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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당에서 나왔을 때는 밤 11시 반이다. 서정인은 물론 이은향까지 술을 잘 마셨기 때문에 막걸리 대신 소맥으로 바꾸고 나서 다시 열 잔씩은 마셨다.
“자, 2차 가자.”
이제는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박기춘이 말했다.
“꼬냑으로 입가심을 하자.”
“좋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윤성일이 박기춘을 노려보았다.
“안주로 순대하고 파전을 사갖고 가자.”
“그럼, 떡볶이도.”
맞장구를 쳤던 박기춘이 숨을 들이켜더니 골목 안으로 서둘러 도로 들어갔다.
“오빠.”
박기춘을 부르면서 서정인이 쫒아갔다. 그때 머리를 든 윤성일이 이은향을 보았다.
“저 새끼, 며칠 전에 그걸 먹고 토했거든.”
“뭘요?”
“순대하고 파전, 떡볶이.”
“아아.”
“그 생각 하니까 또 오바이트 하는 거지. 인간의 몸은 본능적으로 지난 행동을 반복하는 습성이 있어. 난 보드카에 김치 먹으면 꼭 오바이트 해.”
“거짓말.”
“긴 머리에 화장 안한 여자를 보면 성욕이 일어나.”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면서요?”
“저 개새끼.”
“아직 못 찾았다면서요?”
“술 깼다.”
주머니에서 손을 뺀 윤성일이 이은향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바로 앞에다 세워놓고 흔들었더니 옆을 지나던 중국인 무리가 유심히 보았다. 골목으로 들어간 둘은 나오지 않았다.
“나 먼저 갈게, 바이.”
몸을 돌린 윤성일이 세 발짝을 떼었을 때 옆으로 다가온 이은향이 팔을 끼었다.
“오늘밤 자줄게.”
이은향한테서 향내가 맡아졌다. 땀과 비누향이 섞인 냄새다. 퀴퀴하고 단 냄새. 다시 숨을 들이켠 윤성일이 잠자코 발을 떼었고 이은향은 더 붙었다.
“돈 내라고 안할 테니까 암말도 마.”
눈을 뜬 김가영이 머리를 돌려 옆자리를 보았다. 비었다. 탁자에 부착된 디지털시계가 8시10분을 가리키고 있다. 늦었다. 상반신을 일으켰던 김가영이 자신의 몸이 알몸인 것을 깨닫고는 손으로 젖가슴을 가렸다. 스위트룸이어서 침실은 넓다. 그러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젯밤 천기영 회장과 이곳 인천의 퍼시픽 호텔에 투숙한 것은 12시가 조금 넘었을 때다. 그리고는 오전 3시경이 될 때까지 엉켜있었던 것이다. 천회장은 끈질겼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는 쾌락으로 김가영은 모든 것을 잊었다. 그리고는 깨어나 보니 8시가 넘은 것이다. 팬티와 브래지어를 찾아 입고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걸친 김가영이 바깥 응접실로 나가 보았다. 비었다. 안쪽 화장실도 인기척이 없다. 다시 침실로 들어왔다. 김가영은 창가의 탁자에 놓인 흰 봉투를 보았다. 다가간 김가영이 봉투를 열자 수표가 보였다. 1백만 원짜리가 여러 장이다. 김가영은 차분한 표정으로 수표를 세었다. 다섯 장, 5백만 원이다. 천회장은 2차 값이 5백이다. 지금까지 천회장하고 세 번 2차를 했고 1천5백을 받았다. 장회장하고는 열 번쯤 되었나? 천만 원이 3번, 5백만 원이 다섯 번, 그리고 두 번은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고서 주지 않았다. 그리고 백사장이 한 번, 3백만 원. 탁자 앞쪽 의자에 앉은 김가영의 머릿속에서 숫자가 난무하고 있다. 이제는 인간 얼굴이 안보이고 돈뭉치만 더해졌다가 빼진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김가영이 수표를 가방에다 넣고는 다시 침대에 오른다. 체크아웃이 12시니까 그때까지 다시 잘 작정이다. 퍼시픽호텔 스위트룸은 1박에 150만원이다. 서둘러 나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핸드폰이 울렸으므로 윤성일이 손을 뻗쳤다. 그러다가 탁자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떨어뜨렸다. 방바닥에 떨어진 시계가 오전 8시20분을 가리키고 있다. 다시 핸드폰을 집어든 윤성일이 발신자를 보았다. 강희나다. 윤성일은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응,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오늘은 뭐해?”
