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산 김정한 선생의 삶과 문학 10일로 요산 김정한 선생이 타계한 지 열흘째가 된다. 그런데도 요산이 떠났다는 사실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이는 요산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모든 후학들의 한결같은 느낌이다. 아쉬움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을 허전하게 하고 있다. 요산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건강 악화로 글을 쓰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문단의 거목으로 존칭되고 당대의 양심 혹은 스승으로 존경받는 것은 요산이 문학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행동인으로서도 우리의 귀감이 됐기 때문이다. 요산은 백낙청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의 말대로 “조용히 살고 계시는 것만으로도 문학을 한층 문학답게 해 줄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요산문학'이 민족문학의 이정표가 될 힘을 그만큼 크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요산의 문학정신은 등단작인 <사하촌>과 26년 절필 끝에 문단 복귀작으로 내놓은 <모래톱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고통받는 민중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사회 중심에서 소외되고 힘있는 자에게 착취 당하면서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해 가는 사람들을 `순덕이'라 지칭하며 이 나라의 수많은 순덕이들의 참담한 생활을 적시함으로써 동포애적인 연민을 이끌어 내는 한편, 순덕이들 자신들에게 인내만으로는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없으며 애오라지 사회의 부조리나 힘있는 자의 억압에 저항할 때만이 사람답게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 요산문학의 본질이었다. 요산의 단편 `산거족'에는 저항의 당위성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삶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하거나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은 아니다.”이 한마디만으로도 요산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천착의 강도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요산이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나선 것도 인간 존엄을 위해서는 최소한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장치가 필수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후학들에 대한 요산의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항상 열심히 정직하게 살기를 당부했고 태작을 내는 문학인에게는 문단에 문학 공해 풍토를 조성한다며 질책을 아끼지 않았다. 언젠가 당신이 무척이나 아끼는 문학인 한 사람이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단호히 출입금지를 명했다. “어려울 때 힘이 돼준 조강지처를 버리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비록 안락을 취할 기회가 오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준다면 그걸 취해서는 안된다는 뜻이었다. 유신정권에 저항한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영어의 몸이 되자 선생은 손수 내의를 구입하거나 영치금을 마련해 부산 교도소를 찾아 그것들을 전달했다. 그러면서 후학들에게는 “너거가 가서는 안된다. 심부름 하다가 중정에 찍히기라도 하면 우짤기고!”라는 말로 일을 맡기지 않았다. 요산은 떠나기 얼마 전까지도 작품을 쓰고 싶어했다. “논개 얘기를 장편으로 쓸기다.” 자서전 집필에도 무척 마음을 썼다. “출판을 해 공해를 일으키자는 것이 아이라 타자로 쳐서 책 일곱권만 만들어 일곱 아이들한테 주어 가훈으로 삼게 할기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해방 뒤 단정수립을 반대했던 요산이 후학들에게 항상 일깨우던 과제는 통일문제였다. 그러나 결국 요산은 남북대화마저 막힌 냉랭한 현실을 개탄하며 세상을 떠났다. 편히 하길 바랐지만 영영 편히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가슴 아프다.윤정규 소설가· <국제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