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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 문재인 비서실장이 주사파[주체사상파]
때문에 논란인데 주사파 계보를 알아보자
임종석 주체사상파 빨갱이가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됐어요.
앞으로 리석기, 리정희도 얼굴이 보일건 어린아이도 예측 가능해요.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 안희정 충청남도 도지사 (80년대 전대협을
조직한 반미청년회 간부출신- 노무현의 의식화 선생)
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남한대표로 불법밀방북했던 임수경
(조통그룹 출신)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주사파는 주체사상파의 줄임말이다.
모하는 새키들이노?
언제 생겼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어디 어디에 주사파가 있을까?
자 살펴보자
'주체사상파'는 주체철학(주체사상, 김일성주의)을 세계관으로 받아들여 남한의 모순을 극복하는 운동에 이념적 바탕으로 삼아 활동하는 운동권, 혹은 좌파분자를 일컫는 총칭이라 하겠다.
태생과 종류
일단 주체사상파를 주체사상과는 별도로 연북파, 종북파로 불러보자 왜냐면 주체사상이란게 70년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기에 6.25직후 부터 남한 사회에 좀비활동했던 단체들, 세력들에게 그 이름을 붙이기는 연대적으로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5,60년대에는 무장공비나 남파 간첩들에게 포섭된 세력들이 비밀지하조직을 결성해서 활동하는데 이 세력들이 감방에 들어가서도 세력을 넓히게 된다.
이후 70년대 재일동포를 우회한 간첩활동을 거쳐서 80년대 들어선 자생적 북한추종세력 들이 학생운동권을 장악하게 되고
이 80년대 세력들이 지금 사회 곳곳에서 우리나라를 갉아먹고있는 암세포들이 되겠다.
1. 교도소 주사파
한국전쟁이 휴전하고 나서도 홍어나라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이 전개되는데 이른바 '빨치산'들이다.
이들은 주로 퇴각하지 못한 부카니스트군인, 그리고 붉은완장차고 따라나선 남로당빨갱이들이 대부분인데
'빨치산'들은 형기를 마쳐도 전향을 거부하면 사회로 복귀가 완전차단 되었기에 '이인모'같은 장기수가 생겨났던 것이다. (암세포 사회병리 정채 ㅎㄷㄷ)
이른바 이 '비전향 장기수'들은 감옥안에서도 당활동을 하면서 간간히 잡혀들어오는 남파간첩들을 통해서 북의 정치동향을 전해 듣고 스스로
학습에 매진 자연스레 지사적, 의사적 인물로 스스로를 의인화 해가면서 주체사상에 빠져드는데..........
70년대,80년대 반독재투쟁을 하다 잡혀온 학생들이 감옥에서 이 노인네들을 만나면서 씹선비적인 생활과 초연한듯한 의식세계에 폭빠져들고 이들의 선동에 놀아나서 주사파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남민전'이 되겠다.
90년대 초까지 전향을 거부하다 죽어가는 노인네들이 늘어나자 남한 정부도 부담을 느끼게 되고(엠네스티등 씹선비스탈의 젖도모르는 ngo들, 종북좌빨 등등)
결국 북으로 가고 싶다는 빨치산들을 북송하게 된다. 이 북송 장기수들은 남한에 있는 전체 주사파들에게는 성자같은 존재가 되고 북의 체제 선전에도 큰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함으로써 남이든 북이든 뭐 한가지 이롭게 한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하겠다 ㅋㅋㅋ(달리 말하면 남한 주사파를 북한도 부담스러워 한다는 농담)
북송되서 김부자 만난 이인모 노인
2. 남한에서 최초의 종북 빨갱이 도당이 형성, 통일혁명당
이승만 정권이 휴전직후부터 좌익척결을 잘 한 결과로 해방이전에 활동하던 사회주의계열이나 남노당 찌그레기들은 남한 사회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물리적인 국지적 도발이 빈번하던 50년대를 지나서 60년대가 시작되면서는 이른바 미소(美蘇)를 대리한 체제 경쟁에 내몰리게 됨으로써 남북 양쪽 정권이 졸라 부담을 서로에게 갖게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버렸다.
통일혁명당
1961년 홍어국 무안에 일자도라는 섬에 최명도라는 농부겸 어부가 살았는데 평양에서 내려온 김수영(간첩)에게 포섭된 1호 인물되겠다.
