라인을 기획한 것도 미국이었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국제전으로 만든 것도 미국이었다. 현재까지도 북한을 특급 적성국가로 분류하여 감시감독과 국제적 고립을 하고 있는 것도 미국이다. 북한이 세습독재와 호전성, 인권침해 등의 부정적인 면이 심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이 자기들의 국익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북한을 악의 축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다. 북한으로서는 이러한 질곡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도 초강대국인 미국이 굴레를 꿰고 고삐를 잡고 있는 한에는 결코 탈출할 수가 없다.
미국이 대북 봉쇄정책을 펼치고 있는 근저에는 미국인 반공주의자들의 획책도 있지만 남한 반공주의자들의 영향도 많다. 2014년 현재도 많은 국민들이 남북화해협력을 수긍하지만, 정치, 경제면에서 기득권을 가진 보수주의자들은 반공반북을 통한 흡수통일을 최선의 가치로 생각한다. 기득권 보수주의자들은 거의 다 미국 유학 등으로 미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즉 거대한 친미파가 한국 사회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 친미파들이 갖는 보수주의적 시각이 그대로 미국 사회에 투영되니, 미국의 기득권층 역시 보수주의적 대북 시각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미국의 대북 시각과 정책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한국 보수주의자들의 시각과 사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한국 보수주의자들의 생각이 변화한다면,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과 수행자들이 국익 위주로 펼치는 일방적인 대북정책에 약간의 변화가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군사력은 주둔시키고 있지만 영토가 없어 군사력 활동에 일정한 한계가 있는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동향에 따라 움직일 수밖엔 없을 것이다. 물론 미국이 중국을 한번은 꼭 손보아야 할 라이벌로 여긴다면, 미래의 적으로 확정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가 아무리 조리 있게 설득해도 미국은 ‘서부의 건 맨 정의감’대로 자기들의 국익을 위해 대북봉쇄와 대중 견제 정책을 펼칠 것이고, 그 핵심인 한반도 분단을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보수주의자들의 의식 변화는 미국의 대북정책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는 북한의 대남정책에 변화를 가져온다. 나아가서는 중국으로 하여금 안보에 대한 우려를 낮춤으로써 한반도 통일에 긍정적이 되도록 한다. 그러므로 한반도 통일의 핵심은 한국 보수주의자들의 의식 변화이고, 그 변화의 키워드는 역시 ‘경제’와 ‘평화’이다. 멀리 있는 주변 4강을 설득하기 전에 가까이 있는 보수주의자들부터 설득해야 한다. 그리하여 남남갈등이 해소된다면 남북갈등 역시 곧 해소된다. 그렇다면 평화적인 한반도 통일에 대한 논의와 협상의 보폭이 빨라질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주변 4강국들 역시 이러한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을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다음 주제인 <시장과 국가>에서 김기원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엔 어느 나라에서건 시장과 국가는 경제활동을 조정하는 양대 축이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나 영국의 대처 수상처럼 “국가는 해결책이 아니라 골칫거리다”라면서 국가 역할 축소를 부르짖는 시장만능주의가 위세를 떨칠 때에도, 국가의 경제적 기능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좌파 즉 진보파와 우파, 즉 보수파의 구별은 이러한 시장과 국가의 궁합 즉 조합 방식을 둘러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좌파는 시장보다 국가를 더 선호하며 우파는 반대로 시장을 더 선호한다. 또한 좌파는 사회복지를 더 중시하고 우파는 자본축적을 더 중시한다.
우파는 규제를 완화해야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으며 민영화와 개방의 확대는 시장의 활력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좌파는 자본에 대한 견제와 약자의 보호가 필요하며 민영화와 개방엔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파는 세금 인하가 개인의 근로 의욕과 기업의 투자 의욕을 고취시키기 때문에 세율 인하를 주장하며 정부 지출 확대에 반대한다. 좌파는 조세를 더 거두어 공공서비스를 늘리고자 한다. 부동산과 주식 거래를 통한 불로소득에 대한 감세에 반대하며 정부 지출 축소는 사회적 약자를 외면한 조치라고 주장한다. 특히 부자가 부담하는 세금을 대폭 늘려 복지 지출을 확대하고자 한다.」
「좌우파의 견해가 이처럼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는 한국사회가 압축적 불균등 발전을 겪어온 탓이 크다. 선진국은 대체로 중상주의에서 자유주의를 거쳐 복지주의가 자리 잡았다가 그 반동으로 시장만능주의, 즉 신자유주의가 출현했다. 그런데 우리는 개발독재의 중상주의에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개발독재, (구)자유주의, 중상주의, 시장만능주의의 갖가지 정책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시장과 국가의 역할 분담을 둘러싼 논쟁에서 단순히 좌파와 우파로 나뉘는 게 아니라 수구 좌파, 개혁 좌파, 개혁 우파, 수구 우파 등 여러 갈래로 나나나는 것이다.