강희나는 요즘 석사 논문 준비한다고 연락도 뜸했다.
“오후 한 시부터 일이 있어.”
갑자기 속이 쓰렸으므로 이맛살을 찌푸린 윤성일이 침대 끝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때 강희나가 물었다.
“저녁때는?”
“어제 술 많이 마셨어.”
“누가 술 마시재?”
“무슨 일 있니?”
“오랜만이라 밥이나 같이 먹어.”
“그러자.”
허리를 편 윤성일의 눈앞에 어젯밤 만난 이은향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은향을 택시 정류장까지 데려간 후에 택시를 태워 보낸 것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두말 않고 같이 호텔에 들어갔을 윤성일이다. 그러나 왜 달라졌는지는 본인이 아직 의식하지 않는 상태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윤성일이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외출 차림으로 서있던 오명화가 활짝 웃었다.
“오늘도 나가니?”
“예, 어머니.”
“어제 늦게 들어왔지?”
“예, 친구 만나서....”
“너, 그런데 요즘.”
눈썹을 좁힌 오명화가 윤성일을 보았다.
“아버지 얼굴 며칠간 뵙지도 못한 거 아냐? 늦게 나가고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말야.”
하긴 집에서는 그렇다. 윤성일이 우물쭈물 했다. 매일 오후 2시경부터 7시까지 아버지하고 얼굴을 맞대고 있다는 것은 두 명 본인 외에 박상호만 안다. 셋이 사금융 관리자가 된 것이다. 오명화가 핸드백을 뒤지더니 수표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여기, 천만 원이다.”
“아이구, 괜찮습니다.”
당황한 윤성일이 손까지 저었지만 다가온 오명화가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너, 돈 많은지 알아. 하자만 나도 용돈 한번 줘보자.”
“많습니다.”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냈지만 윤성일은 내밀지는 못했다. 오명화가 다시 환하게 웃었다.
“방학도 됐으니까 몇 달 써 그럼.”
“고맙습니다. 잘 쓰겠습니다.”
“참.”
오명화가 생각난 듯한 얼굴로 윤성일을 보았다.
“희나하고는 연락 자주 해?”
“그렇지 않아도 오늘 저녁 밥 먹기로 했는데요.”
“아이구, 내가 용돈 잘 줬네.”
다시 웃은 오명화가 발을 떼며 말했다.
“너희들 둘은 잘 어울려.”
오명화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던 윤성일이 문득 강희나가 전화하기 전에 제 이모한테 연락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탁자의 디지털시계가 10시10분을 가리키고 있다. 한숨 더 자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으므로 김가영이 베개에 등을 받치고 우두커니 앉아있다. 앞쪽 TV에서는 음을 노리시킨 채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화려한 집안이다. 가구는 고가품으로 보였지만 어울리지는 않는다. 어색한 배우의 연기와 덧붙여서 그림만 보아도 짜증이 난다. 한동안 우두커니 화면을 보던 김가영이 손끝으로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그 순간 또다시 주르르 눈물이 흘렀으므로 김가영이 숨을 들이켰다.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지금 느낀 것이다.
“너, 무슨 희망으로 사니?”
불쑥 김가영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그 순간 김가영이 주먹을 쥐더니 제 가슴을 쿵쿵, 두 번 때렸다.
“이 더러운 년아. 말해봐.”
목이 메었으므로 김가영이 헛기침을 했다.
“말해 솔직하게. 위선 떨지 말고.”
“보고 싶어.”
김가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손바닥으로 세수하듯 씻었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오빠.”
“형.”
“나 어쩔 수 없었다면서 나설 만큼 뻔뻔한 년이 아니거든.”
“우린 운명이야. 이렇게 헤어진 것이. 그것도 받아들여야 돼.”
그 순간 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김가영이 시트를 끌어당겨 얼굴을 닦고는 코까지 풀었다. 그러고는 시치미를 뚝 뗀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섰다. 눈이 빨갛게 충혈 되어 있다.
차에서 내린 윤성일이 앞에 선 김현기를 보았다.
“회장님 제가 윤성일입니다.”
“기다리고 있었네. 반갑구만.”
김현기가 얼굴에 깊은 주름살을 만들며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윤회장님의 대를 이으실 분이로군.”
“잘 부탁드립니다.”
