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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에 대한 관심이 많은사람들에게 다양한 철학자들을 소개하는 "현대철학은 진리를 어떻게 정의하는가"는 현대철학의 핵심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이 책을 저술한 남경태는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다양한 책들을 편찬했다. 그런데 현대철학의 뿌리는 소위 진보 좌파라 불리는 니체나 마르크스와 같은 사람들과 결을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철학을 읽을 때는 그 사상적 뿌리를 고려해서 보다 객관적으로 읽으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한 동시에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진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저자의 노력의 산물이며 지식의 체계로서 저술한 현대철학을 함께 들여다보면서 현대 철학의 진리체계를 탐구하는 즐거움을 느껴보자. *는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들을 달아놓은 일종의 개인주석이다. 이 내용은 앞으로 일주일동안 계속해서 업데이트할 예정이다.(11월 18일-12월 25일까지 예정)
저자의 글
철학은 철학자의 문턱을 넘어 현대의 일상생활의 공간 속으로 홍수처럼 밀려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언제나 현대는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현대의 정체를 밝히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살펴볼 수 있다면 뭔가 생각할 수 있는 재료들이 생기지 않을까? 이책은 그러한 커닝을 위한 안내서이다. 이책의 인물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태어나 20세기에 활동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서로 연관이 없음에도 놀라운 동시대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을 동시대성으로 읽는 일일 것이다.
칼마르크스: 잉여가치 - 이윤을 낳는 황금거위
물건의 가격을 정하는 곳은 공장이다. 공장의 가격을 공장도가격이라고 부르며 물건에 유통마진이 붙는 것은 상식이다. 공장도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생산원가이다. 여기에 제조이윤이 붙는다. 이 이윤에 직원들의 월급, 자신의 몫을 챙기고 세금도 납부한다. 여기에 다른 경쟁사들과의 가격경쟁이 있다. 그래서 제조업자는 평균적인 이윤율로 이윤을 정한다. 생산원가가 만원이고 이윤율이 20퍼센트라면 12,000원의 가격이 책정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이윤은 원가에 붙이는 액수가 아니다. 이윤은 상품을 원가 이상에 판매하는데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판매자인 동시에 구매자이다. 따라서 판매자로서 얻는 것은 언제나 구매자로서 잃게 된다. 이것을 전사회적으로 일반화하면 판매자로서 얻은 이득의 총액은 구매자로서 잃은 손해의 총액과 같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윤이 생겨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이윤은 어디서 오는걸까? 마르크스의 말에 의하면 이윤은 원가대로 판매해도 생긴다.
'쓸모'와 '다른 선물'은 가치의 두 얼굴이다.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 다른 것과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가 상품의 가치이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고 말한다. 사용가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질적 속성을 말한다. 교환가치는 자신의 상품을 다른 상품과 얼마정도에 바꿀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양적 속성을 말한다. 소비자에게는 교환가치보다는 사용가치가 중요하다. 하지만 경제학에서 중요한 것은 교환가치이다. 교환가치는 한 상품이 다른 상품들과 교환되는 비율을 뜻하기 때문에 경제학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교환가치를 가치라고 줄여서 부른다. 즉 질보다 양을 우선시 하는 것이다.
교환가치는 크기 즉 양을 측정할 수 있다. 상품들이 교환되는 비율은 무수히 많은데 상품의 교환은 서로의 가치가 같을 때 이루어진다. 마르크스는 교환가치의 크기는 "다양한 상품들과의 다양한 등식을 하나의 전혀 다른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돈은 "하나의 전혀 다른 형식"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절대적인 가치기준이 되지 못한다. 돈은 어느 상품보다도 교환하기 쉽기 때문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하나의 전혀 다른 형식이란 바로 노동이다.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노동이 투여되어야만 한다. 현대에 기계를 통한 생산이 늘고 있지만 기계란 노동이 축적된 결과이다. 마르크스가 뜻하는 노동의 질적개념은 숙련도나 노동의 강도에서 사회적으로 일정수준을 이루는 평균적인 노동을 뜻한다. 노동의 양적 개념은 노동시간이다. 이렇게 상품의 가치를 노동시가간으로 환원하면 이윤이 생겨나는 비밀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다. 과거의 정부(근대)는 노동의 상한선이 아니라 하한선을 정했다. 임금이라는 대가를 받는 한 노동도 하나의 상품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임금을 받는다. 이것은 시간으로 결정된다. 노동자는 그 가족이 생활하며 자신의 노동력을 훈련하고 개발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된다. 이 노동을 필요노동이라고 하며, 노동력의 가치는 이 필요노동 시간에 의해서 결정된다. 자본가의 입장에서도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이다. 자본가는 다른 상품처럼, 자기 마음대로 이용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이 노동력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결과 노동자는 필요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하게 되고 자기 노동력의 가치 이상을 생산하게 된다. 노동자가 일하는 시간과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의 가치는 차이가 난다. 초과노동시간은 잉여노동 시간이고, 이 때 노동자가 생산하는 가치가 잉여가치이다. 이 잉여가치가 사장에서 판매되어 현실적인 이득이 되면 이윤이 되는 것이다. 다라서 자본가는 상품을 생산할 때부터 상품과 함께 생산되는 것이다. 자본가가 이윤을 조개 노동자에게 임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임금은 생산하는 과정에서 함께 생산된다. 잉여가치는 모두 자본가의 몫이 되어 이윤이 발생하며 재투자와 사업을 확장할 수 있게 된다. 잉여가치의 생산이 자본주의를 번영시킨 결정적이 동력이다. 사용가치의 주체는 인간이지만 교환가치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상품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인간은 숨고, 새로운 주체인 상품이 전면에 나서면서 자본주의 특유의 물신성, 비인간성이 주체의 해체와 재구성을 하게 한다. 철학적으로 마르크스의 작업은 본질에 대한 관심이라는 전통 철학의 연장선상에 있는 동시에, 상대성으로 시각을 전환하는 탈전통적 요소를 품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단점을 발견하고 노동을 하나의 가치로 발견한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그러나 마르크스 주의자들이 노동을 시장과 자본에 대한 절대가치로 삼고, 정쟁의 무기로 삼음으로서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노동이 절대가치인 공산주의는 이미 그 막을 내린지 오래이며 자본주의 역시 노동을 대치할 수단을 간구하게 만들면서 생산의 주체로서의 자리를 잃어버릴 위기에 초래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의지 - 세상에 진리는 없다.
니체는 '도덕'이나 '진리'와 '이성'이라는 물음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그는 "~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질문은 오히려 불명확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학문에서 "~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기본이었다. 무엇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대상으로 삼아야만 했다. 그래서 인식의 주체인 내가 인식의 대상인 무엇을 냉철한 이성으로 관찰하고 검토하고 분석해서 답을 얻어야만 한다. 그 답을 얻었을 때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주관'이나 '의도'가 섞이면 불순한 앎이며 객관적인 진리가 되지 못한다. 객관적 앎을 위해서 수많은 학문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철학적 주제로 삼아 왔다. 그러나 냉철하게 분석해보면 그렇게 얻어지는 앎이란 없다.
형식의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은 세가지이다. 첫째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것 같이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둘째는, 속성을 말한다. 셋째는 그에 대한 예를 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 모두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 알고보면 세가지는 모두 개념 속에 있는 뜻일 뿐이다. 즉 동어반복(tautology)인 셈이다. 니체는 언어의 환상에 속지 말라고 경고한다. 모든 언어는 주어와 술어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니체는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누가 진리를 묻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묻는 것은 질문자의 의도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질문 속에 포함된 의도, 의지를 읽어내는 것이 그 물음과 연관된 지식과 인식의 꾸러미, 즉 계보를 추적하는 일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런 질문방식을 계보학이라고 부른다. 계보학적 질문에는 단일한 대답으로 응할 수 없다. 의도를 파악하는 일은 자신의 계보를 내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계보학적 물음에는 이미 그 속에 힘 대 힘의 관계, 가치, 의지가 내재하고 있다. 언제나 가치중립을 외치며 가치판단을 뭔가 불순하게 보는 전통 철학은 오히려 그 근엄한 태도 뒤에 모종의 가치를 숨기고 있으므로 오히려 불순한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따라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특정한 방향성을 표방하며, 힘이나 가치를 지닌 물음이다. 그 힘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모종의 의지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것을 힘의 의지, 즉 권력의지라고 부른다.(권력이라는 것은 정치권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적당한 말이 없어서 생기는 번역 상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의지는 심지적인 의지와는 다른 것이다. 일상적인 의미의 의지는 행위주체가 자기 행위의 주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자유의지는 권력의지에 종속되어 있을 뿐이다. 니체는 권력의지에서 인격적인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누가 진리를 말하는가란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 그 물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힘의 관계, 의지와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권력의지는 일종의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의지를 중심으로 하는 니체의 일원론은 근대 철학의 이원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근대 철학의 뿌리는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이 유명한 명제는 이원론의 시작이다. 의심할 수 없는 최후의 나를 인식주체로 삼음으로서 근대 철학은 성립하게 되었다. 따라서 "~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이 근대철학의 이원론에서 나온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나' 없이 '생각한다'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동어반복으로서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것이다. 니체는 근대철학에 대한 불신을 던졌다.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확고하게 구분하고 주체가 대상을 관찰, 분석, 검토하는 근대 철학의 주체가 대상을 관찰, 분석, 검토하는 근대철학의 방법은 잘못되었다, 주체란 없다, 모든 비극은 애초부터 없던 주체를 실체화한 데서 시작한다. 주체의 이성, 앎, 영혼, 자유의지, 자아, 행위의 동기는 모두 허구이다. 심지어 자연법칙으로 여겼던 인과율조차도 인습적인 허구라고 말하였는데 가히 역명적인 발상이었다.
진리 역시 진리는 없고 진리의지만 있다고 말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근대철학은 이성을 중시하고 감각을 무시한다. 그래서 현상계 너머 진정한 세계, 요단강 건너 참된 삶이 있다는 것이 종교의 가르침이며 약자의 도덕이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이상세계는 날조된 것이며 오로지 현상세계만이 유일한 세계이다. 즉 이성은 세계를 인식하는 훌륭한 도구가 아니고 오히려 권력의지의 단순한 도구이다. 세게는 이성이 세운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지를 축으로 하여 영원히 돌고 도는 생성의 무대이며 언제나 과정으로만 남아 있다. 니체는 근대 철학을 완전히 두집어 놓았다. 니체의 철학은 반이성의 철학, 실체의 철학이 아닌 관계의 철학, 정적인 철학이 아닌 동적인 철학, 계몽의 철학이 아닌 허무의 철학,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이다. 충동이나 감각과 같은것으로 여겼던 권력의지가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니체가 보는 세계는 개별적인 실체들이 자리잡은 원자적 무대가 아니라 힘들로 가득차 있고 힘들이 만들어 내는 끊임없는 생성과정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다. 실체(이성)가 힘(권력의지)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실체를 움직이는 것이다. 세계는 힘의 작용으로 인해 실체들이 결합과 해체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영원회기 속에 있다. 니체로부터 시작되는 탈현대 사상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하나의 결정요인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를 거부하는데, 막상 니체는 권력의지라는 단일 기반으로 일원론을 전개한다는 점이 아리러니이다. 니체의 일원론은 종교와 헤겔의 절대정신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일원론과는 다르다고 해야 한다. 덕분에 니체는 체계가 없는 철학자는 비판을 받는다.