다음 주제인 <신자유주의>에서 안현효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지지와 비판 여부는 다르지만, 오늘날의 자본주의 그리고 한국 자본주의가 규제 완화, 시장주의, 경쟁주의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내용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에서 좌우가 대체로 동의한다.
우파는 신자유주의가 세계화 속에서 필연적인 대세라고 주장한다. 그 논거로는 세계화 속의 불가피성과 자본주의 혁신론을 들고 있다. 그러면서 “성장을 통해 분배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화와 혁신이라는 코드로 무장한 신자유주의는, 변화를 지향한다는 일견의 진보성에도 불구하고 실천 과정에서 정치적 자유주의와 충돌하는 요소가 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우익 권위주의와 결합하여 변형되는 계기가 된다. 신자유주의가 경쟁의 맥락에서 혁신을 강조할 때 빈부 격차와 양극화는 불가피한 부산물이며, 이는 사회적 갈등을 초래한다. 결국 보수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를 실천한다면,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의 진정한 혁신을 이루기보다는 도리어 앗아가는 논리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좌파는 신자유주의야말로 자본주의 모순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 비판에는, 신자유주의를 선진 자본주의의 역사에 비추어 자본주의 내 금융자본 분파가 수행한 쿠데타라고 보는 관점, 신자유주의를 신보수주의의 이데올로기 및 정책으로 한정하고 싶어 하는 관점의 두 가지가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의 효과에 대하여서는 일단 이식된 신자유주의 정책은 우파의 예상(성장이 분배를 해결한다)과는 반대로 분배를 더 악화시킨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시장 유연화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필수적 구성물인데, 이는 최저임금 인하, 노동조합 약화, 노동시장 불안정, 비정규직 증대로 구성되어 있어 임금과 소득 불평등의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갓이다.」
「신자유주의의 운명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한국개발연구원 임원혁은 신자유주의가 금번의 대규모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쉽게 퇴조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는 반면, 한국개발연구원 유종일 교수는 금융위기를 계기로 또 미 행정부의 변화를 계기로 신자유주의는 서서히 퇴조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역설적으로 1980년대 말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신자유주의의 전성기야말로 쇠퇴의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모두 신자유주의 일색으로 변하지 않았으며 신자유주의를 가장 과감하게 실천했던 영미 형 자본주의가 1990년대 말에 이르러 퇴조 현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는 사실상 미국을 벗어나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예외적인 자본주의 유형으로 전락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져온 경제적 결과물들이다. 이는 ‘양극화’로 요약할 수 있다. 사회적 양극화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안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중산층의 붕괴와 중도 자유주의 이념의 해체를 야기할 것이다. 따라서 중도적 이념보다 더 급진적 이념들, 보수주의의 강경화와 사회주의의 부활 등 이념적 양극화 현상이 커진다. 하지만 사회복지 정책과 경제성장 정책을 대립이 아닌 상호보완적 관계로 이해하는 중도주의 정책이 성공리에 집행되어 이전의 케인스주의가 거두었던 성과가 나타난다면 사상적 양극화는 완화될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간단히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경제는 사회적 구조에 의거한다. 개체에게는 개인경제만 있으나 마을 단위만 되어도 사회경제가 필요하다. 경제의 요체는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주 등 물질에 대한 만족도를 어느 정도까지 어떻게 충족시켜주느냐 하는 것이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국가라면 경제에 대한 우려가 낮으나, 불가능한 국가는 무역을 통한 대외경제 의존도가 높다. 그래서 다양한 경제논리가 나타나게 된다.
원시공산제가 무너진 이유는 부락민들의 증가 때문이었고, 국민들의 증가에 따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역 정복전쟁이 시작되었으며,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경제 규모가 무한대로 커짐에 따른 자원의 부족 때문에 대륙 단위의 정복전쟁이 발생했다. 19세기 말에 봉건국가가 붕괴하고 20세기 전반까지 식민제국주의가 맹렬하게 작동한 원동력 역시 인구 증가에 따른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때문이었다. 이처럼 인류 역사는 철저히 경제 원리에 의해 움직여왔다. 이러한 경제 원리는 현재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자 미래형이다.
19세기 산업혁명 기에 대두된 두 개의 경제 논리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한 세기 동안 길항한 결과로 일단은 자본주의가 승리했다. 공산주의가 쇠락한 가장 큰 이유는 인구 증가에 따른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평등 노동과 평등 분배라는 단순 논리로는 팽창하는 사회를 감당할 수 없었다. 공산주의는 적정 인구에 적합한 제도이지 팽창하는 인구에 적합한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쇠락은 필연적이었다.
