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AD 96년-AD 192년)는 도미티이누스 황제가 암살되어 단절된 플라비우스 왕조의 뒤를 이어 서기 96년부터 192년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로 이어지는 네르바 가문과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로 이어지는 안토니누스 가문 라인이다. 이 왕조는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대를 잇기 위해 친양자제도와 족벌주의 문화에서 끊임없이 혈연상 정통성 확보하려고 한 공통점이 있다. 네르바, 안토니누스 왕조는 수도 로마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집정관급 원로와
계급에 속한 두 가문이 법적 혈연적으로 결합된 형태의 이중 가문이었다.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와, 콤모두스 황제를 빼면 그 유명한 오현제다. 콤모두스를 제외하면 모두 양자 관계로 제위가 계승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황제들을 양제 황제라 부르기도 한다. 혈연관계로 의존하지 않고 실력자를 양자로 맞이하여 제위를 계승했던 것이 이 시기의 로마를 최 전성기로 이끈 원동력으로 꼽힌다. 마키아벨리는 서기 96년 즉위한 네르바에서부터 180년 사망한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까지의 약 100년을 '로마 황금기'라 불렀다.
전쟁도 거의 없고 평화와 번영이 계속된 시기이다. 네르바 황제는 원로원에서 추천하여 황제에 오른 인물로 성품이 원만한 노인이었다. 네르바 황제로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까지 100년 가까운 기간을 오현제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팍스 로마나 전성기였다. 네르바는 유명한 원로원 집안에서 태어나 황족인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의 여자와 결혼했으며 서기 71년과 90년에는 집정관을 지냈다. 농지개혁 조치와 로마 역사상 마지막 인민법이 이탈리아에서 시행되었다. 특히 알리멘타 제도를 시행했다.
이는 가난한 이탈리아 어린이들을 맡아서 부양하는 제도였다. 네르바는 죽기전에 후계자를 양자로 정했다. 그가 바로 상 게르마니아 속주의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율피우스 트라야누스다. 제13대 트라야누스 황제(서기 98-117년)는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로마를 유린했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본거지였다. 적지에서 태어난 그가 속주 출신으로 처음 황제에 오른 것이다. 트라야누스(서기 98-117)는 로마 역사상 대규모의 군사활동을 이끌었으며 사망할 때까지 로마제국의 최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스페인, 독일과 동부 유럽 나아가 메소포타미아 와 북부 아프리카 전부가 로마의 영토였다.
어느 황제 보다 로마적 문화와 전통을 지키고 선정을 베풀어 '지고의 황제'란 칭호를 얻었다 또한 대규모 공공시설 사업을 주관하여 불후의 건축물들을 많이 남겼다. 그리고 빈민층에게는 곡식을 무상으로 배급하는 등 사회복지정책을 실행하였다. 파르티아 제국(중동지역) 정벌을 나섰지만 정벌하지 못하고 복귀 도중에 소아시아 남해만 셀리누스섬에서 64세에 뇌졸증으로 사망하였다.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했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총애하는 조카 딸의 남편인 하드리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한다. 하드리아누스(서기 117-138년)는 에스파냐 출신이다.
하드리아누스는 20년간 3차례에 걸친 제국령을 두루 시찰하여 제국 각지의 실정을 파악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선임 황제의 팽창주의 노선을 파기하고 현실적인 판단을 토대로 안정화로 전환하였다. 현재 이란 지역인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파르티아와 북부의 아르메니아를 전부 포기한다는 것이 칙령의 핵심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평화가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충분히 인식하고 제국의 방어력을 정비하는데 힘썼다. 군사적 요충지에는 방벽 구축으로 천연 요새를 지어 제국을 방비했다. 그중에서도 칼레도니아인(스코틀랜드)과의 분쟁이 있었던 브리타니아 북부에 방벽(120km)을 구축했다.