*어떤 식으로든 도달할 수 없는 이성계보다는 현상계에 집중한 니체는 인간 세계를 연구한 철학자이다. 니체는 이원론적 체계를 부정하고 일원론을 주장하였지만 종교와 절대정신에서 나타나는 신과 도덕을 거세함으로서 현상계를 권력의지라고 하는 힘의 장, 즉 욕망이 다스리는 세계만 남겨두었다. 이로서 그의 철학은 이성은 사라지고 권력의지의 세계가 되었다. 그의 철학을 비판하자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보다는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인간의 의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로 타락해 가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대제사장(종교)과 빌라도(권세)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권력의지를 드러냈다. 니체는 우리 세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 어둠의 상태만을 우리의 세계로 인식하고자 했다. 니체는 그렇게 이성과 절대성을 부정함으로서 철학적인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부정하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무의식 -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니다
우리 안에 자기도 모르는 부분, 그것이 바로 무의식이다. 의식의 쌍둥이같은 존재이면서도 의식의 뒤편에 감춰져 있는 부분이 무의식이다. 그래서 의식의 뒤편에 있는 무의식이 드러날 때마다 불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무의식을 처음 발견하여 연구한 사람은 의사이면서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이다. 우리의 모든 사고와 행위가 의식에서만 이루어진다고 해도 문제이다. 모든 일상의 생활들을 묵묵히 처리해주는 무의식은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준다. 무의식이 이따금 의식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존재를 알릴 때마다, 자신의 추함을 발견함으로서 몸서리친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최면 때문이었다. 프로이트는 최면을 걸어서 의식을 빼앗아야만 정체를 드러내는 기억을 무의식이라고 불렀다. 의식을 잃는 것은 죽음과 기절 또는 잠드는 것이다. 죽음은 의식과 무의식 모두가 사라지는 것이다. 잠이 들면 꿈을 꾸는데 이 꿈은 의식의 소유자가 선택하고 채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의 발현이라 여기고 꿈의 상징을 해석하고자 했다.
잠재 의식과 무의식은 구별해야만 한다. 잠재의식은 전의식(前意識)이라고도 하며 의식의 일부로서 보조하는 역할을 하지만 무의식은 의식에 억압받고 있으므로 의식에 대립적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무의식은 의식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아무리 강해져도 의식으로 전환되지 않는 잠재의식이 있는데 이를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처럼 의식과 무의식은 함께 있지만 서로 섞일 수 없는 관계이다. 무의식은 드러나지 않지만 의식보다, 더 체계적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의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사실은 무의식이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더구나 무의식은 의식처럼 나름대로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욕구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 이전에도 무의식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무의식에 대해서 연구할 생각이나 방법을 알지 못했다. 무의식은 의식을 통해서 접근해야만 하기 때문에 무의식은 비체계적이고 우연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 그의 숙제였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두가지로 나뉘어진다고 보았다. 하나는 충동과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이드(id:라틴어의 그것이란 뜻으로 정체를 밝히기 어려운 것을 지칭함)이다. 또 다른 하나는 도덕적 사회적 질서가 내면화되어 있는 초자아(superego)로서 이드를 억압하는 역할을 한다. 이 두가지 무의식은 서로 다투고 대립하는 긴장관계에 있는데 이것이 지속된다면 견디지 못하고 고장이 나게 된다. 이 긴장관계를 완화하고 조절하는 또 다른 요소가 자아(ego)인데 자아는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이다. 프로이트는 이드의 에너지가 성욕에 집중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의 극단적인 예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이다. 철학자가 아닌 정신과 의사가 발견한 무의식은 정신분석학 뿐만 아니라 철학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마르크스가 인간존재의 물질적 토대를 분석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들 두 유태인들은 20세기 지성사에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였다. 데카르트 이후로 자아(모든 것을 의심하는 주체로서의 자아)의 동일성은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자아를 선험적으로 인정한 토대 위에서만 근대의 철학과 학문은 가능했다. 그러나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나도 모르는 나의 행위가 있다는 사실이 인간 주체를 분열시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의식을 기준으로 주체를 형성한 근대적 관점을 무너뜨리게 되었다.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무의식을 정립하면서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갖게 했다. 구조주의자들은 '구조'라고 보았으며, 프로이트의 뒤를 이은 정식분석학자 라캉은 '언어'라고 보았고,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라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물리학을 뒤흔든 30년'에 활동했던 만큼 헬름홀츠의 에너지 이론등 물학적 성과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그후의 철학자들은프로이트에게서 기계론적 의미를 거세시키고 있다. 그러나 무의식을 발견한 프로이트는 숱한 빈난과 반발에 시달렸다.
* 헬름홀츠의 에너지 이론이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수학적 공식으로 제시한 것이다. 헬름홀츠는 에너지의 보존 뿐만 아니라 자연 능력 또는 힘이 파괴될 수 없으며 변형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에너지 보존이라는 작업틀 안에 자연 능력의 변환을 포함시킨 점과, 이런 식으로 보존되는 양들을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지시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보다 헬름홀츠에게 중요한 점은 유기체들에게 나타나는 힘들이 비유기적 자연에서 작동하는 힘이 수정된 결과라고 보았다. 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20세기 들어와 질량 에너지 보존 법칙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물리학을 뒤흔든 30년이 등장하는데 20세기의 처음 30년을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이 물리학의 양상을 크게 바꾼 것을 말한다. 상대성이론은 원자 속에서 전자 운동, 태양계에서 행성 운동 및 우주의 은하운동을 논하는데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양자론은 위대한 과학자들의 창조적 연구의 종합적 성과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저서로 G.가모프의 물리학을 뒤흔든 30년이라는 저서가 있다. 기계론적 의미란 모든 현상을 자연적인 인과 관계와 역학적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프로이트 이후의 철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의식과 무의식을 단순한 역학관계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폭넓은 연구가 진행되어오면서, 삶을 지배하고 다스리는데 악용할 우려가 있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이 니체의 권력의지에 영향을 준다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누구도 예견할 수 없는 일이지 않는가? 의식과 절대성이 사라진 세상은 카오스 그 자체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 기표와 기의 - 언어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언어가 나의 주인이라니?
성경에 따르면 고대에는 인류의 언어가 하나였다고 말한다. 인간의 오만이 하늘을 찔러 벌을 받아 민족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게 되자 같은 언어를 사용한 사람들로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 언어의 기원이 어찌 되었든 언어마다 문법체계와 단어들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각 나라의 언어가 다양한 것은 알지만 각각의 언어 안에도 수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사람마다 다 다르게 발음한다는 것이다. 다르다는 것은 결국 공통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이 차이점을 중요하게 말하는 사람이 구조주의 언어학을 창립한 소쉬르이다.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간에도 서로 다른 발음을 하는 것을 소쉬르는 파롤(parole)이라고 부른다. 이 다양한 파롤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을 랑그(langue)라고 부른다. 번역하자면 파롤은 발언이고 랑그는 언어라고 볼 수 있다. 파롤은 말하는 사람의 일회적인 발언이다. 발언은 말하는 사람마다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랑그는 변하지 않는다. 랑그가 없으면 파롤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랑그는 갖가지 특수한 형태의 파롤을 가능하게 해주는 불변의 공통요소, 즉 파롤의 수면 밑에 있는 구조이다. 랑그가 본질이라면 파롤은 현상이다. 본질이 없는 현상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본질은 현상을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내며, 랑그도 그 자체로는 드러나지 않고 반드시 파롤의 옷을 입고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난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영어로는 'I love you'라고 하는데 둘 다 파롤이지만 서로 다른 랑그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영어의 랑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I love you'라는 파롤을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는 우리말과 영어의 문법체계만이 아니라 말을 사용하는 문화적 배경의 차이도 존재한다. 즉 랑그란 단순히 문법체계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만 한다. 너무나 당연한 랑그와 파롤의 구분을 소쉬르가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랑그와 파롤이 전제되어야만 언어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둘의 구분이 되지 않으면 언어학은 어학으로 전락한다. 각각의 언어를 파롤로 모든 언어의 토대에 놓은 공통구조를 랑그로 묶으면 언어학을 정립할 수 있다. 따라서 랑그 파롤의 구분은 소쉬르 언어학의 출발점일 뿐 아니라 언어학 자체의 기반이 되는 셈이다. 소쉬르는 언어학자이므로 랑그를 기초로 해서 언어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에 나선다. 소쉬르는 "언어는 과연 그것이 가리키는 지시대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일까?"란 질문을 던진다. 의성어나 의태어 또는 한자와 같은 상형문자는 말과 지시대상의 관계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말 '개'나 영어의 'dog'는 실제 개와는 관계가 없다. 이와 같이 마음, 파란색, 깨끗함이라는 추상적인 말들은 실제 지시대상과 관계가 없는 언어기호이다.
전통적인 사고에서, 언어와 지시대상이 일치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지만, 언어기호와 그것을 가리키는 대상을 별개로 보는 것은 혁명과도 같은 발상이었다. 전통적인 견해에서 고정불변으로 여겼던 정의(定義)의 개념이 해체되었다. 마음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 몸, 지식, 감정, 의지, 정신활동 등의 말들을 이미 알고 있어야만 한다. 결국 사전에서 어느 단어를 찾아보아도 말들이 서로 돌고 돌 뿐 그 자체로 정의되지 않는다. 소쉬르를 통해서 언어기호의 본질적 의미, 즉 정체성은 그전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언어기호 자체에 정의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기호는 다른 요소들과 맺는 관계와 차이로써만 규정될 수 있다. 여기서 소쉬르는 언어기호를 기표(記表, signifiant시니피앙)와 기의(記意, signifié시니피에)로 나눈다. 기표란 '표시하는 것'이며 기의란 '표시되는 것'이다. 기표가 언어기호라면, 기의는 언어의 의미라고 보면 된다. 전통적인 해석에서 기표는 당연히 기의와 일치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언어기호는 사실 그것이 가르키는 대상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어휘는 나름의 기원을 가지고 발전해 온 것들도 많지만, 소쉬르는 언어가 어떻게 발생하고 발달했는가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소쉬르에 따르면 그것은 언어의 역사, 즉 통시성(diachronie)인데, 언어학에서 중요한 것은 통시성이 아니라 언어의 규칙과 체계, 즉 공시성(synchronie)이기 때문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이 혁명적인 이유는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 즉 언어기호와 지시대상이 서로 무관하다는 점을 밝혔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학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전통철학은 획일성의 철학이며, 동일성의 철학이며, 실체의 철학이었다. 하지만 소쉬르의 언어학적 성과를 반영하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동일성보다는 차이가, 실체보다는 관계가 훨씬 중요해진다. 언어기호의 차이는 각각의 언어기호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에 의해 정해진다. 또한 언어기호는 그 속에 고정된 의미를 굳건히 끌어안고 있는 실체와 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차이라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 뿐이다. 실체라면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와 -같은 것은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언어라는 랑그는 기의와는 무관한 기표들로 이루어진 그물이다. 파롤은 발언자 개인이 주체가 되지만, 랑그는 사회적으로 집합적으로 약속된 언어의 규칙체계이므로, 랑그를 이용하려면 각 개인은 그 규칙을 따라야 한다. 기표와 기의는 무관하므로 각 개인은 실제 사물을 통해서 랑그를 하나하나 배워나갈 수도 없다. 여기서 인간과 언어의 전통적인 관계는 역전된다. 인간은 랑그를 통해서 파롤을 말할 수 있는 것인데 랑그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마지 독자적인 생명을 지닌 존재처럼 행동한다. 인간이 언어의 주인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의 주인이다. 모든 판단이나 사고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언어구조 속에 내재해 있다. 누구나 하나의 발언이나 사고행위를 할 때 암묵적으로 언어를 사용하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언어구조 속에 뛰어들어 사용하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가질 수는 없다. 인간을 중심에서 끌어내리고 언어구조를 중심에 갖다 놓았다는 점에서 소쉬르는 구조주의의 기반을 다진 사람으로 평가된다. 소쉬르 이후 언어학은 철학의 가장 중요한 분과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구조주의 언어학을 형성하면서 후에 프랑스 파리의 기호학파 창시자인 그레마스의 행위자 이론에 영향을 끼친다. 그레마스는 행위자로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중요하다. 대상은 주체가 행동하도록 하는 그 무엇인데, 발신자는 주체에게 대상을 제시하고 수신자는 주체가 대상을 획득하면 그것으로 이익을 얻는다. 이 행위자 모델은 스토리 상에서 행위자들의 목표와 기능들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기호학, 구조주의 문학 연구자들에게 많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담론 연구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행위자에 대한 다원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에드문트 후설 : 판단중지 - 진리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
눈으로 확인된 사실만을 믿으려는 철학자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이들이 실증주의자들이었다. 심오하고 진지한 태도의 선문답을 일삼는 사이비 철학자들에게 실증주의란 만병통치약이다. 실증주의자들에게 신비주의는 모두 사이비이다. 그러나 이 실증주의자들이 눈으로 확인하는 의식과정을 당연하거나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은 철학자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의식의 경험을 하나의 경이라고 했다면 후설은 더 나아가 우주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라고 말한다. 실증주의에서 의식을 당연하게 보는 것은 의식주체와 의식대상을 칼로 자르듯이 완전히 분리하기 대문이다. 나는 주체이며 사물은 대상일 뿐이며, 이 주체와 대상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유리벽이 있다. 나를 주체로 나외의 것을 기타로 보는 사고 방식은 자연과학의 발달에 크게 공헌을 했다. 생각하는 나는 가장 확실한 주체이며 모든 것이 대상이 되기에 실증주의야말로 데카르트가 확립한 근대 철학의 최종 결과물이다.
