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유명하다. 지은이도 유명하고 책도 유명하다. 우선 지은이 박지원은 정약용과 함께 조선후기 실학의 간판 인물이다. 두 사람은 20세기 내내 서로 나란히 실학의 레일 위를 달렸다. 일단 대한제국기에 두 사람의 저술이 처음 공간되어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박지원의 『연암집』(1900)과 『연암속집』(1901), 정약용의 『흠흠신서』(1901)와 『목민심서』(1902)가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루소와 몽테스키외에 비견되었는데 조선의 선각자라는 뜻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두 사람을 향한 문화적인 관심은 계속 나란히 치솟았다. 정약용의 서세 100년(1935)을 기념하여 동아일보에는 정약용의 학문과 사상을 논하는 글(정인보, 백남운, 현상윤)이 실렸고, 박지원의 탄생 200주년(1937)을 기념하여 조선일보에는 박지원의 예술과 사상을 논하는 글(홍기문)이 실렸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늘 함께 있었는데, 1992년에는 『소설 열하일기』와 『소설 목민심서』가 동시에 출간되어 역사소설의 주인공으로도 나란히 활약하였다. 이 무렵 이지함, 김시습, 정조 임금도 역사소설에서 활보하였다.
1992년은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해였다. 이듬해 추억의 연행길을 따라 이규태의 ‘신(新) 열하일기’가 펼쳐졌다. ‘신 열하일기’는 첫 사진으로 압록강 삼강나루, 마지막 사진으로 베이징 자금성을 전송했다. 이규태는 새로운 국제화 시대를 위한 현재적 교훈을 『열하일기』에서 발견하고 한국 전통의 재인식을 말했다. 1997년 방영된 EBS 스페셜 ‘신 열하일기’의 제2부 제목은 ‘새로운 동북아를 꿈꾸며’였다. ‘신 열하일기’는 한국 사회가 탈냉전의 국면에서 새롭게 만난 낯선 동북아의 낯익은 인식 방법이었다.
과거의 『열하일기』는 현재의 동북아와 접속하면서 고금일체의 새로운 시야를 열었다. 옛 열하일기는 새 동북아를 비추면서 새 열하일기로 거듭나게 되었다. 새로운 동북아의 인식 방법을 제공하는 역사 자원으로서 『열하일기』가 ‘신 열하일기’의 역할을 부여받음에 따라 『열하일기』에 대한 전통적인 역사 감각에 변화가 발생하는 계기가 형성되었다.
본래 『열하일기』는 근대에 들어와 박지원이라는 걸출한 실학자의 사상서로 간주되어 왔다. 특히 『열하일기』에 수록된 명문들을 통해서 박지원의 빛나는 문예와 비판적인 정신을 살펴보려는 관심이 강하였다. 예를 들어 대한제국기 『연암집』을 처음 편정한 김택영은 박지원이 세사를 논한 사대(四大) 명문으로 첫째 「허생전(許生傳)」, 둘째 「차제설(車制說)」, 셋째 「북학의서(北學議序)」, 넷째 「서얼소통소(庶孽疏通疏)」를 손꼽았다. 조선의 북벌 계책이 얼마나 엉성했는가, 조선의 빈곤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조선의 이용후생 기술이 얼마나 졸렬한가, 조선의 풍속이 얼마나 협애한가. 김택영은 박지원의 치열한 조선 비판론의 첫번째 명문으로 『열하일기』의 「허생전」을 손꼽았다.
김택영은 『열하일기』 그 자체보다 『열하일기』의 명문들을 애호했다. 그는 이것들을 『열하일기』에서 분리하여 『연암집』에 별도로 편입하는 정성을 기울였다. 『열하일기』의 허생 이야기와 범의 꾸중 이야기에 각각 ‘허생전’과 ‘서호질문후(書虎叱文後)’의 이름을 부여해 독립시켜 『연암집』 잡저(雜著)에 수록했다. (참고로 ‘서호질문후’라는 이름은 박지원의 글은 ‘호질’이 아니라 ‘호질’의 평문이라는 뜻이다.) 그간 「허생전」과 「호질」은 박지원의 반봉건 사상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명문으로 평가받아 왔는데 그 기본 장치가 김택영에 의해 구축된 셈이었다.
김택영 이래 『열하일기』는 이런 식으로 박지원의 반봉건 사상을 드러내는 명문들로 파편화되어 갔다. 『열하일기』의 전체적인 중국론보다는 명문들의 개별적인 조선론에 주된 관심이 쏟아지면서 『열하일기』는 점점 국내용 『열하일기』로 변화하고 있었다. 조선의 낙후한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사상의 차원을 넘어 세계의 새로운 시세를 발견해야 한다는 통찰의 차원으로 『열하일기』 인식의 혁신이 이루어지는 것은 ‘신 열하일기’의 시기부터였는가.
하지만 ‘신 열하일기’의 선구적인 마인드는 20세기 말이 아니라 20세기 초에 나타났다. 최남선은 1912년 광문회의 『열하일기』 출판을 즈음하여 이렇게 말했다. ‘열하일기를 읽을 때는 오늘 이 때이다.’ ‘연암의 글을 읽고 연암의 생각과 접하여 시세를 관찰하고 천운을 헤아릴 때는 오늘 이 때이다.’ 오늘 이 때를 두 번이나 말했다. 무슨 급박한 일이 있었던 것일까.
광문회 『열하일기』의 발행일 중에서 1912년 2월 9일이 눈에 띈다. 당시 신해혁명의 불길이 중국 대륙에 번져 급기야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의 퇴위 조서가 2월 12일 발표되었다. 중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배만사상(排滿思想)의 발생과 발달, 잠복과 폭발에 대해 알고 싶은 독자, 청나라의 전복이 몽골과 티베트의 분리와 외세 편입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알고 싶은 독자, 그대 앞에 광문회 신간 『열하일기』가 있다! 『열하일기』를 읽을 때는 정히 오늘 이 때가 아닌가!
1912년의 청조 멸망, 1992년의 한중 수교, 그리고 박지원의 『열하일기』. 흥미로운 연구 주제이다. 낯익은 텍스트는 낯선 컨텍스트 위에서 빛나는 법, 『열하일기』의 세계관을 다시 새롭게 비출 수 있는 예기치 못한 동북아 신세계가 미래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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