최명도는 엘리트 출신의 김종태를 포섭하는데 성공하고 김종태는 이후 박성준(한명숙 전 총리 남편), 신영복등을 끌어들여 '통일혁명당'이라는 지하조직을 결성하고 북으로 부터 공작금까지 받아서 활동하다가 68년에 검거되고 개작살이 났다.
대부분 남한 주사파의 출발을 이 통일혁명당에서 찾으면 대체로 맞는 분석이 되겠다.
그런데 통혁당 가담자들은 주사파로 보기에는 여러가지 정황상(당시까지 주체사상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슴)
어려운점이 많고 그저 조선노동당 추종세력이라고 판단하는게 옳은 것 같다.
어쨋든 통혁당은 이후 90년대 한민전(한국 민족 민주 전선-물론 이 조직에 대해선 엔엘내부에서까지 의견이 분분할정도로 신비에 쌓여있는 실체가 알려지지 않은 조직)까지 정통성적인 측면에서 남한 주사파의 출발점이라고 보자.
"인자 왜 좌좀들이 한명숙을 대모님 대모님 하는 줄 알겠지?"
한명숙 전 총리와 남편 박성준
3. 남민전 / 80년대 남한내 주사파가 들불처럼 퍼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조직
70년대 말에 민주화 운동하던 세력중에 이상한 늠들이 있었다. 이 시키들은 부자집에 강도질을 서슴치않는 특이한 세력이었는데
바로 '남조선 민족 해방 전선' (남민전) 이다.
스스로 주사파가 되고 북한에 인정해 달라고 함
이때부터 대남방송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 '남민전'좀비들은 라디오를 통해서 스스로 학습하고 주사파가 되고나서는 또 라디오방송을 통해 간첩접선을 알아보고 급기야 조직원들이 혈서로 김일성에게 충성편지를 써서 간첩에게 전달했던 늠들이다.
79년에 검거될떄 조직원만 70명이 넘었고 감악소 다녀온 뒤로 이 좀비들이 민들레 홀씨 처럼 공장으로 대학으로 퍼져나가면서 주사파가 80년대 인기사상으로 자리잡는데 한몫했다고 봐야한다.
아울러 80년 전라민국반란의 배후에도 이들의 부추킴이 큰 역할했다는 사실 기억하자.
대표적으로 민중시인이라고 똥송받는 김남주, 이재오(현 새누리당의원), 홍세화, 임준열(대장), 이수일(전교조), 이학영 등등이 있는데
이학영은 2011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캠프에서 일했고 민주통합당 소속으로 4.11총선에 경기 군포에서 출마도 했었다.(이런 세상에 살고있노 ㅎㄷㄷ)
이영학
서울시장 박원순
4. 중부지역당
이건 뭐 주사파라기 보다는 간첩단 사건이라고 봐야되는데
조선노동당 서열 22위 이선실이 직접 내려와 중부지역당을 결성한 사건인데
민중당대표였던 김낙중, 민중가요 작곡가 윤민서크, 이철우 등이 주요 조직원이었다. 90년대 전국연합이 결성되면서
학원에서 사회로 진출하는 주사빨갱이들과 북에서 직접 내려온 간첩이 만들어낸 합작품으로 8,90년대 남한 주사파 활동의 집체적 사건으로 보면 되겠다.
이철우는 나중에 열린우리당 17대의원이 되고 411총선에서는 경기 연천에서 출마하기도 했다.
이철우 17대 열린우리당 의원
학생운동 주사파
강철 김영환을 제외하고 학생운동 주사파를 이야기하기 어려운데
오늘날 감기바이러스 처럼 흔하게 수 많은 주사파 좀비들이 거리를 활보하는데 이 분처럼 큰 역할을 하신 분이 없다 이기야.
80년대 대학가에서 인기있던 문건이 두가지가 있었는데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도 굉장히 인기있는 교육용 교재로 80년대 명문대 다녔던 사람들 치고 이 세가지 문건을 읽어보거나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에 연루된 무명씨가 쓴 "예속과 함성'이라는 문건하고 김영환이 쓴 '강철 서신'이다.
