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5번(황제) E플랫 장조(엘렌 그라모 피아노 연주, 파보 예르비 지휘,프랑크푸르트
팔도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
[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탄생지를 찾아 ]
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다니엘 디포가 꾸며낸 허무맹랑한 이야기같지만 실은 그가 모델을 삼은 살아 있는 로빈슨 크루소가 있었습니다.
영국 북부의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 지방의 수도입니다. 여기서 북쪽으로 60km 가량 떨어진 라고까지 가는 데는 커코디까지 기차로 가서 버스로 리븐으로, 그리고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는 등 교통편이 여간 까다롭지가 않습니다.
* 로빈슨 크루소의 모델인 셀커크가 4년간 살았던 무인도(당시), 로빈슨 크루소 섬
칠레 바로 건너편에 위치(아래 다섯번째 지도를 참조 바랍니다)
라고는 에든버러 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협만의 입구에 있습니다. 부근의 해안 일대에는 경치가 아름다워 스코틀랜드의 리베리아라고 불리웁니다. 포구인 라고는 동네가 아래위로 하(下) 라고, 상(上) 라고의 두 개로 나뉘어져 인구가 도합 천명 남짓, 바닷가 쪽의 하 라고가 옛 마을입니다.
사암(沙岩)의 집들이 갯가를 따라 늘어서 있습니다. 마을 전체가 보존 지역으로 지정되어 집을 허물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가 로빈슨 크루소의 원형인 알렉산더 셀커크의 고향입니다.
* 셀커크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라고
셀커크는 1676년 라고에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학교에서는 수학과 항해에 취미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기질이 사나웠으나 어머니가 그를 좋아해 큰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실수로 바닷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형이 웃어대자 권총을 뽑아 들고 온 집안에 큰 소동을 피웠습니다. 이 일이 있을 후 그는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는 키가 크고 힘이 센 선원이 되었습니다.
* 라고는 아래 지도에서 에딘버러 바로 건너편 Kirkcaldy 바로 옆에 위치합니다
1704년 '생크 포트'라는 배의 항해장이 되어 남쪽 바다로 출항했습니다. 도중에 선장이 죽고 그 후임자는 선원들에게 인기가 없었습니다. 배를 수리하기 위하여 남미 근해(칠레 건너편) 무인도인 후안 페르난데스 섬에 기항했을 때 새 선장은 곧 출항을 명령했고 셀커크는 아직 배를 띄울 수 없다고 반대했습니다.
셀커크는 선장에게 떠나려거든 자기와 선원들을 섬에 두고 가라고 했습니다. 선원들이 자기한테 동조하여 그냥 못 떠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배가 떠날 때 보니 자기 혼자만 떨어졌습니다. 자기를 태우고 가라고 소리소리 질렀지만 배는 뒤돌아보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이 때부터 로빈슨 크루소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1709년 2월. 그는 4년 4개월 만에 지나가던 영국 배에 구출되었습니다. 배에 올라왔을 때 그는 산양 가죽옷을 입고 있었고 말을 많이 잊어버려 사람들은 그가 하는 말을 겨우 알아들었습니다. 술을 주자 그 동안 물밖에 입에 대지 않아 마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 셀커크가 로빈슨 크루소 섬에서 이렇게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움막집
섬에 사는 동안 그는 두 채의 나무집을 지었습니다. 화약이 떨어지고부터는 나무를 비벼 불을 만들었고 달음박질로 산양을 잡았습니다. 그 동안 잡은 산양이 500마리나 되었습니다. 맨발로 숲이고 바닷가고 날 듯이 쏘다녀 발바닥은 가죽이 되었습니다.
배에서 가지고 내린 성경을 읽다가 찬송가를 부르다가 고양이를 길러 함께 춤을 추다가 했습니다. 나무에 글을 새겨 날짜를 헤아렸습니다. 섬은 비가 많이 와서 나무와 풀이 무성히 자랐습니다.
맹수도 없었습니다. 그 동안 여러 척의 배가 지나갔고 그 중 2척이 섬에 와 닿았지만 모두 스페인 배라 잡히면 죽일 것 같아서 달아나곤 했습니다.
* 후안 페르난데스 제도의 로빈슨 크루소 섬(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건너편)
셀커크의 무인도 생활은 그를 구출한 듀크 호의 선장이던 우드스 로저스가 1712년 <세계 주항기>라는 책을 내고 그 이듬해 <잉글리시맨>이라는 정치 신문에 셀커크의 회견기가 실림으로써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다니엘 디포가 <로빈슨 크루소>를 써 낸 것은 그 몇 년 후인 1719년이었습니다.
디포가 셀커크를 직접 만났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디포 자신이 로빈슨 크루소는 셀커크의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고 합니다. 그 줄거리에 상상을 보탠 것입니다.