후설에게 철학은 가장 엄밀한 것을 다루는 '엄리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차원의 철학자는 데카르트와 칸트였다. 그래서 후설은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근대 철학의 제 1차 전환으로, 칸트의 선험철학을 제 2차 전환으로 규정한 다음, 철학을 '엄밀학'으로 전환시키는 최종 단계를 완수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 철학은 가장 근본적인 것부터 문제를 삼아야 함에도 실증주의자들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식과정)를 당연시하고 넘어갔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실증도 추구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장 혐오하는 형이상학에 빠지고 말았다. 실증주의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의식'이야말로 사실 가장 해명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이자 신비로운 현상, 그 자체로 커다란 경이이다. 실증주의에서 경험의 주체와 대상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당연시 했으며, 종교에서 신이 인간 경험의 실질적인 주체라고 보았다. 실증주의에서는 대상이 의식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후설은 이 전제를 의심하였다. 가장 명확한 외부 대상인 사물도 의식과 전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외부 대상인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다라서 인식은 달라진다. 외부의 대상은 언제나 본질의 일부만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본질의 전부인 '절대적인 지식'은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가? 후설은 그것이 의식의 바깥이 아닌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실증주의에서는 의식을 외부 대상과 마찬가지로 고정된 실체처럼 취급했지만, 후설에게 의식의 존재방식은 외부 대상과는 전혀 다르다.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의식은 스스로 완전무결한 실체와 같은 것이 아니라, 텅 비어 있고 항상 어떤 외부 대상과 관계하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미완성의 것이다. 미완성이 완성되려면 무언가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의식이 대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 바로 지향성이다. 이제 의식과 외부 대상은 실증주의에서처럼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연구하고 가공할 수 있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과 대상은 지향성으로 한데 묶여 그 자체로 경험이라는 사건을 이룬다. 후설은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지향성의 한쪽에 있는 의식을 노에시스(사유라는 그리스어)라고 부르고 다른 쪽에 있는 대상을 노에마(사유된 것)이라고 부른다. 즉 노에시스-노에마는 지향성으로 묶인 존재이다.
후설은 데카르트가 회의함으로서 얻은 선험적 자아(의심하는 자아)를 정신적 심리적 실체로 고정시켜 이를 자기 완결적 대상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한다. 또한 칸트는 감각이라는 1차적 경험에 이미 순수 직관이라는 일종의 판단작용이 결부되어 있음을 밝혔으면서도(이것은 지향성의 전단계라고 할 수 있다) 결국에는 이를 질료와 형식으로 분리시켜 주관과 객관의 이원론을 확립했다. 칸트의 이원론에서는 각각의 의식과정이나 경험에서 어느 정도까지가 외부 대상의 반영이고, 어느 정도가 의식주체의 투영인지 가려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후설은 지향성으로 주체와 대상을 한데 묶어서 그 자체로 이루어지는 경험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밖의 모든 것과 분리시켜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곧 후설의 유명한 방법론인 판단중지이다. 주체의 관점에 따라 본질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면, 남는 것은 두 가지 방향밖에 없다. 하나는 영국의 철학자 흄이 말한 것처럼, 주체가 파악한 대상의 부분적인 모습은 오로지 주체의 연산작용에 의해서 조작된 허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후설과 같이, 주체의 경험을 대상과의 관계에서 검토하는 방향을 포기하고 우선 '의식에 주어진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식과 대상을 지향성으로 묶는 작업이 필요한데 후설은 이 주체와 대상의 '한데 묶기'를 '괄호 치기'라고 부른다. 좀더 철학적인 용어로는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부르는데, 경험을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이 방법은 비록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외부 대상의 본질 추구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는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후설은 본질추구의 공식만 제시할 뿐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렇게 한계 설정을 한 점에서 전통 철학에서 한걸음 비켜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블라디미르 레닌: 약한 고리 - 세계대전을 조국의 내전으로 전화시키자
공비라는 뜻은 공산 비적(匪賊)의 준말이다. 일제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는 독립군들을 딱히 지칭할 이름이 없던 일제의 검찰이 공비라는 말을 만들어 썼다. 그러나 북한 게릴라를 공비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도 공비라고 부른다. 같은 사건을 두고 나라에 따라 평가와 용어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 러시아도 독일이 일으킨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면서 방어전쟁으로 정의로운 것이었다. 그런데 레닌은 러시아의 참전을 반대하였다. 19세기는 제국주의의 시대이다. 자본주의가 독점단계로 접어들면서 생겨난 잉여생산물을 이윤으로 실현하려면 식민지 시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세계열강들이 모든 땅들을 점령함으로서 무주공산이 사라졌다. 마지막 남은 중국에 먼저 영국이 불평등 조약을 맺으면서 열강들이 몰려들어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독일은 산업생산력에서 영국을 제치고 선두로 나선 경제대국이 되면서 식민지 시장이 필요했다. 제국주의 후발주자였던 독일이 일으켰던 전쟁이 세계 1차 대전이었다. 즉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벌어진 최후의 영토재편 전쟁이었다. 이러한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할 수 없다. 레닌은 이러한 전쟁의 참전을 반대한 이유였다. 제정 러시아는 후발 제국주의 나라였으며, 가장 후진국이었다. 러시아 사회주의 세력 중에서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러시아의 참전을 지지했다. 사회주의 국제단체인 제2인터네셔널도 분열되고 말았다. 레닌은 전쟁 반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아예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키자고 주장한다.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은 독일의 사회주의자로서 레닌의 동지였던 카를 리프크네히트나 로자 룩셈부르크 등도 야연실색하게 되었다. 이 터무니없는 슬로건에는 레닌의 깊은 수 읽기가 내재되어 있었다. 레닌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전한 단계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모순도 제국주의 단계에 이르러 최고도로 성숙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모순은 바로 생산은 사회적인데 소유는 사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은 수공업적 생산과는 달리 고립된 생산자가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분업을 활용한 사회적 생산인데, 그 반면에 소유는 점점 독점기업과 독점자본가의 수중으로 집중된다는 이야기다. 이 모수이 바로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킨 원동력이다. 소유가 독점화되면 자본주의적 생산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작이 힘을 잃게 된다.(케인스는 이를 유효수요의 부족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독점자본가들은 해외시장 개척에 나설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시장개척을 위해 독점자본가들 간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 결과가 곧 전쟁으로 표현된 것이다. 최고로 발전한 단계는 곧 최후의 단계라는 말과 통한다. 그래서 레닌은 제국주의 단계를 자본주의 최후의 단계로 규정한다. 그다음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다. 하지만 사회주의로 이행하려면 혁명이 일어나야만 한다. 마르크스의 시대에 선진자본주의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을 거쳐 일어나는데, 선진자본주의 나라는 이미 부르주아 혁명을 겪고 나서 자본주의화 되었기 대문이다. 그러나 레닌은 상황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서면서 부르주아 혁명은 더 이상 의미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다, 부르주아 혁명의 단계를 생략한다면 사회주의 혁명으로 곧장 향해 갈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혁명은 어디에서 일어나야 하는가? 제국주의화한 선진자본주의 나라도 아니며 제국주의 식민지가 되어 있는 나라는 더욱 아니다. 그것은 제국주의 쇠사슬에서 가장 약한 고리를 이루는 러시아이다. 러시아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당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혁명의 주체이다. 혁명의 조건과 주체가 갖춰진 러시아는 제국주의라는 튼튼한 사슬이 끊어질 수 있는 가장 약한 고리이다. 혁명의 주체 요인을 부각시키는 것은 레닌 특유의 정치주의적이고 실천적인 관점에서 비롯되었다. 마르크스가 혁명의 경제적 조건을 강조한 데 비해 그는 혁명의 주체를 강조한다. 레닌에 의하면 혁명은 오는 것이 아니랄 이루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주의 전쟁을 통해서 오히려 내전으로 전환시켜 혁명으로 향한다는 레닌의 슬로건은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었다.
레닌의 통찰대로 1차대전 막바지인 1917년 제정러시아는 무너지고 러시아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정권이 등장했다. 레닌의 혁명은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를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로 규정한 레닌의 혁명이론은 혁명의 객관적 조건보다는 혁명주체에 더 큰 비중을 둔 측면이 있다. 그 점 때문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혁며은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우선 사회주의 혁명과 국가의 문제가 새로이 대두되었다. 소비에트 혁명은 러시아 한 나라만을 배경으로 한 혁명이었다. 마르크스 주의에서는 계급이 중시되고 국가는 별로 중요한 개념이 아니었는데 소비에트 혁명은 계급보다는 국가를 우선으로 하는 일국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결국 일국 혁명에 반대하여 프롤레타리아아트 국제주의 원칙에 투철할 것을 주장한 영구혁명론의 트로츠키가 등장한다. 혁명의 성공 이후 신생국 소비에트 러시아는 코민테른을 결성하고 동구권 국가들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여 국제주의 원칙을 지키려 했지만, 처음부터 실을 잘못 꿰어 생긴 구멍은 메워지지 않았다. 레닌의 의도와 달리 소련과 동구권은 형제국이 아니라 주종죽 관계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후진자본주의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가 성숙되기 전에 사회주의를 선택했으니 생산력이 문제였다. 그래서 소련은 혁명 이후 생산력을 증대해야 한다는 과제를 멍에로 짊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70년 뒤에 사회주의를 포기하게 되는 상황은 출발할 때 짊어진 멍에와 무관하지 않다. 혁명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으로 완료되지만 건설은 이후 계속되는 과정이다. 혁명은 끝이 있지만 건설은 끝이 없다. 레닌은 건설의 프로그램을 실천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스탈린을 후계자로 삼지 말라는 그의 유서가 공개되었지만 스탈린은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 수 많은 숙청을 통한 무자비한 유혈극이 벌어지고 경제적으로 신생국 소련을 계속 '약한 고리'로 남겨두게 되었다.
