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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압의 책략 성공
삼하 14:12-20
12 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당신의 여종을 용납하여 한 말씀을 내 주 왕께 여쭙게 하옵소서 하니 그가 이르되 말하라 하니라
13 여인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같은 생각을 하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심으로 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그 내쫓긴 자를 왕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4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15 이제 내가 와서 내 주 왕께 이 말씀을 여쭙는 것은 백성들이 나를 두렵게 하므로 당신의 여종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왕께 여쭈오면 혹시 종이 청하는 것을 왕께서 시행하실 것이라
16 왕께서 들으시고 나와 내 아들을 함께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을 자의 손으로부터 주의 종을 구원하시리라 함이니이다
17 당신의 여종이 또 스스로 말하기를 내 주 왕의 말씀이 나의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 하였사오니 이는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심이니이다 원하건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과 같이 계시옵소서
18 왕이 그 여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바라노니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내게 숨기지 말라 여인이 이르되 내 주 왕은 말씀하옵소서
19 왕이 이르되 이 모든 일에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내 주 왕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옮길 자가 없으리이다 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령하였고 그가 이 모든 말을 왕의 여종의 입에 넣어 주었사오니
20 이는 왕의 종 요압이 이 일의 형편을 바꾸려 하여 이렇게 함이니이다 내 주 왕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와 같아서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시나이다 하니라
삼하 14:12-20 / 그런데 여인이 또 이렇게 청하였다. `이 계집종이 나의 주 임금님께 끝으로 한 말씀만 더 올리게 하소서' 왕이 허락하자 13) 그 여인이 이렇게 말을 하였다. `임금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와 똑같은 부당한 일을 범하고 계십니까? 임금님의 맏아들이 들녘에서 죽은 다음, 이미 3년 동안이나 둘째 아들마저 고국을 떠나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임금님께서 이 계집종의 아들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판결을 내려 주셨으니, 이제 만일 임금님께서도 쫓겨난 아들을 데려오지 않으시면 저절로 그릇된 행동을 하시게 됩니다. 14) 우리 인간은 모두 죽게 되어 있어서, 한번 죽으면 땅에 쏟아진 물이 잦아들어서 없어지듯이 누구나 이 세상을 떠나게 마련이고 죽은 사람을 다시 이 세상으로 데려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산사람은 계속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산 사람의 생명은 쉽게 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에게도 살 길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직접 멀리 쫓아내셨던 사람마저도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도록 온갖 길을 다 열어 놓아 주십니다. 15) 이 계집종도 하나님의 그러한 용서를 믿고 이렇게 임금님을 찾아와 호소할 용기를 얻었습니다. 친척들이 몰려들어 괴롭힐 때마다 저는 임금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임금님께선 하나님과 같이 살인자에게도 살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 16) 임금님만은 나의 가련한 처지를 알아주시고, 나의 남은 아들마저 죽이려는 사람의 손아귀에서 나를 건져내 주실 것이다. 이 아들마저 죽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에서 이 여종의 가족이 완전히 끊어져 버리는 큰 슬픔을 임금님만은 알아주실 것이다.' 17) 또한 저는 이런 생각도 하였습니다. `임금님은 나에게 좋은 말씀으로 위로해 주실 것이다. 나의 주 임금님은 하나님의 천사와 같으신 분이어서, 나의 처지에서 무엇이 좋고 나쁜가를 분명히 가려내 주실 것이다.' 앞으로도 언제나 임금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셔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18) 왕은 드고아 여인의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이제 물어 볼 말이 있으니 조금도 숨기지 말기 바라오' 여인이 대답하였다. `임금님,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19) 왕이 물었다. `요압이 그대에게 이런 일을 시켰소?' 여인이 대답하였다. `임금님, 사실입니다! 임금님 앞에서는 진실로 어느 것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요압 장군이 제게 해야 할 말과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면서 저를 임금님께로 보냈습니다. 20) 요압이 이런 요구를 느닷없이 임금님께 올리지 않기 위하여 이런 연극을 꾸며 주었으나, 임금님께서는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슬기로우셔서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을 환히 다 아십니다.'
드고아의 여인은 다윗 왕이 압살롬을 용서하고 다시 왕궁으로 데려오도록 자신과 다윗 왕의 상황을 연관시켜 설득합니다.
왕께서 시행하실 것이라(12-17) 드고아의 여인은 이제 압살롬의 일을 꺼내도 좋은 상황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자신의 목적을 드러냅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그리워하며 생각하고 있었기에 여인이 ‘내쫓긴 자’란 말을 했을 때, 그 사람이 압살롬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여인은 다윗을 설득하기 위해서 자신의 상황과 다윗이 처한 상황이 동일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두 상황을 연관시켜 가면서 다윗을 압박합니다. 첫째, 여인은 다윗이 동생을 죽인 여인의 아들을 보복자들로부터 보호하겠다는 맹세를 이용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들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고 내쫓긴 채로 둔다면 다윗의 판결에 모순될 뿐 아니라 자신을 죄인처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13). 둘째, 암논은 벌써 죽었으므로 죽은 자는 돌아오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쫓긴 압살롬만은 살리는 방향으로 방침을 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14). 여인은 다윗을 논리적으로 설득할 뿐 아니라, 듣기 좋은 말로 아첨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사실 압살롬의 경우는 여인이 요청했던 사건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원한을 품고 악의적으로 계획적으로 살인한 것이었습니다. 증인도 없는 들판에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잔치에 청함 받은 손님들 앞에서 살인했습니다. 율법으로 본다면 압살롬은 살인죄로 처벌받아야 마땅했습니다.
여인에게 질문하는 다윗(18-20) 여인의 말을 듣고, 다윗은 이 중요한 일을 여인이 자발적으로, 단독으로 계획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배후에 이 일을 조정하고 있는 자가 있을 것으로 직감하였을 것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요압이 과거에 압살롬의 편에서 자주 중재에 나섰지만 그의 탄원이 거절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따라서 보통의 방식으로는 압살롬을 왕실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요압이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됐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그런 가능성을 짐작하고 이 일에 요압이 관여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이 의심이 옳은지 여인에게 확인하고자 질문합니다. “요압이 이 모든 일에 너와 함께 하였느냐?”는 질문에 여인은 정직하게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요압이 있다고 자백합니다. 이제 결정은 모든 일의 전말을 알게 된 다윗의 몫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적 용 : 거짓을 말하는 자들은 교묘하게 사실을 왜곡시켜서 현혹시킵니다. 거짓에 속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진리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계십니까? 말씀으로 거짓을 분별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여러 문화에 휩쓸려 지내고 있습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다윗은 오늘 여인의 말을 듣고 판단을 하고 분별을 합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건, 사고를 경험하며 지냅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분별하면서 지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지혜와 지식으로 분별하는 자가 아닌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이것을 분별해 나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호크마 주석
=====14:12
여인이 가로되...여쭙게 하옵소서 - 지금까지 얻어낸 다윗 왕의 맹세(8, 10, 11절)를 압살롬의 경우에 적용시키기 위한 드고아 여인의 교묘한 청원이다.
=====14:13
어찌하여...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같은 도모를 -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며 '이같은 도모'란 외국에 도피한 압살롬(13:37, 38)을 용서하지 않는 다윗 왕의 처사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대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 )은 긍정적인 의미(toward)가 아닌 부정적 의미(against)를 지닌다(Keil). 따라서 본절의 의미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스려 압살롬을 요납하지 아니하시나이까'가 된다. 즉 이 말은 다시 풀이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을 다윗 왕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그의 귀환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왜 유독 왕께서서만 압살롬의 죄를 용납하지 아니하나이까라는 의미이다.