자본주의 역시 몇 번의 변신을 거듭하며 논리를 수정한 결과로 현대엔 중심 경제 원리가 되었다. 그래서 팽창하는 인구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다. 하지만 인구 과잉, 자원 고갈, 환경오염, 에너지 부족 등의 위기가 대두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자본주의 이후를 생각하게 되었다. 1980년 이후 한 세대 동안 주류 경제 원리로 군림하던 신자유주의가 결코 팽창한 인류의 수요를 모두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지금, 과연 무슨 경제 원리가 인류에 적합할까 하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세계 석학들의 사고를 점령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팽창하는 인구에 적합한 제도인 것은 분명하나, 팽창하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사회적 불안정성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제도이다. 그 사회적 불안정성을 순리로 해결하지 않고 기득권층이 강제로 억압하게 되면 결국 군중들의 본능적 욕구가 폭발하게 되어 사회적 혼란이 일어난다.
앞으로 미래세계에서 바람직한 경제논리는 한계성장론을 바탕으로 한 통제경제여야 한다. 자유무역에만 치중해도 안 되고 봉쇄경제에만 고집해도 안 된다. 다른 나라에 상품을 대량으로 팔고, 금융자본으로 경제를 지배하는 경제이론을 마감하고, 자국 내 자급자족을 기본으로 필요한 물품을 외국들과 교역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시장에만 맡기지 말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유통의 통로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기득권층의 이해를 바탕으로 부유세 등을 징수하여 사회복지비 지출을 확대함으로써 하류층들에 기초생활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그런 방법으로 자본주의의 최대 약점을 보충하면서 적정 경제 규모를 유지해 나간다면 자본주의가 한 세기 정도는 그럭저럭 지탱해 나갈 것이다. 이후 인지의 보편적 발달에 따른 조정 작용에 의해 인류의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될 것이다.
경제는 무조건 발전해야 하고, 발전된 경제는 의식주를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허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음 주제인 <노동시장 유연화>에서 황덕순 연구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파는 정규직에 대한 사회적 보호 수준이 높고, 정규직을 해고하기 어려워서 초래된 노동시장이 정규직 고용을 기피하고 비정규직을 사용하게 된다고 본다. 또한 실제 법에 의한 규제보다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이 더 경직적이라고 주장한다. 공공 부문이나 노동조합이 강한 대규모 사업장에서 해고가 법에 의한 보호 이상으로 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단체협약이나 노동조합에 의한 보호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좌파는 노동시장에서 정규직이 정상적인 근로 형태이며, 비정규직의 고용은 이를 정당화할 만한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에만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가 거의 무기력하다고 주장하며, 비정규직을 고용할 수 있는 사유를 제한하는 등 현재의 고용보호 관련 법제를 더 강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보호 조항이 실질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유연성을 앞세우는 우파의 주장과 안정성을 중시하는 좌파의 주장을 통합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유연안정성’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기 시작했다. 흔히 ‘황금률 삼각형’이라고 불리는 덴마크의 유연안정성은 크게 세 가지 정책, 즉 유연한 노동시장, 안정성을 보장하는 실업급여, 재취업을 촉진하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결합한 것이다. 이 모델은 노동시장에서의 유연성과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의 안정성을 결합함으로써 거시적인 국가 차원에서 효율성과 형평성의 조화를 추구한다.
고용보험 제도의 사각지대를 줄이고 실업부조 제도를 도입하는 등 실업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 수준을 꾸준히 높이고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발전시키는 것은 노동시장 유연화가 초래하는 부정적인 효과를 상쇄할 수 있는 대안 가운데 하나로 추구될 수 있다.
또한 노동 과정, 즉 작업 조직에서의 유연성을 높임으로써 고용 조정의 필요성과 노동시장 유연화 요구를 줄이는 방식인 기업 우위의 자유주의적 대안이 있다. 작업 조직에서의 유연성을 높이는 것은 배치전환이나 여러 가지 직무에 숙달하도록 하는 다기능화를 통해 달성할 수 있다. 이는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계속 바뀌는 외부 환경에 대한 대응력을 높임으로써, 외부적인 고용 조정의 필요성을 줄여나가는 전략, 즉 ‘높은 생산성 → 기업의 높은 경영 성과 → 고용안정’을 달성하는 높은 수준의 균형 전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일본의 린생산방식이나 미국의 고성과 기업들은 노동과정에서의 유연성, 즉 기능적 유연성과 노동시장에서의 안정성을 결합함으로써 미시적인 기업 차원에서 효율성과 형평성을 동시에 달성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전략이 추진되기 위해서는 노동과 자본의 타협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과 같이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에 불신이 팽배하고 적대적인 노사관계가 일반화된 상황에서는 손쉽게 적용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노동시장 유연화는 채용이나 해고를 자유롭게 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초과 근로시간에 대한 규제 완화나 변형 근로시간제 확대를 통한 ‘노동시장의 유연화’, 임금 수준의 변경이나 임금 결정 방식의 유연화를 통한 ‘임금의 유연화’에 의해 달성될 수도 있다.」
다음 주제인 <소득분배와 경제성장>에서 이강국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파는 성장과 분배의 상호 관계에 관해서도 자유화와 개방에 기초하여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경제성장이 촉진되면 이른바 적하효과로 인해 성장의 과실이 자동적으로 사회 전체로 확산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미국에 비해 유럽의 실업률이 높고 성장률이 낮은 이유를 정부의 경제 개입과 강력해진 노조 그리고 과도한 사회복지 등에서 찾는다.