* 당시 <로빈슨 크루소> 책자가 출판되었을 때 삽화
셀커크는 선장과 싸운 끝에 무인도에 남게 되었지만 로빈슨 크루소는 배가 난파하여 섬에 표착하는 등 일부를 각색했습니다.
라고에는 '로빈슨 크루소의 집'이라고 불리는 2층짜리 돌집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셀커크의 생가입니다. 1885년 이 집의 2층 정면 벽에 움푹 패인 벽감(壁龕)을 만들어 로빈슨 크루소 상을 세웠습니다.
* 라고의 로빈슨 크루소 상(셀커크를 모델로 만들었음)
산양 가죽옷에 화승총을 들고 멀리 바다를 내다보고 있는 모습은 로저스 선장의 <항해기>에서 인상을 딴 것이라고 하니까 정확히는 셀커크의 상입니다.
1712년 어는 일요일 섬에서 나온 셀커크가 금줄 달린 옷을 입고 이 집에 나타났을 때 어머니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향에 돌아오자 혼자 물가를 걷다가 앞바다에 배를 띄우다가 했습니다. 그러더니 1720년 그는 해군 군함 '웨이머스'호에 승선하여 다시 바다로 나갔습니다.
* 셀커크의 생가(로빈슨 크루소의 집)
이듬해 12월 13일, 그는 서아프리카의 기니 앞바다에서 황열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수장되었기 때문에 무덤은 바다입니다. 섬에서 나온 후 결혼을 했으나 자식은 없었습니다. 그는 늘 섬에 혼자 있었을 때 자기는 어느 때보다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셀커크는 군함을 타러 떠나면서 어머니에게 후안 페르난데스 섬에서 쓰던 화승총과 궤짝과 코코넛 껍질로 만든 물컵을 맡겼습니다. 이것이 뒷날 셀커크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준 전시품이었습니다. 그 방문객 중에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대시인이자 작가인 월트 스콧 경도 있었습니다.
이 물컵과 궤짝은 지금 에든버러의 고미술품 박물관에 로빈슨 크루소의 유물로 전시되고 있습니다. 화승총은 어찌어찌해서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했는데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다니엘 디포의 소설에서는 로빈슨 크루소가 맨 처음 배를 띄워 바다로 나가는 곳이 헐 항(항)입니다. 헐은 영국 중부의 동안(東岸)에 위치한 하항(河港)으로 한때는 영국 제3의 항구이기도 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의 배가 떠났어야 마땅한 부두는 구항(舊港)입니다. 헐 천(川)이 험버 강으로 흘러드는 구항에는 낡은 배들이 매어있어 폐선장 같습니다.
* 지금의 헐 항구
알렉산더 셀커크가 살았던 후안 페르난데스 섬은 현재 칠레의 땅으로 산티아고에서 400해리 떨어진 태평양 상에 있습니다. 1574년 페르난데스가 발견한 이 섬은 정확히는 후안 페르난데스 제도인데 3군의 섬 중 가장 큰 섬에 셀커크가 있었고 이 섬 이름이 지금 로빈슨 크루소 도(島)라고 합니다.
이 섬에는 현재 약 1천명 가량의 주민이 살고 있고 그 중에는 육지의 문명을 피해 로빈슨 크루소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온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로빈슨 크루소>의 작자 다니엘 디포는 런던 시내의 번힐 필즈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묘지 가운데 <천로역정>의 작가 존 버니언 및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무덤이 이웃인 디포의 무덤 위에는 뾰족한 오벨리스크가 높이 솟아 그의 묘소를 찾는 사람들 눈에 쉽게 뜁니다.
1870년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에 감사하여 영국의 소년 소녀들이 돈을 모아 세운 것입니다.
* 다니엘 디포의 무덤
[ 다니엘 디포와 <로빈슨 크루소> ]
다니엘 디포(1660~1731)는 59세 때 처음 장편 소설에 손을 대어 그의 대표작이자 그의 이름을 불후의 것으로 만든 <로빈슨 크루소>를 발표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세계 각국에서 번역과 번안이 속출하고 아동물로도 소개되어 널리 읽혀오는 작품입니다.
-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세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고독했던 사람의 이름입니다. 중류 가정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집을 나가 뱃사람이 되었다가 배가 난파하여 무인도에 표착합니다.
여기서 28년 동안에 걸친 외로운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는 배에서 식량, 무기, 의류, 도구 등을 내려와 오두막집을 짓고 산양을 치고 밭을 갈고 짐승 가죽으로 옷가지를 기어 입고 성경을 읽으면서 난경을 꿋꿋이 뚫고 나갑니다.
식인종으로부터 한 토인을 구출해서는 프라이디라 이름 붙여 종으로 삼기도 합니다. 어느 날 영국 배가 나타나자 그는 배 안에서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을 진압하여 그들을 그 섬에 내려놓은 채 영국으로 돌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