70년대부터 대학의 학생운동권은 무림, 학림을 거쳐 자민투 민민투까지 사상투쟁이 이어졌고 80년대 들어서는 사회주의 사상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서 이념적인 배경을 만들려는 활동이 매우 거칠고 활발하게 이뤄지게 되는데 이때 등장한 두 문건이 대학운동권들에게 큰 영향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예속과함성'은 우리 현대사를 반미투쟁의 역사로 규정함으로써 80년 광주를 외면하고 신군부를 인정한 미국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운동권들에게 한줄기 빛을 던져주는 역할을 한다. 이른반 대미종속사관으로 우리나라가 미제의 식민지라는 인식의 확산인데 놀랍게도 북한이 주장하는 배경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북한이 남한을 바라보는 역사적관점 남한사회 변혁을 위해서 풀어야할 선결과제와 조건 등등 북의 눈으로 남한을 해석한 문건이 되겠다.
주구장창 '무엇을 할 것 인가?','우리의 적은 누구인가', '어떻게 군부독재를 타격하고 미제를 몰아낼것인가'에 매몰되고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목적을 위한 수단을 경시하는 철부지 혁명가적 기질이 대학가에 만연할때 '강철서신'은 사람을 강조하고 사람됨을 요구한다. 이른바 '품성론'인데, 활동가가 혁명가가 도대체 왜? 누구를 위해서 싸워야 하는지 또 민중속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피아를 구별하고 아군과 적군을 나눌수있는지를 강조한다. 오유식의 씹선비론적 활동지침인데 이게 졸라 먹혀들어간거다.
피도 눈물도 없이 유교적질서를 개무시해야되는 사회주의 혁명가가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고 민중속에서 누구보다고 지사적으로 모범적으로 살자고 주장하는데 뻑이 가는 바람에 '강철서신'은 대학가를 휩쓸게 되고 '강철서신'이 배달하는 '주체사상'도 엄청 잘 먹히게 된거다.
80년대 학생 주사파 조직들
이 시대의 특징으로는 학생 주사파들이 경쟁적으로 대남방송 '구국의 소리'를 활동의 지침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방송 녹취조가 활동의 중심이었다고나 할까...
구국학생연맹
김영환이 서울대에서 만들었다. 이후 1989년에 김영환, 하영옥, 이석기가 중심이 되어서 '반제청년동맹'이라는 지하조직을 만들고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조정하게 된다. 1991년 김영환등이 평양에 다녀온 뒤에 이들은 반제청년동맹을 지하당으로 확장하기로 하고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만들게된다.
김영환, 하영옥이 중앙위원 그리고 이석기가 경기도 위원장으로 활동하는데 97년쯤 김영환이 민혁당을 해체하려고 하면서 갈등이 생기게 되고 99년 여수앞바다 사건으로 민혁당이 박살나면서 해체되었는데 김영환은 조갑제의 보증으로 전향하게 되고 북으로 부터 암살위협에 시달리면서 현재까지 반북 활동을 하고 있고
감옥댕겨온 이석기를 비롯한 일당들은 경기동부연합(전국연합의 하부조직)으로 들어가 세력을 형성하여 '민중의 소리'등의 언론 사업 뿐 아니라 민주노동당을 거쳐 통합진보당의 당권을 휘어잡으면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반미청년회
조혁과 안희정(충남도지사)이 만든 조직으로 87년 전대협(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을 주도적으로 만든 세력이다. 이 늠들은 (연대, 고대가 메이저캠) 이른바 '전투적 학생회'론을 들고 나와 투쟁일변도의 강경활동으로 일관함으로써 1기 이인영 2기오영식 의장을 끝으로 영향력을 잃게 된다.
자민통 그룹
고려대의 구해우가 만든 세력으로 89년부터 92년까지 사실상 NL학생운동을 주도한 그룹이다. 90년 전대협의장 송갑석이 대표적인 자민통 그룹 출신 의장이고
자민통은 새벽과 연합하면서 학생운동에 영향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임종석 (89년 의장)이 새벽출신 이다.
임종석은 오랜 수배기간동안 잡히지 않고 신출귀몰했던 행적으로도 유명했었지만 놀라운 사실 두가지가 더 있는데,
한양대의 커트라인 점수를 2점 올렸다고 한다.
하이틴등 청소년잡지에서 인기 연예인투표에서 가수, 배우, 스포츠스타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함
임종석 전 열린우리당 빨갱이 의원
새벽
약간 똘아이같은 집단인데, YTN 사장을 지냈던 내일신문 대표 장명국이 만들었다 해서 '장명국 주사'라고 불린다.
