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노래로 불리는 목월의 시 '이별의 노래'는 나이 마흔의 문턱에서, 처자를 거느린 가장의 몸으로, 그를 사랑하는 어느 여대생을 그 또한 목메이게 사랑하다 이승의 번다한 족쇄를 뿌리치지 못하고 끝내 서러운 이별을 해야 했던 시인의 아픔이 깊게 배어든 시다.
1952봄, 대구. 시작은 목월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와의 만남이었다. 환도한 서울에서 E여대 국문과 학생이었던 H양은 목월에게 뜨겁게 다가선다. 이형기씨가 집필한 박목월 평전은 "아니 다가왔다기 보다도 슬픔과 안타까움이 어린 애절한 시선으로 그녀는 거의 매일같이 목월의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고 적는다.
1954년 초봄부터 전쟁의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은 서울의 밤거리를 그들은 함께 거니는 날이 많아졌다. 친구를 불러내 H양을 설득했지만 그녀는 소리없는 울음만 삼키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요"고 반문한다. 목월과 그녀는 끝내 여름이 가고 가을바람이 불어왔을 때 제주도로 떠나가 이승의 피안에 작은 초막을 지었다. 목월의 부인 유익순 여사는 그 해 가을이 다 저물 무렵 남편이 다른 여인과 사는 제주도 집을 방문한다. 그녀는 목월과 H양이 겨울을 지낼 한복 한벌씩과 생활비를 담은 봉투를 조용히 내밀고 돌아선다. 그녀 뒤에서 H양은 통곡을 한다. 결국 목월은 제주도 생활 4개월만에 서울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그 동안의 격정을 채 추스르지 못하고 아내와 자녀들이 있는 집의 반대방향인 효자동 종점 부근에 하숙을 정했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그러나, 잊었을까. 울며 몸부림치던 애틋한 지상의 사랑 하나, 가슴 속 무덤에 깊이 묻어둔 그 이승의 슬픔 하나를 그는 끝내 잊었을까. 30여년 이별의 세월이 흐른 뒤 목월은 고혈압으로 쓰러져 이승을 떠나기 얼마전 늙은 H양의 집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한다. 그리고 그날 밤 이렇게 쓴다.
이제 그를 방문했다. 겨우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겨우 그를 방문했다. 이제 내가 가는 길에 눈이 뿌렸다 (중략) 그의 눈에는 영원히 멎지 않을 눈발이 어렸다. 나의 눈에는 눈발이 내린다. 사람의 인연이란 꿈이 오가는 통로에 가볍게 울리는 응답...
-"방문 백발이 되고, 이승을 하직할 무렵에 한 번 더 만나보려니 소원했던 사람을 이제 방문하게 되었다. 덧없이 흐른 세월이여. 끝없이 눈발이 내리는구나」중에서
이 시의 클라이막스는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하는 대목이다. 이 시에 얽힌 시인의 아가페적 비련을 알고 나면 더욱 이 시의 뜻이 애틋하고 아름다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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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1. 16 경북 경주~ 1978. 3. 24 서울.
시인. 한국시단에서 김소월과 김영랑을 잇는 시인으로, 향토적 서정을 민요가락에 담담하고 소박하게 담아냈다. 본명은 영종(泳鍾). 태어난 지 100일 만에 경상북도 월성(지금의 경주)으로 이사가 그곳에서 자랐다. 1933년 대구에 있는 계성중학교에 다닐 때 〈어린이>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특선되었고, 그해 〈신가정〉에 동요 〈제비맞이〉가 당선된 바 있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인과 어울려 지냈으며, 1946년경부터 계성중학교·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고, 이어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홍익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한국문필가협회 상임위원,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중앙위원, 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 문총구국대 총무, 공군종군문인단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1957년 한국시인협회 간사로 있다가 1968년 회장이 되었다. 한때 '산아방'·'창조사' 등의 출판사를 운영했고, 〈아동〉·〈동화〉·〈여학생〉·〈시문학〉 등에서 편집일을 했다. 1962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취임해 1976년 문리대학 학장을 지냈다. 1973년 시전문지 〈심상 心象〉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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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억 속에 담긴 박목월 시인 - 박동규 (서울대 교수)
아버지 박목월 시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 1978년이다. 21년이나 지났다. 지난 봄 원효로4가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목월 시비(詩碑) 제막식을 앞둔 날 밤, 혼자 비석을 찾아갔었다. 아버지의 시비가 선다는 기쁨과 함께 '시를 쓰며 살아온 아버지의 생애'에 대한 나의 기억이 새삼 팽팽한 풍선처럼 떠오르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경주 근처 모량에서 자라 십 여리 떨어진 건천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는 대구계성중학교로 갔다. 벌써 이때쯤 시인 박목월의 마음에는 자연을 노래하는 마음이 움트지 않았나 생각된다. 내가 어렸을 때 고향에 가면 아버지는 내손을 잡고 고향집 앞 야트막한 야산에 올라 기차역으로 난 논둑길을 가리키며 "아버지는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매고 저 논둑 길을 따라 건천에 있던 초등학교를 걸어 다녔다. 네 할머니는 이 야산마루에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어느 눈보라 치는 밤이었지. 학교에서 학예회 준비를 하고 돌아오는데 너의 할머니가 산마루 나무 밑에 짚단을 둘러쓰고 나를 기다리고 있지않겠니. 눈이 짚단에 내려 하얗게 되어 할머니인 줄 몰랐지."