이 말씀 - 지금까지 다윗 왕이 드고아 여인에게 맹세한 말(8, 10, 11절)을 가리킨다.
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 여기서 '죄 있는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쉠'(* )은 고범죄자(故犯罪者)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부지중에 실수한 경범죄자(輕犯罪者)를 의미한다(레 4:13, 22, 27 ; 5:2, 3, 17). 따라서 본절의 드고아 여인의 말은 다윗 왕이 압살롬을 돌아오지 못하게 조치하므로 말미암아 왕이 부지중에 백성들의 여론과 반대되는 가벼운 범죄 행위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같은 여인의 말은 적어도 서너 가지 점에서 이치에 맞지 않는다. 즉 (1) 자신의 비유(6,7절)를 압살롬 사건(13:23-29)과 일치시켜 다윗을 정죄한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점, (2)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살롬을 다윗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 자체가 신빙성이 없다는 점, (3) 다윗이 압살롬을 내쫓는 것이 아니라 암논을 죽인 후 압살롬 스스로가 도망쳤다는 점 등이다.
그 내어쫓긴 자 - 이는 그술에 도피해 있는 압살롬(13:37, 38)을 은연중 지칭하는 말이다. 즉 드고아 여인은 지금 압살롬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여인이 우회적으로 압살롬을 표현한 것은, 아마도 어떻게 해서든 사건의 진상을 덮어두고 다윗 왕의 약한 감정만을 움직여 압살롬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서였을 것이다(Ewald, Lange).
=====14:14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같을 것이오나 - 본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학자들 간에 대체로 다음 두 가지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1) 이 말은 암논의 죽음(13:28, 29)과 관련된 말이라는 견해이다(Thenius). 즉 본절은, 이미 한 번 죽은 암논은 쏟아버린 물처럼 다시는 회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드고아 여인이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2) 그러나 본절은 그보다 죽음의 일반적인 특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한다는 견해이다(Lange, Keil, Pulpit commentary).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죽으리니'란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아직 완료되지 아니한 사실, 곧 일반적인 진리를 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첫째, 죽음이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며, 둘째, 죽음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종말적인 일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 드고아 여인이 의도하는 바가 분명히 드러난다. 즉 이 여인은 본절에서 압살롬도 인간이므로 반드시 죽을 것이며, 일단 그가 죽으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므로 압살롬이 죽기 전에 그를 용서하라고 다윗 왕에게 넌지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과도 문맥상 잘 어울린다.
하나님은...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하시나이다 - 드고아 여인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처사를 언급한 것으로, 앞 구절에 계속 이어지는 내용이다. 즉,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나 하나님은 그러한 죄인을 용서하시며 사랑하신다는 것이 곧 이 여인의 주장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틀림없이 다윗으로 하여금 죽을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은 바 있었던 자신의 과거(12:13)를 기억나게 하였을 것이다(Lange, Matthew Henry).한편, 이와 같은 드고아 여인의 말은 단편적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보여 주는 매우 고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압살롬에게 적용하기에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다윗 왕의 경우와는 달리 압살롬의 경우에는 죄를 범한 당사자가 회개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드고아 여인 역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이 다만 요압의 분부를 좇아(1-3절) 이러한 말을 하였는데,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3절 주석 참조.
=====14:15
백성들이 나를 두렵게 하므로 - 즉 동생을 죽인 형(6절)을 율법에 따라 벌하지 아니하고 감싼 데 대하여, 백성들이 자기를 핍박하며 살인자를 내어 놓으라고 위협했다는(7절) 드고아 여인의 진술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 까지나 지금껏 애기한 비유(5-7절)를 실제의 일인양 가장, 다윗을 속이려 든 여인의 강변(强辯)일 뿐이다.
=====14:15-17
드고아 여인이 자기가 왕께 찾아온 동기가 순수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이 여인은 단지 자기 자신의 괴로운 문제 때문에 다윗에게 찾아와 호소한 것이지 다른 속셈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라는 내용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근거로서 여인은 (1) 자신이 백성들로부터 살인한 아들을 처벌하라는 강요를 받고 있었으며(15절), (2) 자신이 다윗의 지혜와 수완을 크게 믿고 있었다는 사실(16,17절)을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드고아 여인이 자기가 다윗에게 나아온 동기에 대하여 불필요하게 변명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압살롬의 사면(赦免)을 우회적으로 요청한(13, 14절) 자신의 의도가 지나치게 다윗 왕에게 노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14:16
하나님의 산업 - '하나님의 산업'이란 본래 이스라엘 민족(Keil)이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준 약속의 깡 가나안(Hertzberg)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다윗 왕과 그의 왕조를 은연 중 가리키고 있는 것이기도하다(Hertzberg). 즉, 드고아 여인은 자기와 자기 아들이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는 현상을 은연 중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불행한 일에다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드고아 여인은 자기가 다윗을 찾아온 동기를 변명하고 있는 과정에서 조차 자신의 참된 의도를 은밀히 시사하고 있다.
=====14:17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 같이 -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말레아크 엘로힘'(* )은 하나님의 일을 수종드는 '천사'를 의미한다(창 28:12 ; 31:11 ; 32:1, 3 ; 민 22:24 ; 삿 2:1, 4 ; 5:23). 따라서 본절은 드고아 여인이 다윗 왕을, 신적 권위를 부여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는 천사에다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다윗 왕은 천사도 아니고 천사와 같은 지혜와 공정한 능력도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는 드고아 여인이 어떻게 해서든 다윗 왕의 이성(理性)을 흐리게 하기 위한 아첨의 말이었다 하겠다. 사실 아첨은 든는 이의 판단력을 굽게 만드는 독약과 같은 효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잠 26:28 ; 29:5 ; 행 12:21-23).
=====14:18
내가 네게 묻는 것을 숨기지 말라 - 왕이 드고아 여인 불필요한 변명과 낯간지러운 아첨을 듣고 난 다윗이 이제서야 여인의 진정한 의도를 눈치챘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14:19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 - 다윗 왕이 드고아 여인에게 이와 같이 캐물은 까닭은 아마 한갖 여인으로서는 이처럼 엄청난 일을 꾸미기 힘들리라고 판단했거나, 아니면 다윗이 여인의 말을 듣는 중 그 배후에 요압의 술수가 있으리라고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요압은 일찍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회주의자인 동시에 지략가 였으므로, 다윗 왕은 이번에도 그가 자기의 권세를 공고히 하기 위해 술수를 부렸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3:27 ; 11:16).
왕의 말씀을...옮길 자가 없으리이다 - 다윗 왕의 말이 조금도 틀림이 없이 정곡(正鵠)을 찔렀다는 뜻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드고아 여인의 이와 같은 말은 다윗 왕의 지혜와 현명함에 대한 지나친 칭찬으로 이는 자기에게 있게 될지도 모르는 다윗 왕의 진노를 조금이라도 진정시켜 보려한 아부성 발언이었음에 다름아니다.
=====14:20
이 일이 형편을 변하려 하여 - '이 일의 형편'이란 압살롬이 그술 땅으로 도망쳐 그곳에 있는 지 삼년째이며(13:37, 38)다윗은 아직도 압살롬을 사면(赦免)하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은 현재의 상황을 가리킨다.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시나이다 - 여기서 '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레츠'(* )는 온 세상, 또는 세계를 의미한다(창 9:13 ; 10:8, 25 ; 신 4:26 ; 대하 36:23 ; 스 1:2 ; 욥 1:8 ; 2:3). 따라서 드고아 여인의 이 말은 다윗 왕의 조그마한 통찰력을 하나님의 전지한 능력에다 비유한 엄청난 과장(誇張)이다. 즉 드고아 여인은 17, 19절에 이어 계속해서 아첨을 늘어놓음으로써 다윗의 환심을 사려 꾀하고 있는 것이다.