*소련에서 일어난 혁명은 사실 마르크스의 주장과는 완전 다른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극도의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사회주의로 전환된다고 말했지만 소련은 농민들에 의해서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의 사회주의 혁명은 지주와 농노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맹점과 노동의 가치를 발견한 마르크스의 통찰은 귀한 것이지만, 그의 이론과 추종자들이 맺은 열매는 지나친 이상주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칼 융: 집단무의식 - 내 안에 전체가 있다
세계 모든 민족의 신화는 기본 구조가 일치하는 것도 많을 뿐더러 등장인물들이 거의 같은 경우가 많다. 각기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들이 공통적인 요소를 많이 품고 있다는 사실을 융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한 계기는 꿈이었다. 무의식 역시 나름의 체계를 갖추고 있고, 의식이 빙산의 일각이라면 무의식은 빙산 자체라고 말한다. 융 역시 꿈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꿈의 이미지들은 상당히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큰 차이가 있음에도 동일한 이미지가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근본적인 것인 것이 원형으로서 이미지의 사본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융은 그 복사본들의 원본을 원형(archetype)이라고 부른다. 융이 말한 원형은 인간 각 개인의 심리와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역사적이고 집합적인 기억의 본질을 가리킨다. 원형은 인간 심리의 본성을 규정하는 초인격적 인간 심리구조이다. 인간 개인은 이 원형을 거부하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 동물들은 처음부터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본능을 지니고 태어난다. 하지만 인간은 20년 동안 배우고 나서 어른 구실을 한다. 인간에게는 생물학적인 본능보다 오히려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본능이 큰 작용을 하는데 그것이 융이 말하는 원형이다. 이 원형은 대단히 보편적이어서 개인이 처한 문화 및 시대와는 무관하게 심리의 본성을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즉 원형은 인간이 인간이도록 해주는 기본구조, 즉 '인간의 조건'이다.
인간은 원형을 가장 커다란 에너지원으로 활용한다. 원형과 자아의 관계를 올바르게 설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원형에서 더욱 큰 에너지를 얻어낼 수 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이 유아기에 경험한 내용이 의식에 의해 억압되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원형은 모든 개인의 경험을 초월하여 개인의 경험보다 앞서 존재하는 초인격적 본질이다. 모든 개체 안에 내제하지만 개체를 넘어서는 무의식, 그래서 융은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집단무의식은 원형이라는 충실한 기억의소자로 만들어지는 무의식이다. 이것이 각 개인에게 투과되어 개인의 무의식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집단무의식의 구조 안에는 각기 다른 문화와 시대에 있었던 상징물, 이미지, 신화, 신등이 놀랍도록 비슷할 뿐더러 환자의 꿈에 나타난 이미지들과도 비슷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집단 무의식은 역사가 오랜 인류 전체를 가리키며 일시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인간과 인류 전체가 생존하는 한 지속되는 것이다. 개별 무의식은 꿈이나 농담, 실언 등에서 징후를 드러낸다. 집단무의식은 꿈 뿐만 아니라 신화와 종교, 개별 인간의 생산물이나 모든 영역에 침투한다. 심지어 과학도 집단무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모든 인간 경험은 집단무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경험을 지각하는 것 자체가 집단무의식이므로 과학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집단무의식은 인간의 예술, 신화, 종교에 기록된 모든 이미지들의 원천이며 마르지 않는 저수지이다. 집단무의식에서 흘러나오는 꿈은 그 꿈을 꾸는 사람은 물론 그가 속한 전체 사회에 대해서도 함축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무의식을 의식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장벽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레비스트로스 같은 이는 근대 철학의 주제인 '나(자아)'를 중심에서 끌어내리려는 작업을 통해 그 한계를 다소나마 극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융은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 무의식적인 원형도 역시 자아라는 주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좌표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융은 무의식적 원형이 의식에 도입되는 계기가 바로 자아라고 생각한다. 결국 원형과 집단무의식은 의식과 담을 쌓고 살거나 실 끊어진 연처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자아라는 튼튼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융의 자아는 에고라는 의식적 주체와 더불어 자율적 콤플렉스라는 무의식적 주체를 포함하고 있는 이중적인 존재이므로 그것이 가능하다. 융은 대립물의 쌍을 설정함으로서 주체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 대립물의 개념을 묘하게도 연금술에서 찾았다. 융은 연금술에서 금속이 변화하는 과정을 무의식의 자기 실현과정으로 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연금술사는 스스로의 영혼을 변화시키게 된다. 따라서 진정한 연금술은 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을 무엇으로 변화시킨다는 뜻이므로 적어도 두 개의 항이 필요해진다. 이것이 융이 말하는 대립물의 쌍이다. 융은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이미지, 감정, 관점이 있을 때 자아가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곧 대립물의 통일이다. 융은 주체의 분열과 통합을 주장함으로써 주체의 문제를 극복했지만 그것은 극복이라기보다는 회피에 가깝다. 사실 융의 집단무의식 개념은 헤겔의 절대정식과 같이 하나를 가지고 전체를 설명하는 방식처럼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융은 과학적 합리주의를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상대성 - 빨리 움직일수록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자신이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서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무엇보다 시간 개념에서 크게 달라진다.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빨리 움직일수록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시간과 공간을 합쳐 시공간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세계는 3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차원은 원래 수학적 용어인데, 한 점에서 직각으로 교차하는 수직선의 수에 따라 차원이 나뉜다. 점이라면 아예 수직선 자체가 없으므로 0차원, 선이라면 선이 하나만 있으므로 1차원, 면이라면 고등학교 수학교과서에서 지겹게 보던 x축과 y축 2개를 그어 만들어지므로 2차원, 입체라면 x축. y축, z축 3개이므로 3차원이 된다. 수학적으로 보는 우리 세계는 3차원이지만 물리학적으로 보면 우리의 세계는 4차원이다. 4차원은 독일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헤르만 민코프스키가 만들어낸 말이다. 그러나 사실 그 개념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3차원의 공간에 시간을 더한 아인슈타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간과 공간을 세계가 존재하기 위한 기본 틀이라 보았고, 칸트는 인간의 의식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 개의 형식이라고 보았다. 세계의 모든 존재와 인간의 모든 경험은 시간의 축과 공간의 축이 이루는 좌표상에 표시할 수 있다. 함수의 x축과 y축이 서로 수직이듯 시간과 공간은 서로 완전한 별개의 축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물리학적으로 같다고 말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별빛은 사실상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것이다. 즉 별과 우리 사이의 거리의 공간은 과거에서 현재의 시간과 똑같은 효과를 가진다. 그래서 시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운동상태에서 측정하는 시간은 다르다. 빨리 움직이는 물체일수록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고 말한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반짝이는 빛은 열차 밖에서 볼 때 이동한 거리가 다르다. 왜냐하면 빛을 관찰하는 열차 안의 사람과 열차 밖의 사람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하는데 빛의 속도는 정지된 상태나 운동하는 물체에서 측정하거나 불변하기 때문이다. 즉 물체의 속도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접이다. 우주에서는 절대적인 기준점이란 없다. 로켓은 지구로부터 멀어져가지만 사실 지구가 로켓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단지 가속도의 문제만이 다를 뿐이다.) 이 상대론적 사고는 갈릴레이 때부터 해오던 것이다. 여러 과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느꼈던 모순, 즉 빛의 속도가 불변이라는 사실을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았을 뿐이다. 다른 과학자들은 빛의 속도가 불변이라는 사실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면 아인슈타인은'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것을 E=mc2이라는 공식이 된 특수 상대성 이론의 최대 성과이다. 물체의 속도가 광속에 가까울수록 그 질량이 무한대로 늘어난다는 사실은 열차의 실험에서 몇가지 간단한 일차방정식과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이용하여 증명된다. 상대성 이론의 의미는 에너지는 곧 질량이며 질량은 곧 에너지라는 내용이다. 바로 여기서 핵무기의 원리가 파생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질량은 엄청난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으므로 가장 손쉽게 붕괴하여 에너지화할 수 있는 질량만 찾아내면 되었던 것이다.
특수 상대성이론은 등속운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 11년 뒤에 가속운동의 경우까지 포함한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는데, 여기서도 질량은 곧 에너지라고 말한 것에 못지 않은 단순한 '미학적'원리가 등장한다. 그것은 중력은 가속도라는 원리로 '등가의 원리'이다. 자유낙하로 떨어지는 엘리베이터는 중력을 느끼지 못하나, 가속도로 상승하는 엘리베이터에서는 중력이 늘어나는 느낌을 받는다. 가속도가 중력과 같은 효과를 가진다는 사실은 평범한 것이었지만, 아인슈타인이 발상을 전환하여 포착하기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중력과 가속도가 서로 호환된다는 사실을 통해 중력장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아인슈타인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인 리만 기하학을 도입하여 중력을 공간 기하학적으로 인식한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발견을 하는데, 중력장이 시공간을 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빛은 직진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빛이 통과하는 공간, 즉 시공간 자체가 휘어져 있다면 빛도 그에 따라 휠 수 밖에 없다. 마침내 1919년 개기일식이 일어났을 때, 영국의 천문대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태양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야 할 별의 빛이 태양의 중력장을 거치면서 망원경에 포착된 것이다. 이 사실로 인해 우주는 넓게 퍼져 있는 무정형의 공간이 아니라, 휘어진 중력장을 따라 지구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우주는 일종의 닫혀있는 우주, 하나의 계(系)와 같은 구조가 되는 것이다. 이 발견에는 문제가 있는데 계가 있다면 그 바깥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아주 작은 질량도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한다.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무한대의 에너지가 된다. 이론상 입자가속기를 통해서 소립자 하나를 무한히 가속시켜 빛의 속도에 가깝게 만든다면 무한대의 에너지, 즉 우주 전체의 에너지와 맞먹는 에너지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입자 하나를 빛의 속도에 가깝도록 무한히 가속시키려면 전우주의 에너지와 맞먹는 에너지가 필요하며, 그 에너지를 사용한 입자는 전 우주의 질량과 같은 질량을 지니게 된다. 질량은 곧 에너지라는 간단한 원리를 통해 그게 그거라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은 빛의 속도, 즉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한계를 인정한데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즉 과학이 처음으로 자연법칙이 정한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제 아인슈타인에 이르러서 전통적인 과학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상대성 이론은 전통적인 과학발전의 핵심이었던 주관과 객관의 확실성을 해체했다. 이것은 전 우주를 대상으로 본다면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다. 즉 우주 전체에서 기준이 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전통 과학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다. 하나의 사건이 복수의 시간지평을 지닌다는 사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확실한 앎이라는 것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진리를 인식하는 주체가 불확실한 판에 절대적인 진리관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뉴턴 이후 굳건하게 발전해온 고전물리학과 역할을 해체했지만, 동시에 근대 철학의 유산인 결정론과 실체론에 대한 신념은 확고히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보어의 상보성 원리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등 당시 새로이 부상하던 양자역에 대해서는 한번도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결국 그가 정립한 이론은 근대의 과학적 이성을 해체하는 단초를 열었으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이성중심의 사고에 서 있던 경계선상의 인물이었다.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에서 나온다. 하이젠베르크는 1901년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양자역학을 연구하기 위해서 덴마크 코펜하겐의 보어에게 찾아갔다. 하이젠베르크는 오직 측정 가능한 것만을 이론으로 삼는다는 실증주의 연구방식을 깨트렸다. 하이젠베르크는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미시세계에서는 위치와 운동량의 측정이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또한 관찰자의 행동 역시 영향을 주기 대문에 관찰의 결과가 불확실하게 만든다. 이것을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말했다. 양자역학에서 상보성의 원리(complementarity principle)는 광자 또는 전자가 파동의 특성을 보이기도 하고 입자의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는 원리이다. 물질을 이루는 기본입자들은 입자로 취급할 수도 파동으로 취급할 수도 있지만, 입자와 파동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양자의 세계에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모두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유효수요 - 거시경제학의 지평을 열다
고전경제학에서 말하는 소비 개념은 생산의 영역까지 적용한다. 즉 최대의 생산을 위해 자본을 가장 효율적으로 투자하는 방식은 무엇인가하는 문제이다. 효율성은 곧 합리성을 뜻한다. 고전경제학은 효율성에 따라 가장 합리적으로 소비하고 생산하는 행위자를 경제주체로 설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것은 매우 올바른 출발점 같지만 사실은 극히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소비자는 이상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합리적인 소비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소비자의 욕구에 따른 완전한 선택의 자유가 있어야 하며 완전한 자유경쟁이 전제되어야만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소비주체는 완벽한 자기 의사에 따라서 소비할 수 없으며, 항상 조건에 제약을 받는다. 생산의 주체도 마찬가지다. 최대의 생산을 위해 자본을 가장 효율적으로 투자한다는 생산주체의 개념은 벽에 부딪힌다. 완벽한 자유경쟁은 애초부터 없었으며, 독점이 등장하고 무역장벽이 세워진 현대에 들어서는 더욱 그렇다. 현실에서 자본의 흐름은 매끈하게 흐르는 시냇물이 아니라 여기저기 웅덩이가 깊이 팬 강바닥을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거친 강물이다. 경제주체의 자기 동일성은 무너졌고 고전경제학은 주체를 잃어버렸다. 코너에 몰린 고전경제학의 주체를 완전히 해체한 사람은 케인스이다, 그는 고전경제학의 비현실성과 관념성을 파악하고 1929년 세계 경제대공황을 계기로 새로운 개념의 경제주체를 확립하였다.