좌파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과 양극화의 심화는 국내 수요에 악영향을 미쳐서 투자와 성장을 저해할 수 있고, 격차가 확대되고 빈곤층의 살림살이가 더욱 힘들어지면 이들은 저항하게 될 것이며, 이는 사회적인 갈등과 혼란을 심화시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진보적인 좌파는 양극화가 심화되는 한국의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서 소득 재분배를 위한 정부의 더욱 적극적인 정책적 노력과 이를 이끌어내기 위한 정치적인 노력을 강조한다. 이들은 구체적인 경제정책으로 사회복지 지출의 획기적인 중대와 최저임금의 인상, 그리고 부유세와 부동산세 등 고소득층에 대한 과세 증대를 제시한다. 또한 기회의 평등을 확대하기 위한 공교육의 확충, 실업자들을 위한 직업훈련 등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 그리고 부의 양극화를 악화시키는 부동산투기 근절을 위한 강력한 정부의 규제 등을 촉구한다.」
「한국은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하여 정부가 소득분배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매우 미약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0)의 2001년 공공복지 지출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복지 지출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6%였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 30개 회원국 중에서 최하위로, 회원국 평균인 약 21%는 물론이고 멕시코의 11.8%와 터키의 13%보다도 훨씬 낮은 수준이다.
복지지출의 확대를 통한 소득분배의 개선이 경제성장을 저해하지 않고 오히려 촉진할 수 있다. 평등한 분배는 단기적으로는 내수의 확대를, 중장기적으로는 교육과 투자의 증대를 불러 생산성을 높이고 성장 잠재력을 확충하여 경제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 분배와 성장은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분배와 성장의 선순환이 나타날 수 있으며, 이 경우 가장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평등주의적 발전이 실현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08년 경제학 공동학술대회에서 김진일 국민대 경제학부 교수는 <소득분배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외환위기 이후 소득분배가 악화되어 상대적 소비 성향이 큰 임금 소득자의 소비를 위축시켰고, 이에 따라 총수요가 위축돼 경제침체와 성장 둔화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이 주제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간단히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서적인 면에서 보면, 우수한 지능을 가진 자는 소득이 높기 때문에 열등한 지능에 대하여 우월감을 갖는다. 그래서 높은 소득은 자기의 노력으로 얻는 당연한 과실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저소득층은 소득의 불평등은 자기 개인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기회의 불평등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이라고 여긴다. 자질이나 기술의 차이, 즉 지능의 차이를 감정상 인정하지 않는다. 소득 불균형 문제에 근저에는 이러한 인간적인 갈등이 깔려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인간적인 갈등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부자들은 우수한 두뇌로 열심히 일해 얻은 소득을 세금으로 많이 지출하는 데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는다. 감정적으로는 소득이 낮은 층들을 멸시하고 그들의 소득이 낮은 게 당연하고 생각한다. 반대로 저소득층은 현재의 자기 수준을 직시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부자에 대해 적개심을 갖는다. 이것이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이다.
이러한 위기구조를 개선하는 게 국가의 임무가 된다. 국가는 적절한 정책을 통해 소득의 분배효과를 최대화해야 한다.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율을 높이고 근로소득에 대한 세율을 적정하게 해야 한다. 상속세율은 10억 원 정도까지는 아주 낮은 세율로 해서 중산층이 대를 이어 계속되도록 하고, 그 이상은 차츰 누진세율을 적용해야 한다. 기업주와 재벌에겐 개인소유 재산에 대한 고도의 세율을 적용해 부와 경영의 세습을 방지함으로써 기업과 재벌의 퇴화를 막아 국민경제가 내실화 되도록 해야 한다.
저소득층에겐 기본생활을 보장해주되 사회참여 활동과 생산적 노동을 통해 소득을 얻도록 해야 한다. 노동력이 있으면서도 나태하고 무책임한 생활태도를 가진 저소득층에 대하여 국가가 무조건 보호해주는 정책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국민경제의 선순환을 위한 조정과 강제로서의 국가의 역할이 계속해서 강화되어야만 한다.