< 설 교 >
누룩은 온 덩이에 퍼집니다
무더운 여름철에는 음식물이 쉽게 부패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냥 방치하면 그 주변에는 곰팡이로 가득하고 악취가 진동하게 됩니다.
거짓된 가르침이 이와 같습니다. 본문은 요압이 압살롬을 데려오기 위해 드고아 여인을 통해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를 다윗 왕이 눈치 채고 압살롬이 귀국하는 것을 허락합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나라는 거짓교훈과 죄를 용납하거나 타협해서는 안되며 오직 의와 진리를 추구해야함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거짓 가르침을 분별해야합니다 12-17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지 않는 것은 거짓 복음입니다. 드고아 여인은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어쫒긴 자로 하나님께 버린바 되지 아니하시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사역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사역에 근거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압살롬을 용서하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한 반쪽짜리 복음입니다.
여인의 말에서 한 가지 큰 오류는 죄와 회개의 문제가 빠져있다는 사실입니다.
압살롬은 계획적으로 암논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에게는 살인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가 있어야합니다. 하지만 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 없이 모든 것을 용납하고 넘어가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만 그것은 거저 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통한 사죄는 죄의 고백과 회개 없이는 얻을 수 없습니다.
드고아 여인이 죄와 회개의 문제는 거론함이 없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적용하며 다윗에게 압살롬의 용서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이런 잘못된 의견에 동조하여 죄의 문제를 처리하지 않고 압살롬을 데려옴으로서 결국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후에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키고 결국 압살롬이 죽게 됩니다.
거짓은 진리의 한 면을 이용해 틈타고 들어오는 것을 인식해야합니다.
다윗을 유혹했던 거짓논리가 오늘날 교회의 가르침에도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용서하실 의무 밖에 없다는 식으로 전하는 거짓 복음이 누룩처럼 성행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교리가 성도들의 생각을 누룩처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참된 회개 없이 죄에서 돌이키지 않은 채 교회에 머무르는 교인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죄와 탐욕 속에 마음대로 살면서도 교회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으며
내세를 보상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셔서 무조건 용납하신다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 그 의는 우리의 죄악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받으시고 죽으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사람은 죄와 싸우며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2. 거짓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합니다 18-20절
성도는 거짓을 분별하고 선악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여인의 말을 듣는 중에 요압이 이 모든 일의 배후임을 알아채고 여인에게 요압이 뒤에서 이 일을 꾸민 일인지를 물었습니다. 여인은 일이 탄로 난 것을 알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요압이 다 알려준 것과 압살롬을 돌아오도록 한 것임을 말했습니다.
다윗은 요압이 꾸민 일임을 알았지만 선악을 분명하게 판단하지 않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왕을 속이는 요압과 여인에게도 아무런 정죄도 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굽게 하는 것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요압의 계획을 허락하고 압살롬을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 거짓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거짓이 진실로 여겨질 수 있으며 또 다른 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바른 판단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헛된 격려와 거짓 희망의 메시지를 말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듣기 싫어한다고 해서 죄를 죄라고 말하지 않고 심판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거짓 교훈이고 악한 누룩입니다,
회개가 없는 용서를 말하는 복음은 자신의 실상과 하나님의 공의를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에 대해 명확하게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거짓 교훈이 들어와도 방치합니다. 어떤 것이 죄이며 악인지 알면서도 선악을 분명하게 판단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관용과 대화를 내세웁니다.
말세의 특징은 죄를 죄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분변하고 거짓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합니다
그 진리에 반하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면 잘못되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3. 타협하지 말아야합니다. 21-24절
죄가 공동체에 들어오도록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자신을 속인 요압을 문책하지도 않고 압살롬의 귀환을 막지 않았습니다. 요압은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하자 그술 땅에 있는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했지만 압살롬을 직접 상면하는 것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결국 다윗의 이러한 결정으로 인해 왕국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게 됩니다.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윗 왕에게 이러한 대접을 받게 되자 분노를 느끼며 암몬을 살해하기 위해 2년을 준비한 것처럼 다윗을 향하여 반역을 도모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악을 조금이라도 허용하면 공의를 굽게 함으로 전체에 악한 영향을 퍼뜨리게 됩니다.
죄에 대해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려거나 모르는 척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가 임시방편으로 일을 처리하다보면 나중에 더 안 좋은 결과를 맺게 됩니다.
이런 어리석은 결정을 하는 교회가 늘고 있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사람의 이런저런 요구와 상황 논리에 빠져 죄에 대한 안일한 타협점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좋아한다거나 이 정도는 괜찮다는 이유로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기업체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에도 자기 색깔이 분명한 사람을 채용합니다.
성도는 언제나 말씀에 기초하여 분명한 태도로 살아야합니다.
계 3:15-16절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덥지도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를 그냥 넘어가시지 않고 선과 악을 분명하게 분간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나라 시민권을 가진 백성으로서 그 정체성과입장을 분명히 하고 세상의 악과 타협하지 않고 진리에 굳게 서 주님께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용서와 사랑으로
삼하 14장 18~24절 / 조정헌목사
그리 길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함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으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바쁘고 부족한 세월을 살아가면서 원수처럼 미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본인을 위해서도 그렇고 상대방을 위해서도 그렇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무관심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가 사랑을 많이 베풀면서 살아야함에도 불구하고 미워하면서 서로의 마음에 아픔과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과 미움은 번지수가 같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사랑은 식어지거나 병이 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가 사랑했던 만큼 오히려 미워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누가 다른 사람들과 화목을 이루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들은 서로 낯선 관계가 아니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관계인데... 말 한 마디를 잘못해서, 돈 몇 푼 때문에, 또는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서로 등을 돌린 채로 미워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세상에서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주제인 화해입니다. 그래서 화해는 사랑 못지 않게 우리에게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화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예배를 통해서 교훈해주실 만큼 성도들에게 화해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24에 보시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세상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기보다는 사랑이 미움으로 변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요, 화해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노래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이나 교회에서 사랑과 화해보다는 서로 미움과 다툼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면 그런 공동체는 과연 존재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도 바로 그런 사랑과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도 역시 사랑과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투고 미워하고 갈등을 일으키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화해인지....어떻게 하면 화목을 이루어서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답을 찾고 화해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어떤 이유가 되었든지 서로 미워하거나 갈등을 일으키면 결코 안 되는 관계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일 것입니다.
다윗과 압살롬은 누구보다도 가까운 부자지간입니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거의 삼 년 동안이나 대화가 단절된 채로 서로 마음이 불편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압살롬이 여동생을 욕보인 이복형제 암논을 죽이고 그술 지방으로 도망을 간 후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거의 단절되다시피 살았기 때문입니다.