고대 로마 이래 가장 넓은 영토와 가장 센 국력을 자랑하는 국가는 영국이었다. 19세기 영국의 경상수지는 엄청난 흑자였다. 그러나 무역수지는 적자였다. 영국의 경상수지가 흑자였던 이유는 해운업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해운업을 뒷받침할 막강한 해군력도 갖추고 있었다. 19세기의 영국 경제현실은 생산과 서비스, 경제력보다는 군사력을 통해서 경제강대국이 되었던 것은 케인스의 사상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첫째, 케인스는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고전 경제학의 전제를 거부하고 오히려 거꾸로 바라본다. 소비, 즉 수요를 중심으로 경제를 고찰하는 것이다. 둘째, 그는 자유방임 경제를 거부하고 국가 개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두 가지 관점을 종합하는 것이 곧 유효수요의 개념이다. 유효수요란 가치가 이윤으로 실현될 수 있는 수요를 가리킨다. 아무리 많은 상품을 생산했다 해도 이 상품에 대한 수요가 효과적으로 형성되지 않으면 이윤은 나오지 않는다. 이윤이 없으면 재투자는 불가능하고, 산업은 위축될 수 밖에 없다. 사실 자본주의적 생산이란 수요를 전제로 한다. 수공업 단계와는 달리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직접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내놓을 뿐이다. 생산자들은 미리 시장을 염두에 두고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요는 생산의 초기 단계부터 고려해야 할 중요 사항이다. 다만 생산자는 시장을 제어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상품을 생산하는 데만 관심을 쏟을 수 밖에 없다. 수요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국가인데 이미 19세기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군사력을 매개로 해서 나타났다. 하지만 1차대전이 끝나고 제국주의적 영토재편이 완료되고 열강들의 세력판도가 안정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국가는 재정과 금융 정책을 통해 경제에 개입하게 된다. 자유방임이 포기되고 정책이 우선시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재정과 금융 정첵은 생산이 아니라 수요와 관련된다. 생산은 개별 기업들에게 맡기고 국가가 총수요를 관리하는 방식이다. 고용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황기에는 불가피하게 대량실업이 발생한다. 생산을 중심으로 보는 고전경제학의 처방에 따르면 실업을 줄이기 위해서 임금을 인하해야 한다. 임금을 인하하면 생산비를 줄일 수 있으며, 고용량 전체를 더욱 늘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금을 인하하면 오히려 실업을 더욱 악화시키고 생산은 더욱 위축될 뿐이다. 그래서 케인스는 수요를 중심으로 생각할 것을 제안한다. 실업을 줄이기 위해서는 노동수요를 늘리면 된다. 따라서 국가가 공공정책을 통해 노동에 대한 유효수요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케인스의 경제사상은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발상의 전환인 동시에, 실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정립될 수 있었다. 그는 오류가 없는 모델을 수립하려는 탁상공론적인 경제이론보다는 특정한 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경제적 사고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케인스의 유효수요의 개념은 칠천적인 관심에서 출발해 발상을 전환함으로서 정립될 수 있었다. 케인스의 시대 이전부터 이미 사람들은 유효수요에 대한 생각이 있었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했는데 제국주의 군사력이 유효수요를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케인스의 탁월함은 바로 발상의 전환에 있다. 생산의 규모로 경제활동 수준을 측정한다는 생각은 상식이었지만, 케인스는 산출량과 생산능력이 아니라 수요가 경제활동 수준을 결정한다는 파격적인 생각을 한 것이다. 생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고전경제학이 생산주체인 노동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총생산량이 결정된다고 본 데 비해 케인스는 마치 오늘날의 대량소비 사회를 에견이라도 한 것처럼 기업가가 예상하는 유효수요의 규모가 생산량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합리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고전경제학의 주체가 사라진 지점에서 케인스가 설정하는 경제주체란 총수요의 주체인 국가이다. 국가경제 전체를 하나의 주체로 보아야만 경제현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고전경제학의 무대인 시장은 여전히 제 역할을 하며, 미시 경제학도 여전히 제 기능을 한다. 하지만 고전경제학에서처럼 미시경제학을 그대로 연장, 확대해서 거시경제를 설명하려 하면 혼란에 빠질 뿐이다. 개인을 경제주체로 삼은 자유방임주의는 순진무구한 사고일 뿐 아니라 오류이다. 전체의 자유 총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 미시경제와 거시경제 사이에는 단절이 존재한다.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따라서 전체를 인식하는 방식은 부분들을 인식하는 방식과 달라야 한다. 전체에 대한 총체적 인식은 부분에 대한 경험적 인식을 종합하는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것을 케인스는 '합성의 오류'라고 불렀다. 적어도 케인스는 경제를 거시적으로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함으로서 자기 당대의 경제적 해답을 만드는 틀을 제시한 것이다.
고전경제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1929년의 대공황은 유효수요의 개념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대공황이 발생한 원인은, 수요의 부족에 있었으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자본주의 경제는 주기적인 공황의 파국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유효수요의 개념은 이러한 경제현상을 설명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경제정책에 실제로 적용되어 실효를 거두기도 했다. 대공황으로 발생한 실업자들을 동원하여 미국의 대규모 국책사업을 벌였던 뉴딜은 유효수요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정책이었다. 케인스는 완전고용 아래의 균형상태만을 가정하는 고전경제학의 이론을 특수 이론이라 부르고, 자신의 이론은 불완전고용까지 포용하는 일반이론이라고 말했다. 다분히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연상하게 하는데, 그의 책 제목은 "고용, 이자,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이다. 뉴딜 정책만이 아니라 1950, 60년대에 크게 발달한 우주과학 산업이나 각국마다 대규모로 유지하는 군대와 무기산업 역시 수요를 중심으로 본 경제정책의 일환이다. 달과 화성에 로켓을 보내는 것은 과학보다는 경제적 측면이 더 크다. 첨단산업은 경제, 산업적 연관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군대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순수한 소비집단이다. 무기도 수출품이 된 현대에서는 다른 개념이 되었지만, 고전적인 의미에서는 생산에 속한다. 이렇게 유효수요의 적용폭이 상상 이상으로 넓은 것은 역시 이 개념이 실천적 관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화폐에 대한 견해에서도 발상의 전환을 보여준다. 고전경제학에서 화페는 단지 경제행위의 매개역할을 할 뿐이다. 고전경제학에서는 통화량이 증ㄱ다하면 물가가 오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통화량이 변동할 경우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은 물가가 아니라 이자율이다. 이자율은 투자에 영향을 미치며 이것은 총수요에 연결된다. 이와 같이 케인스는 화폐가 생산에 대해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케인스는 경제학자로서 드물게 투기로 재산을 증식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었다. 자본주의를 가장 잘 읽은 경제학자라고 할 수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 인식론적 단절 - 단절을 통해 발전하는 과학
정치권, 특히 그 시대가 군사정권 시대라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인물이 느닷없이 권력을 장악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때문에 정치권력의 교체는 야당세력이 언제나 주장하는 이른바 수평교체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불연속적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예측 가능한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의 영역에도 불연속적으로 발전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바슐라르(1884~1962)에 따르면 과학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전까지 과학적 성과물을 토대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교과과정에서 고등교육이 중등교육과 다른 점은 인문계와 자연계로 나뉜다는 것이다. 수동적인 자세의 학생들은 처음으로 자기 의사에 따라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학문을 인문계와 자연계로 나누는 것은 타당한 것인가? 이러한 학문의 대표주자는 철학과 과학이라 할 수 있다. 즉 두 계열을 합친다는 것은 철학과 과학을 합치는 것과 같다. 과학은 존재를 다루고 철학은 사유를 다룬다. 따라서 대상의 차이는 분명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철학은 과학을 포함한다. 과학적 담론을 대상으로 한 과학철학이 바슐라르의 연구영역이다.
하지만 바슐라르는 과학 위에 군림하는 철학을 거부한다. 그는 오히려 철학이 과학의 사범이기는커녕 언제나 과학에 뒤처져왔다고 본다. 과학적 사고의 근본적인 특징은 운동성에 있다. 그에 비해 철학적 사유는 부동성의 경향을 띈다. 과학은 언제나 개방적이고 역동적인데 철학은 체계를 고집하고 닫힌 공간에 안주하려 하며, 운동하지 않는 이성에만 의존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과학은 새 옷을 갈아입었는데 철학은 여전히 뉴턴 시대의 어휘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과학자는 스티븐 호킹이나 아인슈타인이지만 철학자는 하이데거나 비트겐슈타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떠올린다. 바슐라르는 철학의 의무가 과학적 인식의 기능을 찾아내는 데 있다는 전통 과학철학의 생각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방법은 정 반대인데 각각의 과학 내부에서 인식기준을 찾고자 했다. 또한 철학이 과학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과학을 검토하는 데서 철학적 개념들이 올바르게 정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개별 과학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다. 바슐라르의 철학은 과학적 인식에 대한 평가 속에서 나타나며, 언제나 과학의 옷을 입고 있다. 과학자는 자신의 과학에 대한 철학을 항상 공표하지 않기 대문에 각각의 과학에 대한 철학을 공표하는 것은 철학자들의 몫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과학자의 영역 바깥에 있는 문제이다.