이 방벽이 아니었으면 중세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르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구분은 없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서기 132년에 유대인의 할렘을 금지하자 유대인들은 조직적인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켰다. 군단을 동원하여 3년만인 135년에 반란을 진압하였다.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와 이탈리아 곳곳에 건축물을 건립했다. 대표적인 것은 로마의 모든 신을 모신 '판테온'이다. 둥근 돔형 지붕으로 만들어진 초대형 건축물이다. 하드리아누스는 말년에 병상에 누워서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삼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안토니누스는 제 15대 황제로 즉위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서기 138-161년)는 온화한 성품에 대부호이면서도 근검 절약에 힘썼으며 23년간 태평성대를 누린 황제라고 일컬어 진다.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처럼 오늘날 스코틀랜드의 중심부에 2년간(서기142-144년) 성벽을 쌓았다. 구간은 포스(Forth)만에서 클라이드(Clyde)까지 58,5km로 안토니누스 성벽이라 불린다. 이 성벽은 하드리아누스 성벽의 후방방어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성벽의 터가 아직 남아있다. 안토니누스 당시 역병이 발생하여 로마 제국 전체를 덮쳤고 이로 인하여 수많은 로마 사람들이 죽어갔다.
역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역병은 막강한 로마 군단의 전력 손실은 물론 도시 인구와 농촌 식량 생산감소, 심지어 공공건물의 건축을 중단시키는 등 로마 제국 사회 전반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인구 감소로 모자라는 군인을 농부와 지역 공무원으로 충당하였다. 안토니누스 황제가 죽었을 때 원로원은 그의 높은 덕을 기려 '경건'(Pius)이라는 이름 뒤에 붙여줬다. 뒤를 이은 황제가 제 16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그의 동생인 루키우스 베루스 두 명이다. 로마 제국의 평화와 안정성의 시기인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마지막 황제였다.
마르쿠스는 오랫동안 서양에서 로마 제국의 황금시대를 상징해온 인물이다. 마르쿠스는 재위기간 동안 변방지역에서 전쟁을 치르고 전염병, 도덕의 타락에 맞서 싸우는 등 중요한 국정을 철저히 수행하였다. 마르쿠스의 천부적인 소질은 법률 분야였다. 수많은 법령을 공포하고 사법판결을 확정했으며 민사법의 가혹한 조항을 제거하고 노예, 과부, 소수민족 같이 국가의 혜택을 적게 받는 계층을 줄였으며 상속 분야에서 혈연을 인정하는 것 등 업적을 들 수 있다. 마르쿠스와 루키우스 공동 황제는 파르티아 전쟁(서기161년-166년)에서 파르티아군을 티그리스 강으로 몰아냈다.
서기 166년 10월12일 마르쿠스는 자신의 쌍둥이 아들 안니우스와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선포했다. 파르티아 전쟁을 끝내고 게르만 부족과 전쟁(서기 166년-180년)을 벌인다. 167년 마르쿠스와 루키우스 공동 황제는 도나우 강을 건너 게르만족 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로마 방위선이 뚫리면서 게르만족이 이탈리아 북부까지 쳐들어왔으나 이를 물리쳤다. 공동 황제인 루키우스가 전쟁 과정에서 사망(서기 169년)하였다. 사망원인은 전염병으로 알려졌다. 마르쿠스는 도나우강 국경선을 뒤찾기 위해 3년간 보헤미안 지방에서 싸운 끝에 도나우강 건너 부족들을 평정했다.
그러나 평소에도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던 마르쿠스는 그만 병사하고 만다. 콤모두스는 마르쿠스 황제가 죽자 재빨리 게르만족과 화해했다. 콤모두스는 17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아버지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것은 두 번째였다. 콤모두스가 등극함으로써 오현제 시대는 종식을 고한다. 로마 제국 사상 최악의 황제 중 한 사람으로 '포학제'라고도 불린다. 서기 182년 누이 루실라가 원로원과 공모하여 암살 시도를 하다가 발각되어 실패했다. 분노한 콤모두스는 상당수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했다. 콤모두스는 차츰 자의적이고 잔인한 통치를 펴기 시작했다.
점차 정신이 이상해지기 시작했고 자신이 헤라클레스 신이라는 망상에 빠져 원형경기장으로 들어가 검투사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서기 190년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로마의 반이 소실되었는데 자신의 영광을 나타낼 좋은 기회라고 여긴 콤모두스는 재건된 로마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붙여 '콜로니아 콤모디아나'라고 명명했다. 192년 정적들이 고용한 그의 레스링 파트너이자 교관인 나르키수스에 의해 콤모두스는 욕조에서 목이 졸려 암살되었다. 콤모두스가 암살됨에 따라 로마는 혼란에 빠져든다. 그의 잔혹한 실정이 야기한 내분으로 96년간 로마 제국이 누려온 안전과 번영의 시대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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