삼하 13:38에 보면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 산 지 삼 년이라.”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입니까? 왜 성군인 다윗의 가정에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은 다윗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이고 또 채찍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있고 다윗에게는 없느냐?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아버지로서 암논이 압살롬의 여동생을 욕보인 사건에 대해서 좀 더 공정하게 징계를 내렸다면 압살롬은 아버지에게 그런 반감이나 불만을 품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을 보면 항상 공정하게 일처리를 하는 공인으로서 거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정의 문제에 있어서는 공정하게 처리하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생활이 덕스럽지 못해 아버지로서의 존경과 권위도 인정받지 못하고 결국에는 아들 압살롬과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이런 불화를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만 문제가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암논이 여동생 다말을 욕보인 죄도 크지만 압살롬이 그 일로 앙심을 품고 있다가 암논을 죽인 일도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큰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이 그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 용서를 구한다거나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너무 뻔뻔하고 당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압살롬이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그런 자식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압살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주변에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갈등을 가지고 서로 미워하면서 서로 증오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들 중에도 이런 비슷한 갈등으로 인해 서로 사랑하고 화해를 이루어야 될 부부나 형제나 친구나 성도들 간에 오늘 다윗과 압살롬처럼 갈등과 불화로 인해 서로 마음의 문을 닫은 채로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미워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안 계십니까?
그리고 우리 인간이 해결해야 되는 가장 큰 불화는 형제나 이웃들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우상을 숭배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싫어하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엡 2:3에 보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심각한 불화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지 못한다면 결국 무서운 진노를 불러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과 압살롬이 서로를 미워하면 결국 어떻게 될까요? 다윗의 가정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불안해지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를 화해시켜줄 중재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런 역할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윗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누구도 중재자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 요압이라고 하는 신하가 그런 다윗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비록 압살롬에 대한 미운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일이 있은 후로 삼년이 지나가 버렸지만... 아버지 다윗이 여전히 아들 압살롬을 마음으로 미워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삼하 14:1에 보시면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요압은 다윗의 마음을 읽고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요압은 그 일을 해결해보기 위해서 지혜로운 사람을 선택해서 세우게 됩니다. 자신이 직접 나설 수 없기 때문에 주변에서 지혜로운 사람을 찾다가 드고아에 사는 슬기로운 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 여인에게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다윗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4:2-3에 보시면 “드고아에 사람을 보내 거기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상주가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하고 3: 왕께 들어가서 그에게 이러이러하게 말하라고 요압이 그의 입에 할 말을 넣어 주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드고아 여인이 그 일을 아주 성공적으로 해내게 됩니다. 다윗이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나중에는 요압의 지시를 통해 자신과 압살롬을 화해시키려고 꾸민 연극이라는 사실을 눈치를 채고 그 뜻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들 압살롬이 다시금 돌아올 수 있게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14:20에 보시면 “이는 왕의 종 요압이 이 일의 형편을 바꾸려 하여 이렇게 함이니이다 내 주 왕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와 같아서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시나이다 하니라 21: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내 목숨을 걸어야 되는 일이었습니다. 큰 헌신이 요구되는 아주 중차대한 일이었습니다. 만약에 요압과 드고아 여인이 계획한 일이 들통이라도 난다면 극도로 예민해져있는 다윗의 진노를 살 수도 있는 아주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요압 자신도 알고 있고... 드고아 여인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를 어떻게 해서라도 화해를 시키기 위해서 그런 위험한 일을 스스로 자처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화해를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14:17에 보시면 “내 주 왕의 말씀이 나의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 하였사오니 이는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심이니이다 원하건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과 같이 계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드고아 여인의 말재간으로만 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드고아 여인의 지혜로운 권면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지혜로운 말 한마디가 따스한 봄바람처럼 얼어붙어 있던 다윗의 마음을 녹일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다윗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그들이 다윗과 아들 압살롬이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마치 불구경이라도 하듯이 방관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압과 슬기로운 드고아 여인이 목숨까지 걸고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는 노력이 마침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과야 어찌 되었건 요압과 드고아 여인의 행동은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화해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도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화해시켜주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화해일뿐만 아니라 수평적으로는 사람들과의 화해를 포함하고 있는 화해의 도구입니다.
골 1:20에 보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그들의 권유대로 압살롬을 다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두 사람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깊숙이 들어가서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마치 깨진 유리조각을 붙여놓은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그들의 화해는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다윗이 궁궐의 대문을 열어놓고 아들 압살롬이 다시 돌아오도록 허락은 했지만, 정작 열어야 될 자신의 마음의 문은 열어주지를 않았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는 했지만, 불편한 심기는 여전했습니다. 관계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습니다. 서로 만나지도 않았고 압살롬을 자신의 집에서 꼼짝달싹도 못하게 했습니다.
삼하 14:23에 보시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24 왕이 이르되 그를 그 집으로 물러가게 하고 내 얼굴을 보지 말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압살롬에게 아버지 다윗을 향한 감정의 골은 더 깊어졌습니다. 오히려 부르지 않았을 때보다 상황이 안 좋아졌습니다.
성군인 다윗의 가정에 이런 좋지 않은 일들이 왜 계속 일어나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불화를 조장하신 것이 아니라 다윗과 압살롬 두 사람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화해는 갈등의 당사자인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 악수도 하고, 얼굴도 마주보고, 차도 마시고, 식사도 같이 하면서 닫혀져 있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다윗과 압살롬의 문제는 어느 한 쪽의 문제가 아니라 양쪽 쌍방에 다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해를 하는데 있어서도 두 사람이 함께 화해를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을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과 압살롬을 보면 두 사람 모두에게 그런 노력들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단지 요압의 주선으로 다윗과 압살롬이 잠시 화해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그 이상 어떤 진전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에게 있어서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갈등의 원인이 두 사람 모두에게 있다는 사실을 서로가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서로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의 자세가 두 사람 모두에게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선 아버지 다윗이 돌아온 압살롬에게 “지난 삼년 동안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이 아비가 정말로 미안하구나.” 이런 위로의 말이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또 그것은 압살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저 때문에 지난 삼년 동안 마음이 얼마나 힘드셨느냐?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버지 용서해주세요.”라고 용서를 구하는 말이 단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얼굴로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방에 대한 섭섭한 마음과 감정을 그대로 품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의 문을 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화해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감정의 골만 깊어지고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관계에 있어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어느 한쪽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면 양쪽에 다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서로 나는 옳고 네가 잘못했다는 식으로 나아가면 진정한 화해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약 3:18에 보시면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화평을 심어야 화평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화평의 열매를 거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나에게 섭섭하게 한 것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상대방에게 섭섭하게 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보고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나로 말미암아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두 가지 화해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 형제나 이웃들과 화해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온갖 조롱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놀라운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과의 막힌 담을 헐어버리고 화해를 이루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 때문에 내 마음이 괴로워서가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덕이 안 돼서가 아니라... 화해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부모와 형제, 친구, 이웃들, 또 성도들 간에도 항상 화해를 이루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이나 자존심을 버리고, 솔직하게 내 잘못을 인정하고, 마음의 문을 넓게 열어서 서로에게 용서를 구할 때에 거기에서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정이나 이웃이나 직장이나 교회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야합니다. 다윗과 압살롬처럼 혹시라도 거리를 두고 서로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반목을 일삼는 사람들이 누가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오래 끌지 말고 내가 먼저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지게 된 것처럼 내 이웃이 아직도 하나님과 원수된 자요, 이웃들과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다면 구경만 하지 말고 그들이 먼저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더 나아가 형제나 이웃들과 화해할 수 있도록 오늘 요압이나 드고아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화해를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들이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 5:9에 보시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화평을 이루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평화와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에 우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되고 우리 가정이 평화로워지고 우리 교회가 더 부흥하고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모두가 화해를 이루게 하옵소서! 먼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다른 사람들과도 화해를 이루면서 항상 내가 서있는 곳에 화평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화해
삼하 14장 18~21절 / 이규왕목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오늘 우리는 사랑을 더 많이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행여나 서로 미워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과 미움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아서 번지수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이 식어지거나 병이 들게되면 언제든지 사랑한 만큼 더 미워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어느 누가 다른 사람과 불화하고 있다면 그 두 사람은 서로 낯선 사이가 아니라 너무나 잘 아는 사이였었는데 말 한 마디, 돈 몇 푼,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서로 등을 돌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세상에서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인 화해입니다. 그러므로 화해는 사랑 못지 않게 아름다운 갓입니다. 예수께서도 화해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사를 가지고 교훈 하실 만큼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화해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세상 어디를 가나, 사람이 사는 곳에는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기보다는 사랑이 미움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으며, 무엇보다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바로 사랑이요, 화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노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가정이나 교회나 노회나 총회가 사랑과 화해대신에 미움과 반목으로 갈등한다면 그 존재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도 바로 사랑과 화해를 이루시기 위함이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까닭도 역시 사랑과 화해를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불신자는 그만두고서라도 왜 예수를 믿는 사람들끼리 조차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반목 갈등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화해이며, 어떻게 하면 진정한 화해를 이루어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 화해자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 다윗과 압살롬-불화의 장본인들
세상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떤 이유이든지 서로 미워하고 갈등해서는 안될 사이가 있다면 그것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일 것입니다.