미국의 공산주의자며 기자였던 존 리드는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을 직접 보고「세계를 뒤흔든 10일」이라는 책을 썼다. 정치적인 격변기였던 20세기는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30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인류역사를 살펴보면 중요한 과학적 발전은 몇몇 시기에 비약적으로, 즉 한동안 없다가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식으로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슐라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만든다. 이에 다르면, 과학적 발전은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약적으로, 혁명적으로 일어난다. 과학은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그것과 단절하고 절연함으로 발전한다. 비슐라르는 이 예로 뉴턴의 역학 체게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체계 사이의 단절을 들고 있다. 상대주의적 사유의 문에 들어서게 되면, 뉴턴의 과학을 구성하던 개념들은 파괴되어 버린다. 그리고 뉴턴의 모든 계산 결과들은 상대성의 계산으로 대체된다. 앞서 과학은 운동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철학은 부동성을 기반으로 하며 항상 과학에 뒤처진다는 이야기는 이것과 통하는 말이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변화를 대체의 과정이라고 말하는데 문제틀의 대체 즉 역사는 문제틀의 변천과정이라고 말한다. 문제틀이 바뀌면 전사회적인 총체적 관점이 변화된다. '인간은 역사를 바탕으로 역사를 창조한다'는 온고지신의 정신, 역사주의적 발상인데, 이것은 상식에 불과하다. 과학은 상식이 아니라 지식이며 담론이다.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단절의 또 다른 측면으로서 과학적 인식과 일상적 인식 사이의 단절을 주장한다. 상식은 새로운 과학적 사고가 나타나지 못하게 방해하며, 새로운 과학적 사고가 나타났을 때, 일상적 사고, 즉 상식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경향이 있다. 바슐라르는 이것을 인식론적 장애라고 부른다.
쉽고 재미있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풍조가 퍼지고 있는데 쉽다는 것은 단순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론이 다루는 이론적 대상이 추상적이고 복잡한 것이라면, 이론 역시 추상적이고 복잡해야만 오히려 구체적이고 알기 쉽다.(종교인들이 남긴 선문답을 해석하고 주해하는 방대한 분량의 문헌들이 존재한다는 점 때문에) 바슐라르는 실재란 결코 단순하지 않고 과학사에서 단순성을 취하려믄 모든 시도는 예외 없이 과도한 단순화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고 말한다. 따라서 바슐라르의 인식론은 철학에서도 그 자신의 철학에서도 단절을 품고 있다. 알튀세르가 이 개념을 받아들여서 청년 마르크스와 후기 마르크스 사상을 단절로 바라본 관점은 유명하다. 하지만 단절의 관점에서 보면 언제나 철학적 문제는 새롭게 제기될 수 밖에 없다. 뉴턴물리학과 아인슈타인 물리학이 설명의 대상은 동일하나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처럼 철학에서도 문제를 해결, 또는 해소하는 방식은 달라지고 단절되지만, 문제 자체는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잇다. 어느 것이든 형성기에 있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전부 드러내지 않는다. 자본주의 속에서 자본주의의 참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한 마르크스의 이야기도 이것과 통한다. 그래서 바슐라르는 모든 철학에는 일단 부정의 철학, 비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비철학이 온전한 철학으로 발전한다면 비철학이라는 낙인을 버릴 수 있지만, 그것은 철학의 완성인 동시에 죽음이 된다. 따라서 살아 있는 모든 철학은 비철학이다. 아직까지 우리의 상식에서 비철학은 아직 미완성인 상태라 할 수 있다.
게오르기 루카치: 계급의식 -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최초의 계급
인간은 예측 불허의 존재이다. 겉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행동은 얼마든지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이것은 한 인간, 즉 개인일 뿐이다. 집단으로서 인간은 또 다르다. 열 사람의 인간집단이 고개를 끄덕인 경우, 행동을 달리하기란 쉽지 않다. 열 사람 모두가 다 생각이 다르다 하더라도 집단은 약속한 대로 행동하게 된다. 심지어 집단에 속하지 않은 다른 개인도 자기 의사와 달리 집단의 행동을 따라하기도 한다. 단순한 인간집단이라면 군중심리라는 말이 적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집단이 아닌 계급은 군중심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계급은 취미나 성격이 비슷한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라 경제적인 이해관계로 결집된 안간집단을 뜻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레닌은 계급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 생산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구분된다고 말한 바 있다. 즉 계급을 구분할 때는 심리보다는 객관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즉 계급은 경제적인 이해관계로 묶인 인간집단이다. 계급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각 개인의 편차는 있지만, 서로 같은 처지에 있기에 행동양식이나 목표도 같다. 그러나 루카치(1885-1971)는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같다고 해서 한 계급이 반드시 행동을 함께 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루카치에 따르면 경제적 이해관계는 행동통일의 필요조건일 뿐이고 충분조건은 계급의식까지 갖추는 것이다.
과거의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과는 다르다. 자본주의 이전의 계급은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계급은 전쟁이나 출신성분에 따라 계급이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봉건제도가 붕괴되면서 태어난 사회제도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이나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프랑스 혁명을 통해 과거의 신분제도가 철페되면서 나타났다. 자본주의는 농노들에게 자유를 주고, 신에게서 해방시켜 인식의 주체로 세웠다. 그러나 인식의 주체로서 인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활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계급을 이루게 되었다. 노동자 계급은 스스로 된 것인가 어쩔 수 없이 된 것인가? 자유로운가, 자유롭지 못한가에 대한 양자택일식의 질문의 성질이 아니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얻은 이중적 자유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가져다 준 자유는 신분의 자유와 더불어 토지로부터의 자유였다. 신분의 자유에서 토지로부터의 자유로 이어지는 이중적 자유는 생계의 원천을 잃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루카치는 자본주의란 이전까지의 인류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사회제도라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역사상 최초로 사회 전체를 경제적으로 통일시킨 제도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모든 측면을 화폐라는 매개체를 이용하는 단순한 관계로 만들었다. 이것은 신분제도까지 단순화시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두 계급을 탄생시켰다.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 사회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자본주의를 자연법칙과 같은 것으로 여긴다. 루카치는 이것을 부르주아지 계급으식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계급, 프롤레타리아트는 반대로 자본주의 자체에 의문을 갖는다. 부르주아지의 몰역사성과는 달리, 역사적 총체성을 가지고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야말로 자신의 경제적 토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최초의 계급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이전계급과는 달리 신분적, 정치적, 사상적 자유를 누리고 있는 계급이다. 완전한 의미의 자유는 아니라도 그 자유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인류 최초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는 계급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부르주아지는 역사를 고정불변의 역사로 본다. 19세기 랑케는 "모든 시대는 항상 비슷한 간격을 두고 신에게 접근해 있다."는 역사적 상대주의를 말했다. 루카치는 이런 관점에서는 사회제도의 기원을 찾을 수 없으며 찾는 것조차 무의미해진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역사는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힘의 비합리적인 전개과정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가장 특수한 단계인 자본주에서는 무의식적인 과정이 아닌 의식 즉 계급의식이 개입하는 과정이다. 루카치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비로소 경제적 계급 이해관계가 역사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계급 이해관계와 계급의식을 일치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적 총체성이 있는데 총체성이란 전체를 부분의 합이 아닌 유기적으로 통합시켜서 보는 것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의 전체, 곧 그 기원과 종말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운명도 의식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는 생산과정의 모순으로 붕괴할 것이며, 인류사회의 다음 단계는 무계급사회가 될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장차 자신이 소멸하리라는 것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역사적,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급이다. 얼핏 루카치의 계급의식은 마르크스 이론과 다소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물론 즉 의식을 물질의 반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루카치가 말하는 계급의식은 경제적 계급 이해관계의 반영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계급의식을 계급 이해관계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자본주의 이전의 계급 개념이다. 고대의 피지배계급은 그들의 경제적 처지, 계급 이해관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계급의식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자신의 계급 이해관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여 스스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계급의식을 지닌 계급을 탄생시켰다. 포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은 계급 이해관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있다. 루카치는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혁명을 위해서는 물리력이 중요하다. 물리력을 적절하게 구사하고 언제 물리력을 사용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두뇌이다. 이 두뇌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계급의식이다.
자연과 달리 인간 사회와 역사는 반드시 객관적이지 않다. 인간 사회와 역사는 인간실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는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이다. 역사는 인간이 의식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속성은 인간집단, 경제적 이해관계와 계급의식을 같이 하는 계급이 없으면 이런 사회제도들도 존재할 수 없다. 자연을 이해하려면 인간이라는 주체가 자연이라는 대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관과 객관의 분리가 필요 없을 뿐더러 옳지도 않다. 사회역사적 현실에서 주관과 객관은 근원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것이 루카치가 말하는 총체성의 철학적 측면이다. 계급 이해관계라는 객관적 조건과 계급의식이라는 주관적 요인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를 붕괴시키고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계급인 동시에, 철학적으로 보면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급이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이 곧 인류의 해방이라고 말했다. 부르주아지는 지배계급의므로 피지배계급이 해방되면 당연히 헤방된다는 이야기이다. 모순이 첨예한 곳에 모순의 해결의 동력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나 루카치의 사상에는 목적론적 측면이 깊이 내재해 있다. 역사를 맹목적인 흐름으로 보지 않고 끊임없는 인간실천의 무대로 보았다는 점에 이미 목적이 개재해 있다. 역사가 맹목적 흐름이 아닌 인간실천의 무대로 보았는데 이 최종 목적지는 유토피아이다.
*루카지의 주장은 역사의식에 대한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 인식에 대한 차이가 있음은 좋은 지적이지만 두 계급 간 인식주체의 상대적 관점일 뿐인 점을 간과하고 있다. 루카치는 마르크스처럼 부르주아지보다 노동자계급이 더 역사의식과 정치적 역량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부르주아지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더 역사의식이 있고 정치적 역량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오히려 노동력을 보호하기 위해서 경제와 역행하는 노조활동과 파업을 일으키고 4차 산업혁명으로 노동력을 크게 상실할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 유토피아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총체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는 존재할 수 없는 신기루라고 할 수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 현존재 - 막다른 골목에 부닥친 형이상학
인간은 하나의 개체이면서 동시에 세계에 속해 있는 존재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숙명과 한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이 인간을 세계 속에 이미 있는 존재, 즉 세계-내-존재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를 가리켜 현존재(現存在)라고 표현한다. 현존재란 Dasein을 번역한 것으로, 인간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만들어낸 개념이다. Sein은 존재 또는 존재함이라는 뜻이고, da는 '거기' 혹은 '지금'이라는 뜻이다. 하이데거는 기존의 단어대신 새로운 개념의 말을 사용하는데, 이유는 기존의 단어에 불만을 가지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인간의 실체를 단단하게 고정시켜 왔다. 그래서 인간은 가장 최종적으로 확실한 주체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볼 때 주체는 단단하게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인간 존재는 닫혀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있다는 점에서 현존재라는 말을 쓰고 있다.(Dasein의 da는 열려있다는 뜻도 있다.) 인간은 답답하게 응고된 실체가 아니라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창문과 같다. 즉 인간은 열린존재인 창문 그자체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존재, 곧 현존재를 세계-내-존재라고 부른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데카르트처럼 인간과 세계가 독립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언제나 이미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와 뗄 수 없이 존재하는 현존재가 인간존재라면 주관(인간)과 객관(세계)이라는 근대 철학의 이원론은 해체되는 셈이다. 이미 후설에 이르러 주관과 객관의 뚜렷한 분리는 상당히 약해졌지만,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에 남아 있는 선험적 자아, 반성적 주관, 이성적 주체라는 개념까지 해체한다. 인간은 전통적인 주관과 객관이 만나는 방식도 아니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것도 아니다. 목수는 못과 망치를 의식하면서 망치질을 하지 않는다. 다만 잘못된 경우에만 못과 망치를 의식하여 작업을 한다. 이처럼 세계-내-존재는 세계를 대처하는데 있어서 이미 이해하고 있으며, 그 이해는 이성을 통한 이해가 아니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존재이해라고 한다. 주관과 객관의 이원론에서 말하는 주관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주관을 찾기 전부터 이미 현존재는 세계 속에 들어가 있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존재하는 방식을 실존이라고 부른다.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배경이 없으면 사실감이 떨어진다. 즉 인간은 세계라는 배경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인간은 세계 속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세계에 대응하고 있는 특이한 존재이다. 현존재가 존재하는 방식은 이중적인데 현존재는 존재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문제로 삼는 유일한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우선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존재자들이다. 인간도 심리와 신체를 가진 한 존재자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과 달리 존재자이면서도 동시에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것을 해석하고 이름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는 초월이다 그러나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이거나 시간과 공간의 범주를 벗어나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존재자이면서 존재 자체를 묻는다는 뜻에서 초월이다. 초월은 주관과 객관, 인간과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에 존재 자체의 존재방식이다. 그렇다면 존재 자체의 존재방식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하이데거는 존재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존재는 스스로 길을 트고, 스스로 빛 속에 드러나고, 스스로 열어 보이고, 스스로 이미 나타나 있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를 신비주의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 철학의 전통인 형이상학에서 존재를 기술할 방법이나 언어도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흴덜린이나 렐케의 시에서 대안을 찾는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인간은 언어라는 거처에서 거주한다. 사유하는 철학자와 시를 짓는 시인은 이 거처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어를 통해 존재의 모습을 나타내고 언어 속에 보존하는 한에서 존재는 자기 모습을 완전히 열어 보여준다. 사실 존재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두가지 측면에서 잘못이다. 첫째, ~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형식은 이미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인식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에 존재에 관한 물음에는 적용될 수 없다. 이 물음이 가능하려면, ~에 해당하는 것이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존재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그것은 존재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처럼 존재의 존재를 전제하면서 존재를 묻는 엉뚱한 물음이 될 뿐이다. 사유, 탐구, 관찰, 분석 등 이성의 무기들은 모두 존재가 있어야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이것들은 이식론의 영역에서만 화려하게 구사될 수 있을 뿐, 존재의 존재방식을 묻는 존재론 입장에서는 효용성이 없다. 존재하면서 존재를 묻는 특이한 물음에 대한 답은 서양 철학의 전통, 즉 기존의 형이상학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극복하러 나선다. 있다와 없다는 반대되는 말 같지만, 없다는 있다를 부정하는 말이고, 있다는 존재한다는 뜻 말고도 서술의 의미를 가진다.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지만 '없는 것이 있다'는 성립한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형이상학을 극복할 길을 찾는다.