다음 주제인 <업적주의와 사회적 불평등>에서 조형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개인의 성취에 따라 경제적 소득과 사회적 지위, 정치적 권력을 보상해야 한다는 ‘업적주의’를 당연시한다. 업적에 따라 차별적 보상이 이루어질 때 개인은 높은 성치동기를 갖게 되고, 사회 전체가 역동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 근대사회의 지배적 신념이었다.
우파의 학벌주의와 교육제도에 대한 관점은 교육에 시장 원리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격렬한 경쟁을 유도해야만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의 등록금 자율화, 수익사업 허용, 기여입학제, 고교등급제, 학교별 학업성취도 공개, 고교평준화 폐지 및 특목고 ․ 자율형 사립고 확대, 우열반 허용, 국제중학교 설립 등은 성취 지향적이고 경쟁력 있는 학생에게 최대한의 성취동기를 부여하고, 그 성취에 부합하는 보상을 허용하자는 취지이다.
좌파는 공교육이 시장 원리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며, 개인의 다양한 잠재력을 개발한다는 교육의 기본 목표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성교육을 외면한 채 시장 원리에 입각한 학력 경쟁만 강화한다면, 교육은 기득권층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승자독식 게임이 될 것이다. 공정한 경쟁을 위한 동일한 출발선은 학력 경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 최소한의 합의이다.」
다음 주제인 <생태위기와 녹색담론>에서 서영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환경은 인권, 민주주의와 더불어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담론이 되었다. 이제 환경은 정치이념의 스펙트럼을 넘어 보편적인 쟁점이 된 것이다. 기후 변화로 상징되는 생태 위기의 심각성은 환경운동을 통해 대중적으로 퍼져나갔으며, 모든 정치 집단은 이에 대응해야만 하는 처지이다.
주류적 우파 녹색담론이 지지하는 생태적 현대화론은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생태적 비용을 생산 비용 안에 포함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합리적인 행위임을 역설한다. 생태 위기 문제를 전 인류의 문제로 간주하고, 과학기술의 발전과 이에 기초한 적절한 정책 개입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적 질서를 수용하고 그 작동 원리를 통해 생태위기를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사회가 위치한 자연의 외적 한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태도는 자칫 인간의 복지를 부차화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보고, 자연을 위해 인간을 희생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갖는다(상당수의 좌파도 이 점에서는 우파에 동의할 것이다). 즉 생태위기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성장에 장애로 등장한다면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좌파가 보기에 각국 정부의 녹색담론과 다양한 환경 관리 정책은 이들이 고수하는 시장 원리와 상충하면서 체계적으로 추진되지 않고 있다.
좌파적 시각, 특히 생태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보면 현재의 생태위기는 자연적 한계 또는 인구 압박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는다. 맹목적으로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경쟁과 낭비라는 사회적 원인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금 계산과 이윤 극대화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필요보다 탐욕과 이윤을 우선시한다. 사회적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자본가, 오직 시장의 힘이 표현되는 가격 신호의 변화만을 따르는 자본가에게 인간과 자연환경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좌파의 입장에서 주류적 우파담론의 시장주의적 해법은 전혀 효과적이지 않다. 무한 경쟁을 조장하는 이윤의 원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소위 자연에 가격을 부과하는 방법은 환경 파괴를 막지 못한다. 이러한 대응은 시장이 합리적인 자원배분을 가능하게 한다는 우파들의 순진한 생각일 뿐이다.
자연환경의 보전과 이해관계를 가진 다음 세대 및 동물들의 이해관계를 현재 시점의 ‘이기적’ 행위자들의 화폐 지불 의사에 따라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좌파의 시각에서는 이미 과도하게 산업화된 선진국과 그들이 주도하는 세계적 질서 자체가 ‘개발도상국’ 또는 빈국들이 직면한 환경적 문제들의 주요 원인이다. 부유한 국가들은 현재 엄청난 양의 부와 자원을 가난한 나라들로부터 부유한 나라들로 옮기며 동시에 사회정책의 우선순위를 왜곡하고 최빈국들의 환경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천문학적 액수의 부채 탕감이나 기술이전이 없다면 빈곤한 나라들이 스스로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의 생산은 자연자원을 개발하는 것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동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서유럽의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이 노동자들의 높은 생활수준을 위해 경제적 성장과 생태적으로 지속 불가능한 소비주의를 조장하여 환경을 파괴했다.
생태주의자들은 대개 평등하고 자율적이며 자연친화적인 공동체가 번성하는 사회를 원한다. 생태주의를 수용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간 사회의 외적 한계를 강조함과 동시에 인간 본성의 한계를 강조하기도 한다.