다윗과 압살롬은 세상에 그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부자지간의 관계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으나, 삼 년 동안이나 대화가 단절된 채 불화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압살롬이 자기 동생 다말을 욕보인 이복형제 암논을 암살하고 처가(妻家)의 그술 지방으로 도망을 친 후 다윗과 관계를 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삼하 13:38)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한 지 삼 년이라 (삼하 13:39)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얼마나 비극입니까? 왜 성군 다윗의 가정에 그 같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난 것일까요? 물론 그것은 다윗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고 다윗에게는 없는 것일까요?
1) 그렇다면 다윗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이 아버지로서 암논이 압살롬의 동생을 범한 사건에 대해서 아버지의 권위로서 좀더 공정하게 징계를 내렸었다면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 반감이나 불만을 품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공적이고 외부적인 문제는 공의롭게 일 처리를 잘하는 공인으로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부적인 가정 문제는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하였고 사생활이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로서의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지 못함으로 압살롬과의 거리를 점점 더 멀어지고 불화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그러나 문제는 다윗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암논이 다말을 범한 죄도 크지만 압살롬이 그것을 앙심으로 품고 있다가 형제지간인 암논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도망친 죄는 암논의 죄보다 더 큰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은 그와 같은 죄를 저지르고 도망을 친 후 단 한번도 아버지 다윗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하나님께 회개를 한 적이 없이 너무나 뻔뻔하고 당당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압살롬이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압살롬이 바라는 것처럼 마음을 활짝 열과 받아드리고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누구도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주인공 다윗과 압살롬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같은 갈등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인간사이고 또한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혹시 오늘 우리 중에 그와 같은 갈등으로 서로 해야할 부부나 부자나 형제나 친구나 교우들 간에 고민하고 다윗과 압살롬처럼 서로 사랑해야 할 사이가 변하여 갈등과 반목과 불화 속에 만남이나 대화가 단절된 사람은 없습니까?
그것만이 아닙니다. 인생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불화는 이웃만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의 화해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는 죄입니다.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 요압과 드고아 여인-화해의 중재자들
암논의 죽음으로 압살롬이 다윗의 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그 장자와 불화 한다면 다윗의 가정만이 아니라 나라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다윗과 압살롬 사이를 화해시킬 중재자가 요구되었습니다. 과연 누가 다윗과 압살롬을 중재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무도 화해의 중재자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 요압은 무엇보다 다윗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다윗이 비록 암논을 죽인 압살롬에 대해서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한편 다윗의 부성애는 삼년이 지났다고 압살롬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내는지 더욱 궁굼 할 수밖에 없는 부성애를 엿본 것입니다.
(삼하 14:1)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2) 요압은 지혜로운 사람을 택하였습니다.
요압은 자신이 직접 나설 수 없기 때문에 주변에 지혜로운 사람을 찾는 중에 드고아에 사는 슬기로운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 여인에게 시나리오를 만들어 다윗의 마음을 돌이킬 수있도록 연극을 하도록 세심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삼하 14:2) 드고아에 보내어 거기서 슬기 있는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이르되 청컨대 너는 상주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같이 하고 (삼하 14:3) 왕께 들어가서 여차여차히 말하라고 할 말을 그 입에 넣어 주니라
3) 드고아 여인은 성공적으로 그 일을 해내었습니다.
드고아 여인의 간청을 듣던 다윗이 처음에는 그것이 연극인 줄 몰랐으나 나중에는 그 여인이 요압의 사주를 받아 자신과 압살롬을 화해시키려고 꾸민 연극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압살롬을 돌아오도록 허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삼하 14:20) 이는 왕의 종 요압이 이 일의 형편을 변하려 하여 이렇게 함이니이다 내 주 왕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와 같아서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시나이다 하니라 (삼하 14:21)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소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거는 모험적인 헌신이 요구되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드고아 여인의 탄원이 사실이 아닌 연극이라는 사실을 다윗이 알았을 때 극도로 예민해져있는 다윗의 분노를 사서 죽게 될 수 도 있는 모험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요압과 드고아 여인이 잘 알면서도 오직 다윗과 압살롬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그 일을 결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드고아 여인의 말재주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적인 권면 때문이었습니다.
(삼하 14:17)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심이니이다 원컨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과 같이 계시옵소서
그 지혜로운 말 한마디는 봄바람처럼 얼어붙은 다윗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다윗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또한 그들은 다윗과 압살롬이 불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불 구경하듯 방관하고 있었으나 요압과 슬기로운 드고아 여인의 생명 건 화해의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화해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까닭도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화해시키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화해만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인간과의 화해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3. 진정한 화해
다윗이 요압과 드고아 여인의 권유를 받아드리고 압살롬을 불러드림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두 사람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그것은 마치 깨어진 유리잔을 마주 붙여 논 격이었습니다.
다윗이 궁궐의 대문을 열고 압살롬을 돌아오도록 허락하였지만 다윗은 정작 열어야 할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게 하였으나 상종을 하지 않고 압살롬을 자기 집에 연금상태에 있게 하였습니다.
(삼하 14:23)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삼하 14:24) 왕이 가로되 저를 그 집으로 물러가게 하고 내 얼굴을 보지 말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그 결과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 다윗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의 골은 차라리 부르지 않았을 때 보다 더 골이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왜 성군 다윗의 가정에 그 같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난 것일까요? 물론 그것은 다윗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와 같은 불화를 일부러 조장하신 것이 아니라 다윗과 압살롬 두 사람이 자초한 것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화해는 갈등하던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 악수하고, 얼굴을 마주하고, 차를 마시고, 식사를 같이하는 외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닫힌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일이 더 우선되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미 살펴 본 말씀처럼 다윗과 압살롬의 문제는 어느 한 편만의 문제가 아니라 쌍방이 다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면, 화해를 하는데 있어서도 두 사람이 다 적극적으로 화해를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다윗과 압살롬 모두에게서 그와 같은 화해의 노력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요압이 주선하여 다윗과 압살롬이 만났을 뿐이 그 이상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불편한 마음으로 계속 얼굴을 대하는 것보다 차라리 서로 헤어져 있는 것이 더 편하다는 생각을 하고 압살롬을 집으로 돌려보낸 대면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 사람의 반목과 갈등의 책임이 두 사람 모두에게 있음을 각자 인정하고 서로 위로하고 사과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고 용서를 해주는 마음의 화해가 없이 얼굴만 마주한 것이었습니다.