그리고 나서 할머니의 얼어붙었던 차디찬 손을 잡았던 기억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대구에 있는 계성중학교에 입학하자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학년은 그럭저럭 보낼 수 있었으나 2학년에 올라가서 집안 형편이 나빠져서 늦가을이 되었을 때 방세를 내지 못하여 자취방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갈곳이 없어진 것을 안 담임 선생이 학교 온실에서 방학까지 지내게 하였다. 어린 아버지는 온실 한구석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밤이면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요를 펴고 이불을 덮고 누우면 이마 위에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때의 기억을 나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내가 별을 보고 있으면 별들이 내 가슴에 와서 속삭이곤 했지. 나는 눈물 어린 눈으로 별들을 맞이하곤 하다가 보니 밤새 별과 내가 친구 사이처럼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지."
내가 대학을 다닐 때였다. 엉뚱하게 "아버지는 나만 온실에서 잠을 자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분노 같은 것은 없었나요?"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웃으며 "이놈아, 유리창 위로 빛나는 별을 덮고 누워 있는 것이 서러웠으면 시를 쓰지 않았겠지. 가난한 서러움을 벗어던지려고 돈을 버는 사람이 되지 않아겠니" 하였다.
아버지가 청년이 되어 「문장」지로 등단할 무렵 내가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때의 기억을 나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경주에 있는 어느 집 마당 한쪽에 있는 초가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저녁 무렵 진통이 와서 아버지에게 산파를 불러와야겠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그런데 진통 끝에 안집 주인 아주머니가 달려오고 결국 내가 세상에 나왔을 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나가 산파를 찾았지만 눈에 산파집이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만 급해서 자전거를 급히 몰다가 전봇대를 박아 앞바퀴가 휘어지고 만 것이다. 결국 자전거를 들고 산파집을 찾아 허둥거리다 그냥 돌아왔을 때 이미 나는 태어난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 말을 할 때면 언제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꼬리에 "그러니까 시를 썼지" 하였다. 어머니는 현실의 바닥을 보지 않고 멀리 산과 하늘과 별과 바람과 함께 사는 아버지의 천성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는 한밤에 서재에 앉아 시를 쓰곤 했다. 아버지가 지금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때로는 어머니가 마당에 서성거리고 있거나 안방에서 성경을 보고 있으면 알 수 있었다. 집안에 들어가서 내 방에 앉아 있으면 마치 작은 소리로 혼자 노래하는 것처럼 웅얼거리는 소리가 아버지 방에서 새어나와 안개처럼 온 집에 흘러 다니는 것이었다. 이때쯤이면 온 가족이 숨을 죽이고 우리 다섯 형제들은 각기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누구도 시켜서 한 것은 아니지만 습관처럼 오랫동안 몸에 밴 것이었다. 때로는 밤새도록 가끔은 "커피 한잔 타줘요" 하는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시를 향한 산고(産苦)는 하룻밤에 그치는 경우도 많았지만 며칠씩 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런 긴장을 싫어하지 않았다.
내가 어느 날 밤늦게 집 앞에 섰을 때였다. 누가 내 등을 소리 없이 잡는 것이었다. 돌아보니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내 소매를 끌고 골목길로 내려가면서 "아버지, 시가 잘 써지지 않는 모양이다" 하시며 조금 있다가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덧붙여 어머니는 "아버지가 우리를 보면, 저것들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인데, 하는 마음이 들어서야 시가 되겠니. 잠시나마 아버지 눈에서 비켜서 있자"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이 말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시를 쓰는 순간만이라도 아버지의 어깨에 매달린 생활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하지만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어머니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 아버지는 유별나게 가족에게 따뜻한 사랑을 지녔기에 어머니는 이를 알고 그런 것이었다. 아버지 박목월 시인은 아들의 눈에도 시밖에 다른 것은 없는 천성의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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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삶과 자연 그리고 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메아리
첫댓글 카테고리방 개편으로 인하여 게재된 글이 하단으로 많이 내려와서 [목월ㅡ김동리의 사랑과 이별] 다시 올립니다.
어떻든지 다시 올려주시니 또 읽도 좋습니다.^^
이렇게 자세한 건 처음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보물을 찾듯이 그리고 찾았다는 듯 구석구석 찾아다니는 지영님. 감사합니다.
읽어주고 보아주시는 것.
그리고 댓글로 고마움을 표하시는 모습 아름답고 고맙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할 수 있다는 힘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푸른 하늘만 봐도 눈물이나는 때가 있었지요.
아버지를 시인으로 둔 박동규 교수님의 회고에서 그 시대를 산 시인의 가난한 모습을 보게됩니다.
아울러 내조의 헌신을 보게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