윤성일이 김현기의 손을 잡고 흔들고는 차에서 알루미늄 가방을 꺼내 쥐었다. 그것을 본 김현기가 말했다.
“자아, 들어가세.”
김현기는 60대 중반쯤으로 보였는데 동양 그룹의 회장이다. 동양 그룹은 재계서열 18위로 30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주력기업인 동양건설이 자금난에 빠지면서 그룹 전체의 주가가 곤두박질을 치고 있다. 김현기가 윤정수와 거래를 시작한 것은 10년쯤 전이지만 서로 신용이 철저해서 한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오늘은 윤정수가 윤성일을 대리인으로 보냈고 김현기가 저택현관까지 나와 맞은 것이다. 자금 거래는 철저하게 비밀로 했기 때문에 응접실에는 둘 뿐이다. 저택 안에도 대문을 열어준 경비원만 보였을 뿐이다. 응접실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을 때 김현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집안 식구나 고용인들은 모두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네.”
“아아, 예.”
“자네 아버님이 이곳에 세 번 오셨지. 내가 아버님 만나려고 다섯 번 자네 집에 갔었고, 그때도 둘만 있었네.”
“전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런가?”
다시 웃은 김현기가 탁자 밑에 놓인 서류봉투를 꺼내 윤성일 앞에 놓았다.
“내가 어제 담보서류하고 각서, 어음은 모두 아버님께 드렸네. 알고 있지?”
“예, 회장님.”
윤성일이 알루미늄 가방을 김현기에게 내밀었다.
“10억짜리 국채 300장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김현기가 가방을 열더니 국채를 확인했다. 3천억인 것이다. 이윽고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확인한 김현기가 시선을 들고 윤성일을 보았다.
“확인했네. 그럼 인수증을 써주지.”
서류봉투에서 꺼낸 인수증에 금액과 날짜, 자신의 이름, 주민번호까지 적은 김현기가 손가락을 인주에 묻혀 지장을 찍고 나서 윤성일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주고받았다네.”
“예, 회장님.”
인수증을 받은 윤성일이 가슴 주머니에 집어넣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아버지 대신으로 나선 첫 거래가 끝난 것이다. 간단한 거래였지만 윤성일의 등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언니는 왜 이렇게 점점 예뻐지는 거야? 피부 손질을 해?”
김윤영이 묻자 김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후 5시 반, 청담동의 커피숍 ‘그린’에는 손님이 두 테이블뿐이다. 어중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6시 반이 넘으면 이곳은 젊은 연인들로 꽉 찬다. 손목시계를 본 김가영이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더니 김윤영에게 내밀었다.
“이거 5백이야. 엄마 4백 드리고 너 백만 원 써.”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냈지만 김윤영이 봉투부터 받고 묻는다.
“이번 달에는 백만 원이 많네? 글고 나한테 왜 백만 원이나 줘?”
“얘가 지가 한 말도 잊어먹어.”
눈을 흘긴 김가영이 말했다.
“너 지난번에 전화할 때 방학 때 배낭여행 간다고 했지 않아?”
“아, 참.”
“백만 원이면 되니? 더 줄까?”
“충분해. 글고 언니가 무슨 돈이 그렇게 많아? 부산 광고회사는 월급을 얼마나 주는 거야?”
“내가 광고 모델도 하거든. 지방 방송에만 몇 초씩 나가. 그래서 모델료 받는 거야. 몇 백만 원씩.”
다시 숨을 들이켠 김윤영에게 김가영이 열심히 말을 잇는다.
“그래서 회사에서 화장비, 의류 협찬도 해주는 거야.”
“야, 언니 신나겠다.”
“가끔 그런 모델료가 나오니까 좀 괜찮은 거지. 근데 너 어디로 여행 가려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더니 김윤영이 끌려왔다.
“동남아, 태국하고 베트남.”
“....”
“특히 베트남을 일주하려고 해. 호치민에서 하노이까지, 바닷가를 열차를 타고.”
“....”
“언니 고마워.”
“아냐.”
눈동자의 초점을 잡은 김가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부산으로 내려가야 돼. 엄마한테는 아까 전화 했지만 다음에 꼭 엄마 본다고 해라. 미안하다고.”
“응 걱정 마.”
여행비 받아서 기분이 좋은 김윤영이 활짝 웃으며 따라 일어섰다.
“자주 연락해, 언니.”
첫댓글 늘 감사합니다.
즐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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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즐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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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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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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