1) 다윗은 돌아온 압살롬에게 지나간 삼년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고 단 한 마디 위로의 말도 없었습니다.
2) 압살롬은 다윗에게 자신의 일로 지나간 삼년 동안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으셨는가? 라는 단 한 마디의 속죄도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나기는 하였지만 상대방에 대한 섭섭한 감정만을 계속 품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열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에서는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윗과 압살롬과 같지 않습니까? 인간 관계에 있어서 무슨 문제가 있다면 어느 한쪽에게만이 아니라 반드시 쌍방 간에다 원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는 잘났고 상대방만 잘못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오고가기 때문에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약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원인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고 감정만을 바꾸려고 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사태가 더욱 악화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화평을 심어야 화평의 열매를 맺는 법입니다.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화평의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내게 섭섭하게 한 것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상대방에게 섭섭하게 한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깨닫고 상대방을 향해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진정한 화해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는 두 가지 화해가 요구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해요, 또 하나는 이웃과의 화해입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조롱을 당하시고 매를 맞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져 하나님과 원수가 변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과의 막힌 모든 담을 헐고 화해해야 할 가장 큰 이유가 그 때문에 내 마음이 괴롭고 일이 안 풀리고, 덕이 안되기 때문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화해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부모 형제, 친구, 이웃, 교우간에 화해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이나 속 좁은 자존심을 버리고, 솔직하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마음을 넓게 열어 서로 용서를 구할 때만이 진정한 화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의 가정이나 이웃이나 직장이나 교회 안에서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다윗과 압살롬처럼 거리감을 가지고 오해하고 증오하고 반목하는 이웃이 누구인가를 찾아야 하며, 그렇게 된 원인이 상대방 때문이라는 자기 중심의 고정 관념을 버리고 내게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시간만 끌지 말고 내가 먼저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내가 비록 지금 아무와도 불화하지 않고 화목하게 잘 지낸다고 다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무슨 문제가 있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화목하시고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나와 하나님과, 나와 이웃과 불화한 것을 당신의 문제처럼 안타깝게 여기시고 화목케 하려고 생명까지도 다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것처럼 내 이웃이 아직도 하나님과 원수 된 불신자요, 이웃끼리 반목하고 있는 것을 구경만 하지말고,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요압과 드고아 여인처럼 화해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러한 화해자를 찾고 계시며, 그러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며, 그러한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은 평화의 축복이 가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마음은 기쁘고 가정은 평화롭고 교회는 부흥될 것입니다.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고후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다윗의 용서
삼하 14:12-24 / 장석환목사
오늘 본문은 다윗이 압살롬을 예루살렘에 돌아오도록 허용하는 이야기입니다.
1. 강요된 용서
송사를 제기했던 여인이 자신의 문제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한 마디 더 말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하여 받아들여졌습니다. “여인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같은 생각을 하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심으로 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그 내쫓긴 자를 왕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삼하 14:13) '이 말씀을 하심으로 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그 내쫓긴 자를 왕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여인은 자신의 아들을 죽지 않도록 하겠다 판결하면서 정작 다윗의 아들은 용서하지 않하고 있기에 다윗이 잘못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이 죄짓는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논리 비약입니다.
여인은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삼하 14:14)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라고 말합니다. 암논이 죽은 것은 모든 사람이 죽는 길을 간 것이며 또한 우리가 어떻게 하든 죽은 자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쫒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생명을 빼앗을 것이 아니라 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던 다윗은 여인의 말을 누가 시켰는지를 물었습니다. “왕이 이르되 이 모든 일에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내 주 왕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옮길 자가 없으리이다 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령하였고 그가 이 모든 말을 왕의 여종의 입에 넣어 주었사오니” (삼하 14:19) '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령하였고'라고 말합니다. 여인은 이 모든 일이 요압의 계책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전에 나단은 송사를 통해 다윗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다윗은 바로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요압이 꾀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선지자를 통해 알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선지자가 아니라 신하 요압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이라 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단이 전한 경우와 많이 다릅니다.
요압은 이스라엘의 2인자입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신하의 뜻을 거절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여인의 송사에 대해 자신이 판결한 것과 산하 요압의 뜻을 생각하여 결국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돌아오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하여 볼 것은 압살롬의 회개가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의 죄는 그가 죄를 인정하였을 때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그가 죄를 인정하였다는 것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마음과 신하 요압의 요청 등으로 용서가 시행되었습니다. 다윗의 죄가 용서될 때는 용서는 되었지만 그에 해당하는 벌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죄는 회개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죄에 대한 어떤 벌도 선언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라는 귀한 일이 시행되지만 안타까운 용서로 끝나고 맙니다. 온전한 용서가 되지 못합니다.
2. 반쪽 용서
다윗은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돌아오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삼하 14:21)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삼 년의 도피가 끝나고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어떤 조건도 없이 돌아오도록 허락하였습니다. 형 암논을 죽였지만 아무 처벌 없이 압살롬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처벌 없는 용서는 당사자는 좋은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처벌 없는 용서는 결국 죄에 대해 가볍게 여기게 만들고 결국은 이후에 처벌을 받게 만듭니다. 처벌 없는 용서는 오히려 죄를 더 가중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다윗은 압살롬을 완전히 용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삼하 14:24)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용서하며 반쪽짜리 용서를 하였습니다.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를 왕위 계승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직 완전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죄가 완전히 용서받지 못하였다는 것을 안다면 그때라도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의 반대길을 가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시작한 반쪽짜리 용서는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마치게 됩니다.
용서가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압살롬이 회개하고 이후에 다윗이 용서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윗이 용서해야 했기에 다윗은 먼저 반쪽짜리 용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끝내 회개하지 않아 결국 용서가 온전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윗이 먼저 반쪽 용서를 한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본래 압살롬이 먼저 회개하는 것이 바른 방향이지만 그것이 안 될 때 용서하는 사람에서 반쪽짜리 용서를 먼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쪽짜리 용서라 하여도 처벌은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반쪽짜리 용서가 왕위를 계승할 왕세자 자리에서의 탈락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만 그것이 명시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그것을 위해 또 악을 자행하게 됩니다. 압살롬은 분명 자신의 죄에 대해 명시적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홀로 도망간 것이고 돌아와서는 다윗의 마음 때문에 일시적으로 왕을 보지 못하는 것에 불과한 것일 수 있습니다.
벌이 없는 용서는 문제가 됩니다. 사적인 부분은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알아서 벌 받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적인 부분은 죄에 대해 벌이 있어야 합니다. 간음한 목회자가 벌 없이 또는 약한 벌 이후에 사역의 현장으로 돌아오면 분명히 문제가 됩니다. 이런저런 유형의 죄악을 저지른 목회자가 벌 없이 목회직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 사람 자신을 위해 좋지 않습니다.
지금 다윗은 벌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기에 벌에 대해 더 많이 아팠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벌로만 생각하여 압살롬에게 관대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죄를 지었고 그가 받아야 할 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벌 없는 용서는 은혜인 것 같지만 실상은 악한 것입니다.
윗이 압살롬을 용서하였습니다. 요압의 꾀로 여인이 송사하게 하였고 다윗이 객관적으로 판결까지 한 것이었기에 어쩌면 압살롬을 충분히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하가 그것을 원하니 더욱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버지로서 마음이 약하여 용서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기에 용서하면서도 완전히 용서하지 않고 반쪽짜리 용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용서는 결국 선한 열매로 끝나지 않습니다. 역시 압살롬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기에 용서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시들어버리게 됩니다.