필자는 근본적 생태주의자들과 좌파가 공유하는 미래상, 즉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는 자율적인 공동체가 번성하고 이들 사이의 자유로운 네트워크가 구성되며 거시적인 사회 ․ 경제적 정책은 민주적 정치과정을 통해 실현될 사회일 것으로 생각한다.」
「녹색담론은 근대 서구의 과학주의적 세계관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대상을 분석적으로 분리하는 과학주의적 담론에 반대하며, 모든 사물은 상호 관련되어 있다는 전체론적 세계관을 옹호한다. 근본적 생태주의자들은 이러한 전체론적 세계관의 근거를 동양 종교(도교, 불교, 힌두교)에서 찾는 경향이 강하다. 때로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전통 사사에 기대기도 한다.
한편, 종교적 세계관을 불편해하는 생태주의자들은 모든 사물의 상호 연관성을 강조하는 열역학 이론(thermodynamics)이나 체계 이론(system theory)에 기대기도 한다.
인간을 동물적 존재로 파악하고 인간종과 비인간종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인간종의 특수한 위치를 부각하는 입장과 달리, 동물권과 생태적 가치에 대하여 심층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근본적 생태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적 생태주의자들은 기존 국가와 민주주의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소규모 공동체를 통한 평등과 자율성 회복을 추구한다.」
다음 주제인 <역사 기술과 정치>에서 조형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친일 청산에 대한 우파의 주장은, 친일협력은 시대적으로 불가피하게 강요된 행동이었으며,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규정된 인물 중 일부 악질적인 매국노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민족적 실력을 키우기 위해 경제계, 언론계, 교육계, 문화계, 군대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한 그 시대의 선각자들이었으며, 다지 후세대에 태어난 행운을 누리는 자로서 앞선 세대를 윤리적으로 심판하는 태도는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친일행위를 ‘한 개인의 악’이 아니라 ‘한 시대의 불행’으로 인식하고, 비판과 더불어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거사 청산이 국가 주도로 진행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과거사에 대한 평가와 심판은 시민사회가 자율적으로 수행할 때만 사회적 성찰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친일청산이 일종의 연좌제로서 후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라거나, 지나간 과거사를 들추어내어 불필요한 국론분열을 초래하는 짓이라는 비판 또한 제기되었다.」
「민족주의 좌파가 보기에 현대 한국사회에는 불신과 냉소가 구조화되어 있다. 대중들은 권력, 부, 명예와 같은 희소한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 부정과 편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극도의 불신과 냉소를 낳은 근본원인이 친일과거사 청산의 무산이다. 해방 이후에 친일파들이 전혀 처벌받지 않고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각 분야에서 민족의 선각자, 근대화의 선구자로 기억됨으로써 한국사회에서는 가치관의 뒤틀림과 전도가 구조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일과거사를 규명하는 것은 지나간 과거의 상처를 들춰내는 작업이 아니라, 뒤틀린 한국사회의 가치관과 윤리적 규범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최소한의 교정 작업이며, 불신과 냉소로 가득 찬 한국사회에 높은 수준의 사회적 신뢰를 축적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 과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주제인 <대학과 지식생산>에서 이명원 문학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파는 대학에서의 지식생산이 실용성과 환금성을 중심으로 기업 이익과 국가경쟁력 강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기 산업사회에서 아이디어와 콘텐츠에 근거한 지식자본이 신경제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갖고, 선진국형 경제에 도달한 오늘의 한국 상황에서는 대학과 지식생산의 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제기한다.
좌파는 시장과 국가의 압력을 뛰어넘어 어떻게 자율성을 지닌 시민적 지식인 배출 거점으로 대학을 수호하느냐는 문제에 집중한다. 대학이 공적 지원을 받는 ‘공교육’ 체계 안에 잇는 이유는 대학이 생산하는 지식과 배출하는 인재가 영리 기업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훨씬 더 다양한 사회 각층의 요구에 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주제인 <고교 평준화와 학교 다양화>에서 김성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파는 과거의 신분 사회와 달리 현대사회에서는 개개인의 능력과 경쟁에 의해 사회적 희소가치인 부와 권력, 명예를 얻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공정한 경쟁체제를 전제하며 이를 강조한다. 그래서 고교 평준화 체제는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할 학습 동기를 떨어뜨린다고 주장한다. 평준화를 획일화로 규정짓고, 사학에서는 자신들의 건학 이념에 충실할 수 있는 학생을 선발하여 그에 걸맞은 교육과정과 수업, 프로그램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좌파는 평준화가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떨어뜨렸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비평준화라든가 특목고 체제가 오히려 다양화를 가로막는다고 생각하며, 나아가 획일화의 원흉이라고 규정짓는다. 고교 간 학교 서열화는 결국 학벌주의를 낳고, 그 과정에서 명문고 중심의 파벌주의를 파생시킨다. 특히 특정 학교 출신들이 한국사회의 중심 세력을 형성할 때, 다양한 고교 출신 간 정상적인 경쟁을 방해하게 될 것이고 결국 사회적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무너지게 된다. 즉 학연에 의한 부정부패의 심각한 연결고리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한국사회 발전에 전혀 도움이 죄지 않을 것이라고 좌파는 생각한다.」
「우리 교육이 파행을 겪는 이유는 명문고교와 명문대학 진학이 실질적인 교육과정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가 받아온 교육은 문제풀이식, 주입식 교육에 불과하다. 그런 정답 찍기 식 수업은 결국 입시 교육의 산물이다. 근본적으로 입시로부터 학생들을 해방시킬 때, 창의적인 교육이 시도될 수 있다.