교조적인 주체사상을 거부하고 주체사상에서 이른바 수령론을 제외하고 '사람주인론'만 받아들인다는 입장으로 인간중심의 철학을 지향했던 조직인데
기관지 이름이 '새벽'이라서 '새벽'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이후에 언급하겠지만 새벽은 나중에 참대학으로 전화하게된다.
이 새벽은 나중에 전향해서 비주사NL출신, PD그룹 출신들과 시민운동적 학생운동단체를 함께 만들게 되는데 이때 통합을 주도한 선배들이 후배들을 설득하는데 큰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 ㅂ진들이 지들이 진짜 주사파인줄 알고 있어서 일부가 전향을 거부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함...선배: 씨바라 니들 주사파 아니었거든....)
새정치민주연합의 설훈의원도 이 새벽출신이다.
구학련(구국학생연맹), 반미청년회, 자민통 이렇게 3그룹이 NL 주사파안에서 메이저 세력들 이었고
서강대를 중심으로 조통그룹(조국통일그룹)이 빠르게 치고 나오면서 학생들을 임수경(1989)부터 박성용 임성희 등등줄줄이 북으로 보내게 된다.
눈여겨 볼점은 경기동부연합의 핵심조직원들이 대부분 외대 용인캠퍼스 출신인데 (이석기 82학번) 임수경(외대85, 조통그룹)도 같은 주사파면서 같은 학교 출신임에도 서로 다른 조직에 있었다는 게 두 사람을 통진당과 새정연으로 가르는 계기가 됐노 ...
안철수 만나는 장명국
전대협이 1992년 6기를 끝으로 활동을 마감하고 1993년에 한총련이 만들어지는데
1992년 전대협의 마지막 의장이었던 서울대 총학생회장 태재준은 주사파가 아니라 '비주사 NL'출신 이었거든 원래는 주사파가 전대협의장을 해야되는데
왜 태재준이 의장이 되었냐면 자민통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자민통이 우세한 학교에서 총학생회장이 나오질 않았던 것이야.... 또 한양대는 91년도에 의장을 했던 학교라 한양대 새벽에게 또 하게 할 수 도 없는 상황에서 다른 그룹에게 정권을 넘겨주기는 싫고 그래서 새벽의 소개로 서울대 비주사NL (해그룹) 출신을 범NL계열 의장으로 만들게 된거임.
근데 태재준이 의장이 되자마자 서울대총학의 씹선비적 유아독존태도가 졸라 문제가 되어버림, 의장이지만 지도위원들의 지시를 하나도 안듣고 서울대 총학식으로 전대협운영하려고 하니까 참다참다 빡돌아서 자민통 간부들이 태재준이를 안기부에 넘겨버림 (의장되고 출범식하자 마자 잡혀감)
90년대 이후 주사파 "자주 vs 사람사랑"
뭐 여러가지 잡다한 분파와 기생조직이 많았겠지만
의미있는 세력으로 분류하면 90년대의 주사파는 크게 '자주파'와 '사람사랑'으로 나뉜다.
자주파(일면 비서동지파)
조문파동이후에 김정일의 권력승계를 지지하는 그룹
'범민련'을 통일운동의 중심으로 인정하고 활동
대표적인 강경파
사람사랑
김정일 권력승계에 의문을 표시하는 그룹으로
이후 이 세력이 진보정당에 기생충처럼 스며들어감
통일운동에서도 6.15공동행사를 중심으로 활동
경기동부연합에서 활동하는 좀비들이 이 계열이라고 보면 되겠따
리석기의 조직이 공안당국의 타격을 받으면서 위축되자 권력이 자연스레
울산연합의 김창현(전 울산 동구청장- 전 민노당 국회의원 이영순의 남편)에게 넘어가 버림
현재 남한 주사파의 실질적인 대빵(뭐 이시키들은 항상 드러나지 않은 한민전 운운하면서 또 다른 배후가 수면아래있다고 설레발치는데....그거 믿을 수 없는 개소리고 실질적으로 세력(사람+돈)이 있는 주사파의 대빵은 김창현임)
96년 연대사태이후 완전히 갈라짐 지금까지도 대학 학생회에 남아 있는 운동권은 대부분 주사파류 이며
이들은 끊임없이 재생산해가면서 자금과 인력을 사회운동세력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 학생운동 주사파 세력이 가장 약했던 곳?