회개 없는 용서, 벌 없는 용서는 은혜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낳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은 반쪽짜리 용서를 하면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용서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은 열매가 없습니다.
사무엘하 14:12~24
아침묵상 QT / 김동희 목사
1. 압살롬은 자신의 여동생 다말을 범하고, 그녀를 책임지기는커녕 오히려 문전박대하고 쫓아내어 모욕까지 준 암논을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압살롬은 2년을 기다린 끝에 복수할 기회를 얻었고, 양털 깎는 잔치를 열어 다른 형제들 앞에서 암논을 죽여버렸습니다. 사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다윗이 문제를 해결했어야 했지만, 그는 사실상 이러한 일을 방치하였고, 결국 형제 사이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비극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2.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고 난 뒤에 더 이상 이스라엘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외할아버지였던 그술왕 달매에게로 도망가 피신하였습니다. 다윗은 암논의 죽음에 크게 슬퍼하였고, 압살롬에게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은 되돌아보지 않았고, 이 모든 문제를 감정적으로 대응하였습니다. 그렇게 3여년이 흘러서야, 다윗은 조금씩 그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3.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장군이었던 요압이었습니다. 요압은 이러한 상황이 나라 전체에 안좋은 영향을 가져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못마땅했던 요압은 이 문제를 해결할 계책을 생각해내었습니다. 요압은 지혜로운 드고아 여인을 한명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윗을 설득할 이야기를 지어, 그녀에게 그대로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4. 그녀는 요압이 가르쳐준대로 다윗에게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저에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이 싸우다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형제를 죽인 아들을 내놓으라, 그는 죄를 지었으니 죽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아들마저 죽으면 저는 자식이 한명도 남지 않습니다. 왕이여 도와주십시오. 다윗은 이 이야기를 들은 뒤, 관용을 베풀어 이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다윗은 걱정하는 여인에게 걱정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 하였습니다.
5. 다윗의 확답을 들은 뒤, 이제, 이 여인은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드고아 여인이 다윗에게 전한 이야기는 사실, 다윗의 이야기였습니다. 다윗의 두 아들, 곧 암논과 압살롬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암논이 죽었다고 해서 압살롬까지 버리면, 결국 두 아들을 모두 잃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려는 이야기였습니다. 드고아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윗은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것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드고아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이처럼 다른 사람의 문제를 바라본 것처럼, 자신의 문제도 똑같이 바라볼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제, 자비와 관용을 베풀어 압살롬을 살려주라 요청한 것입니다.
6. 드고아 여인은 다윗왕에게 오늘 14절 말씀을 통해 진심을 다해 요청하였습니다. “우리는 다 죽습니다. 땅에 쏟으면, 다시 담을 수 없는 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않으시고 방책을 베푸셔서 비록 내어쫓긴 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십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관용과 은혜를 전하며, 다윗왕이 자신에게 관용을 베푼것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하나님의 뜻을 아들 압살롬에게도 적용시켜달라 요청하였습니다.
7. 이와같이 설득을 하니 다윗에겐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이미 드고아 여인에게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를 말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일이라고 해서, 또 자신의 사적인 감정 때문에 그 선택을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드고아 여인은 그 선택이 하나님의 뜻에도 합당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다윗은 이제 자신이 말했던 데로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8. 다윗은 드고아 여인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이 계책을 세운 이가 요압인지를 물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이 정도의 대담한 계책은 요압 정도밖에 세울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드고아 여인은 모든 상황을 솔직하게 대답하였고, 다윗은 이 이야기를 들은 뒤 요압을 직접 불렀습니다. 그리고 요압에게 압살롬을 데려올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끝끝내 예루살렘에 돌아온 압살롬을 직접 만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내뱉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압살롬이 돌아올 것은 허락했지만 아직 감정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압살롬의 얼굴을 보는 것까지는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9. 오늘 말씀에 나타난 다윗의 모습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그 길로 가는 것을 계속해서 막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옳은 것인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이 틀어지고 우리 마음이 상했을때 그 길을 갈 수 없게 됨을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암논이 죄를 저질렀을 때 그 일을 공의롭게 처벌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아들인지라 이 일을 정의롭게 해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압살롬이 살인을 저질렀을 때에도 사실상 이 일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도망간 압살롬을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압살롬을 용서하고 품어야 할 때도 그것을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등 떠밀려서 자기가 내뱉은 말 때문에 그 일을 했습니다. 압살롬이 돌아오고 난 뒤에도, 용서하고 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요압의 계책과 드고아 여인의 지혜가 없었다면 다윗은 영영 이 일을 수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자신의 일들을 그르친 데에는 자신의 마음을 지혜롭게 품고 행하고 다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우유부단한 태도는 훗날 더 큰 비극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은 총명하고 결단력 있던 예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말씀에 잘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던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깨어있지 못할 때, 그의 이제까지의 경험과 앎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 머리 속에 무엇이 옳은 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마음에 가로막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한 태도로 우리의 모습을 늘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지, 내 삶이 얼마나 주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지, 내 심령이 얼마나 주님을 갈망하고 있는지,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고 있는지를 늘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일어섰다 싶을 때 넘어질까 두려워해야 하고 잡았다 싶을 때 놓칠 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늘 새롭게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과 함께할 때에만 우리는 다윗과 같이 실수를 범하지 않고 온전히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주님과 깊이 교제할 때에만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세워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10.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이와 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새로운 말씀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오늘 말씀 속의 다윗을 통해 우리를 되돌아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위대한 믿음의 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믿음의 삶에 실패할 때가 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따르지 못할 때가 있으며,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따라 갈 때가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잘못이 더 큰 비극을 가져오게 되었음을 또한 보았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다윗의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의 모습을 먼저 살피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감정과 분노가 있다면 그것을 녹여주시고, 우리의 생각을 어지럽히는 죄악과 연약함이 있다면 주님의 거룩함과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게 하시고, 오직 성령 충만함 안에서 선한 길로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날마다 주님과 동행함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잘못된 고리가 있다면 끊어지게 하시고, 오히려 선하고 거룩한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직 주님의 사랑과 용서와 평화가 넘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자랑스런 아들이 되자
삼하 14:12-17 / leeapostle
다윗왕에게 자신의 진짜의도를 드러낸 여인.
다윗왕에게 압살롬을 생각하도록 분위기를 조장하고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얘기의 신빙성을 더하게 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자기 얘기를 함으로 자신의 진짜 의도를 숨기고 있다.
말씀을 보는 내내 저 여인은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것일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다윗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들었을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인지도 들었을텐데...
심지어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을 범죄한 사람이라고 책망까지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여인은 뱀이 하와에게 거짓말을 하듯 교묘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내쫓긴자라고 표현하면서 압살롬을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압살롬은 스스로 범죄하고 도망간 것이었다.
또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며 공의의 하나님을 생각지 못하게 하고 있다. 압살롬은 반드시 자신의 잘못을 댓가를 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댓가는 하나님께 업드림으로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압살롬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전혀 그러지 않고 있다.
모든게 이상하다.
여인도 자신의 위치를 뛰어넘고 있고 요압은 정치적이기만 하고 다윗은 전처럼 명철하고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시작인 압살롬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백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은 이 상황을 보고 계시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특히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그럴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인정한 다윗이지만 건강하지 못한...
오늘 하루 주님 앞에서 건강해야 한다.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고 그에 반응하며 온전한 인도를 받는 하루가 되자.
100% 순종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께서 나로 인해 기뻐하시고 나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아들이 되자!