경쟁은 더욱 좋은 기획력과 교육과정,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한 학교 간 경쟁이면 충분하다. 입시제도가 교육을 획일화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입학 경쟁’이 아니라 ‘교육 경쟁’에 열을 올려야 한다.
다음 주제인 <대중지성과 전문가 권위>에서 이명원 문학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에서 대중 지성의 문제는 표면적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인터넷 기반의 정보화 혁명이 가져온 지식 생산의 위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한국의 인터넷망은 대중들에게 기왕의 제도적인 지식의 수혈과 학습 방법 대신, 쌍방향 소통을 통한 자기학습 모델 및 새로운 유형의 공론장을 만들어 주었다.
더욱이 한국은 교육열이 매우 높은 사회라 20~40대의 청장년층에 고등교육(대학)까지 마친 우수한 인적 자원이 풍부하고 사회 전 영역에 골고루 퍼져 있어, 대중 자신이 독자적인 지식 생산의 주체로서 등장할 환경이 마련된 셈이었다.」
「대중 지성에 대한 우파의 시각은 기왕의 엘리트주의를 고수하면서, 대중들에 의해 제기되는 담론의 수준과 이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 참여가 새로운 형태의 ‘우중(어리석은 군중)’을 확대시킬 뿐이라는 우려에 차 있다. 이러한 시각은 대중에 대한 엘리트들의 우월적인 자기 인식이 여전히 강렬한 선입관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선입관으로, 엘리트와 대중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를 우파들이 여전히 확고한 인식 기준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우파는 대중 지성이 근본적으로 허위라는 시각을 바탕으로, 오늘날 국민은 선거 과정을 통해서 행정부와 입법부에 주권을 양도했는데, 정책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사안에 대해서 직접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촛불시위 때처럼)거리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외치는 것은 법과 질서를 교란하는 행우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대중들은 지성적이라기보다는 다채로운 형태의 ‘음모 이론’에 휘둘리는 경향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대중에게 객관적인 정보와 정책을 알리는 일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좌파는 현대가 대중 지성의 시대라는 사실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보았기에 촛불집회를 보면서 ‘대중 지성’ 도는 ‘집단 지성’의 출현을 반겼다. 비평가들과 진보적 언론은 촛불집회에 나타난 새로운 집회 방식과 민주적 공동체의 형성을 다방향의 웹2.0을 통한 자기 조직화와 관계망의 형성이라고 규정했고, 근대적 ‘개임 주체’의 한계를 넘어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주체인 ‘관계하는 개인’의 출현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이 같은 긍정적 평가의 이면에 감춰진 새로운 고민이 제기되었다.
대중의 주체성과 자율성의 집단적 발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논점을 형성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사회운동의 모델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또한 대중들이 요구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또한 국가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사유하던 기존의 관습에 반해, 코뮌(공동체)주의, 자율주의, 풀뿌리 공동체와 같은 새로운 유형의 공동체 운동이 부상하고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맞이했다. 대중 지성 시대의 정치는 ‘삶 정치’ 또는 ‘생명 정치’의 성격을 띠어가고 있으며, 근대적 시민사회와 정치체제의 외부에서 새로운 유형의 협력과 협동의 공동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이 드러났다. 대중들의 생활 속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일종의 정치 계급화한 세력들의 과두정치로 느껴지며, 국민적 의사 대변과 무관하게 정치세력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퇴행적 정치 형태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대중의 특이성에 기반을 둔 연대와 협동의 공동체 모델에 대한 인식이 깊어져 대안적 공동체의 형성 논리와 모델에 대한 논의가 속도를 내기도 했다. 그래서 전통적 좌파의 국가 모델과는 다른 코뮌주의의 문제나 다중에 의한 ‘공통적인 것’의 생산과 전 지구적 생명 지배에 대한 저항의 필요성, 생태주의에 기반을 둔 풀뿌리 공동체의 문제가 새로운 인문적 사유의 근거로 제시되었다.