존재자는 인식이나 학문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존재는 그 자체로 비 대상적이다. 존재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는데, 비대상적인 존재를 하이데거는 존재를 무(無)라고 한다. 존재란 있는 것인데, 어째서 무, 즉 없다는 것일까? 앞서 '~란 무엇인가?'란 물음이 성립하려면 ~이 존재해야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무란 무엇인가?란 물음은 이미 무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무란 분명히 존재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불안을 경험하는 것을 순간적으로 무를 경험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일반적인 불안감 외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경험한다. 사실 불안은 구체적인 대상 없이도 느끼기 때문이다. 불안한 그 순간에 모든 사물과 우리 자신은 어떤 무관심 속에 잠겨버린다. 존재자 일반이 우리에게서 물러나면서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불안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자 일반이 미끄러져 달아나면서 우리는 불안 속에 떨고 있다고 말한다. 이 불안이 무를 드러낸다. 이 무를 직면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불안 속에 평생을 살아갈 수 없듯이 무를 경험하면서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일상에서 무를 잊고 살 때가 훨씬 많다. 사실은 무를 잊은 것이 아니라 무가 자신의 근원성을 위장해서 보이지 않게 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존재, 무가 아니라 존재자들과 관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존재하면서 존재자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설정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인식의 한계이다. 오직 무가 현존재의 근거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존재자의 대단히 괴이한 성격이 우리를 덮쳐온다. 존재자의 괴이한 성격이 우리를 압박해 올 때마나 존재자는 경이를 불러일으켜, 경의의 대상이 된다. 오직 경이, 즉 무의 열려있음의 근거 위애서만 '왜?'라는 물음이 일어난다. 오직 왜?라는 물음만 가능하기에 우리는 근거에 관해 물을 수 있으며, 또 근거를 줄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실존은 탐구자의 운명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존재의 정의를 내리는 것 즉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존재의 이유와 원인을 제공받았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대신 다스리며 정복하며 번성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여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존재의 이유와 원인을 찾아야 했다.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시며 창조의 질서를 따라 존재자가 존재할 수 있도록 상호성을 맺게 하셨다. 그래서 무나 유 어디에서나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빛과 어둠을 통해 낮과 밤이 생겨났으며 낮과 밤을 주관하는 해와 달과 별이 생겨났고, 이를 통해서 날(Day)이 생겨났으며, 땅과 바다를 통해서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생명들이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무에서 유로 나아가는 과정은 하나님의 섭리로 매우 유기적이며 복합적으로 형성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상호성을 인간은 깨트리고 말았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우리들의 존재의 이유가 무라고 설명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의 현존재를 탁월한 안목으로 발견했다. 다만 하이데거는 무를 경험하는 현존재를 위해 오신 참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언어 게임 -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마라
삶은 무엇인지,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질문은 진부한 물음들이기는 하지만 결코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철학적인 질문들이며 전통 철학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보편적인 정답은 아무도 내지 못했고 앞으로고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나름의 해답을 발견했고 또 계속 발견해가고 있다. 그 대문에 지금 우리의 철학적 상식으로는 그런 질문들에 답하는 것을 철학적 과제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답을 구하지 않으려는 철학자들도 있다. 심지어 그것이 철학적인 질문이 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논리실증주의 또는 분석철학이라는 계열의 철학자들이다. 전통적인 철학주제인 인간과 삶의 문제를 해명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이 철학적 가치가 없다는 혁명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다. 이런 철학의 정점에 있는 비트겐슈타인은 함축적인 말을 남겼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하라.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먼저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의 최대의 주제는 언어이다. 비트겐슈타인은 30년 간격을 두고 출판한 두 권의 철학 저술에서 각각 두 가지 상반된 언어관을 서술한다. 이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 사상의 일관성을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 스스로 전기의 입장을 후기에서 부인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전기에서 언어를 실재 세계에 대한 그림으로 보았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실재 세계와 그림처럼 닮은 구조로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사물의 총체가 아닌 사실들의 총체로 보고 있다. 따라서 세계의 그림을 생각할 때 새나 돌과 같은 사물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언어란 낱말이 아니라 문장을 뜻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명제를 철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새가 난다'. '돌을 던진다' 등의 사실을 세계로 보고 이것을 언어가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러셀의 제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논리원자론을 받아들여 모든 명제들을 요소명제로 분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원자의 성질이 물질의 성질을 정하듯이 요소명제가 참이냐, 거짓이냐에 따라 그 명제가 세계에 대한 올바른 그림이냐, 그릇된 그림이냐가 정해진다. 이를 판단하기 위해 그는 오늘날 고등학교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것과 같은 T(true)와 F(False)로 이루어진 진리표를 고안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매일의 일상언어는 세계에 대한 충실한 그림이 되지 못할 뿐더러 참된 논리적 구조를 은폐하고 있기 때문에 혼돈을 빚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직 진리함수적 논리 구조를 갖춘 이상 언어만이 세계를 참되게 기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철학은 일상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상적인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언어가 실재 세계의 모습을 제대로 담고 있다고 보는 데 있다. 언어가 인간정신의 구제적이고도 객관적인 표현이며 언어와 세계는 동형 구조, 즉 자명한 대응관계가 성립한다고 보고 있다. "언어의 유일한 기능은 어떤 대상을 지시 혹은 서술하는 데 있으며, 따라서 한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이런 입장을 취한다면 실재 세계를 보지 않고 언어구조만 살펴보더라도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철학의 본질과 임무를 명쾌히 밝혔으므로 그는 더 이상 철학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비트겐슈타인이 다시 철학계에 복귀하였을 때 그의 언어관에는 단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변화가 있었다. 소쉬르의 언어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게 된 계기가 혹시 언어와 세계의 자명한 대응관계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 아닌가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서는 언어와 세계는 대응관계가 없고 오로지 차이에 의한 자의적이고 우연적인 연관을 맺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는 낱말이 아니라 문장이며 그의 세계는 사물이 아니라 사실임을 상기한다면 그렇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완벽하다고 믿었던 전기의 언어관에서 문제를 느끼게 된 계기는 공교롭게도 그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고 믿었던 일상 언어에서 나왔다. 생활 속에서 흔히 말하는 '엄마, 나 죽네'등과 같은 언어들은 나타내는 사실이 없는데도 버젓이 쓰이고 있다. 사실을 나타내지 않는 언어가 세계의 그림이 될 수는 없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 아니며, 언의 구조와 세계의 구조는 닮은 꼴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전기 입장과 같이 엄격한 논리적 사유의 틀을 통해서 언어를 보았던 것은 잘못이라고 자기 비판한다. 언어란 일상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이다. 이렇게 하여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관심을 전기의 이상 언어에서 일상어너로 추락(?)시키면서 발전시킨다. 언어의 의미는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은 '놀이'에 비유하여 언어게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 언어 게임은 각각의 규칙과 용법이 있다. 어떠한 규칙과 용법도 언어가 사용되는 무수한 맥락과 용법, 모든 경우의 수를 포괄할 수 없다. 따라서 언어란 단일한 하나의 정의를 내릴 수 없다.
한사람의 사상이 반전하는 예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쓰는데 비하면 자기 부정은 대단히 용기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전통적인 철학의 문제들에 대해서 일관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전통 철학의 문제들은 말할 수 없는 것에 속한다. 다만 전기에서는 그런 문제들이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무의미하다고 말했지만, 후기에서는 그런 문제들을 제게하는 것 자체가 현 시대의 언어 용법 때문이라고 말한다. 현 시대의 생활양식이 그런 문제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으문제이지 답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 시대의 문화와 생활양식이 병들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첫번째 저술로 철학계에서 인정을 받았지만 자신의 과오를 번복할 줄 아는 올곧은 사람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구조언어학과는 관계가 없다고 했지만, 그의 궤도 수정은 구조언어학이 제기하는 문제의식과 유사한 점이 있다. 전기의 입장에서 그는 언어가 세계의 그림이며 반영이라는 것을 전제로 삼았다. 이는 곧 실재 세계의 구조가 언어의 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기의 입장에서는 정반대가 된다. 언어구조가 실재 세계에 관한 인간의 사고방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언어가 모든 인식의 대상과 방법을 규정하고 있으므로 인간은 언어를 떠나서 세계를 사유할 수 없다. 언어가 사유에 선행한다는 것, 언어와 그 지칭 대상은 서로 무관하다는 것은 구조언어학의 특징이다. 이는 조건인 동시에 한계도 되는, '같은 시대'라는 사실이 보여주는 위력이 아닐 수 없다.
안토니오 그람시: 헤게모니 - 혁명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다.