여인의 슬기로운 설득
삼하 14:12-17 / by skd1
지난 시간에는 다윗 왕의 마음을 읽고 압살롬을 돌아오게 할 기발한 계획을 세운 요압의 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계획의 핵심 실행자, 바로 드고아의 슬기로운 여인이었죠. 왕 앞에서 자신의 아들을 살려달라는 애절한 연기로 다윗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 여인. 이제 그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왕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진짜 문제, 바로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진심을 건드리며 설득의 클라이맥스로 나아갑니다. 사무엘하 14장 12절부터 17절까지, 여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놀라운 지혜와 용기를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신학 및 종교 연구
🗣️ "왕이시여, 제 말씀을 조금만 더 들어주시겠어요?" - 용기 있는 서두
앞서 여인은 자신의 아들을 살려주겠다는 다윗 왕의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삼하 14:11)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만족하고 물러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요압으로부터 특명을 받은 '슬기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진짜 목적은 자신의 (가상) 아들을 살리는 것을 넘어,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을 용서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다시 입을 엽니다. "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당신의 여종이 내 주 왕께 한 말씀을 여쭙게 하옵소서 하니 왕이 이르되 말하라 하니라" (사무엘하 14:12)
이 짧은 대화 속에 여인의 비범함이 드러납니다. 왕에게 다시 말을 꺼내는 것은 자칫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의를 갖추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기회를 얻어냅니다. "말하라"는 왕의 허락은, 그녀의 이전 호소가 진실되게 받아들여졌으며 왕이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본격적인 설득의 무대가 마련된 것입니다.
💧 "한 번 쏟아진 물처럼... 인생의 이치를 아시잖아요!" - 보편적 진리로 마음을 움직이다
왕의 허락을 받은 여인은 곧바로 핵심을 찌르지 않습니다. 대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생의 보편적인 원리를 언급하며 다윗 왕의 마음을 부드럽게 다독입니다. "여인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이같이 생각하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니 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그 내쫓으신 자를 왕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도 그에게서 버려진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사무엘하 14:13-14)
여인은 먼저, 왕이 자신의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한 판단과, 압살롬을 내쫓은 채 데려오지 않는 현재 상황이 모순됨을 에둘러 지적합니다("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그리고는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라는 말로 인간 생명의 유한함과 한 번 잃으면 돌이킬 수 없음을 상기시킵니다. 암논은 이미 죽었고, 그 슬픔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압살롬마저 계속 내버려 두는 것은 또 다른 상실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 인생의 원리를 들어 설명함으로써 왕이 감정적인 저항 없이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고도의 설득 전략입니다.
💖 "하늘 아버지의 마음처럼, 넓은 긍휼을 베푸소서!" - 신적인 권위에 호소하다
인생의 유한함을 언급한 여인은 이어 하나님의 성품, 특히 그분의 무한한 긍휼과 사랑에 호소하며 설득의 강도를 높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도 그에게서 버려진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사무엘하 14:14 후반부) 이 말은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귀히 여기시고 어떻게든 회복할 길, 돌아올 길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라는 깊은 신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여인은 이 하나님의 마음을 다윗 왕에게 투영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죄인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구원의 방책을 마련하시는데, 하물며 한 나라의 왕이시자 아버지이신 당신께서 어찌 아들을 계속 내쫓긴 상태로 두시려 합니까?'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는 왕의 종교적 양심에 호소하는 동시에, 왕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음을 상기시키는 효과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본받아 아들 압살롬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하는 매우 설득력 있는 논증입니다.
⚖️ "이제 왕의 결단이 필요할 때입니다!" - 공의와 사랑의 조화를 촉구하다
여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왕에게 간청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며 왕의 공의로운 판단과 결단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촉구합니다. "내가 와서 내 주 왕께 이 말씀을 여쭙는 것은 백성들이 나를 두렵게 하므로 당신의 여종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왕께 여쭈어 보면 혹시 종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까 함이니이다 당신의 여종이 또 스스로 말하기를 왕께서 들으시고 나를 내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을 자의 손으로부터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당신의 여종이 또 말하기를 원하건대 내 주 왕의 말씀이 나의 위로가 되기를 바라나이다 이는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심이니이다 원하건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옵소서" (사무엘하 14:15-17)종교 및 신앙
"백성들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말은, 아들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어미의 심정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압살롬이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백성들의 우려나 왕의 결단을 바라는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왕의 판단력과 지혜("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심")를 높이 평가하며, 왕의 말씀이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듯, 압살롬 문제에 대한 왕의 결단 또한 온 백성에게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를 표현합니다. 이는 왕에게 부담을 주기보다는, 왕이 가진 권위와 책임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시기를 정중하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왕이 공의를 세우면서도 사랑을 실천하는,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지혜롭게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 "지혜로운 말은 닫힌 문도 열게 합니다" - 설득의 힘, 그 울림
드고아 여인의 설득은 감정에만 호소하거나,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인생의 보편적인 이치,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왕 자신의 공의로운 판단력에 차례로 호소하며 다윗 왕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녀의 말에는 용기와 지혜,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누군가를 설득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논리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따뜻함과 진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때로는 정면으로 부딪히기보다, 지혜로운 말 한마디가 굳게 닫힌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 말 한마디에도 사랑과 진심을 담아 소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회개든 용서든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삼하 14:12~24 / 생명의 삶 (큐티)
드고아 여인이 왕에게 어째서 왕은 내쫓긴 자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왕이 여인에게 이 일에 요압이 함께했는지 묻자 여인은 모든 말을 요압이 넣어 주었다고 인정합니다. 왕이 요압을 불러 압살롬을 데려오게 허락하지만 그의 얼굴은 보지 않습니다.
1. 드고아 여인의 간청 (12~17절)
진정한 조언자라면 상대방이 문제를 바로 보도록 도와야 합니다. 드고아 여인은 두 아들 이야기를 꾸며 다윗에게 들려주고 그의 연민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고 집으로 데려오지 않는 처사가 이와 같음을 우회적으로 지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압살롬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유독 왕만이 이를 원하지 않으므로 부지중에 죄를 범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여인은 하나님의 자비를 끌어들여 하나님은 내쫓긴 자가 버림받지 않도록 생명을 지켜 주신다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여인의 거창한 말들은 압살롬이 저지른 죄의 본질을 흐리고 다윗의 바른 판단을 막을 뿐입니다. 단죄를 피하려고 하나님의 자비를 방패막이로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자비와 용서는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죄인에게 주어지는 면죄부는 오히려 위험합니다.
* 묵상 질문
드고아 여인의 호소는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나요?
* 적용 질문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문제나 죄의 습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2. 압살롬의 귀환 (18~24절)
마침내 다윗은 드고아 여인의 의도를 눈치챕니다. 여인의 배후에 요압이 있음도 짐작합니다. 결국 다윗은 요압에게 압살롬을 데려오게 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온 압살롬의 얼굴은 정작 보지 않습니다. 그를 용서하지도, 처벌하지도 않는 애매한 상태입니다. 요압의 계략이 성공한 듯하지만,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는 호전되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안에서 서로 불편한 심기를 숨긴 채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압살롬의 귀환은 훗날 그가 일으키는 반역의 서막입니다. 하나님 뜻을 따르지 않은 인간의 계략은 한계가 있고 더 큰 문젯거리를 품고 있습니다.
* 묵상 질문
요압이 꾸민 계략의 한계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하나님 뜻을 따라 누구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면 좋을까요?
오늘의 기도
인본주의적 조언과 야망에 근거한 충성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것들을 분별하고 완전히 버리도록 성령의 지혜를 주소서.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꼭꼭 씹어 먹고 소화시켜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