대체로 좌파의 관점에서 대중 지성 문제는 하나의 가설이 아니라 현실로서 인식된 측면이 크다. 그러나 정체성 수준에서 다채롭게 분화된 대중들이 네트워크식 접속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고 대안적인 공동체 문제에 대해 논의한다고 할지라도, 낡은 근대적 현실 구조는 그것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담론의 차원에서 논의는 자못 활발한 실정이지만, 그것을 현실화시킬 방안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것이 오늘날 좌파들이 안고 있는 고민이다.」
「오늘날 대중 지성을 평가하는 시각은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징후의 차원에서만 대중 지성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경우다. 일련의 사회 ․ 문화적 사건을 관통하면서 한국에서 대중 지성의 출현이 징후로 발견되고 잇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명백한 집단 주체로 간주하기는 아직 어렵다는 견해이다.
둘째, 위와 반대로, 한국사회에서 대중 지성의 실체화와 진화는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부정은 무의미하다는 시각이다.
셋째, 대중 지성은 일종의 허구 개념이며, 오늘날 대중이란 과거의 대중보다도 더욱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실적 상황을 보자면, 오늘의 대중들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문명의 전개 과정 속에서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회피한 채 오히려 분자화 또는 고립되고 있다. 따라서 거창한 사회운동이나 이념의 문제, 대안적 공동체의 모색보다는 ‘살아남기’ 게임에 종속되어 잇다는 것이다. 대중 지성에 대한 지식인들의 이론적 논의나 예찬은 이러한 구조적인 현실의 모순을 오히려 은폐하는 장밋빛 환상이라는 주장이다.」
「현실의 제도와 권력은 여전히 소수 기득권층과 엘리트가 장악하고 있고, 대중들의 삶의 안정성은 나날이 붕괴하고 있다. 안정화된 현실 구조에서 탈락한 대중들이 자신을 루저(패배자) 혹은 잉여로 간주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고, 노동 형태 역시 비정규직을 포함한 근로빈곤 계층의 확대로 나타나고 있다.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관심은 급격하게 축소되는 대신, 경제적인 공포와 위기에 직면하는 청년 세대의 문제는 전 계층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대중들이 낡은 형태의 대중동원 정치인 파시즘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식인 사회의 우려마저 커가고 있다.
반면 국가의 제도적 억압과 각종 통제 장치는 날로 강화되어 지성을 둘러싼 벽은 점점 두꺼워지고 있다. 전통적인 정당정치가 부실한 상황에서 사회운동은 현실적인 영향력을 잃고, 대안적인 대중운동의 세력화는 현실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요컨대 담론 차원에서 대중 지성에 대한 기대와 환대는 매우 강렬하게 작동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희망 내지는 잠재적 모습에 불과할 뿐이다. 현실에서 대중들은 지성적으로 진화하기에 앞서 경제적인 몰락에 더 큰 공포심을 느끼고 있다.
따라서 지난 역사의 서고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교훈이란 이런 것이다. 단순히 문명사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순조롭게 권력 이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낡은 정체성과 새로운 정체성으로 분열되어 있던 대중이 공통의 유토피아적 전망 속에서 소통하고 연대하며 그것을 사유하는 수준을 넘어 실천적 프로그램을 가동시켰을 때, 참다운 변화의 계기를 열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간단히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식의 보편화는 안정과 평화를 원한다. 지식은 공교육에 의해 대개 이루어지는데, 과거 나치나 일제, 현재의 북한과 같이 국수주의나 전제체제 숭배를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교육은 매우 역사 발전에 부정적이지만, 좋은 의미의 공교육의 품질 향상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제도권 교육의 허점을 메울 수 있는 방법으로 사회교육이 필요하다. 사회교육은 사교육(소수의 지성인을 교사로 한), 집단교육이 있는데, 그보다 쌍방향 소통의 장점을 가진 인터넷 토론이 매우 좋은 사회교육 방안이 된다.
지식의 보편화 현상이 넓게 퍼진 미래 세계는 지금 세계보다 훨씬 편안할 것이다. 즉 인간 지능의 진화에 비례하여 지성도 진화하고, 진화된 지성은 이성을 중심으로 하게 된다. 즉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안정되고 평화스럽다.
지금까지 좋은 책 《좌우파 사전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두 개의 시선》에서 7개의 대주제와 22개의 주제 가운데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골라, 좌파와 우파 각 진영의 해석을 본문 중심으로 발췌해 보았다. 사이사이에 필자의 생각을 넣어보았지만, 그것은 단지 희망 사항일 뿐, 2010년대 초 현재까지도 한국사회를 심각하게 갈등토록 하는 도도한 두 갈래의 생각을 아우르기엔 역부족이다.
그러나 갈등은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생각의 문을 열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갈등은 생명의 원동력이다. 변증법의 원리대로, 갈등이 있음으로서 합이 있어 새로운 사고의 지평이 열린다. 우리 한국 사회가 거리에서 몸으로 부딪히는 좌와 우가 아니라 생각의 광장에서 만나 언어의 예의를 지키는 발표와 토론을 통해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어나가길 바라는 뜻에서 장황하게, 이 책을 소개한다.
2014년 3월 27일 열락연재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