서총련 부터 시작해서, 경기, 강원, 충청, 호남, 영남까지 주사파가 없는 학생운동지역은 없다. 또 주사파가 학생운동의 70%라고 보면된다.
서총련(서울)도 주사파가 많이 총학생회를 장악했었지만 북부는 좌파(PD계열)가 의장을 종종 하기도 했었다.
서울지역은 메이저캠과 의미있는 캠들에서 3대1 또는 4대1의 비율로 NL주사파가 당선되던 지역이라고 보면 된다.
(전국 평균치보다 좌파PD가 세력이 조금 더 있는 지역)
호남지역은
주사파이외의 학생운동세력이 전무하다시피할 정도로 NL주사파의 핵심지역이다.(전남대, 조선대, 전북대가 메이져캠)
과거 주사파중심의 폭력적인 학생운동이 문제가 되어서 90년대 말 조선대에서 PD가 주축이 되엇 反주사연합팀이 당선된 적이 있었는데
비분강개한 주사파들에 둘러싸여 총학생회 활동자체를 거의 못하는 수준이었다.(테러위협,감시,미행, 조작폭로 등등)
영남지역
그중에서도 대구경북은 전통적으로 PD강세 지역임
한총련 시절 한때 대의원 숫자가(총학생회 직선간부, 각 단과대학 직선간부) 대구 경북 지역에서는 NL주사파와 PD계열 연합이 50대 50이었던 적도 있었고
총학생회의 숫자가 오히려 좌파PD계열이 우세했던 적도 있었다. 지역정서상 주사파에 대한 반감도 있었을테고....암튼 그러하다.
* 김영환 몇가지
전향이후 김영환이 학생운동 주사파 세력과 접촉해서 이 말도 안되는 사상을 포기시키려 시도했으나 대부분 실패하고 오히려 반역자, 배신자로 내몰리게됨.
더군다나 민혁당사건 이후 북으로 부터 공공연하게 암살위협을 받아서 신변도 굉장히 불안해지
* 99년 여수앞바다 사건 - (민족민주혁명당의 실체가 들어남으로써 말로만 떠돌던 강철 김영환의 존재가 드러나고 아울러 주사파의 북한 연계가 드러난 사건
이때 부터 더이상 좌좀들이 억울하다는 소리를 못하는 계기가 됨)
1997년 8월, 북한의 노동당 사회문화부 5과 소속인 부부간첩 최정남, 강연정은 공해상을 통해 우회하여 거제도에 상륙, 남한 사회에서 생활을 하며 재야인사 포섭 및 경북대 김순권 교수가 개발한 슈퍼옥수수의 종자를 획득할 목적으로 침투한다. 이들은 1997년 10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줄여서 전국연합)의 울산지부인 울산연합의 간부 정모씨에게 접근, "김영환 소개받고 왔다. 북에서 왔으니 통일사업을 위해 함께 하자"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정모씨가 "아무래도 북한에서 온 게 아니라 안기부에서 나를 검거하려고 함정을 파는 것 같다."라고 생각하여 이 남파간첩을 안기부에 신고하게 된다(...).그야말로 소 뒷걸음치다 쥐잡는 격으로 간첩을 하나 검거하게 된것. 그런데 최정남을 취조하던 중, "90년대 초반 남조선의 대학생들 두 명(김영환, 하영옥)이 공화국을 찾아와 김일성 주석님을 만나고 갔다"라는 진술을 확보하게 된다. 김영환 하영옥을 계속 주시하며 탐문하던 정보당국은 99년 결정적인 증거를 잡게되는데, 하영옥이 북에 올라가려고 여수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나기로 했었는데 이게 군 당국에 탐지되었던 것이다.
잠수함 모선은 바로 북으로 토껴버리고 모선에서 상륙하기위해 나왔던 잠수정은 결국 산소부족으로 좌초하고 승조원 5명이 전원 사망했는데, 이 잠수정에서 민혁당 관련 문건들이 증거로 쏟아져 나와버림. 골수 빨갱이 이석기는 5년 살고 나와서 이 후에 국회의원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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