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산성에 올라
대한 이후 엄습한 동장군이 연일 기승을 부리는 일월 하순 수요일이다. 어제는 영하권을 밑도는 추위 속에 새벽 일찍 대중교통으로 부곡으로 향해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왔다. 버스를 갈아타며 오갔던 길에 체감으로 와 닿은 추위는 그리 심한 줄 몰랐다. 추위가 혹심한 날이면 도서관으로 나가 책장을 넘겨도 되겠으나 그간 비가 몇 차례 내렸을 때 다녀온 적 있어 유예해 놓았다.
수요일 이른 아침에 현관을 나서 창원대 삼거리로 나가 김해 불암동으로 가는 97번 버스를 탔다. 창원대가 종점이라 승객이 없었으나 시내를 관통해 가면서 장유와 김해로 출근하는 이들이 더러 타고 내렸다. 방학이라 대학생이나 고등학생은 볼 수 없어도 자연학교는 연중무휴라 변함없이 등교했다. 장유에서 풍유동을 거쳐 서김해를 지나 시내로 들어서자 차내가 일시 혼잡했다.
버스가 활천고개를 넘어 인제대학을 앞둔 어방동 아파트단지를 지날 때 내렸다. 가파른 산비탈에 들어선 초등학교 곁의 등산로를 따라 분산성으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낙엽이 진 활엽수림의 등산로는 서릿발이 숭숭 솟아 겨울다운 날씨임을 실감했다. 올겨울 비가 잦아 습기를 가득 머금은 땅이 단단히 얼었다. 날씨가 풀려 지표가 녹은 상태면 질척거렸을 텐데 그렇지 않아 좋았다.
비탈길을 오르면서 뒤돌아보니 시야에 동김해 아파트단지와 공단 지대가 들어왔다. 건너편은 은하사와 동림사를 품은 신어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주거지역을 에워쌌다. 분산성에 이르니 가야 놀이동산과 김해 천문대가 위치한 분성산 정상부가 가까웠다. 김해를 달리 ‘분성(盆城)’이라고도 하는데 분성산 아래 위치한 고을이라 그렇게 불려왔다. 분성산에 이어진 혈 자리 분산성이 있다.
충북 단양에 고구려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 최후를 맞은 온달산성이 있다. 사서에 남은 삼국시대 전투로 석성이 오롯이 남은 현장이다. 김해 분산성은 그보다 앞선 가야시대 축조된 석성으로 고려말 박위 장군이 개보수해 왜구를 물리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석성은 축조 방식에 따라 테뫼식과 포곡식으로 나뉘는데 분산성은 전자로 산마루 따라 테를 둘러 가며 성을 쌓았다.
아득한 옛적 축조되어 이끼가 붙고 허물어져 가는 분산성은 서북쪽 일부만 보존해 두고 나머지 상당 구역은 근래 복원했다. 테뫼식 축조여서 산마루 바깥을 따라가며 성을 쌓아 멀리서 바라보면 이마에 머리띠를 두른 모습과 유사하다. 성내에는 샘터를 비롯한 유구 유적 발굴 현장이 잘 소개되어 있었다. 동헌과 향교가 있었던 저지대는 읍성을 두고 고지에 쌓은 산성은 유사시를 대비했다.
분산성 성내는 통도사 말사 해은사(海恩寺)가 있다. 2000년 전 인도 아유타에서 허황옥과 그의 오라비 장유화상이 가야국 김수로왕을 찾아왔을 때 머나먼 뱃길에서 풍랑을 재워 안전하게 닿도록 해 감사의 표시로 세운 절로 알려져 있다. 신비감이 더하는 덩그런 자연석과 조화를 이룬 아담한 절집으로 들어 대웅전 곁 대왕전 문을 열자 수로왕과 허황옥의 근엄한 초상화를 대면했다.
절집을 나와 만장대로 올라서니 봉수대였다. 지리산 영신봉에서 기점을 삼은 낙남정맥 종착지였다. 일부 산꾼들은 신어산에서 더 나아간 돗대산을 종착지로 보기도 한다. 만장대에 서니 낙동강이 을숙도로 빠져나가는 김해평야와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공항이 한눈에 들어왔다. 부산 강서와 장유 신도시 아파트단지도 아스라했다. 산기슭으로 내려가니 장군차 자생지 푯말이 보였다.
구지로 건너 동상동 재래시장을 찾아 다문화 홍보관을 둘러보고 칼국수로 점심을 한 끼 때웠다. 많고 많은 식료품과 잡화는 주말이면 동남아시아에서 온 젊은이들도 고객이 되어 한 몫 거들지 싶었다. 재래시장에서 수로왕릉으로 가 경내 후원 숲길까지 거닐면서 왕의 기운을 받았다. 왕릉을 나와 불암동을 출발해 오는 98번 버스를 탔더니 아침에 지난 길을 되짚어 창원으로 왔다. 24.01.24