세상에서 치뤄지는 시험은 정답이 있기 때문에 문제 속에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 개념이나 이름은 사실 그것에 해당하는 내용을 요약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수학의 5+7=12라는 방정식은 좌우가 같기 때문에 답이 이미 정해져 있다. 결국 시험은 실험이나 연구, 탐구가 아니기 때문에 새 것이란 없다. 짤은 분량의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적 명제를 요약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느 사회질서가 붕괴하려면, 그 내부에서 발전할 여지가 있는 모든 생산력이 다 발전하고 난 뒤에야 가능하다. 또한 새롭고 보다 고도한 생산관계가 생겨나려면, 그 물질적 존재 조건이 낡은 사회 자체의 태내에서 충분히 성숙하고 난 뒤에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류는 항상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그러한 과제만을 설정하고 있는것이다.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제 자체는 항상 그것의 해결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이미 존재하거나 적어도 최소한 형성과정에 있을 때에만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사회구성체는 항상 자연사적 발전과정을 거친다고 말하던 마르크스의 지론으로서, 역사발전의 법칙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법칙성을 도식적으로 이해하면, 어떤 사회 다음에는 반드시 어떤 사회가 올 수 밖에 없다는 역사적 결정론에 빠지고 만다. 그람시가 헤게모니 개념을 도입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역사적 유몰론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혁명은 경제난에 허덕일 뿐 좀처럼 사회주의 국가의 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레닌 이후 스탈린의 소련은 무자비한 독재체제로 들어섰다. 더 크느 문제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었다. 세계 1차 대전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한 유럽 가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으로 제국주의는 치유받지 못할 커다란 상처를 입으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1929년 경제 대공황이 오기전까지 오히려 더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경제대공황역시 몰락한 결과가 아니라 번영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낡은 사회에서 충분히 성숙되어야 새로운 사회질서가 생겨난다고 했는데 그러려면 두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제국주의의 변방인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는데도 제국주의 심장부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이니가? 이 두가지 문제는 하나의 요인으로 해결된다. 러시아와 선진자본주의 국가는 전혀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경제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전통에 있었다. 우리의 경우 시민은 특정한 도시의 거주자를 연상 하지만, 서구에서는 일반국민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역시 시민이 발달하지 않았던 러시아의 경우도 우리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서구의 역사에서 유럽으느 절대왕정을 거치면서 시민계급이 발달했으며, 공화정으로 정치체제가 바뀐 후에도 더욱 발달하여 두터운 인구층을 형성했다. 시민사회와 대두되는 것이 국가이다. 서구의 근대사는 시민사회와 국가가 서로 견제와 타협, 긴장과 조화를 이루면서 전개되어온 역사이다. 즉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폭발성을 체재 내로 받아들이고 순화시킬 수 있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국가는 폭력기구이다. 국가란 자본가계급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켜나가는 도구이며, 심하게 말하면 자본가 계급의 결정을 정책으로 실행하는 집행위원회 쯤으로 본다. 그러나 서구역사에서 시민사회가 맡아온 역할을 중시한 그람시는 국가를 그렇게만 보지 않았다. 국가는 보호의 경계를 이루며, 그 배후에는 시민사회라는 강력한 요새와 진지가 버티고 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시민사회가 나타나 위기를 극복한다. 그러므로 국가는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지배방식만을 취할 수 없다. 시민사회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면 국가는 시민사회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국가 역시 최소한의 합의를 구성해야 한다. 여기서 그람시는 헤게모니를 사용한다. 국가는 일방적인 지배를 통해 세련된 방식으로 지배한다. 헤게모니 역시 기본적으로는 지배라는 뜻이지만 물리적 폭력이나 강제력을 사용하는 지배와는 다르다. 헤게모니는 피지배자의 동의 또는 합의에 따르는 지배, 그람시는 특히 지적, 도덕적 지배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헤게모니가 국가의 물리력을 포함하지 않는 개념은 아니다. 헤게모니란 폭력을 통한 단순한 지배와 더불어 지적, 도덕적 지배가 함께 얽힌 지배를 가르킨다.
헤게모니적 지배는 도덕적 측면을 포함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피지배계급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다면, 피지배계급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 없다. 오히려 지배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어느 정도 희생하고 양보하면서 피지배계급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과 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 피지배계급의 혁명을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 서구에서 자본주의와 더불어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헤게모니적 지배체제를 구축한 데 있다. 자본주의의 원리는 생산수단을 장악한 소수의 손에 부가 축적되는데 있으므로 민주주의와는 대립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헤게모니를 통해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이라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이 완화되었다. 그람시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자기 방어력도 일종의 혁명이라고 간주자여 자본주의의 소극적 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람시는 헤게모니 개념을 국가 또는 지배계급만이 아니라 혁명세력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배계급의 지배전략이 세련되고 복합적인 것이라면, 그에 대응하는 혁명전략 역시 그렇게 구사해야 한다. 혁명은 일순간의 파국, 건설이 아니라 매우 느리고 끈끈하게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그람시는 이것을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이라고 말한다. 혁명의 전개에서도 헤게모니가 필요하다. 진지전은 단기간이 아니라 장기전이다. 물리력이 우세할 때 초반에 승부를 걸 수 있지만 장기전은 아군의 정신 무장이 중요하다. 그람시는 혁명 세력에 대한 이념 교육과 정치 교육을 주장한다. 그 교육을 담당할 교사가 지식인이다.
마르크스는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해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도 독점적인 활동영역을 갖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어느 분야에서라도 자신을 훈련시킬 수 있고, 사회가 생산을 전반적으로 규제함으로써 오늘은 이 일을, 내일은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 고기 잡으러 가며,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고 저녁식사 후에는 비판에 몰두할 수 있게 된다. 마르크스가 고백한 말에는 적어도 혁명을 어떤 목적으로 삼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공산주의 사회의 세세한 제도와 특징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사회의 생활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고정된 목표가 아니라 움직이는 과정 자체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람시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은 장기전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대중의 의식을 전환시키는 이데올로기 투쟁이 된다. 혁명은 폭발이 아니라 서서히 일어난다. 그러나 혁명이 언제 이루어질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확답을 줄 수 없다. 따라서 레닌은 혁명의 준비과정이라 할 만한 것을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혁명 이후의 사회를 모색한 것이 아니라 혁명을 성취할 수 있는 장기적인 과정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혁명론은 목적을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혁명'이다. 그람시의 혁명 역시 미래사회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역사의 법칙성을 강조한 것을 통해 그람시는 오히려 법칙으로부터 벗어난 혁명, 목적을 배제한 과정으로서의 혁명, 내일을 생각하기 이전에 오늘을 살아가는 혁명을 구상했다고 볼 수 있다.
※ 이미 헤게모니지배에 대한 혁명은 혁명을 위한 혁명으로 전락한지 오래이다. 마르크스는 혁명의 조건으로 어느 사회의 질서가 붕괴하려면, 내부에 발전할 여지가 있는 모든 생산력이 다 발전한 뒤에야나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는 낡은 사회의 물질적 조건이 충분히 성숙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부의 평등한 분배는 부를 축적하는 사회적 질과 양이 성숙해져여만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은 그렇지 않다. 단지 기존의 질서와 지배구조를 헤게모니적 지배로 치부하여 해체하고 부숴트리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는 운동일 뿐이다.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나찌의 궤벨스처럼 선전과 선동을 일삼고 과정으로서의 혁명만 부르짖는다. 이들이 지나간 자리는 혁명이 끝난 뒤에 건설되어야 할 미래 사회는 없고 단지 현재에 대한 끊임없는 해체와 투쟁만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미래를 가져오지 못하고 분열과 다툼만 초래함으로 디스토피아 사회만 건설할 뿐이다.
자크 라캉: 욕망 - 태양 아래 내 것은 없다.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인식주체인 나와 인식대상인 나가 분리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 이렇게 둘로 나누었다가 하나로 합하는 것은 의식선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무의식의 경우라면 사태는 달라진다. 내가 아는 나는 의식된 나일 뿐으로 무의식의 나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는 말은 단순히 듣고 넘길 이야기가 아니기에 자크 라캉(Jaques Lacan, 101~81)은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보았다.
무의식을 발견한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프로이트는, 의식적 자명성(주: 자신의 생각을 기초로 하는 철학; 인식론)에 기초한 데카르트의 근대적 인간관을 근본적으로 회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의식이 아닌 다른 곳에 인간행위의 진정한 기초가 있음을 밝히려고 했던 프로이트가 기대한 학문은 의학과 물리학이었다. 프로이트를 이어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라캉은, 소쉬르에게 배운 언어학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정신분석에 임하고자 했다. 라캉은 언어학과 정신분석학을 결합시킴으로서 욕망이론을 개인의 성격과 인성 분석에서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넓혀 나갔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이것이 라캉의 기본 사상이다. 언어활동은 무의식의 조건이며, 인간의 언어활동이 없다면 무의식도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언어란 총체적인 언어, 즉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수단 전체를 뜻한다. 라캉은 언어학을 도입함으로써 욕망, 억압 등의 의미를 사회적 상징체계들이나 문화, 제도 등과 연결시킨다. 프로이트의 의학적 혹은 개인 심리학적 욕망이론을 라캉은 언어학과 결합시켜 사회철학적인 의미로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에 비해 유난히 시각적 효과에 집착하는 서양 문화에서는 거울이 그만큼 중요하며 신화적인 역할을 한다. 백설공주가 불행을 겪게 되는 일도 거울에서 시작하며, 중세 설화에 등장하는 마녀의 주무기도 빗자루라는 운동수단과 수정구술이라는 시각장치다. 그런데 라캉은 이 상징적인 거울을 꺠는 일을 성장의 첫 단계라고 본다. 아기는 아직 말을 배우지 않았기에 언어활동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지 않은 상태이다. 언어활동은 타인과의 관계속에서만 성립함으로 이 거울 단계의 아기는 언어를 매개로 해서 타인과 자신의 관계를 설정하지 못한다. 라캉은 이 거울 단계를 세 가지 과정으로 나눈다.
① 처음에 아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실재적 존재라고 여긴다. 뿐만 아니라 아기는 거울 속의 존재를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생각한다.
② 아기는 거울에 비친 존재가 실재가 아니라 하나의 영상임을 깨닫는다. 아기는 거울을 밀치거나 뒤쪽으로 가서 진짜 실물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뒤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③ 마침내 아기는 거울에 비친 영상이 실제가 아니라 영상에 지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반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동물실험에 나오는 침팬지 같아서 아기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아기는 사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주체의 동일성을 확립한다.
이 시기에 아기가 가지게 되는 자아의식은 거울 속에 박힌, 즉 주체의 바깥에 있는 객관화된 자기 몸의 통일적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언어활동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주체의 기능을 정립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아이와 같이 말을 못하는 존재가 자기 동일성을 갖는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객관화시키기 이전의 상태다, 그래서 거울 단계는 비록 자기 신체의 통일성을 지각하며 자기 동일성을 이해하는 단계이기는 하지만, 그 자기 동일성은 타인을 배제하는 것이므로 나르시시즘의 성격을 지닐 수 밖에 없다. 이때의 아기는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은 보지 못하며, 자신이나 자기 영상 또는 자기 어머니와의 동일성의 관계가 우주의 모든 것이라 여기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자관계'이자 '상상적 단계'가 된다. 이 때의 아기는 다른 아기나 거울 속의 자기 모습, 그리고 어머니에게서도 자기만을 인식한다.
인간이 이자관계에서만 살고 있다면 사회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자관계란 바꾸어 말하면 자기 이외의 모든 것을 동일하게 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미 만들어져 있어서 개인에게 주어지는 언어의 세계에 뛰어들면 이자관계로만 살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언어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언어의 결과이다. 인간은 언어의 질서를 능동적으로 만들어냈다기보다는 오히려 언어의 질서가 인간을 인간으로 구성한다. 바로 여기서 라캉은 생각하는 주체의 자명성에서 출발하는 근대 인간관과 확실하게 결별한다. 언어가 인간을 만드는 과정은 '언표하는 주체(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주체)'와 '언표된 주체(다른 사람들이 불러주는 주체)'사이에 심각한 불일치가 생겨난다. 앞의 것은 스스로 상상적 관계에서 오는 것이고, 뒤의 것은 타인이 붙여준 상징적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이것이 I와 ME의 불일치 즉 분열이다.
라캉은 모든 도덕의 기본이 바로 이 틈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도덕적 주체는 그에게 언표된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므로 타인들이 이름 지은 사회적 역할과 기능의 분배에 다름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